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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분향- 오분향은 오계의 근본적인 공부하는 이치에 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침저녁 예불에 이오분향을 스님네들이 항상 잊지 않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죠. 그것은 또, 스님들만이 아니라 여러분과 더불어 같이 공부하기 위한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부처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놓으신 겁니다. 그 오분향을 다 아실 것 같으면, 여러분이 다 해마다 받는 오계의 의미도 거기 다 포함돼 있는 겁니다. 우리는 한하나 배우기 이전에 지혜로우면 껑충껑충 점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한 사람의 역할만 하는 게 아니죠. 누가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하기 이전에 아버지의 행동을 하며, 남편의 행동을 하며, 아들의 행동을 하며, 형의 행동을 하며, 아우의 행동을 하며, 사위의 행동을 하며, 친구의 행동을 하며, 사원의 행동을 하며 여러 가지를 자동적으로 하고 있죠. 그렇듯이 부처님 법에 요렇게 꼭 집어서 말씀해 놓으신 것만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나면 이렇다, 누구를 만나면 이렇다, 이렇게 말씀해 놓은 것이 아니라 자유스럽게 만나고 말하고 듣고 보고 이럽니다. 안 그렇습니까? 자유스럽죠? 그런데 예전에도 내가 얘기했죠. 콩을 심어서 싹이 났는데 콩 싹은 자기가 제일이라고 하더라 이겁니다. 자기만이 자기인 줄 안다 이런 거죠. 엄연히 자기 종자가 있어서 콩 싹이 됐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혜로우면 ‘아, 콩씨가 없어도 콩 싹이 없고 콩 싹이 없어도 콩씨가 없구나.’ 하는 걸 우리가 알게 됩니다. 벽을 치면 붓장이 울리듯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여러분한테, 요 한 가지만 딱 말 하는 게 아니라 둥글려서 말을 하려니까, 둥글려서 전체 나가려니까, 이것저것, 소소한 것, 뭐든지 거기 포함돼서 들어가게끔 항상 말을 하죠. 팔정도니 육바라밀이니 사성계니 오계니 그런 게 모두 거기 포함돼서 들어가는 이치를 얘기하거든요. 왜냐하면요, 하나하나 이렇게 하다보면 늙어 죽을 때까지도 그 길을 걷지 못할 테니까요. 그래서 물은 강하면서도 유유히 돈다고 합니다. 힘이 없어서 유유한 게 아니죠? 사대를 우리가 좇아가는 것도 아니고, 사대가 우리를 좇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단, 그 간운데서 우리가 어떻게 생각을 하고, 어떻게 움죽거리고,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시대는 바꿔질 수도 있고, 좋게 될 수도 있고 이렇습니다. 그러니까 이 지구에서 주인은 우리 마음이죠. 지구의 근본과 우리의 근본, 우주의 근본, ‘삼천대천’ 이럽니다. ‘삼천’ 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무엇을 삼천이랬나 하고 말입니다. 과거, 미래 현재를 한데 포함한 것을 삼천이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삼심이라고도 하죠. 그러나 요거는 한 개체만 보는 견해에서 삼심이라고 하는 것이지 전체를 본다면 ‘삼천’ 이라고 하죠. 이것을 삼세간이라고 하는데, 그 삼세간이 어떻게 돼서 일심으로 돌아가느냐는 얘깁니다. 우리가 살면서 지금 현실에서 돌아가고 있는 그 자체가 바로 삼세간에서 돌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이렇게 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 이 자체 내에 하세계, 중세계, 상세계가 엄연히 있는 것입니다. 이 삼세계가 여기 우리가 지금 사는데 있다는 거죠. 그래서 삼세간이라는 그 자체가 있다면, ‘삼천’ 그냥 하나가 됩니다. 한마음이 되는 거죠. 예를 들어서 한마음을 ‘천’ 이라고 합니다. 