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산’이라는 노래를 아십니까?
-부용산 가사 및 곡에 얽힌 이야기
얼마 전 답십리고미술상가 편고재라는 갤러리에서 매달 모이는 모임이 있어 갔다가 편고재 서가에 꽂혀 있는 책 한 권에 시선이 머물렀다. 바로 ‘부용산’이라는 책이다. 저자 박기동, 2002년 5월 10일에 발행됐다. 책 표제 상단에는 ‘민중의 아픔을 대변한 이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라 쓰여 있고 아래부분에는 부용산 노래 가사가 쓰여 있다. 아, 부용산 노래에 얽힌 이야기가 실린 책이 바로 이 책이었구나. 무척 반가웠다. 망서릴 필요도 없이 바로 책을 구입했다.
‘부용산’ 노래는 필자도 무척 좋아하는 애창곡 중 하나이다. 가사가 애절하고 곡도 눈물 날 정도로 슬픈 흐름이다.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젖은 감성을 자극한다. 가수 안치환, 한영애 등이 불러서 국민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킨 노래이기도 하다.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이 부용산 가사 및 곡이 세상에 알려진 계기는 특히 한국일보 논설고문으로 있던 김성우 씨의 칼럼이 가장 컸던 것으로 보인다. 1998년 2월 14일부터 김성우 논설고문은 ‘부용산 오리 길에’라는 칼럼을 세차례에 걸쳐 썼다. 아래는 당시 그 컬럼 기사다.
호남인의 애창곡 '부용산'의 내력이 소개되자 여러 애창자들의 호응이 있었다. 定曲없이 입에서 입으로 흘러다니던 노래의 악보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노래가 50년 동안 초야에 굴러다니면서도 시들지 않고 널리 확산되어 있다는데 놀랐다. 인기 티비드라마였던 '목욕탕집 남자들'에서 양희경이 이 노래를 부르더라는 제보도 있었다.
이런 반응속에 커다란 볼멘소리가 섞여나왔다. '부용산'이 목포의 노래로 주장된 데 대해 전남 보성군 벌교읍 쪽에서 이것은 벌교의 노래라는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작사자 박기동 씨가 벌교사람인데다 부용산은 벌교에 실재하는 산이고 노래의 주인공은 작사자의 목포 항도여중 제자가 아니라 벌교의 친누이동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벌교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이 곡을 고향의 노래처럼 합창한다고 한다. '부용산'이 벌교의 노래라는 뒷받침으로는 광주에서 발행되는 '예향'이라는 월간지가 94년에 쓴 기사가 있다고 한 독자가 알려주었다. 그 잡지를 구해 보니 현재 전남 순천 낙안의 금둔사 주지로 있는 知虛스님의 증언을 빌려 '부용산'은 작사자가 16세 때 죽은 그의 누이동생을 벌교의 부용산에 묻고 돌아오면서 가사를 지은 제망매가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지허스님의 전언은 출처가 불분명하다. '부용산'의 본향을 다시 찾아나설 수 밖에 없다. 5년전 호주로 이민 가서 시드니에 살고 있는 박기동 씨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올해 81세인 그의 육성증언의 내용은 이러하다.
부용산 노래 최초의 악보-출처 여수 MBC
박씨는 전남 여수의 돌산이 고향이다. 일본의 간사이(關西)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1943년 귀국해 벌교의 남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해방이 된 이듬해 벌교상업중학교로 옮겨 국어와 영어를 가르쳤다. 이무렵 아버지가 벌교로 이사와 있었다. 1947년 박교사는 새로 설립된 순천사범학교로 전근했다. 이 해에 큰 누이동생인 박영애가 순천 도립병원에서 폐결핵으로 죽었다. 이동생은 심성이 곱고 얼굴도 예뻐 천사같다고 소문나 있었다. 1941년 18세 때 벌교로 시집을 갔고 죽은 것은 24세 때였다. 30세이던 박교사는 벌교의 부용산에 누이동생을 장사 지내고 돌아와 순천에서 '부용산'이라는 시를 썼다.
이듬해인 1948년 박교사는 목포의 항도여중으로 초빙되어 갔다. 여기서 안성현이라는 음악교사를 처음 만났다. 안교사는 극단적인 낭만주의자였다. 이때 항도여중 3학년에 김정희라는 학생이 경성사범에서 전학해 와 있었다. 특히 문예방면에 소질이 뛰어난 천재소녀였다. 조희관 교장 말이 이 학생에게 국어를 가르칠 선생이 없어서 박교사를 모셔왔노라 했다. 이 해에 이 아까운 소녀가 폐결핵으로 죽었다. 박교사는 장지까지 따라갔다. 얼마 뒤 서랍 속에 넣어둔 박교사의 시작노트를 안교사가 몰래 가지고 가서 곡을 하나 붙여 왔다. 그것이 '부용산'이었다. 박교사는 맨 끝 구절인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를 상여 나가는 소리로 만들자고 조언했다. '부용산'은 노래를 잘하던 배금순이라는 상급반 학생이 맨처음 불렀고 금방 전남 일대로 유행해 나갔다. 나중에는 전혀 사상성이 없는 노래이면서도 지리산 빨치산들의 애창곡이 되기까지 했다.
