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기]
자녀들과 함께 찾은 오대산
새해 들어 새로운 마음으로 오대산을 찾기로 하였다.
불교의 성지라 일컬어지는 이 오대산의 장엄한 멧뿌리들을 밟고
새해 설계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신인천관광 산악회에서 1월 2일 오대산 월요산행이 계획되어
있다고 하기에 나는 교대에 다니는 문주와 중2인 성주를 데리고
등산길에 나섰다.
오전 7시 30분. 인천을 출발하여 영동 고속도로를 타고 10시 50분
월정사 뒤 주차장에 도착했다.
월정사를 지나 비포장도로를 들어서면서 노면에는 흰눈이
자갈위로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였다.
-----월정사-----
오대산장 옆 연화교를 지나면서는 1965년 여름 고려대생 10명이
소나기로 갑자기 물이 불은 냇물을 건너다 모두다 목숨을 잃은
어이없는 죽음을 떠올렸다.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는 30리 길. 속력을 죽여 버스로 조심스레
왔으니 20분은 족히 걸린 듯싶다.
짐을 챙겨 배낭을 메고 서둘러 버스에서 막 나서니 관대교가
나타났다.
조선왕조 세조가 많은 충신들과 어린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을 때
온몸에 종창이 심하여 전국을 순회하며 기도와 온천으로 병을
고치려 할 때였단다.
이곳에 이르러 물이 하도 맑고 땀도 났던지 주위를 물리치고 관대를
풀고 시원스럽게 목욕을 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어린 사미승이
나타나 세조의 등을 밀어주니 병이 말끔히 나았단다.
-----관대거리-----
세조가 기뻐하여 "내가 임금임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니
동자승 역시 답하기를"삼감께서도 문수를 친견 했다는 말을 하지 마시오"
하고는 갑자기 살아졌다는 것이다.
세조가 놀라 즉시 정신을 가다듬고 꿈인 듯 사방을 보았으나 문수는
없고 기억은 희미하여 떠오르는 아련한 동자승의 모습을 그대로 화공을
식혀 그리게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 절에 모셔 졌다는 상원사에
있는 문수동자상 이라고 한다.
-----상원사에 모셔진 문수동자상-----
나는 애들에게 이런 일화들을 얘기하면서 공사가 막 끝난 듯한
상원사의 돌계단을 올랐다.
몇 백 년은 됐음직한 주목들에 둘러싸여 양지바르게 지어진
상원사는 아담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에 휩싸여 정숙하기만 하였다.
그런데 좀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이 나를 감싸주지 않는 감을 주는
것은 마구 흐트러진 돌덩이와 자재들이 여기저기에 가로막아
산란스럽게 정신을 흐려 놓은 탓이 였을까?
마침 계단을 쓸고 있는 스님에게 문수동자상을 참배할 기회를
달라고 하였더니 스님들이 백일기도중이라는 이유로 거절을 했다.
한껏 큰 기대를 갖고 문수동자상을 알현하기 위하여 이곳을 찾아
왔건만 서운하고 야속한 생각이 몹시 들었다.
그러나 어쩌랴?
발길을 돌려 성덕대왕 신종과 함께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되었다는
상원사 동종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상원사-----
-----상원사 동종-----
세조가 병이 나음에 보답으로 전국 최고의 종을 구해 주었다는
이 종은 꽃구름을 타고 날개옷 휘날리며 하늘을 나는 비천상의
양각조각이 유독 아름답게 눈에 들어왔다.
울림 역시 깨끗하고 맑게 멀리퍼져 백리 밖에서도 들을 수 있고
우리나라 동종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였다니 어찌 국보로
지정되지 않을 손가?
종각안의 바닥엔 수없이 많은 동전들이 떨어져 보기에 민망
하였는데 이것은 신비스런 종소리를 듣기 위함인가 아님 행운을
빌어 문수의 지혜를 빌리려 함인가?
흡사 유럽 여행시 로마의 테레비 분수를 연상 식혀 씁쓸했다.
또한 상원사에는 세조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세조가 불공을 드리러 법당에 들어가려 할 때 였단다.
어디서 고양이가 나타나서 용포를 세 번이나 잡아당겨 이상히
여겨 주위를 살피니 자객이 불상뒤에 숨어서 세조의 목숨을
노렸다는 것이다.
이에 고마움을 느껴 고양이에게 묘전을 하사하고 고양이상을
세우게 하였다는데 지금 생각하면 황당한 전설로만 생각되나
돌로 조각된 많이 풍화에 마모된 계단앞의 고양이상을 보면
그냥웃고 지나치기엔 너무 실증적인 것 같다.
고양인지 강아지인지 구별이 잘 되지 않는 조그마한 이
돌조각상을 가까이 가서 유심히 돌아보고 이내 발길을 돌려
적멸보궁으로 향하였다.
