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 영암 소와 관련된 마을을 보니 상서로운 기운찼소...소복(丑福)하니 번성할 지어이다
누워있는 소
물 마시는 소
되새김한 소
소머리가, 구시(구유)가
소 닮은 바위가, 소 발자국이
신축년(辛丑年)의 소, 전국의 소와 관련된 지명 731개나 된다고 한다. 전라남도만 해도 28%인 총204개의 지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으며 전국 최다이다. 그 다음으로 경상남도가 96개, 경상북도가 94개 등으로 집계됐다.
전라남도 도내 시.군별로는 신안군이‘우이도(牛耳島)’를 비롯한 25개로 가장 많다. 이어 영암군에 18개 정도와 장성군에 17개로 파악됐다고 신축년 새해를 맞아 각 언론에서 보도됐다.
소의 관련한 지명으로‘우산(牛山)’이라는 지명이 가장 많으며 고흥군 포두면의 우산마을 등 8곳에서 소의 관련한 지명을 쓰고 있다.
소의 지명에 대한 종류별로 보면 마을이 161개인 74%로 가장 많고 섬이 32개로 16%를 차지하며 고개는 9개로 4%이다.
소가 누워있는 제주 우도(쇠머리오름)
제주 우도(쇠머리)에서 바라보이는 성산봉
제주도 토종 소
소가 누운 형상의‘와우산(臥牛山)’은 서울.부산 외에 전국 곳곳에 있다. 제주의‘우도(牛島.쇠머리오름)’는 소 이름이 들어간 섬의 대표다. 서울의‘우면산(牛眠山)’,‘우이동(牛耳洞)’도 친숙하다. 또한‘쇠소깍.소똥령.소티재.쇠물뿌리’같은 우리말 지명도 정겹다.
소는 예로부터 농사일을 도우면서 부(富)와 재산(財産)을 상징하는 재산목록 1호로 여겼다. 가장 중요한 재산으로 우직하면서도 근 성실한 친근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육십 간지의 38번째인 신축년 소의 해, 신축년은 흰색을 나타내‘흰 소’에 해당된다. 힘과 재산을 의미한 소는 영어로 소를 뜻하는‘cattle’은 자본을 뜻하는‘capital’과 동일한 어원을 갖고 있다. 소를 가축화된 것은 1만1000~8000년 전이다. 소는 하품밖에 버릴 것 없다고 했다. 살아있을 때 소는 달구지와 쟁기를 끌거나 연자방아를 돌리는 동력원으로 쓰인다. 소는 우유도 제공할 정도로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동물이다. 소는 또 죽어서는 고기를 내놓는다. 물론 내장까지 먹을거리로 아낌없이 준다. 또 소가 남긴 뿔과 가죽도 공예품(화각.지갑.가방.모자.신발.혁띠)이나 북.장구 등의 악기와 옷을 만드는데 활용하고 있다.
소는 농경을 본업으로 삼아 온 한민족에게 오랜 옛적부터 전해오는 소의 심성은 우직하고 희생과 성실의 표본이었다. 일생을 농경에 힘쓰다가 끝내 고기마저 바치는 희생정신과 본성은 유순하나 때로는 경발하는 기개가 있으며 느릿느릿 걷는 황소걸음이 만리를 간다하여‘우보만리(牛步萬里)’라고 표현했다. 또한 소는 어떤 동물보다 현실적인 이용도가 높고 동시에 넉넉하고 군자다운 성품을 지냈다. 그로인해 소는 특별한 상징성과 신성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선비들은 소를 통해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삶을 음미하고자 소에게 인간적인 해석을 시도하가나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소의 중요성은 고대로부터 있었으며 현재에 와서도 변화하면서 더 소중히 여겼다. 특히 고대에는 재물과 희생용으로 중시되었으며 농경생활이 시작된 이후에는 농경의 조력자로서의 중요성이 옮겨지고 있다. 한국 문화에 나타난 소의 모습은 고집 세고 어리석은 측면도 있지만 농사신, 부, 풍요, 힘, 근면, 성실, 우직, 충직, 순박, 희생, 제물, 축귀, 길상, 수호신, 벽사, 의로움, 자애, 유유자적의 여유, 한가함과 평화로움 등으로 축약된다.
농경사회 동반자였던 소는 시골의 정겨운 이미지메이커였다. 시인 정지용의 향수에‘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등장동물로 황소가 글을 아름답게 장식해주고 있다.
또한 이중섭 화가가 그린 '황소' 가 군더더기 없이 굵고 역동적으로 선으로 이룬 황소 그림이 어떤 역경에도 헤쳐 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집집마다 가축으로 길렀던 소는 마을의 풍요로움을 바라는 마음으로 산이나 섬 등 지형을 소의 형국으로 표현하며 지명을 붙였다. 소가 누워있는 형상의 뒷산이나 섬을‘우산(牛山), 우도(牛島)’등으로 부르는 지명이 많았다. 또한 소를 닮은 바위 등을 소바위, 소와 관련한 구이통 등을 소와 연관시켜 지형을 구시래 등으로 불렀다.
우리 민족은 소를 아끼고 보살피면 집안과 마을이 번창한다고 믿고 소의 상징성을 중요시 여기며 이 같은 믿음이 지명에 반영됐다. 전남 나주 노안면에 있는‘구축(九丑)’마을은 옛날 선비가 아홉 마리의 소를 기르면서 마을을 발전시켰다는 전설에 따라 이름을 아홉 구(九) 소 축(丑)자를 따‘구축’이라고 했다고 한다.
소의 지명으로 산에서 소의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불러진 전남 무안군 몽탄면의‘우명산(牛鳴山)’이 있으며 전남 영암군 독천면에는 어린 송아지를 매매하던 시장 주변에 하천이 있어 송아지 독(犢), 내 천(川)자를 써‘독천(犢川)’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고려청자의 고장 전남 강진에는‘가우도(駕牛島)’라는 섬이 있는데 강진읍 보은산이 소의 머리에 해당되고 섬 모양이 소의 멍에처럼 생겼다하여 지명이 유래됐다. 가우는 가마나 상여 또는 짐수레를 끄는 소를 뜻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소가 누워 있다고 해서‘와우동’, 소가 내려가는 모양이라 해서‘하우리’, 소꼬리처럼 생겼다고 해서‘우미리’등 이런 소의 관련된 지명이 전국적으로 퍼져있을 정도로 소가 그만큼 의미를 두며 상징성을 갖고 있다.
전남에서 소에 관련된 지명이 신안군 다음으로 많은 영암군은 개천가의 우시장에서 송아지를 팔았던 독천을 비롯해 관내에는 재미나는 전설이 얽히고설켜져있다.
*삼호 서창리 우산정-소 경기
영암군 관내에 소의 관련된 지명을 보면 삼호읍 서창리‘우산정(牛山停)’마을이 있다. 우산정은 서창리 서쪽의 마을로서 우산정(牛山停), 우장리(牛場里), 독우촌(犢禹村), 쇠바탕 등은 소와 관련돼있는데 마을 서쪽 언덕이 길게 뻗어져있으며 소나무가 울창한 곳으로 옛날 단오나 추석 때가 되면 마을 사람들이 소 끌기 등의 소와 관련한 경기를 즐겼고 소를 키울 주변 환경과 여건이 좋아 소를 많이 키워서 소와 관련한 소 우(牛)자를 따‘우산정(牛山亭)’또는‘독우촌(犢牛村)’등으로 마을 이름이 불리어졌다.
*삼호 망산리 망우정-와우형국
삼호읍 망산리 '원망산 마을' 은 망산리의 중심에 위치한 망우정은 마을 앞의 장산을 접하고 있으며 산 밑의 저수지(구터리 방죽)는 많은 아낙네들이 빨래터로 사용 되고 있고 저수지 옆 전망 좋은 곳에 넓은 바위가 있는데 힘센 장수가 이곳에 앉아 장산을 바라보면서 망중유한(忙中有閒)을 즐겼다고 한다. 정산의 앞산이 소처럼 생겼다하여 마을 이름을‘원망산’이라고 일컬었다. 원망산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480년 전 김흥수라는 분이 마을에 처음 입향(入鄕)했으며 그는 군서면 동호리에서 살다 어느 날 영암의 서쪽 지형을 따라오다가 소의 형국처럼 생겨 상서로운 기운이 솟을 만큼 산세가 좋고 농토의 자리 잡기가 좋아서 이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형성되면서 자연스럽게‘망우정(望牛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삼호 서호리 목우촌-소를 기름
삼호읍 서호리 '목우촌(牧牛村) 마을' 은 서호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송죽정의 뒷산인 쇠등산과 뱃머리(송죽정 포구)를 끼고 있으며 사람들은 어업에 종사하면서 쇠등산에 소를 많이 기르고 있다하여 기를 목(牧), 소 우(牛), 마을 촌(村) 자를 써‘목우촌(牧우촌)’이라 불렀다.
*삼호 서호리 쇠동-소 등에 마을조성
삼호읍 서호리 쇠동마을(송죽정)은 마을이 소의 등에다 마을을 조성하였다고‘쇠등’이라고 하였는데 한문 지명으로 바뀌면서 송과 대가 많다는‘송죽정(松竹亭)’으로 바꿔 불리어져지고 있다.
*삼호 용앙리 소등도-소등처럼 생김
삼호읍 용앙리 '앙감 마을' 소등도는 마을 북쪽에 위치한 섬(島)의 지형이 소의 등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소등’이라 했으나 중간에‘소등도(小嶝島)’로 마을 이름이 변하였다.
소는 동물 중에서 사람과 가장 친근한 동물이다. 그 종속적 충섬심이나 근면성, 끈기와 인내심은 가축 중의 으뜸이다. 소가 새끼를 생산하여 주인의 재산을 늘러 주고 죽어서는 고기와 가죽을 남겨준다는 점에서 인간에게는 은혜로운 동물이다. 이러한 다각적인 용도의 동일성과 성격상의 특성은 집안과 관계되는 사람, 집, 재산, 사업체, 특권, 기타 시간과 관계되는 일거리의 상징물로 등장시키고 있다. 옛 사람들이 소는 조상의 동일시한다고 믿었다. 그것은 조상이라는 관념적 존재가 곧 현실에서의 집안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호주나 그와 맞먹는 사람과 동일시하는 걸로 여겼기 때문이다.
소등을 타는 꿈은 길몽이다. ▶소를 타고 신나게 달리는 모습은 추진 중인 일이 모두 크게 성사된다고 한다. ▶소를 타고 길을 가는 것은 현실에서 집안 식구 중의 누군가가 충성스러운 사람의 협조를 얻어 사업을 확장하거나 어떤 권세를 얻을 수 있고 사회적 지위를 얻게 되며 일을 순리대로 잘 진행시킨다고 한다. 소는 어떤 단체일 수도 있고 사업체, 권리 등을 상징한다.
삼호 용앙리 앙감 마을의 소등도는 마을 사람들이 소등에 올라 탔다. 사람이 타고 있기도 하고 소가 짐을 실고 집으로 들어오는 형국이다. 꿈에서는 길몽이다. 풍수지리에서는 복(福)을 불러들이는 명당이다.
*군서 동구림리 소전머리-소의 머리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학암 마을' 쌍취정 동남쪽에 위치해있으며 학 바위가 있어 학암(鶴岩) 마을이라고 불리어지고 있지만 마을의 쌍취정 동남쪽의 지형이 마치 소의 머리를 한 형국이라고 해서‘소전머리’로 불리어지고 있다.
소는 하늘의 뜻을 알리는 영물이라고 한다. 소의 머리 형국은 분명 길복이다. 소가 누워있던 서 있던 먹이를 먹고 있던 소는 짐을 등이나 달구지에 짐을 실고 가려고, 논밭을 갈기 위해 가려고, 풀을 뜯고서 집으로, 풀을 먹기 위해서 들로 모습을 한 채 지낸다.
꿈에서 ▶소가 집으로 들어온다면 예기치 않는 이득이나 행운의 기회가 생기거나 큰 황재를 할 것이라고 한다. ▶소가 새끼를 낳는 꿈은 오랫동안 공들이고 애써온 어떤 일거리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소가 똥이나 오줌을 싸는 꿈은 재물 운이 상승한 길몽이며 많은 재산을 얻게 된다고 한다. ▶소가 수레를 끄는 꿈은 여러 사람과 협력을 하여 계획한 일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황금색 뿔을 가진 소를 보는 꿈은 엄청난 길몽으로 부와 명예, 권력까지 모두 가지게 되는 등 어떤 단체의 우두머리나 사업체의 경영자가 되어 세력을 과시하게 된다고 한다. ▶소에 올라타서 길을 가는 꿈은 귀인의 도움으로 사업이 성공하여 명예를 얻게 된다고 한다. ▶얼룩소의 꿈은 언론 분야에서 명성을 얻게 된다고 한다. ▶소에게 먹이를 주는 꿈은 성실하게 미래를 위해 준비해나가면 나중에 큰 성공을 맞보게 된다고 한다. ▶목장에서 놀고 있는 많은 소를 보게 되는 꿈은 사람들을 많이 대하는 일거리가 생기게 된다고 한다. ▶소에게 먹이를 준 꿈은 훌륭한 아들을 얻는다고 한다. ▶황소가 여러 마리 매어져있는 꿈은 자수성가할 인물이 태어난다고 한다. ▶소가 산이나 언덕을 오르는 꿈은 바라던 일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소를 타고 거리로 나가는 꿈은 공공단체나 협조자에 의해 일이 진행된다고 한다. ▶자신이 소를 이끌고 산에 오르는 꿈은 자신을 내세울 만한 일이 생기거나 재물을 얻게 된다고 한다. ▶소가 자신의 집에 들어오는 꿈은 재물을 얻게 된다고 한다. ▶소가 송아지를 낳은 꿈은 바라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소에다 쟁기를 매고 농사일을 하는 꿈은 어떤 사람 또는 협조자와 일을 추진하게 된다고 한다. ▶소가 밭을 일구는 꿈은 그동안 침체기였던 사업이 풀려 잘 진행된다고 한다. ▶큰 암소를 끌어내려 말뚝에 매는 꿈은 새로운 인물과 인연을 맺게 된다고 한다. ▶시골에서 소가 나오는 것을 보는 꿈은 사업이 크게 번창하게 된다고 한다. ▶흰 소가 나오는 꿈은 진실과 성실함을 뜻하며 본인에게는 행운이 오고 있음을 암시한다고 한다.
