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상로전(上爐殿)의 전각(殿閣)
(1) 대웅전(大雄殿)
경상남도 양산군 하북면 지산리 소재. 통도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불전건물이다. 현재 국가 지정 국보 제290호로 보호받고 있다. 이 법당은 통도사의 중심건물로서 상로전의 주건물(主建物)이다. 대웅전의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5칸의 규모로 되어 모두 15칸 건물인데 특히한 것은 두 개의 건물을 복합시킨 평면행이라 건물내부의 기둥배치가 다른 건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예이다.
전면 쪽에는 동향한 3칸 방향 평면의 건물이 있고 뒤쪽에는 남향의 3칸, 2칸 정방형 평면의 건물이 전면 쪽 건물에 붙어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기둥의 배치에서 곧바로 알 수 있으며 지붕모양을 보고서도 알 수 있다. 현재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44년(인조 22)에 중건하였지만 건물의 기단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기단의 형식을 보면 지대석(地代石), 면석(面石), 갑석(甲石) 등을 조립한 가구식(架構式) 기단이며 석계(石階)의 배치는 원래부터 현존의 건물과 같은 평면형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계단의 위치를 보아도 평면이 합성(合成)형식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불당은 내부에 불상을 모시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이 불당은 배전(拜殿)의 기능만을 갖고 있는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불상을 모시지 않은 대신 불당 앞에 진신사리를 모셨다. 불당 내부에는 불쪽에 동서방향으로 길게 불단만이 있고 그 앞쪽 중앙에 설법상(設法床)이 있어 대덕승려가 설법할 때 사용한다.
건물 구조형식을 보면 공포( 包)는 다포식으로 외삼출목(外三出目), 내사출목(內四出目)으로 칠포작(七包作)이다. 외부는 모두 쇠서 모양으로 되고 내부는 교두(翹頭)모양으로 되었다.
가구는 일고주(一高柱) 구량가(九樑架) 형식으로 하여 대량, 중종량, 종량이 지붕구조를 받도록 되었다. 천정(天井)은 우물천정인데 층급(層級)을 두어 중심부를 가장 높게 차지하였고 내부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지붕은 팔작지붕의 복합형인 정(丁)자 형인데 정면과 양측면에 박공(朴工) 부분이 보이게 하여 특이하며 기와 가운데에는 철제(철제)기와도 올려져 있어 보통 건물이 아니었음을 짐작게 한다. 지붕 정상에는 청동제(靑銅製) 보주(寶珠)가 있는데 직경 약 70㎝에 달하는 이 보주의 윗부분에는 다시 높이 50㎝ 가량의 길다란 철주(鐵柱)를 설치해 놓았다. 정확한 조성연대는 알수 없으나 대웅전 중건 당시의 유물로 짐작된다.
이를 가리켜 통칭 찰간대(刹竿臺)라 하며 이는 대찰 또는 부처님의 연궁(蓮宮)을 뜻하는 상징물이다. 즉 불탐에서와 마찬가지로 불천(佛天)의 하강(下降)을 나타내는 조형물(造形物)이라 하겠다. 그리고 지붕의 막새기와 상부에는 자기(磁器) 연봉장식이 있어 불사리 계단의 보궁 장엄에 온갖 정성을 쏟았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대웅전에는 건물의 4면에 편액을 걸었는데 동쪽이 적멸보궁(寂滅寶宮), 서쪽이 대웅전(大雄殿), 남쪽이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고 했다. 이 불당은 조선 중기 불당 건축의 특수형으로 불당연구 및 목조건축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주목받고 있다.
대웅전의 내부 천정은 우물천정으로 이룩되었으며 이들은 목단, 국화문 등을 조각한 위에 단청(丹靑)하여 매우 화려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같은 목조조각은 전면 불단의 초자(草子)에도 매우 화려하게 나타났는데, 이는 곧 조선시대 목조 공예의 진수를 나타내고 있다.
건물의 크기는 남북이 15.8m, 동서가 10.1m이며 동쪽 대웅전 현판 아래 두 장의 꽃살문 역시 조각이 우아하다. 연화문, 옥단문, 국화문 등을 새겨 문살을 장식하였다.
건물의 네 귀퉁이에는 버팀기둥, 즉 우주를 놓아 추녀의 하중을 지탱하도록 하였으며 외양(外樣) 역시 조화를 잘 이룬 뛰어난 목조물이다.
(2) 응진전(應眞殿)
대웅전 바로 앞에 있는 불전건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6호.