곡이 나오자 학생들이 수근거렸다. "박선생님이 정희의 무덤에 가서 울었단다"하는 소문이 퍼졌다. 박교사는 그 때 아직 총각이어서 여학생들한테 인기있는 선생이었다. '부용산'의 주인공이 정희라는 설은 이래서 와전된 것일 것이다. 박씨의 카랑카랑한 전화 목소리는 여기서 끝난다. 작사자 본인의 토로이니 제망매가설을 정설로 굳힐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말의 의문은 남는다. 누이동생이 결혼까지 하고 24세에 죽었다면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라는 구절은 어색하지 않은가. 박씨는 "시를 미처 다듬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예향'이라는 잡지에는 항도여중 때 김정희의 단짝친구로 '부용산'의 哀弟子曲설을 내세운 경기대 김효자 교수의 기고도 실려있다. 김교수는 이 글에서 박교사가 누이를 묻고 읊은 시가 '부용산'이라고 해명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부용산'은 우리에게 의당 사랑하는 친구 정희를 애도하는 노래였다. 부용산이 어디 있은들 무슨 상관이랴. 그것은 차마 일찍이 잃어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아쉬운 사람이 묻힌 상징적인 산일 뿐이다"라고 썼다. '부용산'은 '향수'의 가수 이동원이 곧 취입을 한다고 하고 벌교에서는 노래비도 세울 것이라고 한다. '부용산'이 어디 것인들 무슨 상관이랴. 차마 잃어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아쉬운 노래 하나를 만 50년만에 살려 널리 불려지게 할 수 있다면 족할 뿐이다.
시 ‘부용산’을 쓴 박기동 씨는 그의 자전적 책 ‘부용산’ 228쪽에서 당시 김성우 칼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1998년 2월 14일부터 ‘부용산 오리 길에’라는 김성우 칼럼이 세차레에 걸쳐 기사화되었는데, 어느 날, 원로배우이신 김성옥 선생이 주관이 되어 목포에서 소프라노 송광선 교수의 부용산 독창회를 갖기로 되어 있는데 부용산이란 시가 너무 짧아 단조로우니 2절을 만들어 줄 수 없느냐는 김성우 선생의 요청이 있었다. 그 곡에 맞춰 2절의 형식으로 만든 것이 다음과 같은 시다.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 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박기동 시인은 “다른 요인도 작용을 했었지만 실은 이 ‘부용산’이란 한 편의 시 때문에 나는 많은 곡절을 겪었다. 작곡자 월북, 빨치산·운동권 학생·민주인사들의 애창, 그리고 남도 일대에 은근히 지하로 숨어 다니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사연...이런 사연 때문에 나는 그 ‘부용산’이란 시를 쓴 사람으로서 좌경시인으로 지목되어 지금도 내 이름이 지워지지않고 어딘가에 기록되어 남아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작곡가인 안 선생은 6·25 전쟁 때 무용가 최승희를 따라 월북하여 한 때 그곳의 국립교향악단 단장으로 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중략). 나의 운명과 결부되어 나를 따라 다니던 이 ‘부용산’이란 시는 지금 전남 벌교의 부용산 오리 길의 길목에 하나의 돌비석이 되어 서 있다. 당시의 경원대학 이대순 총장이 주동이 되어 서울에 거주하는 벌교 출신의 향우들, 벌교번영회, 벌교청년회의소 여러분의 힘으로 이루어진 기념비이다. 1999년, 2000년에 걸쳐 세 번, 광주 KBC TV에서 특집 다큐로 ‘부용산’에 관한 얘기를 다룬 것도 ‘부용산’을 널리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라고 말한다.
박기동 시인과 작곡가 안성현 미망인 성동열 여사-출처 여수 MBC
박기동 시인은 당시 늘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아야 했고, 툭하면 가택수색, 연행 혹은 구금을 당했다. 애지중지하던 시작 노트는 이 과정에서 모두 빼앗겼다. 76살 나이에 호주로 이민을 갔던 것은 숨 한번 편하게 쉬자는 생각에서였다. 부용산 말고 순천사범학교 재직 중 남조선교육자협회 성명서에 서명한 것도 족쇄처럼 따랐는데, 내용이란 게 고작 “우리의 권익은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신생 한국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부용산 시비-출처 오마이뉴스
2000년 가을 ‘부용산 시비’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박기동 시인은 50여 년 만에 벌교에 갔었다. 부용산 자락을 헤맸지만 동생 영애의 무덤은 끝내 찾을 길이 없었다. 한 떨기 들꽃이 되어 피어있었는지도 모른다. 박기동 시인은 2003년 지병인 뇌경색 치료를 위해 영구 귀국 후 2004년 5월 9일 88세에 지병으로 한많은 이 세상을 떠났다.
이른바 ‘구전가요’ 부용산은 1997년 안치환에 의해 세상에 그 존재를 알린 뒤, 이동원·한영애 등 우리의 가객들에 의해 원곡도 발굴되고 그 선율이 소개됐다. 이제 벌교 부용산엔 시비와 부용정이, 항도여중엔 노래비가 그리고 목포와 남평에선 음악회가 열리고 있다.(글/임윤식)
https://youtu.be/vXq3x4hz9gM (안치환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jYiCP3LaZOU (한영애 노래)
https://youtu.be/XdRP_HODHQw 여수MBCPrime 아직도 못다 부른 노래 #부용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