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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지리
곽지리 리명 유래는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900여년 전 설촌한 현 곽지상동이 주된 마을이었는데 마을을 이루고 있는 지형은 서북방향이 바다가 보이는 지형이며 지형을 보완하기 위하여 높고 긴 성(長城)을 쌓았고, 마을 안 여러 곳에 잣(잔돌로 쌓아 놓은 곳)들이 있어 곽기리(郭岐里)라 하였다가 곽지리(郭支里)로 통용되었다고 한다. 서기 1300년 고려 충렬왕 26년에 곽지현(郭支縣)을 곽지리(郭支里)로 개칭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마을약사
설촌유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유적의 분포범위가 곽금초등학교 일원 서쪽부터 금성일원 남동쪽으로 0.5km까지의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있는데 패총지대와 유물산포지가 섞여 있다. 이 지역은 해안과의 거리가 0.5km 정도에 불과하고 해발 30∼40m의 낮은 지대로써 생활에 용이한 입지조건 때문에 일찍부터 취락이 형성되었고, 그래서 제주도내에서 가장 넓은 유적지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맴돌
패총(貝塚)은 1973년 송석범씨가 처음 발견하였고 그후 1979년, 1984년, 1985년, 1989년 각각 다른 지점에서 제주대학교 박물관 발굴조사단이 조사한 바 있다.
1979년 이백규가 곽지리 2070번지와 2091번지 두 지점을 발굴하였는데 그 중 2091번지에서 4개의 층위를 확인하고 청동기시대말에서 철기시대에 이르는 대량의 유물을 발굴하였다.
1984년 이청규가 발굴한 곽지리 2091번지 역시 층위는 4개 층위로 구분되며 출토 유물로 보아 1979년에 발굴한 연대보다 늦은 삼국시대 이후의 것으로 파악고 있다.
1985년 곽지신용협동조합 건물 신축공사장에서 공사 중에 패총과 석곽묘를 발견하였다. 여기 패총에서 다량의 토기유물과 조개 동물의 뼈가 수습되었는데 토기는 1984년 발굴지구와 비슷하다.
1989년 곽지∼봉성간 도로공사 시 편입도로 양쪽 부분을 발굴 조사한 결과 삼국시대의 원형토기가 대량 발굴되었다.
(제주대학교 박물관 유적조사 보고서 제1집 곽지패총 발굴 조사에 따라 1979년과 1984년 2회 발굴 조사에 의해 곽지패총은 적어도 청동기 시대 후기에서 삼국 시대 초기에 이르는 시기에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게 되었고, 이 패총의 조사결과는 장래 제주도 선주민 문화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의 토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마을사람들의 쉼터 - 팽나무(폭낭) 정자
진모살 바닷가 - 지금은 해수욕장이 되었다.
이상과 같은 증거로 보아 곽지리는 약 2,000년 전에 설촌되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설촌 이후 사람들은 해안가의 남당물, 석경개, 진모살, 모물일원에 산재하여 거주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 지역은 서기 1007년 해일 피해로 대부분 매몰되었으며 여기에 살던 주민들이 배드락밭, 송세미, 셋오름길, 엉밭, 도가비지붕, 곽남(郭南)밭 일원으로 거주지를 옮겨 살았으며 지금으로부터 약 900년 전에 상기 일원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자연적으로 곽지 상동, 성로동, 금성상동에 모여 살았으며 일부는 납읍리로 건너 갔다.
마을의 성소 - 하루방 터
곽지리의 마을 형성 초기 성씨로는 문씨로 추정하고 있는데 곽지리에 하르방당이 있었는데 당신(堂神)으로 문씨하르방을 모신 것으로 보아 문씨로 추정되고 있다.
마을의 성소 - 할망당 터
서기 1271년 김통정 장군의 항몽항쟁 당시에 총관부가 군사들을 훈련하기 위한 백문사, 관문고상대, 사장사가 있었으며 지금은 백문밭, 관문밭, 사장밭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서기 1300년 곽지현이 설치되었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곽지리의 제2설촌은 900년 이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눌우시 동산
아득한 옛날 일이었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였다. 당태자는 8년이나 거듭되는 내란과 외환으로 산동성을 피해 다른 곳으로 피난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마마, 큰일이옵니다. 멀쩡하던 하늘이 갑자기 먹구름으로 앞을 가리니 이 일을 어찌 하오리까?"