응진전은 대웅전 서남쪽 동향한 불전으로 1677년(숙종 3)에 지섬대사(지섬대사)가 창건하였다 전한다. 현존의 건물은 원래의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중기 이후 여러 차례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형식은 정면 3칸, 특면 3칸의 주심포식(柱心包式) 맞배집으로 비교적 간결하지만 지대석(地帶石), 면석(面石), 갑석(甲石)을 갖춘 고식의 기단 위에 동향(東向)하여 있다. 공포( 包)는 기둥 위에만 짜여져 주심포식을 취하고 있고, 제공(諸貢)은 쇠서를 갖춘 다포식(多包式)의 모양을 하여 절충식의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주심포 형식으로 된 공포는 다포식을 많이 수용한 절충식이다.
불당 내부에는 중앙에 석가여래와 좌우에 미륵보살과 제화갈라(提華褐羅)가 동쪽으로 향하여 봉안되었고 그 주변에는 16나한상과 범천 및 제석천왕상을 좌우에 모셔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불과 함께 16제자상을 봉안한 셈이다. 곧 미륵보살은 석가여래의 일생보처(一生補處 : 다음생에 성불하여 부처님이 될 보살)이고 제화갈라보살은 과거불이기 때문이다. 응진전은 나한전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나한이 범어(梵語)의 아라하트(Arahat)를 한자로 음사(音寫)한 것으로서 그 뜻은 중생의 공양에 응할 만한 수행이 있다는 뜻인 '응공(應供)' 또는 진리에 응하여 남을 깨우친다는 뜻에서 '응진(應眞)'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을 항상 추종하던 상수제자(上首弟子)는 1,250인으로 불경(佛經)에 기록되어 있지만 이들 가운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제자가 16나한이다. 그러므로 16나한을 봉안한 법당을 나한전(羅漢殿), 응진전(應眞殿), 또는 십육성전(十六聖殿)이라고도 하나 모두 같은 의미이다. 물론 부처님의 가장 대표적인 제자를 더 줄여서 말할 때는 십대제자를 들기도 하지만 나한전에 봉안되는 제자상은 십육나한(十六羅漢)이 보편적이다. 대체로 나한은 삼승(三乘), 즉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 가운데서 부처님으로부터 고(苦), 집(集), 멸(滅), 도(道) 사제의 법문(法門)을 듣고 진리를 깨친 분이다. 연각이 12인연의 도리를 스스로 깨쳐 독각이란 칭호를 듣는 데 비하여, 부처님의 진리의 법문을 듣고서 깨친 것이 다르다. 다시 말하면 보살승(菩薩乘)이 중생구제의 서원을 지닌 이타행을 본업(本業)으로 하는 대승임에 비하여,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은 자기(自己)의 수행이나 구원이 위주되는 자리(自利)를 근본으로 하므로 이를 소승(小乘)이라 말하게 된다.
그러나 아라한(阿羅漢) 역시 부처님의 사제법문(四諦法門)을 듣고 정신수행(精進修行)하여 아집(我執)과 번뇌를 끊어 생사(生死)를 초탈(超脫)한 성자(聖者)이다. 이들 16나한(羅漢)은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부처님의 유촉을 받고 영원히 이 세사에 계시면서 중생의 복전(福田)이 되어 불법(佛法)을 옹호하는 불제자(佛弟子)로 신앙된다.
(3) 명부전(冥府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5호
명부전은 대웅전의 동남쪽에 서향(西向)하고 있다. 창건연대는 1369년(공민황 18)이라 전해내려오고 있으나 현재의 건물은 「통도사사적비(通度寺事蹟碑)」에 의하면 1760년(영조 36) 춘파대사(春坡大師)에 의해 개건(改建)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887년(고종 24) 화재가 발생하여 다음해인 1888년 (고종 25) 호성대사(虎星大師)가 중건한 것으로 범종루상(梵鍾樓上)의 「명부전중수기(冥府殿重修記)」에 의하면 "1887년(고종 24)봄에 감로당에서 실화로 원통방(圓通房), 화엄전(華嚴殿)과 더불어 명부전이 회록(回祿)되매, 다음날 보집원(普集院)에 대중들이 모여 의논하기를 '방료(房寮)의 회복이 하루라도 급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저승에서 제도받을 중생들이 노좌(露坐)하여 있는 것을 어찌하겠는가'하였다. 이때에 장로(長老) 호성화상(虎性和尙)들이 주관하여 산내(山內)의 18개의 방사 및 암자에서 시주받고 표충사 등 9개처의 타사(他寺)와 전 승통(僧統) 문우대사(文佑大師), 정일화상(定日和尙) 등 수많은 도속(道俗)의 희사(喜捨)로써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모두 마쳤다. 그로부터 애석하게도 호성화상이 입적하였다"라 하고 있다. 이 기문(記文)은 광서(光緖) 16년경인 8월 화주(化主) 영해대사(永海大師)의 기록인데 전당(殿堂)이 소실된 지 3년 후의 기록이다.