-----고양이 돌조상-----
잎은 떨어졌으나 울창하게 높이 욱어진 이름표를 붙인 나무들과
산죽이 어우러진 돌게단과 흙길이 번갈아 이어지는 비교적 넓은
길을 20여분 남짓 걸어 중대 사자암에 도착 했다.
지붕에 하얀 눈이 아직 남아 있는 이 암자는 승유억불 정책을
쓰면서 새로운 왕조의 기반을 다지고 조선의 이념을 강력히
구축 하려했던 태종이 말년에 불교에 관심을 가져 이사자암을
중건하고 원찰로 정하여 먼저 간이의 원혼을 달래려 했다한다.
그렇게 카리스마가 있는 태종역시 죽음에 있어서는 한낱
미약한 인간에 불과 했던가?
불교의 모든 것을 파는 매점을 왼쪽으로 하고 오른쪽으로
돌아 가파르게 치닫고 능선을 따라 20여분을 더 오르니
용안수라는 조그마한 우물이 나타나면서 하늘로 향한
돌계단과 함께 적멸보궁 안내판이 보였다.
-----적멸보궁 올라가는 계단-----
신라 때 자장율사가 당나라로부터 부처님의 정골사리를
모셔와 오대산의 한가운데인 이봉우리에 봉안하였다는
이곳은 신비스러운 영지 같았다.
파랑새가 안내했다는 오만진신의 상주처라 일컫는 이
길지는 불도들에게는 물론 일반 중생들에게도 추앙받는
성지임엔 틀림없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용이 여의주를 갖고 노는 머리에
해당된다고 하던가?
청룡. 백호. 현무. 주작이 뚜렷하고 비로봉에서 뻗어 내린
줄기가 굴곡이 심하게 용트림을 한 형국이라든가 앞이 확
트이면서도 산줄기가 서로 감싸않은 전망은 참으로
인상적이였다.
적멸보궁 앞의 편편한 공간은 풍수지리를 모르는 나도
사방에서 호위하여 주는듯한 편안함과 권위를 느끼게 함에
놀랐고 명당자리가 어떤 곳인가를 조끔이나마
눈뜨게 하여주었다.
전각안의 좌대에는 불상대신 붉은색 방석만이 동그만이
놓여 있어 허전케 하였는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뒤꼍의
교묘한 바위와 작은탑 그리고 마애불상이 새겨진 곳이
진신사리를 모신 세존진신탑묘란다.
-----적멸보궁 뒷편에 있는 세존진신탑묘-----
물론 전각안에서는 불공을 비롯하여 모든 행사가
자행되였는데 나만의 무지에서 오는 의문이였을까?
불뚝 솟은 지형으로 인하여 모퉁이길로 다시 내려와
돌아 능선을 타고 가파른 나무계단을 올랐다.
이길이 주산에서 뻗어 내려오는 소위 말하는 내룡이라는
콧마루 산줄기임을 의식하면서.........
고된 비탈길을 1시간 이상 말없이 힘을 다하여 올랐을까?
가쁜 숨을 헐떡이며 정상에 도착한 시각은 12시 50분. 꼬박
2시간이 걸린 셈이다.
정상엔 "비로봉"이라고 색인 대리석 표지석이 돌 사이에
놓여 있었다.
쭉- 뻗어 내려가 꽃술과 같이 뭉쳐 솟아오른 적멸보궁은 동대산.
두로봉. 상왕봉, 그리고 오른쪽으로 호령봉의 다섯 봉우리가
마치 연꽃과 같이 오무라들듯이 품어주어 정말 연화대의
극락인 것 같았다.
-----정상의 비로봉 표지판-----
명당이란 이런 것인가?
어사 박문수는 불교의 사찰들이 전국의 모든 길지와 명당들을
차지하여 그렇게 중들이 여유있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정말 이러한 명당엔 현세상의 이치와 연통하는
신비의 인과가 있는 것일까?
문주와 성주는 몹시 지쳤을 텐데도 이리저리 사방을
둘러보며 좋아했다.
멀리 넓게 펼쳐지는 산봉우리들의 그림같은 향연을 보며 산정에
올라선 희열을 우리는 모두 맛보았다.
어렵게 올라오면 어려운만큼 땀흘린 가치가 수도자의
고행과 같이 신령스런 내면의 참 모습일 것이다.
비로봉 주변의 등산로에는 군데군데 주목이 군락을 이루었고
측백나무가 길을 막아 발길을 더디게 하였다. 고산속에서의
적막감을 바삭 바삭 눈밟는 소리로 깨치면서 가노라니
휘파람이 절로 날만큼 기분이 상쾌해졌다.