누워있는 소, 되새김하는 소, 소전머리 등의 소와 관련된 지형은 좋은 징조로 기대를 하며 소처럼 근면 성실하게 살면 좋은 일들이 집안에 가득할 것 같다.
*군서 모정리 모정-와우형국
군서면 모정리 '모정 마을' 에는 소의 외양간에 해당하는 골자기인‘외양골’이 있다. 모정 마을은 월출산 천황봉에서 굽어보면 넓은 평야 한 가운데 떠있는 섬처럼 보인다. 바다가 아닌 평야 위에 떠있는 섬인 셈이다. 동쪽으로는 남성적인 월출산이 서쪽으로는 여성적인 은적산이 자리하여 음양의 이치를 절묘하게 조화시키고 있다. 월출산과 은적산의 중심에 위치해 있는 모정 마을은 풍수적으로‘와우형국(臥牛形局 )’이다. 누운 소 형국의 마을들은 주로 완경사 평야지대에 큰 하천 줄기가 아닌 작은 물줄기 곁에 논농사에 접합한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형성되었으며 모정 마을의 입지 조건이 소가 누운 모습이어서 마을 환경을 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해주고 있으며 마을에 좋은 기운이 넘쳐난다.
*군서 모정리 초장골-소 먹을 풀 저장소
또한 군서면 모정리 '모정 마을' 서남쪽에 위치한‘초장골(草藏洞)’은‘소가 먹을 풀을 저장’하는 곳이다. 모정리는 평야지대인 모정(茅亭)과 서호강(현재 학파농장)을 낀 검주리(黔蛛里)의 1.2구로 나누어지고 있다. 검주리 마을은‘거미형국’을 한 마을로서 모정리에는 주로 광산김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여기에 평산신씨, 전주이씨도 함께 마을을 형성하며 지키고 있다. 모정리는 넓은 평야의 농토가 많아‘와우형국 지세’의 영향으로 넉넉함이 넘친 풍요로운 마을로서 크게 번창하고 있다.
*군서면 해창리 원해창-산등성이 와우형국
군서면 해창리 원해창 마을은 영암읍쪽에서 영상강을 건너 도포와 시종을 가는 길목이다. 군서면 부서쪽 맨 끝으로 덕진천을 경계로 도포와 마주 보고 있는 원해창은 고려시대부터 영암의 해로 입구로 수집 보관하던 창고가 있어 해창이라고 했다. 영상간 하구둑이 생기기 전까지만 하여도 목포로 가는 여객선과 화물선이 드나든 중요한 항구였다. 도포와 시종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나루터를 이용하는 등 영암읍과 도포, 시종과의 연결고리를 했고 또한 목포로 가는 길목이 되어주었다.
지금은 해창다리가 생겨 배로 드나들던 일은 사라지고 말았다. 영암읍에서 버스로 원해창까지 오면 지금의 펌프장인 정류장에서 내려 다시 배를 타고 건너야만 했다. 영산강이 막아짐으로 인하여 드나들던 바다물은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해창은 에로부터 군사적으로 이용했던 곳이였으며 또한 고려시대 때,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때에는 곡식 등 각종 식량을 배로 실고 갔던 항구의 역할을 한 곳이다.
해창이라는 이름은 바다 해(海), 곳집 창(倉)자를 써서 붙어진 이름이다. 해창(海倉)은 옛 이름은 '창말' 이다. 또는 한자를 써 '창촌(倉村)' 이라고 했다. 해창은 옛날에 조세(租稅)를 목적으로 영암지역에서 거둬드린 벼 등 농산물의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다. 조세 창고가 영암의 해창 말고도 해남 마산의 북창(北倉), 해남 북평의 남창(南倉) 등이 조세창고로 유명하다.
원해창은 영산강을 사이로 두고 맞은 편에 덕진면 쇠섬이라는 우도가 있다. 우도는 소가 누워있어 붙어진 지명이다. 원해창 마을 뒤에는 나즈막한 구릉지형의 산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군서 오산과 원마산을 품고 있는 성뫼산과 가삼봉이 있는 산줄기이다. 산등성은 우로는 해창리 4구 신흥 들녘, 좌로는 해창리 1구 신덕정 샘골 들녘이 있으며 반도형식으로 튀어나온 지형이다. 영산강이 좌우로 감싸고 있다. 이 능선이 가삼봉에서부터 도포와 덕진 방향의 영산강으로 쭉 뻗어나온 줄기이다. 줄기 능선은 장등(잔등) 이외는 특히 지명으로 알려진 게 없지만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다. 군서면 원해창의 소와 덕진면 우도의 소가 영산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국이다.
제주도 우도가 마치 소가 누운 채 머리를 바다로 향하고 있듯이 원해창 마을 뒤의 능선도 소가 누운 채 머리를 영산강으로 향하고 있다. 소가 맞은 편 우도를 바라보는 형국이다. 우도는 '암소' 에 해당된다. 원해창 소의 형국은 '숫소' 이다. 숫소와 암소가 영산강가에서 풀을 뜯어 먹고 지내면서 쉬기도 하고 쉬면서 되새김질하며 한가롭게 지내고 있는 모습이다.
소의 형국을 하는 곳은 번창의 의미를 담고 있다. 원해창은 작은 마을이다. 예전에는 벼농사를 지을 만한 농토가 많지가 않아 풍족하지는 못했다. 주로 해산물을 의존하며 생계를 꾸려왔다. 하지만 고려시대부터 일제강점기 까지는 이곳이 농산물과 공예품 등 각종 물품을 수출하던 항구로서의 부흥을 이루었던 곳이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조세라고 하지만 수탈의 상처로 남는 장소였다.
원해창은 지금도 마을이 크게 번성(繁盛)하지는 못하고 있다. 마을이 크게 형성할 정도로 터가 넓지 앖기 때문이다. 영산강을 막음으로 인하여 간척지로 인한 논농사가 몇배 늘어나 풍족한 마을로 자리잡고 있다. 원해창 뒷 산 산등성이 소의 형국으로서 원해창이 소의 머리라면 신흥과 목화정은 소의 뒷쪽 몸체에 해당된 배와 허리와 뒷 다리에 해당된다. 영암읍 신정 마을이 소의 꼬리에 해당된다. 지금의 신흥 마을에 온천관광호텔이 들어섰다. 온천이 나온 지역이 소의 소변이 나온 곳에 해당된다. 소가 영상강 물을 마시고 배출한 곳이 바로 온천관광호텔 자리이다.
해창에서 도포로 가는 영산강 해창나루터는 노로 젖는 작은 목선들이 정박해 있었던 포구(浦口)다. 역객선과 화물선이 목포에서 이곳 해창 포구까지 오고 갔다. 항구(港口) 역할을 했던 해창포구다. 나룻배를 움직이는 사람보고 '나루쟁이' 라고 했다. 물이 들어 나룻배를 건널 때는 반듯이 나루쟁이의 신세를 져야했다. 나루쟁이는 상시 쓰는 말이 욕으로 시작해 욕으로 끝나는 식이어서 한때는 욕 잘하는 사람을 보면 해창 나루쟁이 같다고 했었다.
온천이 소의 소변이라고 표현했지만 소는 농가에서나 사람들한테는 없어서는 안 될 희생의 동물이다. 원해창의 소의 형국이 이름은 얻지 못했지만 소의 역할은 톡톡히 해내고 있다. 소가 누워 쉬고 있는 모양인데 분명 소는 영산강이 바다물로만 가득 채워질 곳으로 보지 않고 언젠가는 내가 바라보는 저 영산강이 내가 좋아하는 풀과 곡식들로 무성하리라는 예시를 하며 언제나 변함 없이 한 곳에서 누운 채 영산강 건너 편에 있는 우도의 암소와 함께 영산강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짠물이 드나들던 영산강은 민물의 영암천으로 갯벌은 농토로 변했다. 이를 지켜본 소는 더 힘이 난 듯 되새김질을 한 듯하다.
꿈에서 소변이란 소원, 소망, 정신적 물질적 재물 등을 상징한다. ▶큰소가 내몸에 폭포같은 오줌을 싸는 꿈은 집안에 아니면 남에게 큰 재물이 들어온다고 한다. 원해창의 소가 시원하게 소변을 보는 모양세이니 계약, 합의, 합격, 승진, 횡재, 재물, 운수, 소원성취 및 성공 등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길지(吉地)이다. ▶장애물이 사라지고 괴롭혔던 문제들이 해결되어 계획했던 일을 이루게 된다고 한다.
온천은 콸콸 솟아나오고 있다. 소의 소변 줄기가 세차게 나오듯이 온천물이 나오고 있다. 소변 줄기가 세차다는 것은 직장, 사회단체 등에서 가치를 인정받게 되어 명예와 지위가 상승한다는 뜻이다. 그동안 노력했던 것에 좋은 성과 및 보상이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소가 누운 오줌(온천)이 강물이 되고 있다. 이것은 꿈에서 보면 길몽 중에 길몽이다.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에 있어 큰 성과를 거두어 부와 명예, 높은 지위를 얻게 되고 부귀영화를 누리게 됨을 의미하는 꿈이다.
원해창의 산등성이의 소가 논과 밭에 소변을 쏟아내고 있다. 이것은 뜻밖에 재물이 생길 수 있음을 뜻하는 길몽으로 쏟아내면 낼 수록 좋다고 한다. 지금 영암 월출온천관광호텔은 오줌을 쏟아내 영산강 들녘을 더 기름지게 하고 있다.
원해창은 예로부터 없서는 안 될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이곳을 통해 삶의 현장이 펼쳐졌다. 산등성이의 소가 누우면서 한 때는 눈물이 흘러 그 눈물이 영산강을 넘치게 했다. 지금은 그 아품을 뒤로 한 채 기쁨의 눈물을 보이며 "그래 올 것이 왔다. 내가 바라던 일이 드디어 왔구나" 하며 미소를 띤 채 회한의 눈물을 흘러보이고 있다. 그래서 소는 더 곡식과 풀을 뜯어 먹고 또 물을 마시며 온천을 콸콸 세차게 뿜어 쏟아내고 있다. 오줌뿐만 아니다 똥도 많이 싸고 있다. 그래서일까 주변의 농토들이 많은 수확으로 내고 있다. 대변을 누운다는 것은 좋은 의미를 말한다.
▶꿈에서 소가 똥을 누운 꿈을 꾸게 되면 부자가 되는 꿈으로 풀이하고 있다. 원해창 산둥성이의 소가 쌓은 똥이 쌓이고 싸인 가삼봉이 아닌가한다. ▶똥이 산처럼 수북히 쌓여있는 꿈은 자산, 경제, 재물, 돈이나 상품, 식복, 먹거리, 선물 등을 상징한다고 한다. ▶황소에 온통 똥을 칠한 꿈은 생산, 유통, 식품업 등에 투자하면 엄청난 돈을 벌고 사업이 날로 번창한다고 한다.
소가 마당에에서 똥과 오줌을 싸는 것을 보는 꿈은 길몽으로써 귀인의 도움과 주위 사람들의 협력으로 재물과 이권이 풍성해지고 사업이 잘 풀리고 집안으로 흥할 운의 꿈이라니 이곳 원해창 산등성이를 실제 보는 것 또한 행운이 있을 것 같다.
*학산 독천리 독천-송아지 사고 파는 천(우시장)
영암군 학산면 '독천리 마을' 은 우(牛)시장으로 번성한 마을이다. 독천 마을 천 주변에 우시장이 형성돼 영암군 관내에서 가장 큰 우시장이었으며 이곳에는 각 농가에서 가축으로 기르던 소를 팔거나 사는 등 거래를 했다. 장날이 서면 소 천국이라고 볼 정도로 소의 음매소리가 요란했다. 배고파서 울기보다는 어디론가 자신이 팔려가는 게 두려웠다. 마치 장터에 따라왔다가 엄마 손을 놓쳐 우는 어린애처럼 음매 소리가 끊이질 안했다.
주인을 잘 만나면 그 소는 통통하게 살이 쪘고 어떤 소는 잘 먹고 자랐다. 어떤 소는 그 집에 일꾼으로서 희생을 해야만 했다. 특히 송아지는 자신이 왜 여기에 와있는지를 모르며 그저 울음소리를 냈고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이이저리 뛰어 다니듯이 움직였다. 외양간과 마당의 좁은 집에만 가두어있다가 넓은 장소에서 오니 마냥 좋았는지 꼬리를 치며 뒷다리를 찼다. 어미 소와 송아지 등 집안에 있던 소들이 다 나온 듯 하는 우시장, 소와 사람으로 진풍경을 그려내며 시끌벅적했다. 소를 팔고 사는데 흥정하는 사람을 '쇠살쭈' 라고 했다. 소를 사서 장에 파는 사람을 '어상' 이라고 불렀다.
이런 시장 통이였던 곳은 우시장은 천의 물 흐르듯 사람들의 정도 흘렀다. 장날이 되면 영암의 모든 농가들이 기르던 가축을 여기 천가로 끌고 와서 매매를 했으니 천(川)도 마을(里)도 덩달아 이름을 얻게 됐다. 이름 하여 어린 송아지를 매매하던 시장 주변에 하천이 있어 송아지 독(犢), 내 천(川)자를 써‘독천(犢川)’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독천 마을은 우시장이라는 싱징성이 컸지만 추억만 강하게 남긴 채 이제는 우시장보다는‘독천낙지음식명소거리’로 더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소 대신 낙지가 대세다. 갈낙탕은 음식의 조합이자 사람과 세상의 조합이면서 솥이 팔팔 끊어 오르듯이 정이 모락모락 피어오른 독천의 정서다.