또 ‘대천’ 이럽니다, 대천! ‘삼천대천’ 이러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 한마음과 저 외부의 한마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우주간, 대천세계와 더불어 ‘삼천’ 하는 것이, 삼천은 벌써 돌아가고, 삼천대천 하고 포함된 겁니다, 이게. ‘삼천’ 하면, 삼천이라고 한 말은 금방 과거로 돌아가고 과거에서 현실로, 그냥 대천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일심이 천심이요, 천심이 일심이라. 내가 아는 마음이 천심으로 돌아간다. 남이 아무리 모른다 하더라도 내가 아는 마음이 천체와 다 같이 돌아가니 이건 무슨 까닭인가. 여러분이 죽어 보지 않았으니까 죽은 세상을 모르는 거지, 그리고 또 우리가 그 모든 업식에 의해서, 즉 남의 다리를 긁어가면서 살거든요. 허허허. 그런 경우가 많죠. 남이 이럭하면 나도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흔들리면서 나도 저렇게 흔들리고, 바람이 이쪽으로 불면 나도 이쪽으로 가야된다고 하는데 이렇게 가야 된다 안 된다 하는 말도 없이 그냥 천연적으로 따라 가게 돼 있습니다. 그거는 자기 중심이 없이 그냥 남의 다리 긁어 주면서 가는 거죠. 자기 다리를 시원하게 긁지 못하고 그냥 따라가는 거죠. 그러면 ‘삼천대천’ 이럴 때, 삼심이 일심이면 그 대천 지금 현실의 삼천이 둘이 아닌 까닭에 내 한마음에 응집이 되고 한마음에 정심(定心)이 된다 이거예요. 그래서 오분향을 얘기할 때에 ‘누구든지 함이 없이 해라’ 하는 뜻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무주상이다’ 하니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주는 것이 무주상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착이 없이 주되, 아주 똑 바로, 똑부러지게 해 놓는 것이 바로 무주상이자 함이 없이 하는 것입니다. 똑똑히 하지 말라고 한 게 아닙니다. 부처님이 그렇게 어리석지 않고, 깨달은 분이 그렇게 어리석지 않아요. ‘함이 없이 무주상 보시 하라’ 이런다고 해서 무의미하게 그냥 그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마음에---. 예를 들어서, 나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예전에 이런 예가 있었죠. 70년경에, 처음에 이 집을 지었을 때는, 저기 조그만 가겟집 하나뿐이었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공동묘지 였었구요. 그런데 도둑이 들어 왔습니다. 그날 저녁에 공양주한테 이렇게 말을 했죠. “오늘 도선생이 오실 테니까 저 문 좀 단속해라.” 이러곤 무심코 그냥 잤습니다. 그런데 변소 문에 이렇게 망을 쳐 놓은 것을 뜯고선 그리로 들어왔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야 사람이나 몇 있었습니까? 그런데 지하실에 들어가서 있으면서 밤중이 되면은 할 양으로 숨어 있는 겁니다. 집어갈 거 뭐 있습니까? 그런데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거 사람들 놀라겠고 큰일 났단 말이에요. 그래서 불을 켜고 그 지하실 문 앞으로 갔습니다. 가서 “빨리 나와.” 문을 열어 놓고 말입니다. “빨리 나와. 아, 빚을 준 게 있으면 대낮에 받으러 오지, 어찌 이렇게 밤중에 와서 남 놀라게끔 만들어?” 이러면서 나오라고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픽픽 웃는 소리가 나요. 허허허. 웃는 소리가 나더니 아주 젊은 애가 신발을 벗어 들고나와요. 그래서 이렇게 말했어요. “부처님 법에 이런 게 있다. 네가 뭐를 훔치러 왔어도, 가져가게 돼서 가져갔으면 바로 빛 받을 게 있어서 네가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빛을 받으려 왔으면, 떳떳하게 앞문으로 들어와서 ‘나 빛 받으러 왔소.’ 하든가, 그렇지 못하다면‘스님, 나 이런 게 힘드니까 쌀 좀 주십시오, 돈 좀 주시오.’ 하든지 아, 그러면 내가 안 줄 사람이 아니야, 있으면 다 털어 줄 사람이야. 빚 갚는데 무슨 이유가 붙겠어?” 이랬어요. 그랬더니 날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한참이나 있더니 그래요.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는데 병이 나서, 상당히 급하게 생겨서---, 그런데 내가 지금 여기 오는 게 두 번째입니다.” 이러는 거예요. 