현재의 건물은 전면 5칸, 측면 3칸의 긴 장방형평면(長方形平面)으로 양측칸 2칸씩 별동공간(別途空間)으로 되어 있는 건축양식상 다포식 팔작(多包式八作)지붕으로서 특별한 특징은 없으나 19세기말의 명부전 양식을 나타내주는 한 예로서 문화재적 가치를 갖고 있다. 법당 내부의 중앙에는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을 비롯하여 십대왕(十大王)을 봉안(奉安)하였고 시왕(十王)의 탱화(幀畵)를 모셨으나 탱화는 경내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져 보호되고 있다. 명부전의 '명부(冥府)'라는 말은 저승, 곧 지옥세계를 의미한다. 즉 세상에서 무자비한 살생을 하거나, 도적질, 사음(邪淫), 망어(妄語) 등 온갖 나쁜짓을 하면 사후 명부의 십대왕으로부터 심판을 받는데 죄의 경중에 따라 삼악도(三惡途 : 지옥, 아귀, 축생)로 보내고 또 착한 일을 한 사람은 천상이나 인간세상에 태어난다고 한다. 이 가운데 지장보살은 지옥의 문전에서 언제나 눈물을 흘리면서 지옥으로 오는 중생들을 교화하는 보살이다. 그래서 일명 명부전을 지장전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명부의 주인이 지장보살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까닭에 명부전의 경우 시왕탱화가 이 전각(殿閣)의 성격을 잘 나타내 준다. 즉 각 대왕의 주변에는 죄인의 죄목을 살피고 있는 여러 대신(大臣)들의 모습이 있고, 그 아래에는 죄인들이 고통받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4)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은 대웅전 서편 구룡지(九龍池) 옆에 위치한 규모가 작은 법당이다. 삼성각의 초창은 고종 7년(1870) 영인대사(靈印大師)에 의하여 이룩되었으나 현 건물은 1935년 본사 경봉노사(鏡峰老師)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이 건물 형식은 정면 3칸, 측면 단칸의 작은 건물로 주심포계 익공식(翼工式) 맞배집이다. 전면 3칸은 모두 4분합문을 설치하고 전칸을 개방하였다. 건물내부에는 중앙에 삼성탱을 안치하고 그 오른쪽에는 칠성탱(칠성은 북두칠성을 말하는데 이는 주군으로 인간의 복과 명을 맡고 있다), 왼쪽에는 독성탱(독성은 나반존자라고도 하는데 12인연의 이치를 홀로 깨달아 성인의 지휘에 올라 독성이라 한다)을 안치시켜 복합적 기능의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건물에는 삼성의 추앙 말고도 인간의 수복(壽福)과 이치를 깨달을 기원하는 법당의 구실도 한다.
삼성(三聖)은 고려말(高麗末)의 고승(高僧)이었던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삼화상(三和尙)을 지칭하는데 지공은 인도로부터 우리나라에 온 범승(梵僧)으로서 당시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특히 지공스님과 통도사와의 연관은 밀접하다. 즉 지공스님은 고려말 충선왕대(忠宣王代)에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와서 불교를 전파하였는데 그둥에서도 통도사에 와서 부처님의 가사(袈裟)를 친견(親見)하고 사리계단(舍利戒壇)을 참배한 후 등단설법(登壇說法)하는 등 통도사에서 성대한 법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나옹스님은 고려말의 이름높은 스님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무학 역시 고려 말기 태조(太祖)의 왕사(王師)로서 조선(朝鮮) 건국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고승이다. 이 아담한 법당에 세분의 고승 영정(影幀)을 봉안하고 삼성각(三聖閣)이라고 하였으니 이들은 모두 고려 이래 존중받는 고승으로서 추앙되고 있다.