우시장으로 번성했던 독천은 재산목록 1호인‘소’를 팔고 사는 거래처였다. 가축은 재산으로 부(富)의 척도가 되었다. 소를 팔아서 손에 쥔 돈은 자녀의 입학금 등 가정의 살림에 큰 보탬이 되게 한 생활자금으로서의 목돈마련 수단으로써 소는 가정의 큰 힘이 되어준 아주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가축이 됐다. 샀던 소는 농사일을 하는데 더할 나위 없는 요긴한 가축이었다. 기쁨을 안겨준 독천우시장은 농가에게 희망을 불어준 행복의 요람(要覽)이었다.
▶송아지 꿈은 행운이 오게 하고 하는 일에 도움과 이득, 수익, 영예, 유명세, 연인 등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한다. ▶소를 사 오거나 소를 끌고 집으로 들어오는 꿈은 며느리나 귀한 손님이 오거나 재물, 사업체, 결혼 등이 생긴다고 한다. ▶소를 팔고 다른 소를 사는 꿈은 며느리, 가정부가 바뀌거나 집, 재물, 사업 등을 새로 장만하게 된다고 한다.
소를 팔려가면서 우시장 갈비탕집에 들려 뚝배기 한 그릇 뚝딱 비우며 느낀 행복은 다음 장에도 또 찾게 만들었다. 어린 손을 붙잡고 같이 시장에 가서 시장의 먹거리를 사주었던 엄마 아빠의 마음은 사랑 아닌 내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 담긴‘아낌’이었다. 그래서 독천은 송아지가 그랬던 것처럼 시장을 찾은 사람들은 송아지가 되었고 그저 좋을 뿐이었으며‘송아지 파는 독천시장’말만 들어도 정감이 간다.
천에 가면 소가 노래를 한다
사람도 추임새를 넣는다
음매소리에 피라미가 갈기를 친다
백로도 사뿐거린다
각설이타령에 장은 흥겨워진다
우시장엔 소살 돈이 꺼내진다
주막은 소판 돈에 술판이 된다
천의 소는 끌러간다
진풍경이 따로 없다
장터가 작품이 된다
구경꾼이 그래서 있나보다
기웃거린 사람들 표정이 참 예쁘다
천의 물 흐름, 사람 마음의 흐름이다
독천아! 넌 이름값을 하는 애다
그래서 나는 네가 좋다
다시 한 번 부르고 싶은 그 이름 독천아!
사랑스럽다
장터는 멋지다 음식은 맛있다
장터를 그려내는 사람들이 좋다
장터가 생각날 때 사람이 보고 싶을 때
설레임은 더 컸다
장은 열렸다 사람은 몰렸다
소도 그랬다
천의 새들도 찾아들었다
독천장은 마음부터 찾아들게 한다
다음엔 강아지도 따라 가보겠단다
음매소리 그리울 것 같다
채소 파는 아줌마 손이 또 보고 싶어진다
소도 먹으면 좋다는 낙지 구경만 하고 간다
막걸리 한잔에 취한 아저씨 다음 장날에 장날에는
독천장에서 또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갈낙탕 파는 식당 아줌마도 반갑게 맞이할 것 같다
이런 서정시 한수를 지어도 될 정이 담겨져 있고 삶의 애환이 서려져있는 독천의 풍경이다.
도포 가축전자걍매시장
영암고을의 고을 사람들한테 생기를 불어줬던 곳, 삶의 애환이 녹아져 있는 곳, 아이콘이 된 곳의 대표적인 상징성이 컸던 곳으로써 소를 팔고 사는 우시장으로 번성했던 독천우시장은 소를 파는 사장, 소를 사는 시장으로서 한때는 영화로움은 하늘을 찔렀다.
지금은 일반 가정마다 소 한마리씩을 키우며 농사를 직거나 살림용으로써의 보탬이 되고자 가축을 기르지를 않아 우시장도 형성이 되지 않고 있다. 이제는 소 대신 농기계가 자리했고 대량으로 기업화하며 소를 사육을 하고 있어 한 두 마리 키우는 농가는 그리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지가 않다.
또 우시장이 영암에는 독천우시장과 신북우시장이 있었으나 이제는 도포면에 가축전자경매시장이 준공(2017.6.22)돼 비육유 및 임신우, 송아지를 경매할 수 있게 해 전통 우시장이 필요없게 됐다. 집에서 기른 던 소나 낳은 송아지를 시장이 집에서 몇 십리길임에도 마다하지 않고 직접 동이트지 않은 이른 세벽부터 끌고 가서 팔았다.
소가 필요하면 소를 사 집까지 끌고 오는 시골의 옛 풍경을 한 정취가 한편의 드라마보다 더 재마가 있고 의미가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풍경은 찾아볼 수가 없다. 추억의 흔적마저도 사라져 버린 것 같아 몹내 아쉬움이 있는 독천우시장이다.
독천우시장에서의 소들의 표정은 정감이 있었다. 사골 장의 상징성이었다. 모든 농가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전시장이었다. 삶이 이곳에서 피어나고 또 삶을 느낄 수 있는 삶의 현장이었다. 어미를 따라온 송아지는 어미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도 비벼대며 애정을 서로 과시했다. 어떤 소는 시장에서도 자기 새끼를 위해 젖을 먹이는 등 모성애를 보이는 감동의 장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독천시장은 사람만 북적이면서 삶의 노래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소도 사람 못지 않게 자기들만의 애정을 표현하며 음매소리를 내됐다.
독천장은 우시장이 있어 잡은 소고기를 이용한 요리들이 많았다. 갈비탕, 곰탕, 우거지탕, 내장탕, 선지국이 주 메뉴로 나왔다. 그리고 바다가 접해져 있는 곳이어서 낙지를 활용한 낙지연포탕이 식탁을 차지했다. 그러던 것이 어느 날 갈낙탕이 새로 생겼다. 독천낙지음식명소거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음식으로 떠오른 갈낙탕은 음식 중에 가장 으뜸으로 치며 이 지역의 가장 자랑할 만한 인기 있는 대표적인 음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고소하고 담백하게 감칠맛 난 맛이 으뜸인 매력적인‘갈낙탕’이 탄생하는 이유는 어느 날 산낙지를 고무 통에 두었는데 낙지가 안 보였다고 한다. 낙지가 통에서 나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주인은 영문도 모르고 낙지가 어디로 갔지 하며 보이지가 않아 못 찾고 있는데 솥에 국자를 저어보니 거기에 낙지가 있었다. 주인은 어이가 없었지만 한번 먹어보니“어! 괜찮은데”맛이 새로웠고 풍미가 더 느껴졌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소갈비탕만 할 게 아니라면서 소갈비에다 낙지를 함께 넣어 끊이게 됐다.
이게 바로‘갈낙탕’이 탄생한 계기가 됐다. 우연한 발견이다. 독천이라는 지명도 재미나지만 우시장에서 생긴 음식 에피소드도 이채롭고 시골장터에서 일어날만한 일이다.
갈낙탕의 재료에는 소갈비와 낙지가 들어간다. 소고기 재료는 우시장이어서 소를 잡은 현장에서 쉽게 구했고 낙지는 인근 면(미암 문수포 앞바다)이 바다와 접해있어 갯벌에서 잡은 것을 구해 썼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낙지는 인근 무안이나 신안에서 공수해온다. 어찌됐던 시내의 식당에서 개발한 음식이 아닌 정감 있는 장터환경에서 태어난 구수함을 풍겨낸 토속적인 특별메뉴이다.
시골정취를 느낄만한 어머님의 손맛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갈비와 낙지의 첫 글자를 딴‘갈낙탕’, 독천과 갈낙탕의 함수관계는 동등하며 찰떡궁합이다. 우시장이 있는 독천은 장문의‘역사책’이며 장편의 소설(小說)이며 감동의 서정시(敍情詩)이며 애환의‘창(唱)’이며 휴먼의‘드라마(Drama)’이다. 식지 않는 영원한‘레퍼토리(Repertory)’다.
소의 관련된 지명들은 주로 소가 누워있는 모양으로 연관되어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학산면 독천은 소가 누워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고 해서 붙인 와우산, 우면산, 우도와는 달리 소를 파는 시장에서 일어난 일을 두고 지명으로 삼았다. 천가의 시장에서 송아지를 파니까 송아지 독(犢), 내 천(川)자를 써‘독천(犢川)’이라고 부르자고 한 것이다.
와우형국은 평야에서 생산한 풍성한 곡식으로 풍요롭게 만들어줬지만 독천은 그런 형국과는 조금은 다르다. 독천 마을은 군서면 모정 마을과는 달리 천을 위주로 우시장이 들어 번성했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다양하고 풍족한 주방에서 요리된 먹을 음식이 식탁에 놓이게 했다.
지금은 예전 같은 우시장의 정취는 못 느끼지만 천 주변에‘독천낙지음식명소거리’라는 먹거리촌이 조성돼 옛 향수를 느끼게 해주고 있다. 소가 누워있는 모양을 해 와우형국이라고 한다면 독천은 소가 많이 모여드는 곳인‘소우형국(巢牛形局)’이다.
*독천 우시장 유래
고려초 후기 대문장 익재(益齎) 이제현(李齊賢.1287~1367)의 후손인 영암읍에 살고 있는 경주이씨 이주남이 조상의 묏자리를 잡으려 지관을 모시고 월출산 상봉에 올라가 보니 저 멀리 있는 신성스러운 기운이 뻗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지관은 곧바로 그곳으로 달려가 '비래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다시 정상에서 주위를 둘려보는데 비래산 허리에 여자의 생식기 모양인 여근형 명당이 보였다. 지관은 여근이 있는 혈(穴)로 내려가 명당으로 부족한 점이 없는지 두루 살펴보니 100m 정도 아래 샘까지 있는 것을 보니 천하의 명당으로 판단해 지관은 이주남에게 여근혈 명당 자리를 알려주자 이주남은 길일을 택해 조상의 묘를 그곳으로 이장했다.
조상을 묘를 써서 그랬는지 이주남의 동생이 1672년(현종 13)에 무과에 급제해 선진관(宣傳官) 벼슬을 하였고 이후 경주 이씨 자손들도 날로 번창하였다. 두루 조상을 음덕이 미쳤는데 한편에서는 근친상간 사건이 자주 일어나 가문에 누를 끼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문중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헤 유명한 지관을 다시 모셨다. 지관은 여근혈(女根穴) 묏자리가 명당이기는 하나 음기(陰氣)가 너무 성하여 이런 일이 생긴다고 하며 산 밑 하천에 우시장을 만들면 남자들이 모여들어 양기가 발산될 것이니 여근혈 주변 천가에 우시장을 조성하면 음기를 중화시킬 수 있다고 조언하였다고 한다.
지관이 말한 대로 하천에 우시장을 세우자 그 후부터는 이씨 문중에 우환이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우시장이 생긴 후에 송아지 독(犢)자와 내 천(川)자를 써서 지명도 '독천(犢川)' 으로 바꾸었다.
독천의 이름을 낳은 독천장은 원래의 이름은 '독내장' 이다. 냇가에서 송아지를 팔았다하여 송아지 '독' 자와 내의 '내' 자를 따서 부르게 된 이름이다. 독천장은 4일과 9일에 서는 오일장이다. 독천장은 영암군 학산면 면소재지인 독천리 123=2 일원에 위치해 있다. 독천장은 영암읍장과 함께 오래된 재래시장이다. 허허벌판이던 곳에 1964년에 장터 주변에 집들인 장옥(長屋)이 건설되었다.
독천장이 위치한 독천은 인근 목포~독천~해남과 강진으로 연결되는 국도가 독천장을 통과하여 육상교통의 요충지였다. 독천장은 독천 정류소와 연결되어 있으며 일제 강점기에 건설된 신작로와 하천 주변 등까지 번성하였다.
오늘날 갈낙탕이나 연포탕이 유명해진 것은 독천장은 남쪽과 서쪽에 넓은 갯벌을 지닌 바다와 접하고 있어 해산물 수급이 용이했다. 남쪽 문수포에서에는 갯벌과 바다에서 나는 낙지, 숭어, 조개 등 해산물이 공급되었고 서쪽 감치 포구로는 장어, 숭어, 농어, 황복, 새우, 가오리 등을 잡은 어선과 목포를 오가는 화물선이 드나들며 물품을 실어 날랐다. 이것들을 각 지역으로 나눠주는 유통망의 거점이 바로 독천장이었다.
독천장은 영암읍장과 함께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1770),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1830)에서 확인된 역사가 있는 오랜된 장이다. 18세기 후반에는 십일장으로 4일에 장이 섰으며 19세기 전반에 오일장(4일, 9일)으로 전환되어 지금까지 그대로 4일 9일 오일장으로 장이 서고 있다. 독천장은 일제 강점기에 독천 광산이 개발되면서 더욱 발전하여 영암읍장 다음으로 성장한 장이었다. 특히 갯벌에서 나는 해산물로 유명하였고 1980년대까지는 우시장을 겸하고 있었다. 독천장은 2007년 12월부터 2010년 9월까지 현대화 사업을 진행하여 현재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독찬장이 들어선 곳의 지형을 보면 인근 산이 와우형국은 아니지만 소가 냇가로 나와 풀을 뜯어먹거나 물을 마시며 휴식을 취하는 형세다. 지형을 보면 우시장이 있는 지점은 약간의 툭 튀어나온 반도 형식을 취하고 있다. 물이 동북쪽에서 흘러 서남쪽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이 물이 독천장의 지형을 감싸듯이 흐르고 있다.