신하들은 걱정이 태산같았다. 당태자만이라도 무사히 피난을 가야 훗날을 기약할 터인데 그 것마저 물거품이 된다면 아무 희망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할 수 없는 일, 그냥 배를 띄워라. 한시가 급하질 않으냐?" 당태자를 태운 배는 보름동안 바다를 흘러가다 겨우 곽지리 '진모살' 동쪽에서 난파되었다. 그러나 당태자는 허기에 지친 나머지 죽고 말았다. 그러나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사람이 있었다. 다름 아닌 당태자 부인이었다. 당태자 부인만이 겨우 목숨을 건져 진모살을 기어 올라왔으니 그 비참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당태자 부인을 간호하며 슬픔을 달래주었다.
사람들은 당나라 배가 파선당한 곳을 '당파선코지'라 불렀다. 당파선이란 당나라의 배가 부서졌다는 뜻이요, 코지란 뾰족히 드러난 곳을 이름하니 지금도 곽지리 해수욕장 동쪽에는 이 흔적이 남아 있다. 또한 당태자라는 직위는 그 당시 우리나라로서는 감히 입에 담기도 어려울 정도로 높은 지위였기에 비록 배는 부서져 당태자는 죽었어도 그의 무덤만큼은 소홀히 할 수 없다 하여 전포(앞개)에 묻어 '당능'이라 이름을 지어 관리를 했다 한다. 이 事大란 것이 육지에 있는 조정을 넘어 외진 섬나라 동네에서 까지 미쳤으니 실로 대단하다.
그 후 당태자 부인은 낯선 곳 곽지에서 살면서 남편이 묻힌 무덤을 매일 드나들며 슬피 울었다. 그 광경이 너무 가련하고 애를 끓는지라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눈물이 흘러 길을 메웠고 천근만근 무거운 걸음은 자갈을 부셔 모래를 만들었다. 그 부인은 남편이 묻힌 동산을 넘을 때마다 울었다 하여 '늘 울며 다니는 동산'이란 뜻에서 '늘우시동산'이라 불렀다.
이렇게 슬픔에 쌓여 지내던 당태자 부인도 더 이상의 아픔은 참지 못했는지 얼마 못가 그만 죽고 말았다. 그러니 사람들은 그 부인의 길을 조금이라도 편히 가라는 뜻에서 대비인동산 즉 그 부인의 일편단심 높은 절개를 기리는 동산이라 불렀으며 지금도 곽지해수욕장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文筆峰과 塔池
답단이 탑은 곽지리 남쪽 서상동에 위치하였으며 300년 전에 만들어 졌다 한다. 구전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에 스님이 곽지에 시주 받으러 왔는데 시주를 넉넉히 아니 주니 스님이 화가 나서 동네 사람들과 언쟁이 벌어졌다. 스님이 마음이 상하여 심술을 부려 곽지 마을 자방(북쪽)에 있는 문필봉들을 허물고 오방(남쪽)에 있는 답단을 허물어 못을 파면 곽지마을이 앞으로 문인과 무인이 많이 배출된다고 말을 하고 스님이 사라졌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문필봉과 오방탑을 허물어 못을 파 만드니 이후부터 곽지에는 문인과 무인이 배출이 아니 된다고 한다. 마을 어른들은 문필봉과 답다니를 복원하여야 한다고 하며 문필봉 및 답다니 못 복원을 서둘고 있으며 남아있는 문필봉은 지금도 절경이 아름답다.
답다니 못은 1974년 새마을 사업으로 못을 매립하여 현재 방치되어 있다. 답다니 파괴 당시 전설로는 탑을 전부 파괴하니 탑 속에서 초롱새 두 마리가 날았는데 한 마리는 알세미 못 옆에 앉고 한 마리는 초롱새왓에 앉아 마을 사람들이 수상히 여겨 알세미 못 옆에 만들고 초롱새왓에 탑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다 허물어졌다.
문필봉
열녀 金天德
김천덕은 곽지 사람으로 사비(寺婢)였다. 그의 남편은 곽연근(郭連斤)이었는데 그는 배를 타고 고기를 잡아 연명하고 있었다. 워낙 배를 잘 다루었기에 그의 소문은 삼읍까지 퍼지게 되었다. 그래서 관청에서는 그의 배 다루는 기술을 인정하여 중국에 바칠 진상물을 실어가는 책임자로 임명하게 되었다. 진상물을 옮기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당시에 바다에는 왜놈들의 노략질이 심하던 시절이니 웬만한 베짱이 아니면 배를 타고 머리 나가지 못할 때였다.
"여부 있겠습니까? 하라면 해야조"
곽연근은 자신있게 진상물 배를 타겠다고 했다.