(5) 산령각(山靈閣)
산령각(산신각)은 삼성각의 동북쪽에 거의 붙어 있다. 정면과 측면이 단칸으로 남향하고 있는 아주 작은 건물로 맞배집이다. 처음의 건립은 영조 37년(1761)이며 哲宗代 : 1850 - 1863)에 중수(重修)를 거쳣으나 현 건물은 1986년에 소실되었다가 당시 주지 원명(圓明)화상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그래서 최근의 것이기 때문에 특별한 특징은 없다. 건물 내부에는 일반적으로 산신탱을 안치하였다. 산신은 옆에 호랑이를 거느리고 있어 산신(山神)과 호랑이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1600여 년이 흐르면서 불교는 토속신앙(土俗信仰)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예가 바로 사찰(寺刹)안의 산신각이나 칠성각(七星閣) 등이다. 산신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산악신앙(산악신앙)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 것으로서 산속에 위치하는 사찰의 일각에서는 별도로 산신각을 지어 신앙하게 된다. 통도사에는 일종의 호랑이 혈맥(血脈)이라 할 수 있는 호혈(虎血)이 있다 하여 사내(寺內) 두 곳에 이를 진합할 호혈석(虎血石)을 배치하고 있는 것도 산악신앙과 함께 흥미로운 일이다. 이 호혈석은 현재도 응진전 바로 옆 남쪽과 하로전(下爐殿)의 극락전(極樂殿) 옆에 위치한다. 이처럼 산신은 산악숭배사상(山岳崇拜思想)에서 나왔고 칠성(七星)은 도교신앙과 관련이 깊은데 이러한 것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 조선시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전(殿)이란 명칭을 쓰지 않고 대개 각(閣)이란 명칭을 쓰고 있다. 산신각은 불교와 토속신앙이 융합되어 있는 좋은 예(例)라 할 수 있다.
(6) 일로향각(一爐香閣)
이 건물은 상로전(上爐殿)을 관리하는 노전(爐殿) 건물로 대웅전(大雄殿)과 응진전(應眞殿)의 남쪽에 위치한다. 원래는 1757년(영조 33)에 범음대사(범음대사)가 창건(創建)하였다고 전하며 현재의 건물은 1968년 청하화상(淸霞和尙)이 그 자리에 중건한 것이다.
건물은 정면(正面) 8칸, 측면(側面) 3칸으로 남향(南向)한 팔작(八作)집이며 전면(全面)에 툇마루를 두고 서쪽 끝 2칸은 마루, 동쪽 끝 3칸은 부엌, 나머지 공간(空間)은 단칸(單間), 2칸,4칸의 크고 작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초창시기(初創時期)의 건물은 어떠하였는지 확실치 않으나 고방(庫房)이 있었다고 하며 이 고방(庫房)에는 향목(香木)을 쌓아 두고 불전(佛前) 공양(供養)을 지을 때 이 나무를 사용하였다고 전하므로 부처님 공양은 향나무로 쌓았던 노전(爐殿)으로 생각된다. 지금은 설법전 자리에 있던 것을 설법전이 들어서면서 지금의 주지실채로 쓰이고 있으며, 예전의 주지실채를 옮겨 응진전과 나란히 하여 일로향각으로 쓰이고 있다.
3. 중로전(中爐殿)의 전각(殿閣)
(1) 대광명전(大光明殿)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94호
이 불전(佛殿)은 중로전(中爐殿)의 중심건물로 대웅전(大雄殿) 서북쪽에 위치(位置)하며 건물의 규모나 목재 또는 가구수법(架構手法)이 대웅전 다음가는 우수한 건물이라 하겠다. 대광명전 앞에는 전향각(篆香閣), 장경각(藏經閣), 개산조당(開山祖堂), 세존비각(世尊碑閣) 등이 있고 이들 건물 앞에 5층석탑이 있다.
대광명전(大光明殿) 사전(寺傳)에 의하면 1725년 영조 원년에 축환대사(竺環大師)가 중수하였다고 하나 실제 건립연대가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특면 3칸의 다포식(多包式) 팔작(八作)집으로 내부에는 뒤쪽에 고주(高柱)가 세워져 있으며 비로자나불을 안치하고 있다. 비로자나(vairocana)는 광명변조(光明變造)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 불전을 대광명전이라 했다. 즉 법계의 진리와 일치하는 이불(理佛)로서 우주의 본체를 상징하는 법신불(法身佛)이다. 비로자나불상의 뒷편에는 삼신후불탱화 3폭이 있었으나 좌우의 탱화는 박물관으로 이전되었고 중앙의 법신탱만 걸려 있다. 탱화는 화기(畵記)에 의하면 "건융이십기묘 칠월일 양산북취서산 통도사 대광명전법신탱(乾隆二十己卯 七月日 梁山鷲栖山 通度寺 大光明殿法身幀)....."이라 하였으므로 그 조성이 영조(英祖) 35(1759)임을 알 수 있다. 흔히 비로자나불을 모셨을 때 비로전(毘盧殿)이라 편액하기도 한다.
