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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참여연대 마라톤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anarch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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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5-"불을 찾아헤매는 불나비처럼"
우린 옥천으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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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찾아 헤매는 불나비처럼
밤이면 밤마다 자유 그리워 하얀 꽃들을 수레에 싣고 앞만 보고 걸어가는 우린 불나비 오늘의 이 고통 이 괴로움 한숨 섞인 미소로 지워버리고 하늘만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앞만보고 걸어가는 우린 불나비 오 자유여 오 기쁨이여 오 평등이여 오 평화여 내마음은 곧 터져버릴것같은 활화산이여 뛰는 맥박도 뜨거운 피도 모두 터져버릴것같애. 친구야 가자가자 자유찾으러 다행히도 난 아직 젊은이라네 가시밭길 험난해도 나는갈테야 푸른 하늘 넓은 들을 찾아 갈테야. (2절) 오 자유여 오 기쁨이여 오 평등이여 오 평화여 내마음은 곧 터져버릴것같은 활화산이여 뛰는 맥박도 뜨거운 피도 모두 터져버릴것같애. 친구야 가자가자 자유찾으로 다행히도 난 아직 젊은이라네 가시밭길 험난해도 나는갈테야 푸른 하늘 넓은 들을 찾아 갈테야 ===================================================
일요일에 옥천 대회에 가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입니다.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에 가는 것에 비하여 훨씬 덜 힘든 일이기는 하나 품이 많이 드는 일입니다. 옥천은 교통편이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예전에는 10,000원을 내고 전세버스를 타고 갔는데 올해에는 그것마저 쉽지 않아 우리 회원님들과 기차표를 예매했습니다. 아무래도 갈 때와 올 때 버스는 밀려서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올해에는 우리 참여연대 마라톤 모임에서 다섯 분이 참가하십니다. 서울에서 네 분 부산에서 한 분입니다. 또 저희들과 함께 하셨던 다른 분들도 같이 하기로 했습니다. 9월 25일 옥천에서 만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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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4.
아침에 김정규 선생님께 전화를 했습니다.
조반마 대회에 우리 모임에서 협찬을 하는 게 어떠냐고 하니
10만원을 내신다고 하였으나 5만원만 주시면, 저도 3만원 준비하여
김병욱 님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마라톤 양말을 사기로 하였습니다.
미아역까지 가 지리산 님 가게에 갔습니다.
참가하시는 우리 모임 분들께는 마라톤 장갑을 드리기로 하고
조반마 조직위에는 마라톤 양말 20켤레를 기증하고,
나머지 10켤레는 참여연대 배너를 달고 달리시는 분들께
드릴 생각입니다.
조반마 대회를 준비하신 분들과 참가하신 몇몇 분들께,
이 야만의 시대에 시대정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돈도 되지 않는 일을 하신 분들께
동지적 애정을 보냅니다.
제9회 조선일보 반대 옥천 마라톤 대회에 즈음하여 참여연대 마라톤 모임의 김정규,허필두 회원은 회비로,
김병욱 회원은 물품을 싸게 공급하여 주셔서 선물을 마련하였습니다.
마라톤 양말 ‘펄이즈미’는 일본 제품의 브랜드로 현재 오케이아웃도어에서는 17,000원에 판매하고 있으나
제작한 회사에서 싸게 제품을 받은 마라톤 공구 김병욱 대표 님께서 원가로 주셨습니다.
아주 질이 좋은 제품입니다.
참여연대 마라톤 모임에 대하여
모임 취지
마라톤은 그 성격상 아주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운동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달림이들은
자기 자신의 목표인 기록단축을 위해서 달리는 게 일반적인 일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 사회의 진보를 꿈꾸는 사람들은 많지만 정작 입으로만,
슬로건으로만 외치고 몸으로 움직이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이 답답한 세상에서 몇명 하위직 공무원들이 모여 2006년 4월 서울시직원 마라톤대회에서부터
“공직사회개혁, 노동3권 쟁취, 공무원의 정치적 자유보장하라!”라는 우리들의 주장을 담은
배너를 붙이고 달려왔습니다.
우리 참여연대 마라톤 모임의 첫 단추는 2008년 9월 27일 참여연대 회원대동제 술자리에서
시민참여팀의 이귀보 선생님의 제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다음달 10월 3일 국제평화마라톤 대회부터 “힘 내라 참여연대,
내가 참여하는 만큼 바뀌는 세상”이라는 배너를 붙이고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2009년 9월 16일 조선일보반대옥천마라톤 대회 참가를 앞두고
“(가)참여연대마라톤 모임”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물로 2009. 11. 29. 손기정 마라톤 대회에서 새로 만든 “함께 만들어요 좋은 세상,
내가 참여하는 만큼 바뀌는 세상”이라는 배너를 부착하고 세 분이 진눈깨비를 맞으며
첫 번째로 뛰었으며, 3개월 후인 2010.3.1.