"과연 듣던대로 보통 인물이 아니로군"
관청관리는 그 즉시 곽연근에게 중국에 보내는 진상물을 실어 떠나라고 했다.
잔잔한 바다를 가르며 진상물을 실은 배가 바다 한가운데쯤인 화탈도(化脫島) 부근에 다달았을 때 갑자기 들이닥친 풍랑으로 배는 뒤집히고 곽연근은 죽고 말았다. 김천덕은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흘 낮 사흘 밤을 눈물로 지샜다.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던 김천덕은 이제나저제나 죽은 남편이 혹이나 살아 돌아올 줄 알고 기다렸다. 매년 명절 때는 밥상을 차려놓고 화탈도를 향해 마주 앉아 식사를 했다. 이런 모습을 본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일처럼 슬퍼했다. 그 후 죄를 지어 곽지에 귀양오는 선비마다 김천덕의 미모에 반하여 그를 탐내었으나 김천덕은 말을 듣지 않았다. 오직 죽은 남편만을 지아비로 섬겼다.
한편 명월진의 여수(旅帥)라는 이가 김천덕의 미모를 누구보다 더 탐내고 있었다. 여수는 재물을 앞세워 천덕의 부친 김청(金淸)을 설득하여 첩으로 삼으려 하였다.
"이보게, 자네 한 번 팔자를 고치게. 죽은 사위야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질 않나? 허니 자네 딸을 내게 보내게. 그럼 호강하고 한평생 편히 지낼 게야. 자네도 함께 말일세."
여수는 감언이설로 김청을 속여 허락을 받고 말았다. 그 사실을 안 김천덕은 아무리 부친의 명이지만 거절하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고 말았다. 머리를 깎았지만 마음만은 아직도 죽은 남편이 살아 돌아 올 것이란 믿음에는 변함없었다. 그래서 매일 정한수 떠놓고 바다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김천덕은 예나 다름없이 정한수를 떠놓고 화탈도를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할 참이었다.
"지나가는 나그네요. 목이 마르니 물이나 한 사발 얻어먹읍시다."
어떤 선비가 길을 가다 정한수를 뜨고 가는 김천덕을 발견하고 물을 청했다.
'허 참, 이게 귀신이냐? 사람이냐?'
선비는 혼이 빠졌다. 생전 그렇게 아름다운 절색의 미녀는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자, 여기 있사옵니다"
김천덕은 막 뜬 물을 선비에게 주려다 얼른 물사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길옆에 있는 버드나무 잎사귀를 하나 다서 물위에 띄우고는 고개를 돌려 선비에게 주었다.
"허허, 얼굴은 절세 미녀로다만 마음씨는 고약하고만…"
선비는 김천덕을 나무라며 후후 버드나무 잎을 불며 천천히 물을 마셨다.
"버드나무 잎을 띄운 걸 용서하소서. 그렇게 해야 물을 천천히 마실 것이라 여겨 그랬습니다."
김천덕은 갈증을 느낀 선비가 혹이나 물을 급히 마시다가 체하는 날이면 손도 써보지 못하고 죽을까 염려하여 버드나무 잎을 띄운 것이다.
"그런 연유를 알지 못하는 나야말로 정말 소인이로다. 과연 얼굴에 그 마음씨로다."
선비는 김천덕의 고운 마음씨를 알고는 더욱 욕심이 생겼다.
"자 나와 함께 사는 게 어떤고?"
선비는 김천덕의 손을 잡고 애원했으나 듣는 체도 하지 않고 손을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와 긴 줄에 목을 매고 죽고 말았다. 세상의 모든 남정네들이 하나같이 자기를 탐내니 더 이상 목숨을 부지하는 건 죽은 지아비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후 임제(林悌)라는 문인이 지은 김천덕전(金天德傳)에 다음과 같은 말로 그의 정조를 높이 기렸다.
<천덕은 남쪽 거치른 땅의 하녀일 뿐, 밭에서 김을 매며 규문지범(閨門之範)을 배운바 없으며 방직(紡織)을 업으로 하매 어찌 여훈지규(女訓之規)를 배웠으랴만, 남편을 섬기고 정조를 지킴에 비상한 바가 있으니 가히 어찌 천질(天質)이 순정하여 배움을 더 기다림 없이 능히 성선(性腺)이 있다 아니하리오. 오호라. 세상에 이른 바 남자들은 조금만 이해로 형제와 벗들과 서로 다투고 국정이 문란해진 때와 나라가 위태로운 때에 나라를 파는 자와 어버이를 잊는 자가 얼마이던가? 천덕과 같은 열부효녀가 드므니 슬프도다.>
천덕은 선조 10년(1577) 제주 목사에 의해 열녀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그녀를 기리는 비는 지금도 마을 중심에 있는 어머니회관 앞에 있다. 또한 '천덕의 못' 역시 곽지해수욕장 입구, 신작로 가에 있다.