건물은 비교적 견실(堅實)하며 조선 중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막돌을 바른 층쌓기 하고 상부에 장대석으로 갑석(甲石)을 만든 기단(基壇)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약한 내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 웃몸은 창방(昌枋)으로 결구(結構)하고 이 위에 기둥사이에도 놓은 다포식(多包式)을 이루고 있다. 다포식 공포의 짜임은 외삼출목(外三出目), 내사출목(內四出目)으로 제공(諸貢)위에 놓이는 살미첨자의 끝은 강직한 앙서로 되어 있고, 내부에서는 판형(板形)으로 연꽃봉오리를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정면(正面) 어간(御間) 양측의 기둥머리에 용머리(龍頭)를 조각하여 꽂아놓은 것은 내공포(內 包)의 판형(板形)이나, 연꽃봉오리 조각의 장식성 등이 조선 중기 이후의 감각을 잘 보여주고 있는 수법이다. 가구(架構)는 후면 내진(內陣)에 세운 고주(高柱)와 전면 평주(平柱)에 대들보[大樑]를 걸고 이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宗梁]를 걸었으며 우물 천정을 가설하여 천정 속을 가리고 있다. 정면의 각 주간(柱間)에는 아름다운 빗살창호를 달고 측면에는 정자살창호를 두 짝 달았다.
대광명전 내부에는 외부와 달리 단청(丹靑)과 벽화가 잘 보존되어 산수화풍(山水畵風)으로 전개된 그림을 위시하여 건물의 불벽(佛壁)사이에도 승상(僧像)과 동자상(童子像) 등 인물상을 등장시켜 불경과 관계되는 도화적(道話的)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다. 법당 내부의 굴도리 상부도서(上部東西) 2개소에는 다음과 같은 묵화가 있어 주목된다.
이는 건물의 화재를 방지하기 위한 일종의 방화부적(防火符籍)으로 생각된다. 법당 내외에 조각된 목조비룡(木造飛龍)의 모습이 사실적인데 이는 조선시대에 발달된 목조공예의 수법을 여실히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 할 것이다.
(2) 용화전(龍華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4호
용화전은 대광명전과 관음전 사이에 위치하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1369년(공민왕 18)에 초창되었으나 당시 창건주는 알 수 없으며 현재의 건물은 1725년(영조 元年)에 청성대사(淸性大師)에 의해 중건되었다고 한다. 건물 안에는 약 2미터 정도의 미륵불좌상을 봉안하였다. 이 미륵불은 석가모니 다음에 출현하실 미래불(未來佛)이다. 그 부처님의 탄생하실 곳이 용화수(龍華樹) 아래이고 또 설법회상(說法會上)을 용화회상(龍華會上)이라 하므로 법당의 명칭을 용화전이라 하였다. 석가모니의 설법회상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함에 비하여 이는 미래불의 용화회상을 뜻하는 법당임을 알게 한다. 즉 미륵불로서 출현하기 전까지는 미륵보살이란 칭호를 받는 석가모니의 일생보처(一生補處)로서 석가모니의 출현으로부터 56억 7천만년이란 장구한 세월이 흐르고 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실 부처님이다.
이 용화전 앞에는 약 2미터 높이의 발우(鉢盂)모양의 석조봉발(石造奉鉢)이 있다. 이를 봉발탑(보물 제471호)이라고 하며 이는 탑이 아니고 발우이다. 이 석조물은 지대석(地臺石) 위에 하대석(下臺石)을 놓고 그 위에 부등형(不等形) 8각 간석(竿石)을 세우고 간석 위에 상대석(上臺石)을 놓았으며 그 위에 뚜껑을 갖춘 발(鉢)을 올려 놓았다. 얼핏 보기에는 석등(石燈)과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석등의 화사석(火舍石) 위치에 발이 놓여 있어 특이하다. 이 석조 봉발은 "석가모니의 발우(鉢盂)를 미래세(未來世)에 출현하실 미륵불에게 드리기 위해 부처님의 상수제자(上首弟子)인 가섭존자(伽葉尊者)가 발우와 함께 가사(袈裟)를 가지고 인도의 계족산(鷄足山)에서 멸진정(滅盡定)에 들어 기다리고 있다"는 불경의 내용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이와 같이 석조 발우는 꼭 같지는 않지만 보은(報恩)의 법주사(法主寺)경내의 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이 머리에 이고 있는 석조발과 같은 형식이 아닌가 생각된다. 법주사의 봉발도 원래는 용화전 앞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3) 개산조당(開山祖堂)과 해장보각(海藏寶閣)
개산조당은 용화전 옆 서쪽에 위치한다. 통도사의 창건주 자장율사의 영정을 봉안한 아담한 전각이다. 전각 정면에 개산조당이라는 현판이 붙은 솟을문은 해장보각의 조사문으로서 '솟을삼문'형식이며 해장보궁(海藏寶宮)으로 통하는 문의 3칸 건물인데 중앙칸이 양 측면칸보다 높게 솟아 '솟을삼문'이라고도 한다. 3칸 모두 두 쪽의 널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건물형식은 조선시대 말기의 수법으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사당(祠堂)의 솟을삼문과 같다.
