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비스는 프랑크 왕국의 수도를 파리로 정했다. 파리는 동과 서 그리고 북쪽에서 아직도 프랑크 왕국에 반기를 드는 게르만족을 통제하기 좋은 위치였다. 그는 이곳에 성 주느비에브 교회를 지어 예수와 사도들에게 바쳤다. 파리는 프랑크 왕국의 수도가 된 이후 유럽의 중심지로서 현재까지도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클로비스는 재위 말년에 유럽의 중세를 연 프랑크 왕국의 창시자로서 그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정치를 펼쳐나갔다. 그는 오를레앙 공의회를 열어 32명의 주교를 소집하고 주교들이 회의를 거쳐 만든 교회법을 심의하였다. 이 공의회에서 정해진 교회법은 중세 교회의 성격을 결정지었을 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요일인 안식일에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이라던가 추수감사절 등, 현재 교회뿐 만 아니라 서구일반에 퍼져있는 갖가지 법규들이 이 오를레앙 공의회에서 정해졌다.
교회법을 통해 원주민과 게르만족 전체를 아우른 클로비스는 정복자인 게르만족의 법률을 성문화시켰다. 이것이 살리카 법전이다. 살리카 법전은 크리스트교나 그리스 로마법에 영향을 받지 않았고 게르만족, 그 중에서도 최고 정복자인 살리족에게만 적용되었다. 살리카 법전은 주로 형법과 소송법에 관한 법전으로 각종 규칙 위반과 범죄에 대한 벌과금 목록을 자세하게 싣고 있다. 살리카 법전은 중세를 거쳐 근세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유럽의 왕위계승문제에 살리카법이 종종 인용되었다.
클로비스는 511년 말에 파리에서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그가 지은 생드니 성당에 묻혔다. 그가 죽은 후 프랑크 왕국은 프랑크족의 관습인 분할상속 원칙에 따라 4명의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분할상속은 왕의 권위를 나누는 것이니만큼 프랑크 왕국과 메로빙거 왕조를 약화시켰고 상시적인 내란의 단서가 되었다. 메로빙거 왕조는 명목상으로는 751년까지 존속하였으나 결국 카롤링거 왕조를 세운 피핀에 의해 몰락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