곽지십경
○ 선인기국 : 부락형이 바둑판 같고 취락형이 바둑돌과 같아 선인이 바둑을 두는 것 같다하여 선인기국형이라 한다.
○ 와우삼태 : 곽지봉이 큰오름, 셋오름, 말젯오름 등 세오름으로 형성되었으며 그 형상이 소가 누운형과 같다하여 와우삼태라 한다.
○ 곽악분화 : 곽지봉의 큰오름과 셋오름사이, 속칭 앞개통에 화산 폭발 시 분화되었 다하여 곽악분화라 한다.
○ 자방문필 : 곽지리의 자방(북쪽)에 문필봉이 있어 자방문필이라 칭한다.
○ 오방탑단 : 곽지리의 오방(남쪽)에 탑이 있던 지명을 지칭하여 오방탑단이라 한다.
○ 석경감수 : 옛적에 태우를 매던 포구옆에서 용출하는 담수(과물)를 석경감수라 한다.
○ 장사악포 : 과거 곽지해수욕장에서 멸치잡이하는 것을 말하며 장사악포라 한다.
○ 치소기암 : 일명 소로기통이라 말하는데 큰 암석으로 형성되었으며 그 암석형이 솔개가 알을 품어 있는 형이라해서 치소기암이라함.
○ 쌍암종립 : 일명 가린돌이라 말하는데 큰 암석 두 개로 용출 형성되어 절경을 이루었다며 쌍암종립이라 한다.
○ 유지유압 : 일명 버들못을 말하는데, 버드나무가 많은 못 주위에 오리가 노는 것을 아름답다하여 유지유압이라 한다.
○ 이각철요 : 남자를 상징하며 양을 뜻하는 지명이라 하여 이각철요라 한다.
○ 오구요철 : 여자를 상징하며 음을 뜻하는 지명이라 하여 오구요철이라한다.
곽지해수욕장
곽지해수욕장의 명물, 과물 노천탕
곽지패총
◈지정번호 : 제주도기념물 제41호
◈지정년월일 : 1990년 5월 30일
◈소 재 지 : 제주시 애월읍 곽지리 2043-1번지외 5필지
곽지패총은 이미 제주도 뿐만 아니라 고고학계에서도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는 유적이다. 이 유적은 先史人이 만들고 사용했던 토기, 석기 등의 일상용품과 먹고 나서 버린 음식물이 차례로 퇴적된 조개더미〔貝塚〕이다. 이 패총은 지표상에 흩어진 유물 분포 범위가 10.000평 이상의 대규모 유적지이다.
1973년 이래 여러 차례의 발굴 조사를 통해 제주상고문화의 변천과정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여 주었다. 밑바닥에서는 초기철기시대(기원전 300∼0)에 해당하는 구멍무늬토기 문화층이 확인되고 있고, 그 윗층으로는 삼국시대의 항아리형 적갈색토기 문화층이 퇴적되어 있다. 다음 층으로 통일신라시대의 깊은 바리형토기문화층과 연속해서 고려·조선시대의 각종 도자기, 질그릇이 포함된 문화층이 확인되고 있다. 이렇게 오랜 시기동안 연속해서 퇴적된 패총 문화층의 확인되고 있다. 이 패총의 중심시기는 제주의 탐라시대(삼국·통일신라)에 해당된다. 토기는 육지부에서 수입한 회색도기로 나누어지며, 이외의 생활유물로 각종 철기류, 수확용기인 전복껍질로 만든 칼, 간돌도끼 등의 인공유물과 조개껍질, 동물뼈 등의 자연유물이 다량으로 확인되고 있다.