하하하. “아, 더더욱 그렇지, 그렇다면은.” 그러면서 좀 줘서 보냈어요. 지금으로 따진다면 한 삼백 정도 되게요. 왜 그랬느냐 하면 도둑이라고 해서 다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그것은 환경에 따라서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거죠. 어리석으니까 저지르는 거지, 사람 본래 성품이 나빠서 그런 거는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모두가, 강도든 아니든, 도둑이든 아니든, 선하게 사는 사람이든 간에 본성은 다 평등하죠. 그런데 살다 보니까 환경에 쪼달리고, 바람이 쓸리고, 이러다 보니까 남의 다리를 긁게 되고 그것도 시원치 않으니까 훔치러도 다니고 그러는 거죠. 그런데 제가 말하는 거 이해가 되십니까? 말은 모자라게 하더라도 듣는 건 잘 들어 주십시오. 그래서 오분향을 이렇게 가르칠 때에 오계도 거기에 포함 돼 들어가니까, 잘났든 못났든 모두가 자기가 있으니까 상대가 있고, 사느라고 애쓰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아니, 자기가 없는데 뭐가 있겠습니까? 아, 생각해 보세요. 아주 없죠? 따따부따할 것도 없고 말할 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오분향은 처음에 공부할 때에 이렇게 공부를 해라 하는 것을 말한 것이죠. 부처님께서 당시에 가르칠 땐 그렇게 가르쳤단 얘깁니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을 모두 남의 탓으로 생각하지 말고 내 탓으로 생각해라. 내가 잘했든지 못했든지, 잘한 거를 못했다고 하더라도 공부하는 마음으로써 내 탓으로 생각해라.” 이런 거죠. 왜냐하면 내가 있기 때문에 부딪치는 거지 내가 없다면 어떻게 부딪칠 수 있겠느냐는 얘기죠. 안 그렇습니까? 허공에다 돌을 친다고 소리가 나는 거 보셨어요? 돌이 마주치니까 소리가 나죠. 그러니까 내가 있는 탓을 해라 이거예요. 내가 있는 탓으로 인해서 상대에 부딪칠 수도 있고 상대로 인해서 누가 되게 할 수도 있고 그러니 첫째, 모든 것을 누가 되게 하지 말고, 은사에게 누가 되게 하지 말고, 자기에게 누가 되게 해서는 안 되고, 불가에 누가 되게 해서는 안 되고, 그러면서 안과 바깥의 모든 걸 다 모아라 이거야. 모으는 작업을 해라. 정(定)에다 놓는 작업을 해라. 이게 계향이에요. 정향이라 하는 것은 한군데 모아서 익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익어진 것을. 아, 이제는 내 주장자가 엄연히, 딱 심봉이 박혀 있으니까 어딜 가도 흔들리지 않는다 하게끔 되었을 때 그걸 정이라고 합니다, 정향! 완전히 심봉이 박혀서 흔들리지 않을 때, 이제는 그 정향 속에서 들이고 내는 살림살이가 여여하게 들이고 내어진다 이겁니다. 그러는 동시에 그게 여여하게 돌아가게 되자 지혜가 생긴단 말입니다. 그러면 지혜로써 여여하게 하니까 자기 말이 법이 돼서 그대로, 들이고 내는 것이 모두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고 또 꺼내도 줄지 않는 겁니다. 이렇게 정향에서 들이고 내는데 완전히 손색이 없다면 그때는 지혜가 생기기 때문에 그래서 혜향이라고 그랬습니다, 혜향! 지혜 혜자 혜향. 이거는 제가 이렇게 공부를 해 오면서 느끼고 배운 거를 지금 얘기 하는 겁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분향을 처음에 들었을 때에 ‘아하, 이런 거로구나.’ 하구요. 하하하. 그랬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까 부처는 많고도 많더군요. 전부 그냥, 전부 부처예요. ‘전부 주인공이십니다.’ 이런 겁니다, 지금. 그래서 지혜로워지면 그때는 들여도 두드러지지 않아요. 그걸 자세히 얘기할까요? 심령을 천 개, 만 개를 넣어도 두드러짐이 없죠? 그죠? 이 허공에 꽉 찬 마음을 다 꺼낸대도 줄지 않겠죠? 그러니까 이건 평등공법에 의해서 나오는 법 아닌 법입니다.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고 꺼내도 줄지 않는다 하는 혜향이 있습니다. 그 혜향이 이제 완성되면, 이게 꺼내도 줄지 않고 또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게끔 완성된다면 마음이 다 익어간다는 얘깁니다. 그런다면 그 속에 지금 오계로 받은 여러 가지가 다 포함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익어 가면, 그다음부터 이제 혜탈향이 나옵니다. 