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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윤영국과 함께하는 제주여행 원문보기 글쓴이: 리향만당
이 글은 제가 평소 가이드하는 내용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추사적거지 [추사가 귀양살이 하던 강도순 가옥]
추사적거지는 추사가 귀양 와서 살던 집이다. 적거(謫居)란 귀양 갈 적, 살 거로 귀양 와서 산다는 뜻이다. 마당 가운데 선 비석에는 추사김선생적려유허비(秋史金先生謫廬遺墟碑)로 쓰여 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쓰고 참여정부때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은 우리나라사람 중 단군 이래 한 분야에서 세계최고의 반열에 오른 사람은 추사 김정희라고 말한바 있다. 실학자였던 추사는 개혁군주 정조의 꿈이 좌절되지 않았더라면 다산정약용과 더불어 조선을 개혁할 동력이 되었을 사람이다. 그가 이곳으로 유배 온 이유는 당쟁 때문이다. 이미 정권을 농단하던 안동김씨 세력에 의해 ‘윤상도의 옥사’를 추사의 부친이 배후조종한 혐의로 이미 고인이 된 부친을 대신하여 귀양을 왔다.
귀양에도 본향안치 주군안치 중도부처 절도안치 위리안치 등 급수가 있는데 추사는 가장 최악의 귀양을 왔다. 본향안치란 자기고향으로 보내는 것으로 사실상 귀양이라기 보단 은퇴에 가깝다. 주군안치는 본향안치와 비슷한 형태인데 고향이 아닌 지방으로 보내는 것이고 해당 군 관내에서 행동의 제약은 없다. 중도부처는 귀양지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거소를 정하는 것이다. 절도안치는 섬에 귀양 보내는 것이며 위리안치(圍籬安置)는 울타리를 두른 집안에 안치하여 울타리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가장 고된 귀양으로 사형 다음의 중벌에 해당된다. 해남, 강진에서 주군안치 귀양을 받아 조선후기의 피폐한 사회현실을 경험한 다산 정약용 은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책을 썼고. 9년 가까이 절도안치 겸 위리안치 형을 받아 고립된 추사 김정희는 자신의 예술세계를 완성하였다. 그 결과물이 추사체인 것이다.
제주도가 유배지가 된 것은 조선시대 들어서이다. 명나라 법을 모방한 조선의 법에서 중죄인은 3,000리 밖으로 귀양을 보내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토가 작고 서울이 정 중앙에 있어 실질적으로 서울기준 3,000리가 나오지 않는 관계로 상징적으로 가장 먼 제주도, 그 중에서도 가장 아래쪽인 대정현으로 유배를 보내게 된 것이다. 제주로 유배 온 사람은 200여명 되는데 그중 가장 유명인물은 광해군과 김정희일 것이다.
(1)돌하르방 돌하르방은 제주의 상징과도 같은 것으로 우석목 무석목 옹중석 벅수머리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렸으나 돌하루방을 거쳐 돌하르방으로 이름이 굳어진 것은 현대에 와서이다.
[추사 기념관 앞의 대정현 양식 돌하르방]
45기 혹은 47기라고도 하는데 서울의 국립민속박물관에 2기가 가 있어서 그렇다. 조선시대의 제주도의 행정구역에 따라 제주목식, 대정현식, 정의현식등 각각 모양이 다른 3개의 양식이 존재하는데 우리에게 익숙하고 캐릭터상품으로 팔리는 돌하르방이 제주목의 양식이다. 오늘날 제주도내에 돌하르방을 조형물로 설치하는 곳이 많은데 지역구분 없이 모두 이 제주목 양식을 세우고 있다. 과거의 행정구역을 감안해서 세우는 것이 더 흥미롭고 역사성이 있는 일이련만 편의주의에 밀리는 것 같다.
[컨벤션센터 앞에 있는 3기의 돌하르방은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 (좌로부터) 3개의 양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보여준다.]
제주양식은 평균 높이가 180이 넘어 3개 양식중 가장 크고 정의(오늘날 성읍)양식은 140cm 남짓한 크기다. 대정현 양식이 가장 작아 평균 136cm 정도이다. 제주양식이 가장 균형미가 있고 대중적이어서 오늘날 재현하는 돌하르방은 거의가 이 양식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가분수 형태의 대정, 정의 양식은 덜 알려진 탓에 신비롭고 해학적인 모습을 띄고 있어 특별한 친근한 느낌을 준다. 추사적거지로 들어가는 성곽 옆에 1기, 추사관 입구에 2기 등 3개의 돌하르방은 문화재로 지정된 것으로 오리지널 45개중 하나이다. 돌하르방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손의 위치에 따라 문관, 무관을 상징했다고 하는 말은 후대에 만들어낸 말일 뿐이다. 영조 때의 기록에 제주도에 돌하르방이 있다고만 되어있을 뿐, 누가 왜 만들었는지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제주도에 장승이 없는 것으로 보아 주술적 의미가 있다거나 마을입구에 있었으므로 경계, 금표 등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몽골유래설과 남방유래설 남근석의 우회적 표현으로 제주에서 자생했다는 등 여러 학설이 있다.
