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동 (松江洞)은 백제때는 우술군, 신라때는 비풍군, 고려때는 공주부에 속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공주군 구즉며에 속해서 소나무가 무성하므로 송강(松崗)이라 하였는데, 조선시대 말기 고종 32년(1895년)에 회덕군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청룡리, 와룡리, 주성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송강리(松江里)라 하고 대전군 구즉면에 편입되었다. 1935년 11월 1일 대전부 대덕군,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 유성구, 1995년 1월 1일 대전광역시 유성구 송강동이 되었다. 보덕봉 동쪽 일성사로 넘어가는 산길의 입구에서 구석기시대의 유적지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송강동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부터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산지와 들과 강물이 아름다워 절승지로 꼽았으며, 서쪽 산악지대에는 유별나게 소나무가 무성해서 한낮에도 산에 들어가면 어두침침하여 산짐승도 많았었다. 특히 노루, 꿩이 많아서 매년 조상에게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지내는 12월달에는 전국에서 포수들이 몰려드는 사냥터로도 유명했던 곳이다.
옛날 지금의 송강동에 늙은 영감이 있었는데, 부자이나 욕심 많은 구두쇠이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쌀 한줌 꾸어주지 않고 스님에게 시주 한번 하지 않아 사람들은 이 영감을 딱정쇠영감이라 불렀다.
어느날 조 부자가 광에 가득 있는 볏섬을 둘러보고 흐믓한 기분에 젖어 있는데, 대문밖에서 목탁소리가 들리자 어느 중이 동냥왔거니 하면서 육간대청에 앉아 긴 장죽을 빨고 있었다. 그의 인색한 성품이 중에게 시주할 사람이 아니나, 오늘따라 유난히 목탁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며느리를 불러 "밖에 뉘집 개가 온모양이다."라고 말 하였다. 영감은 "나가서 줄 것이 없다고 돌려 보내라"고 하니, 며느리는 "거지가 아닌 스님입니다."라고 하였다. 영감은 "스님은 무슨 스님이냐. 까까중이라 까마귀처럼 시끄럽다."며, "시주할 것 없으니 썩 물러가라"고 하였다.
며느리는 시주 얻으러 온 스님을 그냥보낼 수 없어 시아버지 몰래 쌀을 한되주자. "이집은 모두 나쁜 사람만 있는줄 알았더니 고마운 분도 있다"고 하며 서서히 동구밖으로 사라졌다. 다음날 영감이 조밭에서 조를 열심히 가꾸고 있는데, 마침 중이 지나며 하는 말이 "조가 크거든 조이삭을 잘라두면 천 석의 조가 나올 것이다."고 하였다 이말을 들은 영감은 조가 자랐을 때 조이삭을 모조리 잘랐다. 잠시후 갑자기 하늘에서 먹구름이 밀려오고 천둥이 치자 어짜할바 모르던 영감은 순간 번쩍하는 동시에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후에 그의 아들이 만들었는지 지금도 송강동 입구의 밭 가운데는 둥그런 묘가 있어서 길다란 밭은 둘로 나뉘었고, 사람들은 이묘를 조천석의 묘라 부르게 되었다.
유성문화원-유성의 역사 중에서
첫댓글 조천석이 사람 이름이 아니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