그땐 뭐냐 하면 바깥에 다니면서 보거나 듣거나, 말하거나 같이 와서 얘기를 하거나 뭐, 하다못해 소가 도살장으로 끌려가거나, 이런 것들 전체를 그저 보는 대로 무명을 거둬 주게끔 돼 있습니다. 하나하나 거둬 주는 게 아니라 일체 선명하게 살아가면서 지혜로워져서 그 무명에서 벗어나라, 그리고 진화를 해라, 이렇게 진화를 시키는 겁니다. 즉 말하자면 초등학교 다니는 거를 중학교로 올리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걸 첨단에다 올려놓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냥 차례차례 이렇게 올라가게끔 무명 전부를 벗겨 주는 것입니다. 묶여진 마음을 다 헤쳐 주는 것입니다. 무명에 얽매여서 헤어나지 못하는 생명들을 다 그냥 풀어 주는 거죠. 그거를 풀어 주게 되면 자기가 한 생을 살아가면서 점프하게 되거든요. 진화를 해서 형성되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그 모습을 가지고 몇 천 년 그냥 가도,, 그 모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니까요. 이게 말로만이 아니라요, 엄청난 일입니다, 이게. 이거 말로는 안 되는 얘기죠. 그래서 ‘혜탈향’ 이럽니다. ‘더불어 같이 묶인 무명을 풀어 준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내 아픔처럼 생각하고 풀어 준다.’ 이런 걸 말하는 겁니다. ‘혜탈지견향’, 이것은 아주 간편하게 이렇게 얘기 합니다. 여러 가지 얘길 하면 또 복잡해서 머리에 들어가지도 않을 테니까요. ‘혜탈지견향’ 하면 미생물에서부터 모든 게 내 생명 아닌 게 없고, 내 몸 아닌 게 없고, 내 아픔 아닌 게 없고, 그래서 모든 것이 내 도량 아님이 없으므로 일체 부처하고도 둘 아니고, 일체 삼라만상 대천세계가 전부 하나로 묶어져서 펴지고, 펼쳐지고, 묶여지고, 하나로 되고, 수만으로도 되고 이렇게 작용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어야만이 구경 도리천에 이르러서 자유스럽게 과거, 현재, 미래는 물론이거니와 우주 삼천대천세계를 한 번에, 한 생각에, 찰나에 돌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같이 감을 할 수 있고, 통할 수 있다 이런 소립니다. 또 같이 할 수 있고, 내가 되지 않은 게 없고, 지장, 아촉, 아미타, 미륵, 칠서, 관세음, 지신, 용신 모든 것이 내가 아니 됨이 없을 때 해탕지견향입니다. 인간이라고 부르는 그 이름이 이름이 아니라 그 이름 하나 얻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죠. 그래서 이름 아닌 이름이라고 그랬습니다. 이름 아닌 이름! 그래서 한울에서 인정을 받아야 된다 하는 것은, 도리천을 큰 바다라고 하면 이 바다 가운데서 그냥 인정을 한다, 인가를 한다 이런 거죠. 그냥 잔등이에, 이 몸 아닌 몸 잔등에 그냥 처-억(주먹으로 손바닥에 도장을 찍듯이 하시며) 인가를 받죠. 이렇게 인가 받은 도장이 바로 법륜 마크나 만(卍)자 이런 것입니다. 그게 한만히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인가 받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인간 되기 위해서, 그리고 인간을 넘어서기 위해서 하는 거죠. 이 중세계에만 있는 게 아니라상세계에도 엄연히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믿어야 됩니다. 중세계에서 사람이 된다면, 바로 그러한 공부가 돼서 진짜로 인가를 받을 수가 있다면, 벗어나는 거죠. 이 세상에서 그대로 벗어나는 거죠. 그래서 자기가 옷을 벗으려면 벗고 말려면 말고, 금방 여기다 못을 벗어놓고선 그냥 가서 또 자유스럽게 이 옷을 입을래도 입고, 저 옷을 입을래도 입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믿지지 않으시겠죠? 그렇게 해 보시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전에도 제가 얘기했죠? 5-25때 말입니다. 접시비행기라는 말 들어 보셨죠? 많이 보시기도 했을 거예요. 그게 접시 모양뿐만 아니라 타원형으로 생긴 것도 있고 뭐, 원형으로 생긴 것도 있고, 여러 가지 있죠. 길쭉하게 고구마처럼 생긴 것도 있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움죽거리는지 보셨습니까? 