풍수(風水)란 우리 조상들이 오랫동안 쌓아온 땅에 대한 깨달음과 자연에 대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만든 삶의 지혜이다. 풍수에서는 물은 '재물(財物)' 을 관장한다고 한다. 수세(水勢)가 좋아서 사람이 모이고 돈이 모인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전국의 오래된 전통시장들은 천(川)을 끼고 들어섰다. 수세가 좋아야 사람이 모이고 돈이 모인다고 보기 때문이다. 수세가 좋다는 얘기는 물길이 그 터를 감싸고 돌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물길이 감싸 안고 도는 안쪽에는 사람이 살아가기에 적합한 편안하고 평온한 안온(安穩)의 터가 형성된다. 풍수 용어로는 '환포(環抱)' 라고 한다. 물의 흐름이 터를 감싸 안 듯 유정(有情)한 모습으로 환포한다는 터로 부자의 기운이 서러있다.
환포하는 대표적인 터는 어린이 대공원이 있는 광진구청 인근 지역과 국내 최고 부촌인 강남 압구정동(현대아파트) 그리고 용산 쪽도 환포지역이다. 압구정동은 한강이 S자로 굽어 흐르는 가운데 강 쪽으로 툭 튀어나온 돌출부 부분에 자리잡고 있어 한강 물이 휘감아 흐르는 '금성수(金星水:환포.궁수.포신.만곡.횡포)' 지역이자 '득수형(得水形)' 자리라고 한다. 압구정로와 논현로가 아파트 부지를 부채골 모양으로 감싸줘 지기(地氣)가 집결한 최고의 명당이다.
압구정동처럼 독천장이 있는 지형도 툭 튀어나온 지형을 물이 휘감아 흐르고 있어 금성수지역이자 득수형 자리이다. 독천장의 유래에서 보듯이 지관이 여근혈의 기세를 잡고자 이 터에 사람(남자)이 많이 운집하도록 장을 서게 했지만 지관은 기세가 쎈 기(여자)를 막고함은 물론 지형적으로 봐서는 번성할 곳으로 보였기에 풍수에 입각한 이곳에 사람이 북적이는 장을 들어 서게 하면 분명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은 물론 크게 번성할 것이라고 판단을 하는 등 예지력을 갖춘 선견지명이 있는 뛰어난 지관이 아니었는가 본다.
*학산 학계리 각시골-소 발자국 바위
또한 학산면 학계리 '각시골' 에 있는 바위에‘소 발자국’이 비슷한 흔적이 있어‘쇠죽대’라고 부르고 있다.
▶발자국은 행적, 이력 따위를 뜻한다. ▶사회적으로 지도자격인 사람의 업적을 기리며 추종하게 된다. ▶자신의 발자국을 보는 꿈은 성공을 나타낸다. 또한 ▶선인의 흔적과 문헌의 기록을 재조명한다. 자신의 행적과 업적 등을 남기고 그것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된다는 발자국, ▶바위에 파여진 굴곡은 신들의 발자국이라고 여겼다.
힌두교에서는 발은 인간과 땅 사이를 오가는 신성한 접촉지점으로 보고 있다. 발자국은 인간이 지나간 길, 자신이 살아왔던 삶을 나타낸다. 또한 발자국은 성자의 현존이나 방문을 뜻한다. 그래서 발자국은 신이나 성인의 존재나 통과에 의해서 또는 추종자나 신도들을 인도하는 선구자에 의해서 삼라만상에 찍히게 된 표지이다. 각기 다른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는 두 종류의 발자국은 가는 것과 오는 것 그리고 과거와 현재, 과거와 미래를 나타낸다.
학산면 학계리 마을 각시골에 있는 바위에 소의 발자국처럼 찍혀 있다는 것은 오로지 앞으로 느릿느릿 걸어도 황소걸음이라고 하듯이 우직하게 부지런하게 걷겠다는 뜻일 게다. 또한 소는 부와 재물을 상징하기에 필시 이 마을에 영화로운 경사스러운 일이 꽃처럼 피어날 것임을 암시한‘쇠죽대’이다. 인간과 땅 사이를 오가는 신(神)이 우리도 모르게 먼 옛날 이곳을 찾아 신성한 접촉지점으로 보고 내려와 발자국을 남겼지 않나한다.
*미암 선황리 우와대-소가 누워 휴식
영암군 미암면 선황리 '대초지 마을' 은 마을 동쪽에 위소와대(上牛臥垈), 아랫소와대(下牛臥垈)라 부르고 있으며‘큰 소 두 마리’가 풀을 뜯어먹고 망월천(望月川)에서 물을 마시고 배가 불러 쉬고 누워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지형이라 하여 우와대(牛臥垈)고도 불리어지고 있으며 이 마을에는 처음 살기 시작한 성씨로는 고려 초기에 수원백씨가 이곳에 남하해 개척하여 마을을 이루어 평구(平區) 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작은 평구 마을을 이루고 살다가 이 마을에 번성해 정착하고 살려는 주민이 불어나고 터가 좁아 점차 넓은 지대로 이동하는 등 확장된 마을이다. 강이 평야가 되고 야산이 밭으로 변하여 늪이 생겨 갈대와 잡초가 무성한 마을이 되어‘대초지(大草地)’마을로 개칭하여 지명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덕진 금강리 우산정-와우형국
영암군 덕진면 금강리 '소적굴 마을' 은 서북쪽에 위치한 우산정(牛山亭)의 마을로서 금산의 옛 마을 중의 하나이며 1900년대 폐동됐으며 앞산이 소가 엎드려 누워있는 와우(臥牛) 형국이라고 해서 마을 이름을‘소적굴’로 붙여진 지명이다.
*덕진 용산리 우도-와우형국
덕진면 용산리 '우도 마을' 은 군서면 원해창과 영산강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해창다리 맞은편에 있는 산이‘소가 앉아있는 형상’의 섬이어서‘쇠섬’이라고 부르다가 소 우(牛), 머리 두(頭)자 써 지명을‘우두(牛頭)’라고 불리어졌다가 섬이어서 자연스럽게‘우도(牛島)’라 부르고 있다. 소가 앉아있다는 것은 한가로이 편안하게 여유롭게 쉬고 있다는 것이다. 우도는 영산강 안에 있는 섬이다. 지금은 간척으로 인하여 육지가 됐다. 소의 형국을 한 곳은 풍요롭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그래서일까 우도는 현재 예전의 물이 아닌 농토로 싸여져있다. 소가 태평하게 앉아 쉬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걱정거리가 없다는 뜻일 게다.
*금정 용흥리 우적걸-암소가 일어나서 밥 먹는 형국
영암군 금정면 '세흥 마을' 은 용흥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서 마을 뒷산이 마치‘암소가 일어나서 밥을 먹는 형국’이라 하여 주변에 역등(力嶝), 우족(牛足)걸, 쇠포리 까끔, 구시 굴, 쇠정이 들, 우적바위, 황두들이 있어 소와 무관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원래 소가 일어난다는 뜻의 우리말과 한문이 섞인 쇠(소의 방언)와 한문의 일어날 흥(興)의 쇠흥으로 불렀으나 일제 행정구역 개편 전에 조사한 구한국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년)의 기록에는 가늘 세(세)자의 세흥(細興)으로 기록되어져있다. 세흥은 평택임씨 의자라는 분이 아버지가 무령사화로 유배를 당하자 형제들이 헤어지면서 이곳에 정착하여 대대로 흥하라고 세흥(世興)이라고 불렸다는 설도 있다.
▶소가 먹거나 되새김을 하거나 토하는 꿈은 적은 투자로 많은 이익을 내거나 근심하던 일이 해결된다고 한다. ▶초원에서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소떼를 보는 꿈은 새로운 시작한 사업이 크게 성공한다고 한다. 또한 창작물은 좋은 평가를 받게 된다고 한다.
세흥 마을의 지형을 보면 마을 뒤로 산이 있고 마을 앞에는 내가 흐르고 내 주변에는 넓은 농토들이 발달되어져 있다. 풍수적으로 보면 배산임수라고 볼 수 있다. 소가 일어나서 풀을 먹고 있다는 것은 그 만큼 이 곳은 먹을 것들이 널려있을 정도로 풍족하다는 것이다. 곡식이 있으니 배고프지 않고 물이 있으니 목마르지가 않는 세흥 마을이다. 세흥의 일어날 흥(興)은 소의 배부름이다. 흥할 것 같소이다.
*금정 용흥리 구시걸-구시(구유)형국
금정면 용흥리 '안기 마을' 은 인근 세흥 마을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뒤 지형이‘구수(구유)’처럼 생겼다하여 마을 이름을‘우적걸, 구시걸, 구숫골’이라 부르다가 앞들 쇠정이 들어 비옥하여 사람 살기가 편안한 터라는 뜻에서‘안기(安基)’로 개명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때는 나주군 금마면 우적리(牛跡里)라는 마을로 한동안 존재하다가 통폐합에 따라 사라지고 고종 32년(1885)에 영암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4월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이곳을‘안기’마을로 부른다. 소 여물통인 구수 또는 구시가 있다는 것은 먹는데 부족함이 없다는 뜻이다. 안기 마을은 넓은 논 같은 농토는 없어도 작은 밭떼기라도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소의 먹이를 담아주는 그릇인 여물통인 구유(방언 구시)는 주로 통나무를 파서 만든다. 시골에서는 본체에 외양간을 두거나 따로 외양간을 두며 소를 길렀다. 외야간에는 소가 일어나 언제든지 시시 때때로 여물을 먹게 바로 옆에 구유통을 뒀다. 구유인 여물통은 음식을 담는 그릇이다. 구유통에 음식이 있다면 소는 행복해 할 것이다. 배고프지 않게 하는 구유통이 소에게는 꼭 필요한 밥그릇이다.
마을이 소 구유통 모양을 닮았다면 그 마을은 음식을 채울 수 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구유의 그릇에 의해 배가 부르고 배고플 걱정이 없을 것이다. 풍족한 삶이다.
▶자신이 구유통에 들어가는 누워 있는 꿈은 경쟁자들과의 경쟁에서 상대방의 여건이 점점 약되어 자신에게 유리하게 된다고 한다. ▶구유를 보는 꿈은 승리의 소식이 자신에게 연달아 다가옴을 말한다고 한다. ▶만약 처녀가 이꿈을 꾸었다면 돈이 많은 부자집에 결혼을 가게 된다고 한다. ▶구유에 꽃이 가득한 꿈은 큰 돈을 벌게 된다고 한다.
금정 용흥리 안기 마을의 구시걸은 이 마을 사람들에게 배를 채워줄 음식이 항상 그릇을 넘치게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승리의 소식이 중중하여 기쁨으로 다가오리라 본다.
복은 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할 만한 행운 또는 거기서 얻는 행복을 말한다. 복(福)이 많은 집안을 복가(福家)라고 한다. 풍수지리에서는 길한 터에 지은 집으로 본다. 복을 누리는 분수의 복분(福分), 복스러운 운수의 복수(福數), 복이 많고 장수의 복수(福壽)가 있다면 인생은 더할 나위없이 행복하다. 금정 용흥리 안기 마을의 구시걸은 행운과 복을 가져다주는 복신이다. 한 구루의 나무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주고 있듯이 구시걸 또한 마을의 악귀를 물리쳐 주고 안녕을 지켜주고 복을 가져다주는 '복신(福神)' 이다.
먹을 음식을 담은 구유통(구시통) 돈복, 식복(食福), 여복(女福), 인복(人福), 처복, 일복, 수복(壽福) 중에 식복이 없다면 그 삶은 배고프다. 복 중에 식복이 넘쳐 생기를 얻게 되고 식복이 없다면 다른 복은 누릴 수가 없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듯이 아무리 좋은 경치라도 배가 고프면 그 경치는 아름답게 보이지 않고 더 구경하고 싶은 생각이 없게 된다.
북 중에는 최고의 복은 식복(食福)이라고 한다. 밥을 잘 먹으면 복이 온다고 보고 있다. 밥을 잘 먹으면 건강하게 된다. 건강복인 셈이다. 밥을 깨적깨적 먹거나 추접하게 먹으며 복이 달아 난다고 봤다. 식복이 있어야 모든 복이 들어온다고 한다.
인생에서 복(福)이란 무엇일까? 흔히 오복(五福)을 든다. 오복에는 수(壽).부(富).강령(康寧).유호덕(攸好德).고종명(考終命)을 말한다. 수는 장수하는 것이다. 부는 물질적으로 넉넉하게 사는 것이다. 강령은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것이다. 유호덕은 도덕 지키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고종명은 제 명대로 살다가 편히 죽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시대 현대인의 복(福)은 무엇일까?
처복(妻福), 치아복, 자식복, 남편복, 인복 등을 복으로 보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먹을 복(福)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한다. 이것이 운명 못지않게 중요한 식근(食根)이라는 것이다. 명복(冥福)보다 중요한 갓이 먹을 복이리라는 뜻이다. 내일 먹을 복이 없으면 오늘 어떤 형태로든 죽어줘야 하는 것이 우주의 원칙이다. 금정 용흥리 안기 마을은 구시걸이 있어 배를 잔뜩 주리고 그곳에 가도 될 것 같다. 굶주리지는 않을 것 같다. 구시걸에 잔뜩 채워진 음식들이 있으니 말이다. 이 마을에는 먹을 복이 많아 사람들이 물결치듯 모여 온 동네가 복닥복닥, 벌인 잔치에 웃음꽃이 피어날 것같다. "어메 징하게도 많이 차렸네 상다리가 부러지겠소" 푸짐하게 차려진 밥상에 행복에 겨워할 것이다. 구시걸이 복스럽다. 흥겹다.
금정 용흥리 안기 마을의 구시걸은 식근(食根)을 잘 타고난 '식복(食福)' 이 있다. 안기 마을 사람들은 식복을 늘리기 위해 남에게 많이 베풀며 살고 있다. 남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올곶은 신심으로 신을 위하며 사는 것이라네 하며 식복을 늘릴 것이다.
