“물회”의 철학 “물”
知淵 韓相辰
세월은 물같이 흘러간다. 한 번 흘러간 물은 되돌아 올 수 없듯이 한 번 흘러간 세월은 돠돌아 올 수 없다. 우리 인생도 그렇게 하염없이 저물어가고 있는 것인가.
내가 속한 모임 중에 “물회”가 있다. 회원은 모두 아홉 명이다. 현직 고등학교 교장 K.
현직 대학 학장 P, 대교협 사무총장이며 현직 교수 S, 현직 교직단체 본부장 P, 현직 교육위원 L, 전직 교수 H, 전직 이사장 J, 여사장 Y, 그리고 현직 객원 교수 H이다. 첫 모임 때 한밤의 사진편지와 주말걷기를 운영하고 있는 글로벌 멋쟁이 H가 이름을 물회라고 제안하여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내가 물회의 철학을 정립하겠다고 스스로 나섰다.
나는 가끔 틈이 나거나 우울하면 법정 스님의 시를 읊기도 한다. “산 같이 물같이 살자”
‘텅빈 마음엔 한계가 없다. 참 성품은 텅 빈 곳에서 발현된다. 산은 날보고 산같이 살라하고 물은 날보고 물같이 살라한다. 빈 몸으로 왔으니 빈 마음으로 살라고 한다. 집착, 욕심, 아집, 증오 따위를 버리고 빈 그릇이 되어 살라고 한다. 그러면 비었기에 무엇이든 담을 수 있다고 한다.(부분)’
어쩌면 이 세상 풍경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인생은 한 줄기 시내가 바다로 향하듯 順理대로 흘러가는 가는 것이 아닐까.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上善若水 물을 만물에게 온갖 이로움을 주면서도 공을 내세우지 않으며 남과 다투는 짓은 더욱 하지 않는다. 水善利萬物而不爭 물은 언제나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데로 향한다. 이 셋 가운 데 노자는 특히 다투지 않음을 강조해 오로지 다투지 않기에 허물이 없다고 했다. 그 것은 그 만큼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선은 기본적으로 착하다 또는 훌륭하다는 뜻이다. 상선은 높은 경지의 德(virtue)을 가리킨다. 선행은 착한 행실을, 선정은 훌륭한 정치를 가리킨다. 善終은 유종의 미를 거둔다 또는 환란을 겪지 않고 천수를 다하여 죽는다는 의미도 된다. 喪事를 다하여 예의를 다해 처리한다는 뜻도 된다. 善은 또 어떤 동작이나 행위에 정통하거나 뛰어남을 표시하며 어떤 일에 마음과 힘을 써 잘 행함을 표시하기도 한다. 여기서의 善利는 이롭게 하는데 뛰어나다 또는 대단히 이롭게 한다는 뜻이다.
사람이 목숨보다 더 질긴 思索과 苦腦를 한다지만 물이 바다에 이르기까지의 思念과 고뇌에 비하면 사람은 입을 다물어야 한다. 하찮은 돌멩이 모서리에 부딛쳐 흘러가야 하고, 때로는 높은 폭포에서 떨어져 시퍼렇게 멍들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감추어 살아간다고 어느 시인은 읊었다. 인상주의의 대표적 화가 모네의 수련은 유명한 작품이다. 물론 물과 연관이 있는 그림이다. 모네는 물의 풍경을 그리기를 좋아 했다고 한다. 그의 수련 작품은 지상의 풍경, 물에 반영된 바깥세상, 그리고 수면 위에 핀 수련이 한 화면에 나타나는 무한한 공간이 되었고 마치 小宇宙를 연상하게 한다고 평하고 있다. “물회” 회원들의 만남의 공간-소우주 세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수면 자체가 화면이 되어 섬세한 색체조화와 광선에 녹아드는 형태 등이 보이는 화면은 색체의 교향악과 같은 조화와 분위기를 느끼게 하고 있다고 한다. 각기 인간적인 취향과 색깔이 다양한 물회 회원들의 조화가 일구어 내고 있는 멋진 오케스트라가 바로 물회의 철학이 아닌가.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흘러내린다. 그러므로 역천자는 망하고 순천자는 흥한다. 물은 한 방울 한 방울이 모여서 큰 강을 이룬다. 그러므로 모든 일은 목표를 설정하여 한 단계 두 단계 벽돌 쌓듯 해야 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그러므로 윗사람의 행동과 처세가 옳아야 아랫사람도 따라서 올바르게 한다. 흐르는 물은 맑고 깨끗하나 고여 있는 물은 썩어간다. 그러므로 열심히 뛰고 걷는 자만이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말이다. 물이 많으면 홍수가 되고 적으면 가뭄이 온다. 재물과 음식은 적당히 있고 적당히 먹어야 탈이 안 난다는 황금률(golden mean)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은 일직선으로 흘러가지 않고 굽이굽이 흘러간다. 그러므로 인생살이도 굴곡이 이 있다는 뜻이다. 내가 좋아하는 Chuck Roper의 시 "I Listen"(자연이 들려주는 말) 구절에 냇물(the creek)이 우리 인간에게 삶의 철학과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다.