(2) 제주에서 완성된 추사체 흔히들 최고의 명필로 왕희지를 꼽는다. 서성(書聖)이라고 까지 한다. 내로라하는 명필들 대부분은 그를 답습한다. 그러나 지천년 견오백이라고 하여 종이는 천년 비단은 500년을 지속한다고 하나 왕희지는 이미 1,700년 전의 사람이다. 그의 서체를 왕희지체라 하여 전승은 되지만 복사기나 카메라가 없던 시절이니 왕희지의 필법이 정확히 전승되기는 어렵다. 비슷하게 쓴다고 해도 여러 명 거쳐 베껴 쓰다 보면 원문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김정희는 실학자요, 불교학자요 금석학자다. 금석문 즉 돌에 새겨진 오리지널 원문들을 연구하였다. 그래서 그는 오리지널을 충분히 참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평생 돌벼루 열개가 다 닳아 못쓸 정도가 되고 붓 천여자루가 닳도록 정진하였다고 한다. 24세 때 동지부사(겨울에 보내는 사신 중 으뜸인 동지상사 다음의 직위)로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가서 당대 최고의 학자로 거유(巨儒:대선비, 대학자)로 칭해지던 옹방강과 완원을 만나 학문적 교류를 하게 되었고 청나라의 학자들은 김정희를 해동제일통유(海東第一通儒:통달한 학자)로 추앙하였다. 오늘날 한자의 오리지널은 중국이 아닌 한국에 있다. 근대이전 중국의 전성기를 이끈 청나라 황실은 한족이 아니었고 공산화 이후 중국정부가 문맹퇴치를 위해 간체자를 보급한 이유도 있지만 명나라 이래로 스스로 주자학(성리학)의 본류를 자임한 소중화사상과 함께 추사와 같은 대 학자가 있었기에 중국의 변방이 아니라 한자문화권의 원류를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자는 근본적으로 중국글자이며 명필이라는 것은 중국의 대가를 닮는 길 이었다. 그러나 제주 유배를 거치면서 추사는 그 누구도 닮지 않은 독자적인 서체 즉 추사체를 완성했다. 척박한 제주에서, 위리안치의 혹독한 시련 속에서 완성된 추사체는 회화적 요소가 가미되고 조형미가 독창적인 서체로 평가 받는다.
(3) 제주의 전통초가와 가족제도 제주도는 삼다도외에 삼무도라는 별칭이 있다. 3무는 도둑, 거지, 대문이 없다는 의미이다. 집안에 들어가려면 대문의 역할을 대신하는 정낭과 정주석을 지나야 한다. 입구 좌우에 세우는 돌을 정주석이라 하는데 구멍이 1~4개가 뚫려져 있다. 가장 흔한 것은 3구 형태다. 이 구멍에 가로지르는 나무를 정낭이라고 한다. 지역적으로 약간씩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좌우 양쪽 정주석의 구멍에 걸쳐 정낭을 하나 가로지르면 잠깐 집을 비운 것이고 두개를 걸쳐놓으면 멀리 출타한 것이며 세 개를 모두 걸쳐놓으면 며칠간 비운다는 뜻이다.
[이 상태는 주인이 있으니 들어와도 된다] 요즘은 열쇠가 필요 없는 디지털 도어 잠금장치가 인기다. 지문이나 홍체를 인식하는 첨단 잠금장치도 있다. 그리고 집을 비우고도 흡사 주인이 있는 것처럼 시간이 되면 불이 켜지고 텔레비전도 작동한다. 모두가 빈 집에 사람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정낭과 정주석은 디지털 도어락 보다 한수 높은 커뮤니케이션 도어락이다. 역설적으로 다른 그 어느 첨단 잠금장치보다 더 세련된 방식이다. 방문자에게 집의 상태를 말해 준다. ‘우리집은 비었어요!’ 하고 광고하는 셈이다. 그러면 온 동네 사람이 ‘저 집은 비었군’ 하면서 관심을 갖고 지켜봐 주게 된다. 은행에서 돈을 찾아 가방에 넣어가지고 나오다 날치기 당하는 경우가 가끔 뉴스에 오른다. 만약 돈을 가방에 넣지 않은 채 만천하에 드러나도록 뭉칫돈을 바리바리 싸들고 나온다면 모든 행인이 눈을 휘둥그레 하여 쳐다 볼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는 날치기가 불가능 해 진다. 정낭과 정주석은 너무 멋진 발상이다.