*구시걸의 설화를 보면 아득한 옛날 이곳 구시걸이 있는 곳에 가난한 농가가 소를 한 마리를 키우면서 밭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고 한다. 소는 집안의 가보로써 귀중한 재산이었고 농부는 이 소를 애지중지하며 함께 생사고락을 하며 비록 식량이 풍족하리 만큼 살림이 넉넉하지 않지만 소 한 마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큰 욕심을 내지 않고 살아갔던 농부는 먹을 게 없으면 바로 산에 올라가서 도라지, 더덕, 버섯 등을 캐와 식량으로 끼니를 해결했고 손바닥 만한 밭떼기에는 각종 곡식을 심어 가족들을 먹어 살렸다.
보이는 곳이라고는 사방이 산이였고 하늘은 눈꽃만 하게 보일 정도였다. 인적이 두문 이곳에서 삶이란 오로지 자연이 벗이었으며 자연에 의지하며 부러울게 없이 빈농의 처지에도 비관하지 않고 운명이라 생각하며 안빈락도의 심정으로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날 깊은 산골은 우환이 겹치기 시작했다. 쓰러질 듯한 초가는 호랑이의 출몰로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소를 잡아 먹기 위해 나타났던 호랑이는 사람까지도 해치고 말았다.
농부는 소도 잃고 가족도 잃어 실의에 빠져 그만 본인도 세상과 등을 지고 말았다. 농부는 죽기 전에 가장 애석하고 애통했던 일이 가족보다 소를 잃었던 것이 몹내 아쉬웠고 슬프게 생각했다. 농부는 본이나 자식들보다도 소가 더 소중했고 음식을 잘 챙겨줄 정도로 온갖것 정성을 다해 아끼고 사랑을 쏟았기 때문이다.
주인이 없는 쇠 구시(구유.여물통)를 보며 하염 없이 눈물을 쏟아내며 "아이구야 원통하고 분통해라 내 새끼 어디 간거야 어디 간거야 " 통곡하며 호랑이가 물어간 소가 혹시 돌아오지 않는가 싶어 문밖에서 기다리다려 보고 그래도 안 보이면 주변의 산을 샅샅이 뒤지며 울면서 찾아 봤다. 아무리 불러도 찾아봐도 소는 보이지 않고 하여 집으로 돌아와 쇠 구시를 보며 안으며 땅을 치고 울며불며 했다고 한다. 산신령은 농부의 사연이 가엽었는지 골짜기를 농부가 눈물을 흘리며 안은 구시를 구시걸(구시가 있는 골짜기)로 만들어줬다. 마을 사람들은 골짜기가 구시형국을 하고 있는 것을 두고 산촌댁 양반이 죽어 구시걸로 변했다는 전설로 구전되어지고 있다. 구시걸은 지형이 소 구시를 닮았다하여 붙여진 소지명이다.
산골짜기가 구시로 변했다는 설화이지만 소 구유는 음식을 담아 먹는 그릇이다. 소의 밥그릇인 구유는 투박하지만 소에게는 아주 요긴한 생활도구다. 그릇은 채운다. 담는다 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금정 용흥리 안기 마을의 구시걸의 구시(구유)는 소 먹이를 담은 그릇의 용도이지만 농부의 마음을 담았다. 소를 위해 마음을 담은 농부의 사랑이 여물의 김처럼 모락모락 피어났다. 마음의 채움, 꽃의 피움은 복이다.
마을 사람들은 구시걸의 혼령이 쇠정이라는 뜰을 크게 조성하게 해주었다고 봤다. 구시걸이 마을을 지켜주고 마을의 안녕을 가져다주면서 마을을 풍요롭게 해준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우적걸, 구시걸, 구숫골' 로 부르다가 구시로 인해 마을 사람들을 펀안하게 터를 잡고 산다하여 마을 이름을 펀안할 안(安)자와 터 기(基)자를 써 '안기(安基)' 라고 했다. 아마 구시로 변한 산촌 양반의 음덕이 아닌가해 마을 사람들은 구시걸이란 소지명에 매우 의미가 있는 값지게 생각하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안기 마을의 지형이 마치 소의 여물통인 구시 모양과 비슷하게 오목하게 파여진 모양세다. 마을 땅 모양이 소의 여물통인 구시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우적걸, 구시걸, 구숫골' 로 불렀었다. 마을이 구시형국을 하고 있다.
금정 용흥리 안기 마을 이외에도 구유와 관련된 지명에는 '구시골' 마을로 알려진 경남 함양 수동면 죽산리에도 마을 압구에 옛날에 만들어진 구유통이 남아 있다. 마을의 땅 모양이 소의 여물통인 구시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이름을 구시골로 붙였다. 또한 강원도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평안리의 /통골' , 경북 봉화군 명호면 관창리의 '구우밭' 등이 구유와 관련된 지명이다.
소에 관련한 쇠, 통을 쓰는 단어들이 여러개 있다.
쇠로 끝나는 단어가 글렁쇠 등 597개, 통으로 끝나는 단어가 쇠죽통 등 2600개나 된다. 또 쇠로 시작되는 단어가 쇠고기 등 847개. 통으로 끝나는 단어가 빨래통 등 1878개이다.
구유에 관한 사투리(방언)를 보면 지역별로
◆강원도가 구멍, 궁, 귀숭, 귀융, 기유, 기승, 쇠죽통, 구녕, 구숭, 소구명, 쇠통, 구성, 구송, 구수이, 구승, 구융, 구잉, 궁영, 궝, 귀옹, 귕, 귕이, 쇄통 등이 있다.
◆경기도가 궁,궹이, 귀임, 귀이, 구수, 귀이미, 굥, 구융, 구이, 궝, 궤, 귀엉, 귀옹, 귕, 규 등이 있다.
◆충청도가 구수, 구융, 귕 등이 있다.
◆경상도가 구시, 구시통, 구이, 귀씨 등이 있다.
◆경상남도가 구세, 세구세, 소구시. 쇠죽구시, 쇠구시 등이 있다.
◆경상북도가 시죽통, 쇠죽통, 구위, 귕이, 쇄물통, 쇄이구이, 쇄이통, 쉐통, 구우 등이 있다.
◆충청북도가 구시, 구양, 쉬통, 소통, 쇄죽통 등이 있다.
◆충청남도가 밥구수, 구쇠, 구이 등이 있다.
◆전라도가 밥통, 구시, 구수 등이 있다.
◆전라북도가 말밥그릇, 밥구덕 등이 있다.
◆전라남도가 구수통, 구시통, 구시름, 밥구시 등이 있다.
◆제주도가 구융 등이 있다.
◆함경도가 구시 등이 있다.
◆평안도가 궁이, 구이, 궝이, 궤이, 뀅이 등이 있다.
◆황해도가 궁, 궹, 귀, 귀영, 경, 밥궁, 밥괘, 게웅, 괘이, 구융통, 궝, 궝이, 궤, 궤이, 귀엥, 귀옹, 귕, 뀅이 등이 있다.
◆함경남도가 구숭, 구송, 구수이, 구숭이, 구이 등이 있다.
◆평안남도가 괭이, 괘이, 구세이, 구셍이, 귕이 등이 있다.
◆중국 요령성이 구이, 궝이, 궤이, 뀅이 등이 있다.
◆중국 흑룡강성이 귀씨 등이 있다.
마소나 돼지에게 먹이를 담아 주는 긋인 구유는 곳에 따라 구융(경기.충청), 구수(전남), 구시(경남), 궁이(강원) 등으로 불린다. 긴 통나무를 나무의 생김대로 길고 우묵하게 파낸 것으로 암 마구리를 귀를 달아서 외양간의 기둥 사이에 고정시킨다. 통나무를 파서 구유를 만들어서 나무가 마른 과정에서 터지기 때문에 2~3년 동안 그늘에 두어 오줌 따위를 받아 두었다가 사용했다. 구유를 예비 구유를 하나 더 만들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사랑채 부근에 두어 오줌을 받는데 썼다. 이를 오줌구이라고 한다. 농가에서는 외양간에서 흘러나오는 쇠지랑물을 구유에 받아 두었다가 거름에 쓰기도 하였다.
강원도 정선군 일대에서는 구유의 머리 부분에 구능장군이 깃들어 있다고 믿어서 어린이가 병에 걸렸을 때 이곳에 물을 떠놓고 빌면 아픈 것이 낫는다고 믿었다. 이웃집에서 고기 따위의 맛있는 음식을 가져왔을 때 구유 머리에 가서 '여봐 궁(구유의 방언)' 하고 먹으면 탈이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소가 더위를 먹었을 때 구유에 진흙을 바르고 진흙물을 강제로 입에 들이붓으면 더위병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그래도 낫지 않으면 구렁이를 잡아 둘글게 감고 진흙과 구유에 붙여두면 더위 먹은 게 낫는다는 풍습이 있었다. 소는 진흑 사이로 흘러나오는 구렁이의 썩은 물을 먹게 되면 더위는 곧 낫는다고 믿어 처방으로 썼다.
경기도 영평군 강하면 성덕리에서는 소가 개 떨듯이 심하게 떨며 열병을 앏을 때 '지랄병 걸렸다' , '귀신이 붙였다' 하여 구유 머리에 밥과 미역국을 차려 놓고 이것을 먹은 귀신은 반드시 물러난다고 믿고 있다. 강원도 고성군에서는 구유 위에 한지를 접어 걸고 이를 '구융남' 이라고 부르며 따로 모신다.
구유의 구는‘그릇’을 뜻하며 유는 구유 조(槽)로써‘통’을 말한다. 그릇이 구시 또는 궁이로 구시가 구유로 변천했다. 조에는 목욕을 하는 욕조(浴槽), 목욕물을 받아두는 탕조(湯槽), 물을 담아두는 통인 수조(水槽), 기름을 저장하는 유조(油槽), 전극과 전해액을 넣는 전해조(電解槽), 술을 담는 주조(酒槽), 온도를 항상 일정하게 유지하는 항온조(恒溫槽), 기름을 실어 나르는 유조선(油槽船), 높은 곳에 고인 빗물이 흘러 아래로 떨어지도록 하게 한 석루조(石漏槽) 등이 있다. 기축에게 먹이를 주는 그릇의 구유통, 술을 담아두는 술통, 술 빚은 그릇통, 물을 담아두는 물통, 곡식을 빻거나 찧으며 떡을 치기도 하는 절구통 등이 이에 해당된다.
금정 용흥리 안기 마을 구시걸처럼 평안북도 의주군 홍남리 서쪽 문장교와 8.15마을 사이에 있는 고개가 있다. 고개가 구유통처럼 움픅하게 생겼다하여 '구시통고개' 또는 '구유통고개' 라고 부르고 있다. 양강도 운흥군 용포노동지구 동쪽에 '구시홈' 이 있다. 산 모양이 구유처럼 생겼다.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산아촌 동북쪽에 있는 구아 마을은 지형이 구유(구시)처럼 생겼다하여 구시라고 하는 구시골에 마을이 들어섰다. 충청남도 금산군 남아면 하금리 하금천 마을 남쪽에 '구수골산' 이 있는데 산에 소 밥통인 구시처럼 생긴 '구수골' 이 있는데다가 산 자체가 모양이 구시처럼 생겨 이름을 '구수골산' 이라고 붙여 불리게 되었다.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에 와우리라는 누운고개가 있는데 와우리 구시울은 마을 지형이 구시처럼 생겼다하여 생긴 이름이다.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구시골은 마을 형국이 구시와 같다하여 붙은 명칭이다.
경상남도 합천군 용주면 구시골,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구수 마을, 경상남도 창녕군 유어면 풍조리 마을, 전라남도 순천시 서면 압곡리 마을, 경상남도 전주시 내동면 삼계리,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봉소리 조동 마을, 경상북도 상주시 내서면 고곡리 구이골, 전라남도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귀골 마을, 잔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 자귀바락,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법정리 기동 마을,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내계리 내구 마을 등 전국 곳곳에는 구시(구유)형국을 한 지형들로 인하여 지명을 쓰고 있다.
금정 용흥리 안기 마을의 구시걸은 경상남도 합천군 대양면 조동 마을의 구시 마을처럼 소가 구시에 엎드린 모습이 아닐까한다.
구시걸
구하고자 하는 것마다 얻으리라
시하고자 하는 것마다 보이리라
걸하고자 하는 것마다 넘치리라
구하는 것이 보이니 걸게 하도다
*신북 갈곡리 우정-소가 우물을 마시는 형국
영암군 신북면 갈곡리 '우정 마을' 은 산세가‘소가 물을 먹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소 우(牛), 우물 정(井)자를 써‘우정(牛井)’으로 기록되어오다가 입향조인 광산김씨들이 이거하고 300년 전에 전주이씨 이만백이 함안박씨와 함께 정착한 뒤에 우정의 정(井)자를 정자 정(亭)로 변경하여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우정 마을은 가구 수가 많지 않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가구 수는 적어도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훌륭하게 사회에 진출한 분들이 많이 나왔다.
우정 마을의 샘은 우물이 철철 넘쳐흐를 정도로 샘물이 솟아나고 있다. 우물이 넘쳐흐른다는 것은 재물 운이 상승한다는 것이다. ▶우물을 마시는 꿈은 길몽으로써 좋은 소식을 들여올 길한 꿈으로 본인이 준비하던 시험, 승진 및 취업과 같은 시험에 합격하거나 입학, 결혼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불교 경전인‘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에 적힌‘소는 물을 마시고 젖을 만들고 뱀은 물을 마시고 독을 만든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직역하면‘소는 물을 마시고 젖을 만드나 뱀은 물을 마시고 독을 만든다’라는 말이다. 소는 자신의 새끼를 먹어 살릴 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도움을 주는 우유(善)를 만들어내지만 뱀은 그 물로 남을 해치는 독(惡)을 만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우정 마을의 우물을 뱀이 아닌 소가 마셨으니 필시 소는 물론 인간에게도 이로운 일이 생길 것이라는, 소가 우물을 마시는 형국을 한 '우정(牛井)' 마을이다.
