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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렘과 기대로 잠을 설치고 목포항에서 하루 한 번 운항하는 쾌속선에 오른 시각이 아침 8시. 파도의 일렁임이 점점 심해져 성급했던 아침식사를 후회하며 속을 달래고 있자니 가거도 선착장이 시야에 들어온다. 목포에서 직선거리로는 145km의 거리에 있는 섬이지만, 비금, 도초를 지나고 흑산-상중태-하태를 거쳐 총 233km의 거리를 시속 60km의 속도로 달리는 쾌속선은 4시간 만에 고맙게도 가거도에 여행자를 내려놓는다.선창이 있는 1구 마을은 마치 울릉도의 도동항처럼 숙박업소와 식당, 우체국, 출장소 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29년째 계속되고 있는 항만건설공사(1979년 처음 착공했으나 세 차례 태풍피해를 겪으면서 계속 유실의 피해를 입어 올해 완공을 앞두고 있다)와 산책로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인부들과 육지를 다녀오는 주민들 사이 해경들이 짐을 나르고, 섬 아이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따가운 햇살 속으로 제각기 흩어져 간다.서울서부터 긴 여행에 지쳐 있던 터에 예약된 민박손님을 맞으러 나오신 2구의 은성호 선장님 트럭을 놓칠세라 무작정 짐부터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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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거도는 모두 3구의 마을에 500명 가까운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으나, 초등학교와 가거도 출장소가 위치한 1구(대리)에 주로 밀집되어 있고, 바람이 많은 2구(항리)에는 두 곳의 민박집을 포함 27가구에 40명 내외, 3구(대풍리) 역시도 7가구에 20명도 안 되는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선장부부의 희귀새와 사진 찍기 이야기를 들으며, 역시 후박나무섬임을 느끼게 하는 빨간 새순의 후박이파리들 살랑임으로 눈이 즐거워지는가 싶더니 15분쯤 후 곡예하듯 펼쳐졌던 콘크리트길은 그림같이 자리한 바다 앞의 ‘다희네 민박집’에 닿는다. 바다에서의 탈은 바다것으로 달래야 한다며 서둘러 끓여 내오시는 미모의 다희 어머님표 ‘홍합죽’은 언제 아팠냐는 듯 속을 편안하게 가라앉혀준다. 민박집 맞은편 폐가들 사이사이 염소와 민달팽이도 간혹 만나면서 언덕의 고샅을 오른다. 돌담을 타고 오른 담쟁이덩굴이 연초록의 기운으로 무성하다. 영화 ‘극락도’(주민들이 싫어하는 관계로 실제제목에서 ‘~살인사건’은 생락한다)에서 등장한 폐교가 건너편 전망 좋은 곳에서 안개에 휩싸여 있다. 자칫 길을 잃을까 우려하는 사이, 하늘은 “우우우~” 긴 호흡으로 다가오는 바람을 받아들이며 이내 어두워지고, 결국 굵은 빗방울들을 쏟아낸다. 도회였다면 못할 것을 외투에 빗물이 부딪히는 소리에 맞춰 콧노래를 읊조린다. 다희 할머님의 걱정소리를 들으며, 온통 젖은 옷을 갈아입고 따끈하게 데워진 방에 몸을 누이려니 식사가 준비되었단다. 자연산 광어와 이곳 특산물인 뿔소라, 열기(불볼낙)구이, 거북손(보찰)무침을 미리 준비해간 화이트와인과 주인이 내놓으신 술로 감탄하며 비우고, 이어 홍합미역국과 각종해물을 반찬으로 밥 한 그릇도 깨끗이 비운다. 그날은 밤새도록 슬레이트 지붕을 뚫듯이 그렇게 바람이 비를 몰고 왔다. 바람을 읽을 줄 아시는 민박집 주인의 말처럼 다음날은 거짓말처럼 해무가 걷혔기에 일정대로 유인등대를 들러 3구 마을을 지나 어제 타고 온 배를 타겠다고 인사한 뒤 길을 나선다.허나, 등대까지의 길은 토박이가 아니면 어려운 길이었다. 어제 내린 비와 야생염소의 오물로 숲길은 미끄러웠고, 원시림 속 빛나던 하얀 찔레꽃의 가시는 연신 온몸에 달라붙어 옷이며 살에 상처를 내기 일쑤였다. 시누대숲을 만날 때는 그래서 더 고맙기까지.
어쨌든 대자연 앞에 겸허해야 한다는 진리를 거듭 산은 깨닫게 하고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주민들도 2구와 3구사이의 길을 이제는 다니지 않는단다. 걱정하는 민박집의 전화에 내일 떠나겠다고 알린 뒤, 갑자기 넉넉해진 시간을 위안삼아 신안군 최고봉을 자랑하는 독실산(639m) 정상으로 향한다. 시간에 대한 불안감이 없어지고 나니, 오르는 길 후박나무와 시누대, 동백의 군락이며, 노오란 금새우란, 천남성, 머위 등이 하나하나 신비스럽게 기쁨으로 다가온다. 제주의 해안 절경이 무색할 만큼 아름다운 주상절리대의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 바위마다에 앉아본다. 435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는 상하이 닭울음소리가 환청인지 들리는 듯도 하다. 오전에 높았던 구름은 안개가 되어 쪽빛 바다에 발을 내디디며 내려앉는다. 더도 말고 일주일만 이 섬에 살 수 있다면.