초가는 전근대시대 서민의 대표적 주거양식이었다. 지역별로 차이가 있지만 특히 제주의 초가는 본토의 그것에 비해 많이 다르다. 우선 지붕이 볏짚이 아니다. 벼농사가 불가능한 토질조건 때문에 제주에 지천으로 널린 억새로 지붕을 이었다. 또한 본토의 초가집은 이엉을 얹어 흡사 기와집의 용마루처럼 장식하였으나 제주도는 이엉이 없이 둥글고 밋밋하게 지붕을 올린 후 집줄이라 부르는 새끼줄로 묶어 바람에 의한 동요를 막았다. 본토의 중, 북부지방에 비해 방문이 훨씬 크며 부엌에는 부뚜막이 없고 아궁이가 본토에 비해 반대방향으로 놓여 있다. 부엌과 마주하여 방이 아닌 마루가 있고 그 다음이 방이다. 본토와의 이러한 차이는 기후가 온난하여 난방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덜 하였기 때문이다. 건물의 긴 쪽으로 안방 윗방을 배치하지 않고 짧은 축을 나눠 안방 윗방으로 하였으며 부엌 반대편에 별도의 난방전용 아궁이인 굴묵을 따로 둔 것도 특징적이다. 부엌 앞에는 물 허벅을 올려놓기 위한 공간(물팡)이 있다. 돌이 많아 길이 울퉁불퉁하고 바람이 많이 부는 제주의 특성상 본토처럼 물동이를 머리에 일 경우 발을 내려다 볼 수가 없어 안전하게 보행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주둥이를 작게 하여 등에 질수 있도록 고안된 용기가 ‘물허벅’이고 이 물허벅은 ‘물구덕’에 담아 등짐으로 진다. 물이 많이 필요한 잔치집이나 상가에는 물을 지어다 주는 것을 ‘물 부조’ 제주현지발음으로 ‘물부지’라 하였다. 화장실은 ‘통시’라고 하는데 돼지가 인분을 먹도록 한 구조이며 이렇게 키운 돼지를 똥돼지라 불렀다. 똥만 먹은 것이 아니라 ‘똥도 먹었다.’ 라는 표현이 적당하다. 돗 도고리라 불리는 돼지 밥그릇에 음식찌꺼기도 주었다. 똥돼지는 다른 나라에도 있었으며 우리나라의 울진이나 산청 등 본토에도 있었으나 가장 오래도록 남은 것이 제주지방이었다. 오늘날에도 똥돼지가 있을까? 답은 ‘없다.’ 돼지가 없는 것이 아니라 거기 와서 ‘똥을 눌 인간’ 이 없기때문이다. 요즘 쓰이는 똥돼지라는 말은 똥 먹는 돼지라기보다 제주산 흑돼지의 애칭으로 통용되고 있다.
[통과 통시] 추사가 귀양 살던 이집은 당시 이 고을의 토호인 강도순의 집이다. 안거리, 밖거리, 모커리등 세거리집으로 이루어져 있는 전형적인 제주도 부잣집의 주거형태이다. 안거리라 불리는 안채에 주인내외가 살고 바깥거리에는 손님이나 분가한 자식내외를 살게 하고 모커리에는 머슴이나 일꾼이 기거한다. 제주의 가족제도는 집밖에서 보면 대가족 제도이다. 부모와 결혼한 자식과 손자가 한 울타리에서 산다. 그러나 내부에서 보면 핵가족이다. 자식이 결혼하면 바깥채로 분가 시킨다. 나중에는 장년의 자식내외가 안채로 오고 노년의 부모가 바깥채로 나간다. 이렇게 한 울타리 안에 살면서도 각자 살림을 따로 하며 밥을 따로 해 먹는다. 이것을 보고 관광객들은 제주사람은 부모를 모시지 않는다고 오해하기도 한다. 이러한 특징은 부모가 자식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는 독립성에서 기인한다. 본토와 달리 고립된 섬인 제주에서는 어려웠던 옛날 궁핍을 타개하기 위해 외부로부터 조달할 방법이 없었다. 옛날의 제주해협은 배로 보름이나 걸리던 장벽이었다. 출륙금지령으로 아무나 배를 만질 수도 없었다. 따라서 궁핍을 안으로부터 해결 할 수밖에 없었다. 극단적으로 말해 넷이 두 달 먹을 양식이 남았는데 다음 추수기는 넉 달이 남았다고 치자. 본토에서야 유랑민이 되건 화적이 되건 살아날 길이 있었겠지만 넷이 두 달 먹고 다 죽느니 둘이 넉 달 먹고 살아나야 하는 것이 종족보존을 위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 물론 자식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몰라라 한다는 개념은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짐이 되지 않아야 하는 절실한 이유가 있었다는 말이다.