*신북 명동리 와우동-큰 암소가 누워있는 형국
신북면 명동리 '와우동 마을' 은 소룽골, 서룽골로 불렀던 마을로‘큰 암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 하여 엎드릴 와(臥), 소 우(牛), 골 동(洞)자를 써 와우‘(臥牛洞)’이라 부르고 있다. 와우동은 백용산령(白龍山嶺)을 따라 오봉산(五峰山) 줄기에 조선 중엽에 여러 성씨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이 마을이 소처럼 한가롭고 넉넉한 아늑하고 포근하다.
*도포 성산리 우산정-와우형국
영암군 도포면 성산리 '용동 마을' 남쪽에 있는‘우산정(牛山亭)’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우동(牛洞)이라는 마을과 함께 존재했으며 이 마을은 영암군 북일종면에 포함되었다가 1919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도포면 성산리로 병합하였다. 1920년경에 폐동이 된 우산정은 뒷산이‘소가 누워있는 모습’의‘와우(臥牛)’형으로 되어져있어 지명으로 부르고 있다.
*도포 수산리 목우동-소 구수통형국
도포면 수산리 '목우동 마을' 은 선불 동쪽에 있는 마을로 풍수지리설에 의하여‘쇠구시통’의 형국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쇠구시들’이라 부르다가 한문으로 지명이 바뀌면서 기를 목(牧), 소 우(牛), 골 동(洞)자를 써‘목우동(牧牛洞)’이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이 마을이 소를 많이 사육하고 있어 지명처럼 변화된 마을이다.
*도포 수산리 쇠낀양골-소코형국
도포면 수산리 '유수동' 서쪽에는 '쇠낀양 굴' 이 있는데 골짜기 지형이 마치‘소코’처럼 생겼다하여‘쇠낀양골’로 불리어지고 있다. 쇠낀양 굴은 골자기 쪽에 코뚜레를 한 소가 있다는 뜻이다. 소가 코뚜레를 낀 것마냥 모습을 하고 있다고 봤다.
소코를 닮은 쇠낀양 굴을 자세히 살펴보면 콧등 부위에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정면으로 봤을 때 우측 코에 묘가 들어서 있다. 좌측에는 건물 하나가 있다.
사람에게 있어서 코는 코가 시작되는 부분이 산근(山根)이고 코끝이 준두(準頭)이다. 코는 중앙에 위치한 군주이다. 사람에 있어서 코의 관상은 '재백궁(財帛宮)' 이라고 한다. 재백궁은 재는 재물을 나타내며 백은 비단. 즉 의복을 나타낸다. 재백은 재물 또는 호화로움을 나타낸다. 재백궁인 코는 재물의 재운(財運)이나 금운(金運)을 볼 때 가장 중요한 포인트로 여겨지고 있다.
코 아래의 인중의 양쪽 결을 식록(食祿)이라 하여 재산이나 생활의 풍요도를 판단한다. 재백궁은 명궁(命宮)과 같이 사업운을 보는 중요한 곳으로서 ▶재백궁이 큰 사람은 커다란 계획을 수립하여 대규모인 사업에 성공하는 상이다. 또한 셀러리맨의 경우에는 큰 회사에 입사하는 것이 좋은 기회를 얻게 된다. ▶코 끝에 검은 사마귀가 있어도 보통은 보기 힘든 곳이지만 이러한 사마귀를 가진 사람은 재운이나 금운에 혜택이 있으므로 중소기업의 경영자일 경우에는 원래 재산이 있었거나 없어도 자금난을 겪지 않을 사람이라고 한다. 귀인 가운데 코가 낮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천한 사람은 코가 낮은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재백궁은 돈을 벌고 돈을 관리하는 곳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금전적인 문제는 '재백궁' 을 살피고 부동산 등을 살필 때는 '전택궁' 을 살피고 금전이나 가옥 드에 대한 정신적 만족감을 살필 때는 '복덕궁' 을 살펴야 한다. 또 생명의 원천은 재(財)이다. 재는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영양분을 제공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건강을 살필 때는 '질액궁' 을 보지만 재백궁을 참고해야 개인의 건강 문제를 더 잘 살필 수가 있다고 한다.
▶코가 작은 사람은 자존심이 강하고 마음 씀씀이도 좋지 못하고 고생을 많이 한다고 한다. ▶코가 풍요롭고 크면서 길어 보이는 사람은 반드시 신분에 상응하는 복과 운이 있고 마음이 풍부하기 때문에 장수하지만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게 된다고 한다. ▶코가 살집이 없고 말라 보이는 사람은 그 신세도 풍부하지 않기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게 된다고 한다. ▶콧망울이 발달한 사람은 운세가 강하고 위험을 만나도 헤쳐나갈 수 있으며 실패의 운이 들어와도 주변의 도움을 받아서 재기하게 된다고 한다. ▶콧망울이 발달한 사람이 가난한 상을 가지고 있어도 결코 가난하지 않으며 신분이 상승하게 된다고 한다. ▶콧망울이 발달한 사람을 배우자로 만나면 좋다고 한다.
콧구멍, 입구멍, 눈구멍, 귓구멍, 자궁, 항문 등은 강하(江河)의 기운이 모이고 발산하는 곳으로 여기고 있다. 신체는 자유롭게 활동하고 눈은 천지만물을 보며 귀는 소리를 듣고 코는 냄새를 맡고 입은 말하고 먹는 즐거움을 부여받았다. ▶코는 폐 기능이며 재물복 유뮤와 인간성, 의협심, 자기 주장 행동의 강약을 상징한다고 한다. ▶코가 크면 지배력이 있어 타인을 부릴 줄 알고 그래서 정복자들은 코가 크다고 한다.
코는 냄새를 맡은 기능을 한다. 후각 말고도 호흡에 있어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코로 냄새를 맡고 코로 숨을 쉬고 하는 신체 부위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부위다. 코는 코뿌리, 콧망을, 코끝, 콧구멍, 코중격으로 구분한다.
소의 코는 콧등 부위에 항상 젖어있다. 땀방울처럼 송골송골 맺혀져 있다. 소가 콧등에 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소가 건강하다는 표시라고 한다. 콧등이 촉촉해야 만이 음식 냄새나 소화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소가 혀로 콧등과 콧구멍을 수시로 핥은 것은 수분이 촉촉해야 건강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를 사오게 되면 행주로 소 입을 닦아줬다. 사온 소가 내 집의 음식에 냄새를 맡고 집에서 준 음식을 잘 먹게 하려고 그랬다. 다른 집의 음식에 입맛 길들어진 소가 다른 집의 음식 냄새를 맡고 준 음식의 냄새가 달라 잘 안 먹기 때문이었다.
어릴 적 소는 두엄 밭에 누워 있거나 마당에 누워 있거나 풀밭에 누워 있으면서 놀거나 휴식을 취했다. 되새김질하는 것을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으면 소는 꼬리를 자기 몸을 쳐된다. 파라를 쫒기 위해사다. 피를 빨아 먹은 쇠파리다. 여름 밤이면 모기에 안절부절 가맘히 있지를 못한다. 소는 콧등에 맺힌 땀을 핥는 듯하더니 콧 속으로 집어 넣는다. 위방에 채워놓은 음식을 다시 입으로 꺼내어 되새김질을 해된다. 음식을 되새김질할 때 입가엔 하얀 침이 밖으로 질질새어 나와 소 입은 음식으로 범벅 침으로 범벅이 된다. 먹이로 준 짚이 맛 있는 건지 소는 쉼 없이 입 속으로 집어 넣어 된다. 질근질근
쇠낀양 굴은 소 코를 닮았다. 소 콧등에 건물이 있고 콧구멍에는 묘가 있다. 풍수적으로 보면 재운이 있는 형국이다. 콧등에 건물이 들어섰으니 건강운이 있고 콧구멍에 묘가 들어섰으니 이 역시 건강운이 있다. 냄새를 맡은 부위에 묘를 써 냄새에는 탁월한 재주를 지녔다는 것이다. 또한 코는 숨 쉬는 기능을 함으로 폐의 기능을 튼튼히 하여 모든 신체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것이다. 촉촉한 콧등, 촉촉한 콧구멍을 한 건강운 과 재물운이 있는 명당이다. 또한 쇠깐양 굴 우측 콧등 부위에 검정색 지붕을 한 건물(파란 테두리)이 사마귀인 셈이다. 콧등에 사마귀는 재운이나 금운을 나타낸다. 쇠끼양 굴이 있으니 반드시 코 밑에는 입이 있을 것이다. 소의 입이 있다는 것은 그곳에는 먹을 음식이 있다는 뜻이다. 먹을 음식이 있어 소가 굷지 않고 배부르게 건강하게 자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수동 마을은 굶주리지 않게 살만한 마을이며 배가 고프지 않아 삶이 편안하고 넉넉함으로 인한 여유로움마저 넘치고 있다. 건강운과 재물운이 있는 명당이다.
*시종 금지리 우두-소머리형국
영암군 시종면 금지리 '우두 마을' 은 지금은 인가는 사라지고 없지만 나지막한 산이었던 이곳의 지형이‘소머리’처럼 생겼다하여‘쇠머리산’으로 불렀으며 소 우(牛), 머리 두(頭)자를 써‘우두(牛頭)’로 불리어지고 있다. 우두는 시종면 명산 9두 중 1두였을 정도로 아름다운 산세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인가도 없고 인가 대신 경작지로 변해버렸다.
*시종 와우리 와우-소가 누워 되새김형국
시종면 와우리 '와우 마을' 은 마을 앞산의 생김새가‘소가 누워 되새김을 하고 있는 형국’을 하고 있다하여 마을 이름을‘누리’라고 부르며 엎드릴 와(臥)자와 소 우(牛)자와 마을 리(理)자를 써‘와우리(臥牛理)’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와우리 마을은 뜻과 같이 소가 되새김을 하듯이 와우리 마을 앞에 간척사업으로 배들이의 넓은 들이 있어 논을 이용하여 벼와 보리농사를 많이 짓고 있는 풍요로운 마을이다. 소의 되새김은 소가 음식을 뱃속에 가득 채워놓고 오래 씹을 정도로 먹을 풀이 많았다는 뜻일 게다. 농사를 지울 농토가 많으니 이 어찌 풍요롭지 아니하고 먹을 양식이 많은 고장임을 지형은 말해주고 있다.
와우 마을은 대부분 낮은 산지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 편에 삼포강이 흐르고 그 우측에 간사지들이 있다. 북쪽에 신게들이 있으며 동쪽에 당큰지들, 서쪽에 간사지들이 있다.
소는 되새김을 하는 동물이다. 되새김은 한번 삼킨 먹이를 다시 게워 내어 씹는 것을 말한다. 소나 염소 따위와 같은 소화하기 힘든 섬유소가 많이 들어있는 식물을 먹는 포유류에서 볼 수 있다. 되새김 위는 반추(反芻) 동물의 4개 위(胃) 중 제1위와 2위, 반추위가 있다. 포유류 소목의 일부인 소, 기린, 사슴, 염소 등의 초식동물에서 볼 수 있는 특수한 소화관(위)이 있어 되새김질을 하게 된다. 되세김을 하기 위해 혹위(곰양).벌집위(그물위, 절창).겹주름위(천엽).주름위(막창) 등 4개의 방으로 나누어 있다. 이를 두고 되새김위라고 한다. 한번 삼킨 음식을 다시 입안으로 토하여 잘 씹은 후에 삼키는 것을 반추라고 하고 이런 위를 반추위라고도 한다. 위는 반추(되새김)를 하기 위하여 보통 4개의 방으로 나뉘어 앞에서부터 혹위.벌집위.겹주름위.주름위라고 한다. 위는 앞에 있는 둘은 식도가 변한 것이고 뒤의 둘은 본래의 위이다.
혹위에는 미생물이 공생하고 있어서 풀의 거친 셀룰로스를 분해한다. 벌집위는 내벽이 벌집같이 구획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음식물이 뭉쳐서 다시 입으로 돌아간다. 재차 씹은 음식물은 겹주름위로 들어가 잘게 부서져 주름위로 들어가 소화된다. 반추는 보통 음식을 먹은 후 휴식 시에 행해진다.
되새김(rumination), 씹기이다. 음식을 섭취할 경우의 씹는다고 한다. 시종 와우리 와우 마을이 소가 누워 되새김하는 형국이라니 ▶꿈에 소가 되새김하거나 토하는 것을 보는 것은 작은 투자로 많은 이득을 보거나 해결되지 못했던 것들이 순조롭게 해결될 것이라고 한다.
되새김은 지난 일을 다시 떠올려 골똘히 생각할 때 되새김한다고 한다. 성경 시편에 의하면 신자들이 하느님의 위대하신 업적을 되새기는 것은 참된 신앙을 유지한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신약시대에는 구약의 전통을 넘어서 미사 앞에서 그리스도 구원의 십자가에 현실적으로 동참하는 것을 뜻한다. 예수를 되새긴다는 것은 예수와 생명을 함께한다는 뜻이다. 되새긴다는 기억을 떠오른다는 것이다.
소는 8가지 덕목을 갖춘 동물이다.
▶제1덕으로 서두르지 않고 꾸준함을 지녔다.
소는 더디지만 꾸준하여 멀리 간다는 뜻이다
▶제2덕으로 돌밭이건 진창이건 가리지도 피하지도 머뭇거리지도 않고 간다.
한번 방향을 정했으면 많은 장애가 있어도 그것을 극복하고 오로지 한방으로 매진한다는 뜻이다.
▶제3덕으로 한번 섭취한 음식을 다시 꺼내어 재 씹어 소화를 시킨다.
자신이 하는 일을 되새겨 그 잘못을 반성한다는 뜻이다.
▶제4덕으로 자애롭다.
언덕에 어미소와 송아지가 나란히 누워 있는 평화로움을 느끼듯 어미소가 세끼소를 핥는 지독지애(舐犢之愛)를 뜻한다.
▶제5덕으로 재물을 안겨다 준다.
소는 재산목록1호라 할 만큼 재산을 불게 한 가축으로서 중요시했다. 소꿈은 재산을 늘려줄 길몽이다. 묘지풍수에서도 와우형이면 자손이 부자가 될 것리는 뜻이다.
