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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28일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절 후 열 한 번째 주일)
우리의 안과 밖
신6:4~9/마가14:3~9
히브리 설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모세가 사막에서 목동을 만났습니다. 모세는 그 목동과 하루를 함께 지내며 암소 젖을 짜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해가 지가 그 목동은 제일 좋은 우유를 나무 그릇에 담아 가지고 저만치에 있는 평평한 돌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본 모세가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목동은 하나님께 우유를 드리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의아해진 모세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목동은 “저는 항상 제일 좋은 우유를 가져다가 하나님께 봉헌한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단순한 신앙을 지닌 목동보다 훨씬 깨어있던 모세는 “그럼, 그 우유를 하나님께서 잡수신단 말입니까?”라고 묻자 목동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모세는 불쌍한 목동을 깨우쳐 주고 싶어서 하나님은 순수한 신이기 때문에 무엇을 잡수시고 그러지는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그 목동은 그분이 자신이 바친 우유를 잡수신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에 잠깐 동안 논쟁을 하다가 결국 모세가 그 목동에게 숲 속에 숨어서 정말 하나님이 오셔서 우유를 잡수시는지 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모세는 사막으로 기도하러 가버리고 목동은 남아서 숨어 있었습니다. 밤이 되어 사방이 어둡고 달빛만이 밝은데 작은 여우가 나타나서 좌우를 살펴본 후에 곧장 우유 있는 데로 가서 급히 핥아 먹고는 사막으로 다시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모세는 목동이 침울해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모세가 묻자 목동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말이 맞았습니다. 하나님은 순수한 신이기 때문에 제 우유를 드시지 않았습니다.” 목동의 실망한 목소리에 놀란 모세가 말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전보다 더 많이 알게 되셨으니 기뻐해야지요.” 그러자 목동은 대답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잃어 버렸습니다.”
목동이 슬퍼하는 이유를 알아들은 모세가 사막으로 들어가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야, 네가 틀렸다. 내가 순수한 신인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그 목동이 내게 바치는 우유를 그의 사랑의 표시로 항상 고맙게 받아 들였다. 그러나 순수한 신이니까 우유가 소용없기에 우유를 아주 좋아하는 여우와 그걸 함께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누군가 꾸민 이야기이긴 하겠지만 많은 뜻을 품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 닿는 순수한 마음이 무엇인지,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며, 진정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것이 무엇인지 하는 것들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 여기 살림교회에서 예배드리는데 이 중에 누가 등 떠밀어서 억지로 나온 분, 어떤 의무감을 갖고 나온 분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또 우리 교회를 친교의 장 정도로 알고 교회에 출석하시는 분들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잘 믿어보고 싶고, 믿음을 통해서 내 삶을 더 견고하게 하고 싶고, 사랑을 배워 내 삶을 더 넓게 크게 확장하고 싶고, 예수님이 발견했던 참된 희망을 나도 경험하고 싶은 마음들이 있어서 우리 교회에 다니면서 예배도 드리고 여러 가지 기도회나 또 다른 프로그램에 참석하고 있는 줄 압니다. 기본적인 마음은 잘 믿어보고 싶다,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경험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예, 좋은 마음입니다. 이것은 한 두 마디 은혜로운 설교나 한 두 번의 어떤 종교적인 경험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신앙의 성장이란 나 자신의 전인적인 성장과 같이 가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길은 우리는 한 걸음 한걸음 우리가 경험해야 할 것들 다 경험하면서, 그 경험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면서 또 깨달아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는 이런 긴 여정 가운데서 어쩌면 앞에서 이야기한 목동과 같이, 우리가 어렸을 때 가졌던 순진한 신앙을 잃어버리고 그럼 이제는 뭘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마음이 되신 분도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또 처음 교회에 나오는 분들은 다른 교회처럼 뜨겁게 기도하고 뜨겁게 찬양하면서 뭔가 확실한 것을 보여주지는 않고 늘 아리송한 이야기만 하고 있다고 생각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한 젊은 지성인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신은 모태로부터 신앙생활을 했었고 그것도 정말 열심히 순수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했는데 자라면서 자신의 지성이 발달하고 많은 인문학 공부와 사회학, 또 과학을 공부하면서 자신이 어릴 때 가졌던 순수하게 만났던 그 하나님을 잃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도 없고 하나님에 대한 간절한 사랑도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또 한 교우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침묵으로 기도하면서 자신의 중심,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는 것은 좋은데, 자신이 평소에 하던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혼란스럽다는 것입니다. 마치 기도의 대상을 잃어버린 느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굳건하게 서기 위해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유치한 것들을 뒤로 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을 버리면서 나가는 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하면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리는 과오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외적이고 형식적인 행위들은 늘 성찰해야 하겠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사랑하기 위해서이기 하나님을 외면하기 위해서는 아닙니다.