(4) 추사 기념관 작품감상 추사는 단순히 명필이 아니라 경학·음운학·지리학 등에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으며, 불교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학문에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설파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완성시켰으며, 특히 예서·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예술에도 조예가 깊어 시·서·화 일치사상에 입각한 고답적인 이념미(理念美)를 구현하려 하였다. 추사의 외8촌 동생인 흥선 대원군 이하응은 젊은 시절 추사로부터 난을 치는 수업을 받았고 남종화로 유명한 소치 허유선생도 추사의 제자였다. 함흥 황초령과 북한산 비봉의 신라 석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 낸 것도 추사 김정희다.
추사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세한도로 유배생활 5년째에 그린 그림이자 편지로 추사가 제자인 우선 이상적(藕船 李尙迪)에게 준 편지이다. 이상적은 추사의 제자로 당시에 온양현감을 지내고 있었는데 통역관출신으로 북경에 여러 번 왕래하며 청나라의 문인들과 교류가 깊은 사람이었다.
편지의 제목처럼 세한도는 추운 겨울을 그림으로 그리고 있다. 논어의 자한 편에서 따온 것으로 『세한이 지난후에 알게 된다(歲寒然後知) 소나무가 잣나무의 늦게까지 시들지 않음을(松柏之後凋)』이런 뜻이다.
귀양을 오면 요즘말로 별 볼 일 없는 신세가 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외면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통역관이었던 추사의 제자 이상적은 그런 스승을 보살펴 주었다. 통역관이라는 직업상 청나라를 자주 드나들며 위리안치상태의 고독한 추사에게 외로움과 지적욕구를 충족시켜줄 책들을 공급했다. 특히 만학집과 대운산방문고 라는 책을 구해서 보내준데 대한 보답으로 이 편지를 썼다. 오늘날에 비해 발행부수도 훨씬 적고 글자가 커서 권수가 많은데다 택배제도도 없던 시대에 귀한 책을 구해 뱃길로 보름여 걸리는 절해의 고도까지 보낸다는 것은 상당한 수고와 비용이 드는 일 이었을 것이다. 추사는 그 보답으로 제자에게 이 편지를 써서 치하를 하였다. 전시된 그림 옆에 한글로 된 해석이 같이 있다. 편지에 보면 고맙다는 말은 하나도 없고 오호 슬픈 일이로다 라는 말로 맺고 있다. 그러나 태사공과 성인을 논하며 제자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이 절절이 담겨있다.
[세한도 모사본, 진품은 개인소장이다] 그림에서 귀양살이 하는 신세로 보잘것없는 추사 자신은 조그마한 집 한 채요, 제자의 변치 않는 고마운 지조는 추사를 둘러싼 소나무로 표현 하고 있다. 추사와 고마운 제자 이외에는 무관심한 여백이다. 직접 눈을 그린 것은 아니지만 흰 여백이 겨울의 느낌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상적은 이 그림을 청나라에서 자랑을 하였고 청나라에서도 대 학자로 추앙받던 추사의 그림편지 끝으로 당대의 청나라 석학들이 종이를 덧붙여 글을 쓴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인터넷에서 리플을 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추사의 명필과 그 내용, 그림과 더불어 당대 석학들의 댓글까지 달린 이 편지의 가치는 혜량하기가 어렵다. 제주의 유일한 국보다. 그러나 진본은 개인 소장으로 제주도에 없다.
눈여겨 볼 다른 작품으로 대팽두부과강채 고회부처아녀손(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이 있다. 대팽(大烹), 즉 큰솥에 삶는다. 두부(豆腐) 오이(瓜), 생강(薑) 나물(菜)을 넣고 삶으니 곧 찌개를 끓이는 것인데 부부(夫妻)가 아이(兒)와 딸, 손자(女孫)와 같이 모인 이 모임이 최고의 모임(高會) 즉 『가족들이 오손 도손 모여 찌개를 끓여 먹는 소박한 풍경이 가장 좋은 모임이다』라는 뜻이다. 이글은 판전(版殿: 강남 봉은사 전각의 편액)과 더불어 추사의 마지막 작품으로 서거하던 해에 쓴 것이다. 추사는 만 70세까지 살아 당시 평균수명이 40세에 불과하던 시절에 보기 드문 장수를 했다. 벼슬로나 학식으로나 아쉬울 것 없는 추사가 인생의 황혼기에 내린 결론이 인생의 행복이란 이런 것이다. 라는 뜻이 아닐까?
다른 작품으로는 『소창다명 사아구좌(小窓多明 使我久坐)』가 있다. ‘작은 창으로 빛이 훤히 들어오니 나로 하여금 오래도록 앉아있게 하는 구나’ 라는 뜻으로 달 밝은 밤 창가에 처연히 앉아있는 선생의 어깨 위로 달빛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글에서 창(窓)자를 창문 모양으로 쓴 것(전서라고 함)이 특히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