▶제6덕으로 불행과 병을 물고 오는 귀신을 막아준다.
소 뼈다귀를 문전에 걸면 악귀가 집에 못 들어올뿐 아니라 코뚜레를 문전에 걸면 귀신이 무숴워 도망친다는 뜻이다.
▶제7덕으로 잡다한 세상사에 초연하게 유유자적한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을 표방할 필요가 있을 때는 반드시 소가 끼어든다. 도교나 선인들이 소를 타고 나타남도 그 때문이라는 뜻이다.
▶제8덕으로 초월자의 과정을 인간에게 교사한다.
속세로부터 선의 경지에 이르는 십우도(十牛圖)가 있다. 소를 찾아 나섰다가 소를 길들여 타고 돌아오는 동안 소를 잊어버리고 이어 자신도 잊어 초월의 본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8가지 덕목을 갖춘 소처럼 되새김 해봤으면 한다.
시종 와우리 와우 마을은 사방으로 농토가 발달되어 있다. 소가 배불리 먹을 정도로 많은 곡식과 풀들이 산재해져 있다. 소가 배가 빵빵하게 부를만큼 음식을 먹었으니 누워 되새김을 아니할 수가 없다. 되새김을 할 정도로 풍족한 곡식이 많이 생산하는 와우 마을은 가난하게 살지는 않는다. 항상 속이 든든함이 있는 생활이 넉넉함이 넘치는 한가롭고 풍요로운 마을이다. 소가 있는 곳은 그만큼 그자리에는 먹을 것이 풍족하다는 것이다.
음식을 먹고 나면 힘이 나듯이 소도 음식물을 섭취하여 소화촉진 및 흡수를 위해 되새김을 하니 기운을 찼게 될 것이다. 소는 소화를 돕기 위해 되새김 할 위를 4개나 갖고 있지만 와우 마을은 소가 되새김을 할 정도로 거둔 곡식이 풍족해 곡식을 보관할 창고도 클 것이고 창고에 곡식이 가득하는 만큼 그만큼 현금도 두북할 것이다.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이니 소가 음식을 섭취하고서 편안하게 누운 채로 되새김을 하며 쉬는 모습은 우리 인간이 닮고 싶은 심정이다. 와우 마을은 소가 되새김하며 누워있는 '와우(臥牛) 형국' 이니 이 곳에서 태어났거나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반드시 풍족하고 편안한 삶을 누릴 것으로 보인다.
되새김
되로 주고 말로 받네
새로 왔고 기쁨 일세
김남 있고 넉넉 할세
씨앗을 되로 뿌렸는데 수확은 말로 얻어내는 대풍이요
곡식이 독에 가득하니 기쁨이 새롭게 더더 느껴지도다
김나듯 피어나는 넉넉함이 이루말할 수 없이 크네그려
시종 와우리 와우 마을 앞에 있는 산이 소가 되새김하는 형국이다. 소가 되새김질을 할 정도로 먹을 음식이 많다는 뜻인만큼 그만큼 소화를 시킬 일도 많은 부족함이 없는 마을이다.
*시종 와우리 우정-소의 아래 마을
시종면 와우리 우정 마을은 와우 마을에서 안산 잔등을 넘어가면 아담한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이 소의 아래라 하여‘소아래 마을’로 부르고 있으며 한자로 소 우(牛), 우물 정(井)자를 써‘우정(牛井)’이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시종 봉소리 구싯골-소 구시형국
시종면 봉소리 '조동 마을' 은 웃조동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구시(구유)처럼 생겼다하여‘구싯골’로 부르고 있다.
*시종 신학리 우암-서바우를 제물로 바침
시종면 신학리 '우암 마을' 은 일명 소바우라고 하는 이 마을은 영산강의 지류에 우암제(牛巖堤) 제방을 막아서 농사를 지었는데 조수가 왕래하고 농사철에 많은 비가 내려 제방이 자주 무너져서 농사를 망쳐 버리므로 마치 지나가던 도사가 이곳 사람들에게 사람을 제물로 하여 제(祭)를 올리면 그러한 일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서암(徐巖)이라 하는 어린소년을 제물로 하여 제를 올렸다는 전설이 있는데 후세 사람들이 서바우를 제물로 하였다하여‘서바우’라고 부르던 지명이 소를 상징하는‘소바위’로 바뀌며 마을 지명을 소 우(牛), 바위 암(巖)자를 써‘우암(牛巖)’이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주거지 혹은 성벽의 건축과정에서 사람을 제물로 사용한 습속(習俗.예로부터 어떤 사회나 지역에 내려오는 고유한 관습과 풍속)은 고대 중구(BC 1600~1000년쯤, 산나라)에서 성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 제방이나 건물의 축조와 관련된 인주설화(사람을 기둥으로 세우거나 주춧돌 아래에 묻으며 제방이나 건물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내용의 설화)로 전해져 오고 있다.
시종 신학리 우암 마을의 우암제 서바우처럼 사람을 제물로 바친 것으로 보이는 김제 벽골제 저수지에도 인골이 발굴됐다. 신라의 천년 왕성인 월성(사적지 제16호) 상벽에서 약 1500년 전 제물로 묻은 것으로 추정되는 인골 2구가 발견되기도 했다. 발굴된 인골은 월성 축적 때 제물로 바쳤다.
또한 설화이지만 신라 에밀레종의 얽힌 설화가 이채롭다. 성덕여왕 신종(국보 제29호)을 만들기 위해 엄청난 비용이 필요해서 스님들이 시주를 받으려 다녀야했다. 또한 성덕여왕의 업적을 기릴 만한 종을 만들어야했기에 신경을 써야했다. 경덕왕은 스님들한테 "이 종은 선왕이신 성덕여왕을 기리기 위한 것이오, 그런데 종소리가 어째서 이리 탁하단 말이오, 종소리가 이래서야 되겠소이까" 하며 경덕왕이 옷자락을 팽하니 뿌리치며 성큼 자리를 떠나 봉덕사 스님들은 화가난 경덕왕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허리를 구부리며 곰짝도 하지 않은 채 반성을 해야했다.
그런 상황에 주지 스님이 말문을 열며 "종이 제대로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다 정성이 부족해서 입니다" . "스님들이 더욱 더 힘을 내서야 되겠습니다" . "지금 바로 시주를 모아 오세요" 라고 시주에 나서라고 독촉했다. 이 말을 듣고 한 스님이 "좋은 종을 만들려면 정성어린 시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저희들이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신라의 백성들은 가난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 그러자 다른 스님들도 "맞습니다" . "귀족들은 사치를 누리고 있지만 백성들은 가난하여 매일 끼니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 "그런 백성들에게 시주를 얻는 것은 힘들뿐 아니라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라고 스님들은 모두 근심어린 얼굴로 백성들을 염려했다고 한다. 스님들은 경덕왕이 죽을 때까지 제대로 울리는 종을 만들지 못헀다.
경덕왕의 뒤를 이은 혜공왕이 다시 봉덕사를 찾아 아직도 비어 있는 종루를 바라보며 스님들에게 부탁을 했다. 혜공왕은 스님들에게 "스님 경덕왕의 아버지 꿈을 꼭 이루어 주길 바랍니다" . 간곡히 부탁하자 스님들은 종을 만들기 위해 다시 시주를 받으러 다녔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시주를 해 주십시오 하며 목탁을 쳤다. 그러면서 시주를 열심히 이집 저집을 찾아 받아내고 있는데 그런데 어느 가난한 집 부인이 시주를 받으러 문을 두드린 스님에게 "마음 같아서는 시주하고 싶지만 있는 것은 갓난아이 뿐이니 이 아이라도 시주 받겠냐" 고 아이를 건네려고 했다. 그러자 스님은 깜짝 놀라며 "아, 아닙니다. 아이를 시주로 받을 수는 없는 일이지요" 라고 발길을 돌리며 그 집을 떠났다고 한다.
주지 스님은 다른 집을 부지런히 찾아 다니며 시주를 모았고 모은 시주는 종 제작하는데 보텠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종은 또 완성되지가 않고 실패를 거듭하기 일쑤없다. 그 원인이 도도체 어디에 있는지 궁금했고 주지 스님은 무슨 일이라도 있다는 건가하며 이상하게 여겨 점쟁이 집을 찾아 점을 쳐보기도 했다.
어느 날 밤 주지 스님은 꿈을 꾸었는데 감깜한 하늘에서 한 줄기 빛과 함께 이런 소리가 들렸다. "봉덕사의 종을 제대로 울리려면 그 아이가 필요하니 어서 데려오거라" 너무나 생생한 꿈을 꾼 주지 스님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나 밤새 고민을 했다. 마치 점괘도 받을 시주를 안 받아서 그랬다는 점쟁이의 말이 있었다. 주지 스님은 점쟁이의 말에 중얼거리며 "시주라, 무슨 시주를 내가 안 받았단 말인가" 골똘하게 생각한 주지 스님은 "아차 그래 맞아 시주할 게 없다고 아이를 시주하겠다고 해서 그건 안 된다고 했지" 하며 "맞아 맞아 그래 그래" 하며 문득 갓난아이를 시주하겠다던 부인이 떠올렸다. 꿈과 같은 점쟁이의 말도 있었고 하여 주지 스님은 날이 밝자마자 곧바로 이른 아침부터 절을 떠나 아이를 시주하겠다던 부인의 집을 다시 찾아 목탁소리를 크게 내며 "부인 전에 말씀하신 아이를 시주로 내어 주시겠습니까" 거듭 묻자 부인은 "꼭 이 아이를 원한다면 보내 드리겠습니다" . 부인은 아이를 내어 주며 눈물을 훌렸다. 눈물을 흘린 부인을 보고 주지 스님은 "모든 것이 부처님의 뜻이니 슬퍼하지 마십시오" 하며 주지 스님도 흐르는 눈물을 감추며 부인을 위로했다.
얼마 후 봉덕사에서는 새로운 종을 만들기 위해 종의 형틀을 만들고 쇠물을 다시 녹이고 있었다. 부인한테 시주를 받은 아이를 쇳물에 집어 넣었다. 주지 스님은 "부디 좋은 세상에 태어나 행복하게 살거라" 아이의 넋을 위로하는 기도를 올렸다.
그 쇳물로 종을 만들어보니 신기하게도 그제서야 제대로 된 종이 완성됐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종소리는 엄마를 간절하게 부르는 아이의 소리 같았다. 종소리를 들은 모든 사람들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놀라워할 때 부인이 덜썩 주저앉으며 목놓아 울었다. 부인은 "아가야, 네가 나를 원망하는구나 이 어미를 용서해다오" 부인은 "아가야 네가 에밀레 에밀레 하고 나를 부르는구나 부디 용서해다오" 하며 흐느끼며 슬퍼했다.
성덕여왕 신종 에밀레종은 국보 29호로 지정될 만큼 1500년이 지났어도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통일신라 시대의 범종(梵鐘)으로 현재까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범종 중에서 가장 크고(높이 3.7m, 무게 18.9톤) 화려하다. 상원사 동종과 함께 통일신라 시대의 대표적인 종이다. 성덕영왕 신종 에밀레종에 조각된 비천 상은 신라의 여러 문영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비천상(飛天像)은 불교(佛敎)의 천국(天國)에서 허공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고 춤추면서 꽃을 뿌려 부처님을 공양(供養).찬탄(讚嘆)하는 천인(天人)의 일종이다. 천의(天衣)를 휘날리며 허공에 떠 있는 비천상은 마치 도교설화 속에 등장하는 선녀(仙女)를 연상케 한다. 상상컨데 에밀레종에 새겨진 비천상의 천인은 부인이 시주한 아이가 아닌가한다. 그 아이가 에밀레종으로 환생한 듯하다. 손을 모으고 있는 모습이 마치 그 아이는 평화롭고 영화로운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으로 비춘다.
에밀레종을 치면 칠수록 에밀레 에밀레 하며 소리는 긴 여운으로 우리 귀에 남을 것이다.
이후 종은 어미를 원망하는 아이가 우는 소리처럼 "에미 탓, 에미 탓, 에미 탓" 하는 소리를 내며 종이 진동을 크게 내며 여운을 길게 냈다고 한다. 에미 탓이란 소리 언어가 순화되어 '에밀레' 로 바뀌었고 성덕여왕 신종을 에밀레종이라고 했다는 얽힌 설화다. 사람을 제물로 바쳐 무너진 제방을 막고 건물과 성벽을 튼튼히 하고 심지어 좋은 종을 만들어내는데 희생제물로 한 것이다.
에밀레종에 대한 설화는 과학적으로 입증한 결과 사람 등 어떠한 철 이외는 불순물이 들어가 있지 않는 걸로 판명됐다. 불순물이 들어가게 되면 쇠는 기포가 생겨 쇠의 조직이 일정치가 않아 소리가 둔탁하게 나는 등 맑은 음도 나지도 않고 소리의 여운이 짧다고 한다.