한겨레 신문마라톤대회에서는 비가 오고 추운 날씨에도
아홉 분이 참여연대 배너를 붙이고 완주를 했습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고 편법만 난무하는 이 야만스러운 나라에서 우리는 자기의 건강만을 위해서나
자기의 기록을 달성하기 위해서만 달리기보다는 우리가 바꾸어나가야할 세상,
언젠가 와야할,만들어나갈 세상을 위해 달려나갈 것입니다.
굳이 잘 뛰지는 못해도 함께 땀 흘려가며 달려나갈 의지만 있으면 누구나 다 환영합니다.
2011. 9. 25 참여연대 마라톤 모임 올림(http://cafe.daum.net/pspdmarathon)
민들레처럼 - 꽃다지
민들레꽃처럼 살아야한다
내 가슴에 새긴 불타는 투혼
무수한 발길에 짓밟힌 대도
민들레처럼
모질고 모진이 생존의 땅에
내가 가야할 저 투쟁의 길에
온몸 부딪히며 살아야 한다
민들레처럼
특별하지 않을 지라도
결코 빛나지 않을지라도
흔하고 너른 들풀과 어우러져
거침없이 피어나는 민들레
아- 민들레 뜨거운 가슴
수천 수백의 꽃씨가 되어
아- 해방의 봄을 부른다
민들레의 투혼으로
가사 출처 : Daum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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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영혼 아나키스트 허필두 회원님께서 오월 촛불의 광장에서 연행되었다는 이야기는 아시는 회원님은 아시는 이야기라고 생각 합니다. 현직 공무원 신분이기에 법정구형을 받고서도 직장에서 징계까지 받아야 하는 이중의 부담을 가질수 밖에 없습니다. 슬프지요...그게 우리의 현실 입니다. 공무원은 영혼을 가질 수 없는 슬픈 몸뚱아리 이기도 합니다. 어느 누구인들 높은자리에 오르고 싶지 않겠습니까? 저역시 그러한 속물의 근원적인 욕망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허필두 나무님은 그 욕망의 언저리에서 이미 너무나 멀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그는 보이지 않는 아니 보이는 그 허물어져가는 강가의 너울을 지나왔고 잊어가고 있습니다. 서울시 본청 회의를 마치고 돌아서는 길에 연행되는 시민을 구하자고 길가에 뛰어든 그자체가 그의 정신 입니다. 분명히 그는 집회에 참가한것이 아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길에 지하철이 멈추었기에 버스를 타기위해 다시 길로 나선것이 그의 교통카드에 의하여 입증이 되었습니다. 명명백백한 사실이 증명 되었음에도 그를 기소 하기위하여 검찰은 고심을 하였습니다. 결국 그를 기소한 범죄소명은 공무집행 방해 였습니다. 참으로 대단하고 훌륭한 대한민국의 검쌔 입니다. 여기에서 그 검쌔를 이야기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하기에는 저의 입이 더러워질테니까요......전 배운집 아들이니까요....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을 지키자고...... 우리의 같은 길을 같이가던 나무가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그를 개인적으로 좋아하던 또 싫어하던 우리의 벗임에 분명 합니다. 벌금이라도 우리가 십시일반 두레의 정신으로 도와줄수는 없을까요? 대한민국 하위직 공무원으로 아내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비정규직 교사를 하는 그의 가정경제에 이백만원의 벌금의 무게는 너무 무겁지 않을까요? 물론 공무원보다 더 어려운 나무님이 있을지 않을까 싶어서 고민도 하여보았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어서 이렇게 글을 올려봅니다. 적은 돈이든 큰돈이든 이렇게 모아지어서 그에게 전달이 된다면 조금이라도 그에게 위로가 되지않을까요? 올 오월 촛불의 광장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뿌듯 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의 뜻을 모아서 오십만원을 촛불대책위에 전달한적이 있습니다. 다시 허필두 나무님의 일로 인하여 님들의 어려운 주머니에 호소를 하여서 죄송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다시 한번 염치 없는 소리를 합니다. 도울돈 모을 통 : 농협(정준호 더불어숲 마라톤 클럽) 1082-02-001290 도울돈 모을 시간:이천팔년까지.....
허필두님의 허락도 없이 이렇게 글을 올려봅니다.
지난 8월 5일 종로2가에서 잡혀 가는 시민의 연행을 제지하다가
붙잡혀 간 사건이 2008.12.5. 서울중앙지검 강인규 검사가
공무집행방해로 저를 200만원에 약식 기소하였습니다.