이 건물의 창건은 영조 3년(1727)이고 그후 고종 4년(1900)에 고산대사(古山大師)가 중수하였다. 자장율사의 영정을 봉안한 해장보각은 정면 3칸, 특면 2칸의 맞배집으로 앞쪽에 툇간을 달은 형식을 취하고 있어 내부 앞쪽에 내진(內陣 : 안두리)기둥이 배치되어 있다.
이 집을 해장보각이라고 한 것은 불경의 보관처를 용궁(龍宮)에 두기도 하고 또 대장경(大藏經)진리의 내용이 바다 속의 수많은 보배에 비유되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즉 용궁보각(龍宮寶閣)에서 유래된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자장스님의 영정을 봉안한 전각을 해장보각(海藏寶閣)이라고 한 것은 『삼국유사』에 이미 기록된 바와 같이 자장스님이 중국으로부터 가지고 온 대장경을 통도사에 봉안하였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으로보인다. 즉 "정관(貞觀) 17년(643)에는 자장율사가 삼장(三藏 : 經藏, 律藏, 論藏) 400여 상자를 싣고 돌아와서 통도사가 국내 최초의 대장경 봉안하였다."(삼국유사(『삼국유사』전후소장사리조)고 한 내용은 이미 삼국시대에 통도사가 국내 최초의 대장경 봉안(奉安) 사찰이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며, 나아가 이 대장경이 다른 사람 아닌 창건주(創建主) 자장율사에 의하여 봉안되었던 사실을 감안하여 그 영각(影閣)에 들어오는 문을 개산조당이라 하였고, 영각 자체를 해장보각이라고 한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해장보각 내부에는 자장율사 진영 주변에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1,234권을 봉안해 놓았다.
자장율사의 영정은 길이 170㎝에 폭100㎝로서 그 제작은 순조(純祖) 4년(1804)이다. 전체적인 배경은 청록색(靑綠色)에 홍색(紅色) 등받이를 한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나타냈다. 의자의 형태는 단조롭고 통견(通肩)의 법의(法衣) 속에 가부좌한 것으로 보인다. 의좌에 정좌(正坐)하여 전방을 주시하는 모습이 매우 자애로우면서도 수행자의 독특한 의지를 여실히 나타내는 모습이다. 그림의 상부에는 별도로 목조운각(木造雲閣)을 단조롭게 처리하여 좌우에 청룡(靑龍), 황룡(黃龍)을 조각하였다.
(4) 관음전(觀音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1호
관음전은 용화전 앞에 위치한다. 곧 중로전의 중심법당인 대광명전, 용화전 관음전의 세 법당이 남북으로 나란히 놓인 가운데 제일 남쪽에 위치하는 법당이다. 관음전은 영조 원년(1725)에 용암대사(龍岩大師)에 의하여 초창되었고, 그 이후의 중수 사실은 알지 못하며 근래에 기와를 개수(改修)한 법당이다. 이렇게 창건이 늦은 법당이지만 그 전방에는 연대를 법당보다 올려야 할 석등(石燈) 1기(基)가 있다. 석등의 총고는 약 300㎝로서 그 조성수법은 용화전 앞의 석조봉발(石造奉鉢)과 비슷하다. 한 장의 넓은 지대석(地臺石) 위에 놓인 하대석(下臺石)의 시문(施紋)이 닮아 있고 무엇보다도 중간의 간석(竿石)은 부등변(不等邊) 8각으로 중간에 마디를 설치한 수법은 동일한 형식이다. 상대석 위에 놓인 화사(火舍)는 장방형(長方形) 4면에 화창(火窓)을 커다랗게 내었는데 그 형식이 신라 이래의 8각과는 다르다. 다만 상부의 옥개(屋蓋)와 보주(寶珠)는 착실하게 고식(古式)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이 석등의 조성연대는 석조봉발의 형식을 추종한 조각수법이 나타나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관음전보다는 앞선 조각양식으로 보아야겠다. 그러므로 이 석등은 어쩌면 용화전 앞에 본래부터 건립돼 있었으나 이후 관음전의 신축과 함께 이곳으로 옮겨 왔을 가능성이 짙은 중요한 유물이라 하겠다. 관음전 내에는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을 봉안하였으며, 본래는 사찰의 중요한 유물이 이곳에 보관 전시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관음보살상은 화려한 화관(花冠)을 쓰고 있으며 두 손으로는 길다란 연꽃과 같이 처염상정(處染常淨)함을 나타내는 것이고, 나아가 중생의 모든 번뇌를 감로(甘露)의 법수(法水)로써 씻어주는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상징으로 나아가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또는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千眼觀世音菩薩)을 말하는 것은 중생의 괴로움과 어려움을 구원하기 위하여 시방 모든 국토에 몸을 나투시는 대비보살(大悲菩薩)의 기능적인 면을 나타낸 것이다. 관음전은 전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八作)지붕 형태로서 내벽(內壁)에는 보타락가산(補陀洛迦山)에 계신 관음의 모습과 남순동자(南巡童子)의 형상을 나타내기도 하였고 32응신(應身)을 상징하는 여러 형태의 관음상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내벽 대들보의 사자문 단청이라든지 하늘을 나르는 비천상(飛天像)의 불화(佛畵)등은 특색있는 작품이다.