그런 설화는 꾸며진 이야기로써 구전에서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 마치 종소리가 어린애가 우는 소리처럼 들린다하여 그랬을 것이라는 학자들의 추론이다. 그렇다고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라는 일부 학자들은 주장을 하고 있다. 학자들은 갓난아이와 전혀 관련이 없다고는 볼 수 없다는 설도 조심스럽게 내놓고 있다. 쇳물에 아이를 넣지는 안 했지만 종을 만들기 위한 희생제물로 바쳤을 것이라는 예단을 하기도 한다. 좋은 종을 만들기 위해 제단에 아이를 바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 연유로 종소리가 마치 어린아이가 우는 소리로 들려 그 소리를 듣고서 아이를 희생시켜서 그렇게 소리를 냈다고 여겨 제단에 바친 어린아이를 왜곡하거나 와전된, 어린애를 쇳물에 넣은 걸로 소문이 났으리라는 설화를 풀어보고 있다. 학자들은 여러 정황을 파악해 보면 어린아이를 쇳물에 넣었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일로써 헛 소문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우리나라 최고 역사기록서인 삼국유사에도 에밀레종이 어린아이를 희생제물로 바쳤다는 설화적인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제단 위에 바친 것을 설화에서는 쇳물(용광로)에 집어 넣다는 걸로 보면 아마 성덕여왕 신종에 희생된 어린아이를 주민들은 불쌍하게 여겨 그렇게 소문을 냈으리라는 추리를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종소리마저 그렇게 어린아이가 슬피 우는 소리처럼 들렸으니 말이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풍습은 고대로부터 성행했다. 어린아이를 집단의식에 의해 산 채로 신에게 바치는 등 희생제물로 삼았다. 사람을 매장하거나 사람의 목을 잘라 그 피와 함께 벤 목을 제단에 올리는 등의 습속은 발굴조사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잉카문명의 전후에 희생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영아 유해 44구를 발견하거나, 페루 수도 라마에서 남동쪽으로 1300Km 가량 떨어진 '푸노' 지방을 통치했던 '코야문명' 시대에 살았던 고고학 유적지에서 지금까지 200여 구의 유해가 발견되기도 했다.
시종 신학리 우암 마을의 우암제를 위한 서바우(어린아이 이름)의 희생제물은 여타 제방에서 사람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방식과는 거의 다를바가 없다. 사람을 제물로 바쳐야 만이 비로소 안전하게 완성되고 오래 유지되어햐만 했던 제물신 사상에 의지를 해야먄 했던 희생제물은 어쩜 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위대한 희생이 아닌가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제우스에게 인간을 제물로 바쳤다. 희생양 같은 가축을 제물로 바치던 터인 뤼케이온 산에서 3천년 전 정도 추정되는 10대 청소년의 유골을 발견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고대 고고학자들은 고대 이스라엘, 로마, 이집트에서는 종교적 의미로 인간을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 또한 남미 페루에서 재물로 바쳐진 어린이들의 유골이 대량으로 발굴돼기도 했다. 아즈테카문명과 마야문명, 잉카시대에도 사람을 제물로 바친 종교의식이 성행했다. 인간을 제물로 바친 것이 하나의 관습이었다. 아이들이 제물로 바쳐진건 지금으로부터 550년 전 차무제국이 번성했을 때로 추정되고 있다.
시종 신학리 우암 마을뿐만 아니라 영암 여러 곳에서 사람과 소 등 짐승을 제물로 바쳤을 것으로 보인다. 희생제물로 인하여 탈 없기를 바라는 기우제, 산신제 등을 위한 돼지를 제물로 바치는 일종의 토속신앙으로서의 제물신을 모셨다.
*영암읍 회의촌 냇가-소바우
지명이 아닌 바위에도 소에 관련된 것을 보면 영암군 영암읍 회문리 '회의촌' 서남쪽 냇가에 있는 바위가 소를 닮았다하여‘소바우’라고 부르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두고 영험한 기운이 상승하여 마을의 지켜주는 수호신(守護神)으로서 평화롭게 하고 융성하게 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회의촌은 명지(名地)라고 볼 정도로 입신양명을 한 악성으로 불리는 가야금산조 창시자 김창조, 바둑계의 국수 조훈현, 해병대사령관 강기천 장군 등 큰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고 있다.
소는 영험한 동물이다. 2021년은 신축년의 소의 해여서 소와 관련한 지명이나 명물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2021년은 신축년 소띠 해다. 소띠 해는 을축(乙丑), 정축(丁丑), 기축(己丑), 신축(辛丑), 계축(癸丑)의 순으로 육십갑자에서 순환한다. 십이지의 동물인 소는 발향으로 북북동, 시간적으로는 새벽 1시에서 3시, 달로는 음력 12월을 지키는 방향신(方向神)이자 시간신(時間神)이다.
많은 사람들이 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곤 한다. 소에 관한 전설, 소에 관한 에피소드, 소에 관한 그 용도 등에 대해 알고 싶어 하고 알고 있듯이 쏟아낸다. 우리 조상들은‘소가 말이 없어도 열두 가지 덕(德)’이 있다고 했다. 여유와 평화를 부르는 소, 소는 제주고 심성혈 신화, 고구려 고분벽화 등에서는 소가 농사신(農事神)으로서 인식되는 등의 부와 풍요와 힘을 상징한다. 농경사회인 우리 민족에게 소는 농사일을 돕는 일하는 짐승으로 부와 재산과 힘을 상징하고 있다.
소에 관한 세시풍속이 많은데 소를 위하는 놀이에서도 소는 풍요를 가져다주는 동물로 농가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자산(資産)으로 여길 정도로 풍부한 노동력을 의미한다. 새해에는 풍년을 기원하며 가을 한 해 동안 고된 농사일에 대한 위로와 풍년을 가져오게 한데 대한 감사로 각종 풍속과 민속놀이가 마을마다 행해졌다.
소는 실지 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마음부자가 되는 듯이 하는데 꿈에 나타난 소도 어찌나 반가울 수가 없다. 꿈에 황소가 자기 집으로 들어오면 부자가 된다고 한다. 소의 형국에 묏자리를 쓰면 부자가 된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을 통해서 볼 때도 분명 소는 풍요를 가져다주는 부(富)의 상징으로 인식됐다.
소는 희생(犧牲)과 제물(祭物)과 축귀(逐鬼) 나타내고 있다. 소의 희생은 희(犧)와 생(牲)은 약간 다르다. 희는 소의 기운, 즉‘의(義)’라는 뜻이다. 제사를 지낼 때 소를 바침으로써 신으로 하여금 소의 기운을 누리게 하기 위해 의미를 달리하여 소의 희생을 값지게 봤으며 소를 중요시했다.
한편 생(牲)은 소중에서도 살아있는 소를 뜻하며 그것은 소를 잡아 고기를 바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소를 바쳤다는 뜻이다. 곧 희생은 천지신명이나 종묘에 제사를 올릴 때 제물로 바쳤던 소를 뜻한다. 암컷은 바쳤지 않았으며 우람한 수컷만을 골라 바쳤다.
근면하고 성실하고 우직하면서 충직하고 신성한 소는 성격은 순박하고 근면하고 우직하고 충직하다.‘소같이 일한다’.‘소같이 벌어서’.‘느릿느릿 걸어도 황소걸음’이라는 말은 꾸준히 일하는 소의 근면성을 일깨워주는 속담이다.
소는 비록 느리지만 어느 동물에서도 뒤지지 않을 만큼 인내력과 성실성이 돋보이는 근면한 동물로 쳐준다.‘소에게 한 말은 안 나도 아내에게 한 말은 난다’는 소의 신중함을 들어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말을 조심하라는 뜻으로 소를 빗된다.
인도 이슬람문화권 힌두교에서 신성시한 소, 소의 충직함에 대한 이야기에는 조선조 후기에 상주에는 의우총이 있었는데 낙동면에 사는 권씨가 집 근처에서 밭일을 하고 있는데 호랑이가 덤벼들어 곁에서 풀을 뜯고 있던 소가 달려들어 주인을 구하고 죽었다는 설화로 전해오고 있다.
재산목록 1호이자 농사의 든든한 동지로서 비록 땅은 없어도 소만 있으면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어 가족을 부양했던 소, 여유와 한가함과 평화로움의 상징한 소는 소를 생구(生口)라고 할 만큼 소중히 여겼던 우리 조상들은 소를 인격시했다. 횡희, 김시습, 맹사성 등은 소와 관련된 많은 일화를 남긴 현인들이다. 황희 정승은 젊은 시절에 길을 가다가 어떤 농부가 2마리 소로 밭을 가는 것으로 보고 농부에게 묻기를“어느 소가 더 잘 가는지요”라고 물었더니 농부는“이쪽의 소가 더 잘 합니다요”귀엣말로 대답했고 황희 정승은“비록 짐승일지라도 사람의 마음과 다를 바가 없어 질투하지 않겠오”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소는 신성시할 만큼 영물이다. 유교에서는 소가 의(義)의 상징으로 여겼고 불교에서는 사람의 진면목을 비유하고 있다. 소는 도교에서는 유유자적을 의미하며 소는 비록 느리지만 근면함과 묵묵함은 유유자적의 여유와 한가로운 대인(大人)와 은자(隱者)의 마음이라는 이미지를 수반한다. 소의 모습에 긴장감이나 성급함을 찾아볼 수 없으며 순박한 눈동자는 보는 이에게 평화롭고 자적한 느낌에 젖게 한다. 이러한 천성과 모습으로 인해 선비들의 취향에 각별한 영물(靈物)로 인식돼 시문이나 그림, 고사에 자주 등장한다.
고집과 어리석음과 어둔함의 대명사인 소는 다른 집짐승에 비해 큰 편이다. 그러면서 우직하고 고집이 세기 때문에 때로는 어리석으며 어둔하고 미련한 짐승으로 이야기되기도 한다. 특히 속담에 소의 고집 세고 미련한 면을 들어‘소귀에 경읽기’니‘황소고집’이니 말들을 해 된다. 또한 몹시 둔해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나‘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다’는 식의 우연히 공을 새웠을 경우도 소에 빗대어 말한다. 또한‘말 갈데 소 간다’속담에서처럼 분별력 없는 존재로 폄하되기도 한다. 소는 또한‘소 죽은 귀신 같다’.‘소 같고 곰 같다’라는 속담에 이르면 소고집은 고집불통의 대명사로로 사용하고 있고 또 소 힘줄은 고래힘줄과 더불어 부정적인 측면에서 매우 미련하고 끈질기고 고집 센 사람으로 통용된다. 그러나 이런 우직스러운 소의 성격은 곧 충직한 성격으로 이어진다.
소의 중요성은 고대로부터 변화를 두어왔다. 고대에서는 제물과 희생용으로 중시되었으며 농경생활이 시작된 이후에는 농경의 조력자로서의 중요성이 중대되고 있다. 오늘에 와서는 고기와 유제품 등으로 중요성이 옮겨지고 있다. 우리 민족과 꾸준히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해왔던 소는 한국 문화에 나타난 소의 모습은 고집 세고 어리석은 측면도 있지만 풍요, 부, 길조, 의로움, 자애, 여유 등으로 축약된 소의 매력이다.
소는 사람들에게 사람 이외는 가장 친숙했던 동물이다. 신성시되며 여유, 충직의 상징이 되고 있는 소는 꿈에서도 나타나면 좋은 꿈 해몽으로써 길몽이 많을 만큼 소는 우리에게는 행운을 가져다주는 영험한 동물이다.
마을에 있는 산을 두고‘소가 누워있다’.‘물을 마시고 있다’.‘되새김질 하고 있다’.‘발자국을 남겨났다’는 등으로 소의 형국이나 흔적으로 삼고 풍수사상적으로 중요시 여기며 마을에 좋은 기운이 상승하여 건강, 평온, 평화, 재물, 번성, 번영, 출세의 필시 영화로운 일들이 넘쳐나기를 바라고 있다.
아침에 우는 소의 음매 소리는 새벽을 알리는‘청신호(靑信號)’이며 때가 되면 잊지 않고 내된다. 소의 목에 단 워낭은 소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소리는‘행운(幸運)’의 소리인양 퍼진다. 또 소의 코에 달린 코뚜레(고삐를 매기 위해 소의 코에 끼우는 고리)는 소에게는 수갑처럼 여기겠지만 코뚜레는 집안을 지켜주고 보호해 준다는‘수호신(守護神)’의 역할을 띠고 있다.
소의 형국이 많은 영암,“마을 앞산이 소가 누워있는 모습이야”,“소가 부와 풍요를 상징한다고 하지”, “우리 마을이 분명 좋은 일들이 생길 것 같구려”말이 나오게 할 정도로 영암군 관내에 있는 소와 관련된 지명유래와 바위 등의 흔적을 보면 영암군 고을사람들이 영화로운 풍요롭고 평화로운 땅에 살고 있는 듯하다.
집터로 알맞은 장소로 풍수지리에서는 소가 편안하게 누운 모양을 한 마을에 살아야 복(福)이 들어온다고 믿는다. 소가 누운 모양을‘와우형(臥牛形)’, 소의 배 속 모양을‘우복형(牛腹形)’이라고 해 명당으로 친다. 명당에는 소, 말, 닭, 학, 봉황, 거북이 등 여러 동물이 등장한다. ▶소가 누워있는 '와우형국(臥牛形局)' 은 평화, 태평, 풍요를 의미하며 음택의 소의 형국이면 자손이 부자가 된다고 한다. ▶구유를 갖춘 '구시형국' 은 안정과 화평을 불러들인다고 한다. ▶금 닭이 알을 품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이면 입신양명, 부귀공명과 풍요와 행복을 의미하며 닭 벼슬은 벼슬을 의미한다. ▶봉황이 둥지를 튼 '봉황귀소형(鳳凰歸巢形)' 은 자손대대로 문무에 걸쳐 인물이 난다고 한다. ▶거북이가 물에 올라와 알을 낳고 물을 마시기 위해 내려오는 '영구음수형(靈龜飮水形)' 은 재물번성과 자손번창을 의미한다.
우리 선조들은 마을의 산이나 지형이 또는 바위 등이 어떠한 동물 형태를 하고 있으면 그 마을은 번성한다는 믿음을 가졌다. 영암군에 소의 형국을 한 마을은 명당으로서 참 좋소,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소 기운이 소복(丑福)하니 필시‘번성할 지어이다’이다.
소는 우리 인간의 삶과 함께하는 친숙한 동물이다. 몇 만 전부터 소는 인간과 가까이하며 생을 아름답게 꾸려왔다. 이 그림처럼 매사 의욕이 넘치고 역동적이고 진취적인 기운이 솟아나는 "소가 기운찼소", 일체 생령(살아있는 존재)이 다 함께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되는 세상의 새로운 희망을 품고 미래를 개척하는 힘찬 걸음이 됐으면 한다.
김대호 기자
첫댓글 원주변씨카페
주위경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