대검찰청 사건기록 검색이 나타나지도 않고 지난번 전화를 했을 때 계속 수사중이라
그냥 넘어가는 줄 알았는데.......
웃긴 놈들입니다.
어제 아는 여직원이 기소되었다고 전화를 주었습니다.
저도 깜작 놀랐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1989년 4월에도 겪은 일인데 20여 년이 지났어도 역사는 오히려
과거로 퇴행하고 있으니.....
그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주범과 주구들을 다 묻어버리고 쓸어버리고 싶습니다.
anarchist 2008.12.22 14:27:30 (*.119.105.151)
시민참여 아..안타깝습니다. 가슴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종로 2가 촛불 광장에서 진압하는 전경들을 피하려 잠시 인도로 나왔을때 많이 본 얼굴 허필두 선생님을 뵜었지요. 잠시 말씀나누다가 "선생님, 잡히지 마세요. 오래 싸워야하니까요.." 라는 말로 마지막 인사를 대신하고 다른 장소로 이동했었습니다. 그 담날 선생님이 연행되셨다는 말씀 듣고 깜짝 놀랐었죠. 그때도 선생님은 지금처럼 담담한 태도를 보이셨어요 ^^ 사회 참여가 쉽지 않은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많은 활동을 하시는 선생님. 뵐때마다 자극과 시민운동 활동의 계기를 주셨지요. ^^ 선생님 덕분에 오랫동안 촛불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허필두 선생님. 힘 내세요. 많은 분들이 응원하고 계십니다. 파이튕!!! -최인숙 드림 2008.12.22 21:32:56 (*.253.60.18)
anarchist 최인숙 선생님께, 그날은 시청에서 회의를 끝나고 술을 사주기에 실컷 마시고, 그런데 길이 막혀 버스는 갈 수 없었고, 있다가 갑자기 연행되는 사람을 보고 따라가 연행을 제지하다가 같이 붙잡혀 갔습니다. 2008.12.22 14:37:42 (*.119.105.186)
neo161 천웅소 안녕하세요? 참여연대 간사 천웅소입니다. [약식기소]와 관련한 내용을 보시면 도움이 되실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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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입금했습니다
허필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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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을 곳 : 서울 금천구 시흥5동 438-194 영일빌라 1-308
허필두
02-820-9026
010-2701-2018
제가 연행되었을 때 사람들이 변호사 비용이라도 대라고 47만원을 걷어주었습니다.
그 돈으로 <박현채 전집>과 <친일인명사전>을 샀습니다.
황매산 000 선생께,
이제 글을 접으세요.
저보다 훨씬 더 힘든데도 가만이 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뜻은 고맙지만 제가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입니다.
당신과 000 님이 공무원 신분으로 참여연대의 배너를 붙이고
함께 달린 것만 해도
저는 당신께 이미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쯤에서 글을 내려놓시기 바랍니다.
2008.12.21.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미욱한 허필두 올림
체 게바라가 쿠바를 떠나면서 카스트로에게 보낸 편지
이 글은 체가 쿠바혁명 이후 쿠바 공직에 봉직하던중, 자신은 혁명가이지 정치가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쿠바 제2인자의 자리를 버리며 아프리카와 남미의 혁명현장으로 향할때
카스트로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이다.
-게바라 주-
나는 공식적으로 당이 가지는 민족적 지도력에서 차지하는 나의 위치,
수상으로서의 지위, 고위 실력자로서의 지위 그리고 쿠바 시민권,
이 모든 것을 사양합니다. 그 어떤 법적 절차도 나를 쿠바에 묶어두지 못합니다.
유일한 끈은 약속이 그렇듯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또 다른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지나간 생활을 돌이켜볼 때 나는 혁명의 승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 충분한 자부심과
헌신적인 마음을 가지고 일해왔다고 믿습니다.
나의 유일한 중대 실수는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 투쟁을 시작할 때 부터 보다
당신을 더 신뢰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했다는 것과 지도자와
혁명가로써의 당신의 자질을 충분히 그리고 빨리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화려한 날들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같이 있으면서, 찬란하지만
아직은 슬픈 카리브해 위기의 날들을 우리의 민중과 더불어 살아왔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 당시 어떤 정치가도 당신보다 화려하게 산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무런 주저 없이 당신을 따랐다는 점과 위험과 원칙에 대하여 사고하고 그것을 직시해
평가하는 데 있어 당신과 일치했다는 점도 자부심을 갖습니다.