(5) 전향각(篆香閣)
전향각은 대광명전 서쪽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중로전의 네 법당을 관리하는 노전으로 불전에 분수(焚修 : 향불을 피우고 도를 닦음)하는 스님들의 거어(居處)공간이다. 따라서 스님들이 거처하는 주거공간이면서도 일반 요사(寮舍)와는 다른 성격의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건물의 명칭이 전향각(篆香閣)이라 한 것 역시 꾸불꾸불한 향연기를 상징하는 의미가 있겠다.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낮은 건물로 방과 부엌으로 구성된 팔작(八作)집이다. 이 건물은 1757년(영조 33년) 범음대사(梵音大師)가 처음으로 지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30년 설암화상(雪岩和尙)이 중수한 것이다.
(6) 장경각(藏經閣)
장격각은 해장보각 바로 뒤쪽에 동향(東向)하고 있다. 이 건물 안에는 목판(木版)장경을 통안하고 있는데 이들 목판 대장경 강원(講院)의 현행 교과과정에 들어 있는 중요 경전들로 『능엄경』, 『기신론현수소(起信論賢首疏)』,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 『법수(法數)』,『사집(四集)』등 15종의 경판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통도사에서 약 10㎞ 떨어진 운흥사(雲興寺)가 한말(韓末) 폐사(廢寺)될 때 이곳으로 옮겨온 중요 경판(經板)들이다.
(7) 세존비각(世尊碑閣)
이 비각(碑閣)은 1706(숙종 32) 계파대사(桂坡大師)가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중수(重修)하고 석가여래의 영골사리비(靈骨舍利碑)를 세우면서 건립(建立)한 것으로 비석(碑石)에는 불사리의 행적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곧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사리를 모셔온 일과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泗溟大師)가 불사리(佛舍利)를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크고 작은 2개의 함에 문수대성(文殊大聖)께서 자장스님께 부촉하신 승지(勝地)이므로 이곳에 다시 봉안토록 하셨고 한 개의 함은 태백산(太白山 : 영변 묘향산)으로, 다른 한 개는 현재의 계단에 봉안토록 하였던 사실들을 석비(石碑) 전면(前面)에 기록(記錄)하고 있다.
비문은 수사간(守司諫) 채팽윤(蔡彭胤 : 1669-1731)이 짓고 글씨는 승정원(承政院) , 도승지(都承旨), 이진휴(李震休)가 썼다. 석비 뒷면의 비음(碑陰)은 성능대사(性能大師)가 짓고 보윤대사(普允大師)가 썼는데 이곳에서는 석가모니의 행적(行蹟)과 함께 각지(各地)의 시주(施主)내용을 적고 있어 참고된다. 석비의 건립은 숙종(肅宗) 32년(1706)이며 높이는 2.5m, 폭 1m이다.
(8) 황화(皇華閣)
황화각은 전면 7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큰방이다. 이곳은 강원과 학승(學僧)들이 거처하는 기능을 갖고 있는 건물이다. 이 건물의 초창(初創)이 1317년 (충숙왕 4) 1647년 (인조 27) 탄변화상(坦卞和尙)이 중건하고 광무(光武)3년 (1899) 성해화상(聖海和尙)에 의해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ㄴ자 평면으로 2개의 건물을 복합시킨 형식이다. 동서로 자리잡은 평면은 강당과 부엌, 툇마루로 구성되었고 남북 방향의 평면에는 학승이 거처실로 되고 서쪽에 쪽마루를 달았다. 그리고 이들 건물은 일반 신도와 격리되도록 북쪽의 서쪽에서 출입하도록 되어 있어 경학을 공부하는 공간답게 처리하였다.