유적 가까이의 제주시 삼양동, 용담동, 오라동, 애월읍 광녕리, 귀일리 등에 고인돌이 있어 곽지리유적을 남긴 사람들과 긴밀한 관련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1973년에 처음 발견하여 1979년 12월과 1984년 8월 두 차례에 걸쳐 제주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했다. 상당히 넓은 범위에 걸쳐 있는 대규모 유적으로 드러났는데, 크게 3지구로 나뉜다. 유적의 층위는 단순한 편으로 거의 겉흙층(두께 20~30cm) 아래의 제2층(조가비와 검은 부식토층, 두께 60~80cm)에서 유물이 나왔다. 제3층(흑갈색 부식토층, 두께 30~60cm)과 제4층(황갈색 모래층, 두께 20~40cm)에서는 유물도 많지 않고 두 층 사이에는 시기도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출토유물을 보면 골아가리그릇·구멍무늬그릇·항아리·김해토기 등 질그릇과 그물추·가락바퀴 등 흙제품이 많고 도끼·공이·돌칼·끌·자귀·홈돌·갈돌·갈판·그물추·숫돌 등 석기, 칼자루·송곳·뿔연모 등 뼈뿔 제품과 손칼·끌 등 철제 연모, 그밖에 많은 짐승뼈와 조가비 등 자연유물들이 있어 당시의 풍부한 문화내용을 알려주고 있다. 질그릇은 대체로 두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3층과 4층에서는 주로 골아가리그릇·구멍무늬그릇·덧띠질그릇·검은간그릇·갈색간그릇 등이 있어 청동기시대의 성격을 띤다. 2층에서는 입술이 밖으로 벌어진 항아리와 김해토기가 특징으로, 경상도지역의 철기시대 초기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유적에서 출토된 뼈뿔연모에 대한 분석과 조가비, 짐승뼈 등 자연유물에 대한 분석이 진행되면 유적의 종합된 성격이 더욱 뚜렷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과오름
▲ 애월항에서 바라본 과오름. 600여년전 고려의 좌정승정이었던 김만희는 불사이군의 충절을 안고
당시 애월포를 통해 제주에 유배와 제주 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김만희의 망국의 한 만큼이나 바다와 하늘이 푸른 빛을 더하고 있다.
곽악삼태(郭岳三台)라 불리는 과오름은 3개의 화산체로 이루어진 복합형 화산체로서 주봉을 큰오름, 둘째를 샛오름, 막내를 말젯오름이라 한다. 큰오름은 북서 방향으로 크게 벌어진 말굽형 굼부리(화구)를 이루고 있으며, 소나무와 잡목으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샛오름은 큰오름과는 다른 방향인 남서쪽으로 벌어진 말굽형 화구를 갖고 있는 독립화산체로, 남서사면의 공동묘지를 제외한 전사면이 소나무 숲을 이루고 있다. 말젯오름은 큰오름 화구 안쪽에 위치한 원추형의 화산체이지만 침식이 심해 원래의 형태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변은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 김해김씨 좌정승공파 입도조 김만희를 기리기 위해 과오름 인근에 세운 비석
김해김씨 제주입도조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불사이군'은 고려말과 조선초기의 당대 지식인들이 신봉하던 성리학적 의리 정신의 원칙이었다. 고려말 개혁의 바람은 위화도에서 불기 시작했다. 명나라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압록강 위화도에서 진을 치고 있던 이성계가 군대를 돌려 개경을 함락, 475년의 고려 왕조를 허물어 조선을 건국한 것은 1392년이다. 불사이군의 선비정신으로 새 왕조에 동참하지 않은 당대 지식인들은 일종의 정치적 추방인 유배를 떠나야만 했다. 유배인으로서 제주에 정착해 제주의 성씨를 다채롭게 했던 한천, 김만희, 이미를 두고 제주에 유배된 삼절신이라 일컫는다. 이들은 유배생활 동안 모두 교육에 힘썼다.
△애월읍 곽지리에 정착한 김만희
김해김씨 좌정승공파 입도조 김만희가 제주에 유배된 때는 조선 건국 초기인 1393년이다. 김만희는 고려 공양왕 때 도첨의 좌정승을 지낸 정치인으로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끝에 제주와 인연을 맺게 됐다.
가락국 태조 김수로왕의 51세손인 김만희는 애월포를 통해 제주에 도착, 곽지에 머물렀다. 81세, 고령의 나이에 유배된 김만희는 곽지 기암기슭(곽지암·과오름)에 초가를 지어 은거했다. 은거생활을 했던 김만희는 주경야독을 하며 충효의 길과 사람의 정도를 주위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손자 김예와 함께 유배길에 올랐던 김만희는 11년만에 귀향(토산 -황해도 금천군)하게 된다. 제주에는 손자 김예를 홀로 남겨둔다. 김예는 가정을 꾸려 제주에 정착하기에 이른다. 김해김씨 좌정승공파 종친회는 과오름 기슭에 비를 세워 김만희의 망국의 한을 달래며 사람으로서 살아갈 도리를 교육했던 시대정신을 전하고 있다.
최근 TV로 방영됐던 '거상 김만덕'의 김만덕은 김만희의 15세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