세계의 또 다른 국가들은 저의 순수한 노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쿠바 최고 지도자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당신이 하지 못한 것을 나는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 온 것입니다.
당신과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내 마음이 기쁨과 슬픔으로 엉클어집니다.
하나의 건설자로써 내 마음을 여기에 두고 갑니다.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것들 중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자식처럼 받아주었던 쿠바 국민들을 두고 떠납니다.
그런 사실들은 나를 몹시 가슴아프게 합니다.
나는 당신이 가르쳐 준 신념, 우리 민중의 혁명정신, 그리고 제국주의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것입니다.
그래서 대항해 싸워 성서러운 의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전장으로 떠납니다. 이러한 것들이야 말로 깊은 상처를 치료해줍니다.
다시 언급해두고자 하는데 쿠바혁명으로 생기는 의무감을 떠나 어떤 책임감으로부터
쿠바를 자유롭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만약 나의 최후의 시간을 그 어떤 다른 하늘 아래에서 갖게 된다 하더라도 내가
마지막으로 생각하는 것은 쿠바국민 특히 당신에 대한 생각일 것입니다.
당신의 가르침, 모범에 대해 감사드리며, 나는 나의 행동 최후결과에 충실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쿠바 혁명가의 한사람으로 책임감을 느끼고 그러한 자격으로 행동할 것입니다.
나는 아내와 자식에게 어떠한 물질적 재산도 남겨두지 않았으며 또한 그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그것을 행복으로 여깁니다.
그들을 위해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정부가 그들의 생활과 교육을 위해 충분한 것을 제공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과 우리 민중에게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에게 바라는 것을 말로써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승리를 위해 끝없는 전진을
조국이냐 죽음이냐
나의 모든 혁명적 열정으로써 당신을 포옹합니다.
Che's farewell letter to Fidel Castro
HAVANA
Year of Agriculture (1965)
Fidel:
I remember many things in this hour—how I met you in the house of María Antonia,
and how you proposed that I come with you, and all the strain of the preparations.
One day they passed by to ask who would be advised in case of the death,
and the real possibility of it struck all of us. Later we knew that it was true,
that in a revolution one triumphs or dies (if it be a true one).
Many comrades were left along the road to victory.
Today everything has a less dramatic tone, for we are more mature,
but the event is repeating itself.
I feel that I have fulfilled the part of my duty that bound me
to the Cuban Revolution on its territory, and I take my farewell of you,
my comrades and your people who are now my people.
I formally renounce my posts in the leadership of the Party, my post as Minister,
my rank as Major, my status as a Cuban citizen. Nothing legal binds me to Cuba,
only ties of another kind that cannot be broken, as can official appointments.
Looking back over my past life, I believe that I have worked with sufficient faithfulness
and dedication in order to consolidate the revolutionary triumph.
My only deficiency of any import!!!!ance is not to have trusted you more
from those first moments in the Sierra Maestra and in not having understood
soon enough your qualities of leader and revolutionary.
I have lived through magnificent days and at your side I felt the pride of belonging
to our people in the luminous and sad days of the Caribbean Crisis.
Rarely has any statesman shone more brilliantly than you did in those days.
I feel pride, too, in having followed you without hesitation,
identifying myself with your way of thinking and seeing and of judging dangers
and motives.
Other regions of the world claim the support of my modest efforts.
I can do what is forbidden to you because of your responsibility to Cuba,
and the time has come for us to separate.
Let it be known that I do it with a mixture of joy and sorrow:
I am leaving here the purest of my hopes as a builder
and the most loved among my beloved creatures,
and I leave a people who accepted me as a son; this rends a part of my spirit.
On new battlefields I will carry with me the faith that you inculcated in me,
the revolutionary spirit of my people,
the feeling of having fulfilled the most sacred of duties: to fight against
imperialism wherever it may be; this comforts and heals any wound to a great extent.
I say once more that I free Cuba of any responsibility save that which stems
from its example: that if the final hour comes upon me under other skies,
my last thought will be for this people and especially for you,
that I am thankful to you for your teachings and your example,
and that I will try to be faithful up to the final consequences of my acts;
that I have at all times been identified with the foreign policy of our Revolution,
and I continue to be so;
that wherever I may end up I will feel the responsibility of being a Cuban revolutionary,
and I will act as one; that I leave nothing material to my children and my wife,
and this does not grieve me: I am glad that it be so; that I ask nothing for them,
since the State will give them sufficient to live and will educate them.
I would have many things to say to you and to our people,
but I feel that they are unnecessary; words cannot express
what I would want them to, and it isn’t worthwhile wasting
more sheets of paper with my scribbling.
To victory forever. Patria o Muerte!
I embrace you with all my revolutionary ferv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