(9) 영각(影閣)
이 건물은 역대(歷代) 주지(住持) 및 큰스님들의 영정을 85폭 봉안한 건물로 정면 8칸 측면 3칸의 긴 장방형(長方形) 평면(平面)으로 된 팔작집이다. 초창연대는 분명치 않으며 현재의 건물은 1704년(숙종 30)에 지었다고 전한다. 그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10) 불이문(不二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2호
이 문은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경내의 마지막 문으로 일명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한다. 즉 동구(洞口)밖의 산문(山門)과 일주문, 천왕문(天王門)을 거쳐 들어온 마지막 문이다. 이 문은 1305년(충렬왕 31) 처음 지었으나 현재의 건물은 언제 중건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세부수법으로 보아 조선 주익 이후의 것으로 생각된다.
이 문은 동쪽 하로전(下爐殿)의 지반보다 약 1.5m가 높아지면서 축대를 내었고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다포식 팔작집으로 동향한 전면(前面) 3칸에 판문(板門)을 달아 출입하게 하였으며 대들보 위에 얹은 가구재가 다른 건물에 비해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내부는 매우 단조롭게 처리되어 종래 수법(手法)과는 달리 중앙의 대들보를 코끼리와 호랑이가 이마로써 받쳐 이고 있는 형태를 취하였다. 이 역시 코끼리와 호랑이가 건물의 하중(荷重)이마에 서로 의지해 있는 것이 바로 불이(不二)의 도리(道理)를 나타내는 것이라 한다. 대들보위에 두터운 솟을 합장태를 삼각형으로 짜 그 부재 위에 장혀[長舌]를 걸쳐 중도리(中道理), 하중도리(下重道理), 종도리(宗道理)를 얹어 서까래를 받도록 하였다. 이는 고식(古式)의 가구법(架構法)으로 흔히 볼 수 없는 형식이다.
불이문의 현판 글씨는 송(宋)나라 미불(米 : 號는 元章)의 필이다.
불이(不二)의 뜻은 법계의 실상(實相)이 여여평등(如如平等)하여 피차(彼此)의 차별이 없는 것을 '불이(不二)'라 하며 이 법계불이(法界不二)의 진리가 불법의 궤범(軌範)이므로 '불이법(不二法)'이라 하고 일체 성인이 모두 이 불이(不二)의 법위 의하여 진리에 취입(趣入)하므로 불이법문이라 한다. 따라서 여기서부터 청정한 불법도량의 중심부가 되며 불이(不二)의 진리로써 세속의 모든 번뇌를 벗어난다는 뜻에서 해탈문이라고도 한다.
(11) 그 밖의 요사
감로당의 초창(初創)은 고려 충혜왕(忠惠王) 복위(復位) 원년(元年 : 1340)이지만 화재로 인하여 여러 차례 중건, 중수를 거듭했다. 「통도사사적비」에 따르면 고종 19년(1882) 화엄전에서 실화하여 원통방과 감로당이 소실(燒失)되었으나 다음 해에 중건했음을 알 수 잇따. 그러나 불과 4년 만에 다시 감로당에서 실화하여 명부전과 함께 원통방, 화엄전까지 소실되었고 그 다음해인 1887년 덕명대사(德溟大師)가 중건했다고 한다. 이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2칸 건물로 강원의 학인 대중방으로 쓰이고 있으며 이 건물과 동, 서 그리고 남쪽에 객실 3채가 있어 口자형 평면으로 구성되어 중앙에 중정(中庭)이 생겨 주택의 평면형과 같은 구조이다. 감로당을 비롯한 口자형 건물들은 약 86칸으로 거실, 마루, 부엌, 창고, 식당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원통방은 감로당 동쪽 측면에 위치한다. 초창은 1341년(충혜왕 복위 2)이지만 영조 때에 탄해대사(坦亥大師)가 중건하였고 1886년 감로당과 함께 소실되고 다음해에 매예대사(每藝大師)에 의해 중건되었다. 건물은 남향한 정면 7칸, 측면 2칸의 곡루(穀樓)가 자리잡고 있다. 원통방의 '원통' 의미는 '관음보살 이근원통(耳根圓通)'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화엄전은 원통방의 동쪽에 남향하여 정면 7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자리잡고 있다. 이 건물터에는 원래 1368년(공민왕 17) 초창된 건물이 있었고 1762년(영조 38)과 1883년(고종 20)에 소실되었다가 다시 1887년에 구련대사(九蓮大師)에 의하여 중건된 건물들이 있었으나 현재의 건물은 1970년 새로 건립된 콘크리트로 된 건물이다. 이곳은 강원(講院)의 도서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법회(法會)장소로 이용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