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출발이면 항상 그러하듯, 긴장하면서도 들떠 있던 나를 반기는 것은 병원 입구 정면 벽에 붙어 있는 오래 된 인물사진이었다. 사진의 주인공인 소 알로이시오 몬시뇰은 '어서 오시오' 하며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이 병원도, 설립한 신부님은 잘 몰랐다. 물론 신부님도 나를 알 턱이 없었다. 그 후 시설아동들과 가난한 자들의 진료가 거의 대부분인 이 병원과 신부님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다. 병원은 40년 전에 미국에 있는 자선회의 기부금으로 준공되었고, 주로 부모 잃고 집 없는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의료 혜택을 제공하여 왔다.
신부님은 1930년 미국 워싱턴 DC에서 평범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건강하고 강인한 체구에 운동과 글쓰기를 좋아했다. 온화한 성품에 행동은 단호했던 분이었다. 자신에게도 엄격하게 약속을 어긴 적이 없었고, 규칙적인 생활로 믿음을 주었다. 급해도 서둘거나 흥분하는 일이 없었다. 말수는 적은 편이었으나 친밀감이 있었고, 농담을 즐겼다.
수영과 달리기 같은 운동을 좋아하여 40대에 마라톤을 세 번이나 완주하였다. 운동을 하면 신체적인 긴장감이 해소되고, 창의력이 높아져 어려운 고민을 해결하는데도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힘든 고통 후에 찾아오는 기쁨, 만족감, 충족감, 그리고 성취감은 건강을 지키는 신부님의 삶의 철학이었는지 모른다.
한국과 인연을 맺고 부산에서 구호사업을 하게 된 경위도 극적이다. 젊었을 때, 신부님은 벨기에서 신학 공부를 하면서 당시 사회학을 공부하던 한국 신부를 만나고, 그로부터 이념의 갈등으로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는 한국인의 실상을 알게 되었다.
미국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한국에 도착한 때는 한국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 된 무렵이었다. 전후 한국 사회의 첫 인상은 가난과 빈곤 그 자체였다. 판잣집과 천막집으로 통하는 골목길의 음산한 분위기, 초라한 구두닦이 소년의 애타는 외침, 구걸하는 걸인들의 처절한 몸부림, 이런 것들이 이방인의 눈에는 절망적인 광경으로 보였을 것이다.
절대적 빈곤, 비위생적 생활 그리고 숙명적 체념과 절망은 가정 파괴, 자살과 살인으로 이어지고 인간의 존엄성과 자존심마저 상실한 사회는 무엇이 더 필요한지를 알게 하였다. 신부님은 모금한 성금으로 구호사업을 시작했다. 복지시설과 보육시설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껴 가난한 아픈 사람을 위해 진료소를 세우고, 교육을 위해 무료 학교를 설립했다. 버려진 아이들을 가족 형태로 양육하며, 어린이 집과 탁아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불행한 전쟁으로 비록 당시는 가난했지만, 오랜 고통의 역사에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민족성을 발견하고, 이들에게 빛과 희망을 주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생활은 불편하고, 음식은 입에 맞지 않고, 겨울은 혹독하게 추워 가난한 이국 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였다. 결국 간염을 앓고 일본에서 휴양하다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에서 한국 자선회를 설립하고 모금 운동을 시작했으며, 미국 모금은 대성공 이었다.
어릴 때부터 사제가 되고 싶은 것이 신부님의 유일한 희망이고, 절실한 꿈이었다. 아무리 어려워도 가난한 사제가 되고 싶다는 사실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미국에서 편한 생활을 한다는 것은 당신의 양심으로는 상상할 수 없었다. 무소유의 고통을 맛보지 않고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한 생활을 하지 않고는 결코 가난해 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신부님은 부산에서 가장 가난한 성당인 송도본당으로 향했다.
본당 언덕위에 있는 한 판잣집을 사제관으로 삼고 별 세간도 없이 생활했다. 외국인 신부로는 상상할 수 없이 검소하고, 가난하고, 이상한 생활을 한다고 다들 의아하게 생각했다. 고난의 세월은 연속이었다. 가난한 자에게 쓰여야 할 자금이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것을 안 신부님은 주교들과 껄끄러운 관계가 되고, 한국 교회에서도 무시당하게 된다. 결국 한국 주교들에게 버림받고, 사제직을 정지당하며 교구에서 쫓겨나 한국에서 추방되려는 수모를 당했다. 그의 사업을 이해하지 못하고 후원을 거절했던 고위 성직자들의 부정적인 태도와 필리핀 소년소녀의 집 교사들의 파업으로 건강도 어려워졌다.
시련도 있었지만, 전후의 비참한 한국 사회를 목격하면서도 행복했던 순간도 있었다. 부모로부터 버림받아 웃음을 잃은 아이의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을 때가 행복하다고 했다. 평사제로 행복하게 살아 왔고, 평사제로 죽는 것이 행복이라 생각한 신부님은 고위 성직자인 몬시뇰의 칭호를 받고, 1990년 마닐라에서 서임식을 가졌다.
신부님의 꿈은 가난한 자가 풍성한 생활을 하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질병으로부터 해방되고 굶주림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신부님은 삶을 사랑했다. 자신의 삶은 물론이고, 가난한 자들의 삶도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이들 가난한 자들에게 온전히 그저 주었다. 더 이상 남는 것이 없을 때까지 송두리째 나누어 주셨다.
사람들은 누구나 적당한 양과 다양한 종류의 행복을 받고, 적당한 양과 다양한 종류의 시련과 고난을 겪는다고 믿는다. 가끔 필요한 양만큼의 행복을 가질 때도 있다. 하지만 역시 고난은 길고, 행복은 짧다.
신부님은 전후 잿더미가 된 나라에서 수많은 희생자에게 가난을 극복하는 의욕과 삶을 다시 일으키는 희망을 주었다.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희생과 봉사가 가난한 사제의 길로 들어선 이유인지 모른다. 그러나 헌신적인 이 길은 예기치 않게 조용히 다가오는 죽음으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 이 글은 한국의사 수필가협회 공동수필집 제3집 책에 실린 글입니다-
첫댓글 짧은 글이지만 읽으며 몬시뇰님의 생애를 아주 잘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에 어렴풋이 알고만 있었는데... 많은 분들께 읽혀지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생전에 신부님을 뵈온적도 없는 의사 선생님께서 잘 아는 사이같이 쓰신것에 저도 감동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