난 그때 나이가 어렸진만 말입니다. 한 스물서넛 이렇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게 그대로 있는 게 아니라 말입니다. 하나기 이렇게 떴는데 그 하나에서 줄을 지어서 나와요. 지금이 아니라 한 15년 전, 20년 전 얘기죠. 그때 그것을 보면서 ‘아하! 이건 마음의 자유로구나. 모습을 이걸로도 하고 저걸로도 할 수 있으니 부처님께서 천백억화신으로 화해서 나오게 되면 천차만별로 모습이 돼서 을신으로 돼 준다고 하신 뜻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러분이 그것을 보았다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부처님께서 한생각에보살들을 헤아릴 수 없이 낳아서, 원하는 중생들에게 모두 하나로 응신이 돼 주신다고 그러셨죠. 또 법당에 부처님을 모셔 놓으면 한쪽에는 문수보살, 한쪽에는 보현보살 이렇게 해 놓습니다. 그러데 그게 바로 여러분도 가지고 있는 거거든요. 가만히 있으면 부처고, 한생각을 냈다 하면 법신이거든요. 그리고 생각을 했으면 움죽거리게 되거든요. 그것이 보현이 되기 이전에 한찰나에 화신으로 화해서 보현이 된다는 얘기죠. 그러니끼 이 삼신이 바로 한마음이란말입니다. 여러분이 살아나가면서 밖에서 나오고 안에서 일어나고 하는 모든 것을 내가 어떻게 말로 다합니까? 그,러니까 남이 해 주는 게 없어요. 남이 대신 살아주면서 대치를 합니까, 어떡합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이 살고 있는 거 아닙니까? 누가 아무리 친절 하다고 그러더라도 똥 누는 거 대신 눠 줄 수 없고, 아픈 것도 그렇고, 자는 것도 그렇고 대신해 줄 놈이 없어요. 그러니까 자기가 애틋하고, 자기가 앵하고, 자기가 괴로운 거를 그냥, ‘거기서 또 나오는구나! 하하. 나 공부시키느라고 참 잘 나온다. 이렇게 괴롭게 핮;l 말어. 내일은 생각지도 않아. 그저 오늘 모든 걸---, 너를 믿으니까, 다 네 몸이니까, 그리고 네가 끌고 다니니까, 네가 형성시켰으니까.’하고 모든 걸 거기다가 입력해서 믿고 놓는 거죠. 그런데 대치를 해서바꿔 놔야만이 바꿔져서 나오지, ‘너 할 대로 해라.’ 하고 그냥 놓으면 아무것도 입력 되는 게 없어요. ‘너 할 대로 해라’ 그것만 입력이 되는거죠. 음식을 하더라도 양념을 제대로 들어가고 간이 맞아야 되죠. 간이 맞지 않으면 덤덤하고 맞이 없죠, 똑같은 거라도. 그래서 사람들이 태어나도 간이 맞게 태어나야 된다 이런 거죠. 인생이 간이 맞게 태어나면 간이 맞게 살거든요. 넘치지도 않고 줄지도 않고 말입니다. 난 그래서요, 옷 한 가지가 더 들어오면 거북해요. 거북한 것도 사실 알고 보면 그것도 착이죠. 허나 번뇌가 바로 부처님 법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나가는 데 번뇌 아닌 것이 하나나 있습니까? 생각하는 거, 잘한다 못한다 하는 것도 전부가 번뇌입니다. 번뇌라고 이름했기 때문에 번뇌지, 그것이 도를 이루어 나가는 도법에 속하는거죠. 그러니까 그대로 그 도리를 알아서만 한다면 여여하게, 그냥 참 가지런히 살수 있다는 얘기죠. 그리고 우리가 지금 중세계에서 한번 이런 공부를 해서 공부에 종지부를 찍는다면 그냥 세세생생입니다. 그래서 ‘한 생 좀 어려우면 어떻고 한 생 좀 고달프면 어떠냐.’ 하는 거죠. 어저께도 합창단 후원회에서 참 많이 도와주시고, 그런 계기를 마련해 주신 거기에 대해 ‘참, 고맙구나.’하면서 생각한 겁니다. ‘아하, 좀 고달프면 어떠냐, 더불어 같이 고닲펐지 여러분만 고달프라고 한 거는 아니짆느냐.’ 자나깨나 나도 여러분 못지 않게 하고 있어요. 편안하게 사는 사람 아닙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릴만큼 말입니다. 그건 눈물이 아니라 뼛속에서는 피가 흐를 겁니다, 아마. 그러면서 그것을 즐겁게 생각합시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부처가 된다 안 된다를 떠나서 사람다웁게 사는 것이 근본이 아니겠느냐는 얘기죠. 그럼으로써 우리가 사람을 또 리드해 나갈 수 있는 상세계의 자유인이 된다면, 마음으로써 마음껏 건질수 있거, 마음껏 할 수 있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 오분향만 잘 알면 오계를 받은 뜻이 그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오분향을 알면 오계는 다 그냥 저절로 되는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