I listen to the creek, and it says: "Relax; go with the flow. Keep moving--- don't be hesitant or afraid. 느긋하게 흐름을 따르라. 대세를 따르라. 쉬지 말고 움직여라-- 머뭇거리거나 두려워 말라. 물의 철학을 잘 표현해 주고 있는 구절이다.
위스키 하면 스코틀랜드, 맥주하면 독일, 와인하면 프랑스, 막걸리 하면 한국, 보드카 하면 러시아가 연상된다. 물회 회원들은 하나 같이 술 하면 싫어하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다. 그런데 vodka란 명칭은 러시아의 물 voda란 단어에서 나왔다고 한다. 물처럼 투명하고 깨끗한 술이란 뜻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명칭은 위스키와 명칭이 같은 라틴어 “aqua vitae" ”생명의 물“ 에서 나왔다고 한다. 물회의 철학으로 안성맞춤이다. 수 삼년 전 친구와 같이 백두산 천지를 보았다. 우리 민족의 精氣와 魂, 얼, 정신이 담겨 있는 천지-끝없이 샘솟는 물은 생명의 잉태를 상징하고 있었다. 위엄 있고 신비에 가까운 깊고 웅장한 천지의 源泉의 모습에서 나는 우리민족의 위대한 탄생과 무한한 底力과 潛在力, 그리고 생명력의 전율을 느꼈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가 예외 없이 강이 있는 곳에서 일어났다. 인도의 갠디스강, 이집트의 나일강, 독일의 라인강, 프랑스의 세느강, 중국의 양자강, 한국의 한강. 한강의 르네상스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물회 회원들은 한강 위에서 술잔을 나누며 멋진 인생포럼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다. 물회 회원들은 추사 김정희가 인생의 삼락을 1독, 2색, 3주라고 한 말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一讀은 책을 읽고 배우고, 글 쓰고 공부하는 선비정신이고 二色은 사랑하는 사람과 변함없는 애정을 나누며 살고, 三酒는 벗과 더불어 술잔을 나누며 세상사를 논하는 즐거움이라고 했다. 펌프에서 물이 안 나올 때에 물을 이끌어 내기 위해 위로부터 붓는 물을 ‘마중물’이라고 한다. ‘마중물’은 스승이나 부모 또는 선배를 뜻하는 말로 아직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의 지식과 지혜, 재능, 인격과 품격을 이끌어 내는 사람들이라는 상징적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물회 모임의 성격이 바로 ‘마중물 샘터의 공간’이라고 부르고 싶다. 당나라 시인 왕발은 세상 곳곳에 절친한 친구 知 己를 두었다면 천하가 모두 이웃과 다름없을 것(海內存知己, 天涯若比隣)이라고 했다. 거문고의 명인 백아가 산울림을 표현하고자 거문고를 타면 그의 친구 종자기가 “높은 산이 눈앞에 나타나있구나” 라고 했고, 백아가 “강물”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도도히 흐르는 강물이 눈앞을 지나고 있는 것 같다”고 감탄했다고 한다. 백아는 종자기가 죽자 거문고를 부수고 더 이상 연주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회” 회원들은 모두가 서로 자기의 뜻을 알아주는 참다운 친구인 知己요, 知音이라고 느껴진다. 어느 시인은 “물의 꽃” 이라는 시에서 “강물 위에 퍼 붓는 소나기가 ‘물의 꽃’이라면 절벽으로 떨어지는 폭포가 ‘물의 꽃잎’이라면 엄마처럼 섬 기슭을 쓰다듬는 하얀 파도의 물줄기가 ‘물의 백합’이라면 저 잔잔한 강물의 물결이 ‘물의 장미’라면 저 거리의 분수가 ‘물의 벚꽃’이라면 그래도 낙화할 때를 아는 모든 인간의 눈물이 ‘물의 꽃’이라면“이라고 표현했다. 물을 생명의 근원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피워내는 꽃들이다. 물은 계곡과 들판, 도시에서 바다로 흘러가면서 무수한 형상의 꽃들로 태어나고 있다.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흘러내리던 물은 마침내 안타까운 사람의 눈물로 낙화한다. 찬란하게 맺혔다 떨어지는 물꽃의 아름다움 바로 그 모습이 우리 물회의 정신과 철학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평생을 話頭를 들고 참선하는 看話禪의 세계를 수행해온 진제 스님의 법어집 “ 石人은 ‘물을 긷고’ 木人은 꽃을 따네” 란 제목이 어쩐지 물회의 물 철학을 은유적으로 잘 나태내주고 있는 것 같다. 물은 개체를 만들지 않고 언제나 더불어 살면서 큰 하나를 이룬다는 물의 가르침을 깨달았다.
“물회”의_철학_“물”[1].hwp
※ 호는 知淵 현재 한국교육과정 교과서 연구회 회장, 광운대교육대학원 초빙교수, 남서울대 객원교수, 서울교대 대학원 강의, 21세기 한국 교육포럼 공동 대표, 한국교육정책연구소 이사, 전 동작교육장, 한국문인협회 회원, 세계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