저는 지난 8월 초에 트라피스트 수녀원에 다녀오면서 받은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곳 수녀원에서는 하루 일곱 번씩 기도하기 위해 성당에 모이지만 수녀님들을 자세히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일반인들과는 구별되어 성당 앞자리에 따로 그분들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고 일반인들과는 격자가 놓여 있어서 멀리서 수녀님들이 성무일도(시편으로 기도하는 것) 하는 것을 보면서 함께 기도를 드릴 수는 있는데 제가 눈이 나빠서 그런지 그분들의 얼굴 표정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성무일도가 마치면 봉쇄 구역으로 바로 들어가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그분들을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 중에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분들이 성당을 들어왔다 할 때마다 성당전면을 향해 손을 모으고 머리를 숙여 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공식적으로 세어본 바로는 하루에 16번, 성당에 들어왔다 나갈 때마다, 또 성경봉독을 하거나 순서를 맡아서 종을 치거나, 영성체를 받기 위해 나가거나 할 때, 어쨌든 성당에서 움직일 때 마다 성당 전면을 향해 손을 모으고 머리를 숙이며 절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태도들이 그저 건성으로, 그리고 형식적으로 하고 있다는 느낌을 전혀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혀 절을 하는 모습은 정말 내적인 마음이 외적으로 그대로 표현되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마음에 감동을 받은 것은 그렇게나 많이, 일상적으로 하는 절인데, 정말 흐트러짐 없이 늘 마음을 모아 절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느낀 것이 아, 이들의 내적인 태도와 외적인 표현이 참 동일하구나,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면서 살고 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절 하나 하는 것으로 그들의 삶을 어느 정도 알겠더라구요.
우리는 소위 종교인들이 갖는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행태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늘 주여 주여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부터, 아멘 할렐루야를 남발하는 사람, 복음서의 바리새인들처럼 과장된 기도를 하는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의 모습은 그렇게 다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모습에 대한 반발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내적인 태도는 그대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우리는 너무 가볍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나? 정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을 흠숭하며, 그분을 경배하고, 그분을 믿고 있는가? 과연 나는 하나님을 대하는 나의 내적인 태도는 어떠한가? 괜히 우리가 머리가 굵어져서 우리의 마음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오늘 우리가 읽은 신약의 말씀은 베다니의 시몬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실 때 일어난 한 사건입니다. 한 여인이 매우 값진 순수한 나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었던 것입니다. 몇몇 사람들은 화를 내면서 자기들끼리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향유를 이렇게 허비하는가? 이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서,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 그러면서 이 여인을 나무랐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그 사람들은 제자들이라고 되어 있고 요한복음에는 가룟 유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매우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위해 뭔가를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의 그동안의 행적으로 비추어 봐도 이런 낭비는 예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마 자신들이 이 여인을 나무라지 않으면 예수께서라도 이 여인의 그릇된 행동을 지적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여인의 행위를 오롯이 받아들입니다. 이런 모습은 마치 하나님께서 목동의 우유를 그대로 받아들였던 히브리 설화를 기억하게 합니다. “가만 두어라. 왜 그를 괴롭히느냐?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 그는 내게 아름다운 일을 했다.... 이 여인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오히려 이 여인이 한 일이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 이 여인의 밖으로 드러난 태도는 그녀의 내적 자세의 외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아마도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길을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전에 안토니 불름 대주교가 했다는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 중 단지 몇 분만을 그분을 생각하면서 그 시간에 그분이 우리에게 현존해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하지만, 우리는 그 나머지 시간에 그분이 우리의 문을 두드리고 계실 때 우리는 “너무 바쁩니다”라고 대답하든지 아니면 그분의 두드림조차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그분의 부재에 대해 불평할 권리가 없다. 그분이 안계실 때보다 우리가 외면할 때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없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안토니 불름의 말 그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 사랑이 우리에게 다가온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해서 얼마나 예민해 지던가요? 그 사람의 말 한마디 뜻 없는 한 동작도 잊어버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늘 우리에게 감지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동사입니다. 사랑은 외적인 표현으로 드러날 때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비결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외적으로 표현해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으로 모아 하는 기도요 말씀 읽기요 예배입니다.
여러분 그분을 생각하면서 정성 드려 기도 드려봅시다. 그러기 위해 그분을 위해 시간을 내고 가장 적당한 장소를 찾고 마음을 다해 기도해 봅시다. 짜투리 시간만 사용해서 그분을 만나려고 하지 말고, 나 편할 때는 나몰라라 하다가 급하면 왜 나를 외면하느냐고 불평하지 말고, 평소에 그분을 위해 시간을 내고, 가장 적당한 장소를 찾고, 마음과 정성을 드려봅시다.
여러분,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정말 마음과 정성을 드려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정말 예배드리는 시간을 중요한 시간으로 생각하고 우선적으로 시간을 내며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애쓰고 있습니까?
여러분께서 드리는 헌금은 어떻습니까? 정말 과부의 봉헌과 같은 정성으로 드리고 있습니까?
오늘 신명기에 아주 간곡한 말씀이 들립니다. 이스라엘은 들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내가 오늘날 당신들에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십시오. 또 당신들은 그것을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으십시오.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 붙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