이따금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불어주는 바람은 매서운
삭풍이기 보다는 옷속 깊이 땀을 식혀주는 고마운
훈풍이기도 하였다.
만져보고 싶으리만큼 하얀 표피의 자작나무 밑을 지나
오르락내리락 힘겹게 상왕봉에 다다르니 비로봉이 빤히
건너다 보인다.
-----오대산의 풍광-----
모아놓은 돌무더기에 질펀히 앉아 큰숨을 쉬면서 눈을
감으니 심신의 피로가 허공에 날아가 삭으라지는 것 같다.
파란 하늘과 맑은 공기와 확 트인 눈앞의 그림같은
산봉우리들을 가슴에 꽉 않으니 자연이 다 내것이고
이것이 산행의 진미인 것 같았다.
이제는 한결 정신이 맑아졌고 발걸음이 가벼웠다.
눈밟힌 딱딱한 미끄러운 내리막길을 한동안 조심스럽게
지나 산자락 비탈길을 어느정도 내려왔을 때였다.
첩첩 산중에 산허리를 깎아 휘감으며 돌아가는 큰
신작로 길이 나왔다.
천혜의 자연이 현대문명에 의해 파괴되는 볼썽사나운
참상이다.
무성한 수목이 마구 잘리고 맨살이 드러났다.
여기에 웬 자동차길?
발전도 좋고 개발도 하여야 된다지만 이런 무분별한
정책은 좀 너무 심하다고 느꼈다.
우리나라의 명산중의 명산을 이렇게 마구 훼손식혀서
무슨 이익을 창출하겠다는 것인가?
자연환경과 산림 정책자들의 신중한 감시와 결단이
필요한 것 같았다.
다리도 아프고 기운도 빠져 우선 반가웠으나 기분은
영 개운치 않았다.
-----오대산의 풍광-----
잘 닦아진 펀펀한 길을 셋이서 천천히 내려오며 나는
상원사와 6. 25에 대한 일화를 말해 주었다.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이 모두 허망한것이니 만일 형상이
있는 것이 형상있는것 아님을 알면 곧 여래를 볼지라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는 진리의
말씀에 득도를 하고 금강산을 비롯해서 각지를 돌아다니며
고행 끝에 오대산에 머물면서 27년간을 산 문밖에 나가지
않고 입적한 아주 유명한 방한암(중원) 이라는 스님이
있었단다.
천고에 자취를 감추는 학이 될지언정 삼춘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는 유명한 말씀도 있거니와
특히 유명한 것은 목숨을 걸고 절을 지켰다는 것이다.
전쟁이 한참 치열할 때 작전을 맡은 k장군은 상원사에
부득이 소각명령을 내렸단다.
사병들이 명령을 받들어 불을 지르려고 하자 노스님이
법당에 앉아 불에 타 죽어도 물러설 수 없다고 호통을 치며
꼼짝을 안하자 그의 높은 법력에 감동을 받은 군인들은
할수없이 절의 문짝만을 떼어
불을 놓아 멀리서 보면 절이 불에 타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이때 월정사는 다 타버리고 상원사만이 그대로 보전되었으니
만일 그때 스님같이 높은 법력이 없었더라면 생각만 하여도
아찔한 감이 든다.
지금도 중대 사자암에는 방한암스님이 꽂아 놓았다는
지팡이가 신기하게도 살아서 가지가 돋고 잎이 피어 훌륭한
단풍나무가 자라고 있으며 열반할 때에도 가사장삼에 단좌한
채 아무도 없는 법당에서 홀로 꼿꼿이 입적 하셨다고 한다.
-----입적당시 한암스님의 모습-----
태평양 전쟁때에는 일본 총독이 스님을 찾아와 막바지에
이른 전쟁의 승패를 물었는데 의연히 앉아 정의로운자가 이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니 얼마나 큰 도량을 가지신 큰 스님인가?
그 후 k장군은 비행기 사고로 이내 세상을 뜨고 상원사의
문수동자상등의 보물은 지금껏 보전 되어 국보로 사랑받고
있으니 불교에서 말하는 업보라고 만 하기엔 너무나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생전의 한암스님-----
인과응보(因果應報), 윤회(輪廻) 그리고 색(色)과 공(空)을
생각하면서 사람은 그져 올바른 마음으로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모든 자연환경에 감사하면서 정직하게 살아야 된다는 것을
이야기 하면서 내려오다 보니 주차장에 도착했다.
어느덧 산골짜기의 짧은 해는 어둠을 재촉하고 대기한 버스에
오르면서 인생의 무상함과 불교의 오묘한 진리에 대해서
새삼 관심이 머무르는 계기가 된 산행이였다.
1 9 9 5. 1. 3.
상 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