세월아 네월아 하며 등산로 리본 찾아 걷기를 2시간여, 드디어 독실산 정상에 도착한다. ‘하늘별장’(일명 안개별장)이라고도 불리는 콘크리트길의 레이더 기지여서 다소 실망스러웠지만, 갈증을 해소하라고 건네는 해경의 시원한 물 한잔은 얼마나 고마웠던지.다행히 아래쪽 내무반이 있는 부대에서 얻어 탄 지프로 3구마을 진입로까지 갈 수 있었다. 한 사람이 겨우 걸을 만한 길섶엔 둥글레며 곰취나물이 지천이다. 1시간여 힘에 부친 걸음에 해안으로 닿는 길은 더욱 가팔라지고, 이윽고 조용한 마을이 나타난다. 미역을 말리는 아줌마들을 만나니 등대는 포기하라고 한다. 내려온 길을 돌아갈 엄두는 나지 않는다. 한 분이 선창으로 가면 아이 학교 때문에 1구로 이사한 주민의 배를 얻어 탈 수도 있겠다며 귀띔해 주신다. 선창에서 만난 86세의 김미금 할머님은 이웃의 미역 말리는 작업을 돕고 계셨는데, 장마철 오기 전 서둘러 미역을 채취해서 쑥대로 만든 발에 가지런히 늘어 놓고 해풍에 이틀 정도 그대로 말려야 한다며 손이 바쁘시다. 할아버님 한 분은 바닷가 바위에 붙은 삿갓조개, 따개비, 거북손, 배말(보말)을 된장에 삶아 먹는 방법을 설명해주신다. 저녁 7시가 다 된 시각, 1구로 가는 아드님이 승선을 알린다. 일부러 해상일주도 한다는데 얼떨결에 육로에서는 못 볼 구곡앵화와 빈주암, 촛대바위, 동대문, 물둥개, 고래 물 뿜는 곳 등의 비경을 즐길 수 있게 된 거다.감사의 보답을 하려 했으나, 미역 10가닥(반속)을 사준 것만도 고맙다며 한사코 거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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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무들 사이 보랏빛 엉겅퀴와 쑥부쟁이는 사뭇 꽃이 탐스럽고, 바다 쪽으로 야트막한 돌담을 에두른 묘지들은 정겹다. 중간 지점에서 약 20m 떨어진 바다 위에 망부석이 보인다. 마치 아낙네가 아기를 안고 먼 바다를 바라보며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모습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늦게 해가 진다는 땅끝에서 맞이하는 일몰의 감동에 온몸은 소름이 돋는다. 바다는 물론이고 섬 전체가 노을빛으로 변한다. 나도 그렇게 황금빛으로 동화되어 마치 섬과 하나가 된 듯한 기분이다. 그날 저녁, 초등학교 임 주사님의 섬사람풍류를 아껴 들으며, 3구 가는 길에서 뜯으려 했던 곰취며 참나물에 초장을 묻힌 우럭과 농어, 해삼문어를 얹어먹으니 섬나라의 왕이라도 된 듯 뿌듯하다. 휴가 받아 아내와 여행중이라는 모습 좋은 부산 손님도 감탄사를 연발한다.? 자정이 되도록 이야기는 익어가고 아쉬운 마음에 달려 나가 바라본 밤하늘엔, 테를 두른 보름달이 북두칠성과 함께 마지막 밤을 환히 밝히고 있다.
다음 날은 은성호의 그물치기에 동참해보기로 한다. 그야말로 어촌문화체험이다.폭 1.5m, 길이 100m의 새그물을 바닷속에 내려 놓고 조금 이동하여 전날 던져놓은 그물을 1명의 인부가 걷어 올리는가 싶더니, 족히 50cm이상은 될 듯한 광어와 삼식이, 문어 등이 푸른 바닷물을 안은채 쉴틈없이 갑판위로 딸려 온다. 능숙한 다른 한명이 고기를 떼어내기 벅찰 정도의 수확이다. 불과 남대문에서 배를 돌려 다시 돌아오기까지 2시간이 채 못된 시간의 작업이었다. 잡아 올린 광어로 회덮밥 점심이 준비되는 동안 초등학교 3학년 꼬맹이가 뛰어가던 등굣길을 찾아 오른다. 너도밤나무 아래서 땀을 훔치고 꼬불꼬불 돌담길에서 길 잃기를 여러 번, 드디어 흑산중 분교생 8명을 포함해 총 35명이 다니는 가거도 초등학교의 작은 운동장이 나타난다. 자그마한 운동장에서 바라보는 해안선을 감싸 안은 회룡산과 마을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총총 내려와 이 곳 출신으로 4?9혁명에서 산화한 면출장소 앞의 김부연(金富連)기념비와 ‘대한민국 최서남단비’도 들러본 뒤, 놓칠세라 대리항 왼쪽의 ‘콩돌해변’의 푸른 파도 앞에 서 본다.
너무 멀고 험해서 오히려 바다같지 않는
거기 있는지조차
없는지조차 모르던 섬. (중략)
낯선 사람 찾아오면 죄 많은 사람 찾아오면 태풍세실을 불러다가
겁도주고 달래보고 묶어보고 풀어주는 바람 바람 바람섬,
파도 파도 파도섬. -조태일의 <가거도> 중에서
오후 12시 10분. 만재도를 거쳐 다시 목포로 향하는 쾌속선에 오른다. 뭍으로부터 멀고도 아름다운 거리를 가진 바람섬, 가거도에서의 3일은 이렇듯 순식간에 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