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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집 문집 제6권 / 행장(行狀)
의정부 좌의정 서원부원군 정공 시장 갑술년(1634, 인조12)
(議政府左議政西原府院君鄭公諡狀 甲戌)
공의 휘(諱)는 탁(琢),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이다. 정씨는 청주(淸州)가 관향(貫鄕)이다. 고려 시대 대장군 의(顗)는 필현보(畢玄甫)의 난에 절의를 지키다가 죽었다. 그 뒤 오(䫨)와 그의 아우 포(誧)는 뛰어난 문장으로 현달하였는데, 참소를 받아 남쪽으로 귀양 갔다가, 재기하여 사도(司徒)와 서원백(西原伯)이 되었다.
세상을 떠난 뒤에 안동(安東)에 장사 지냈다. 자손들이 마침내 영남 사람이 되었는데, 여러 대에 걸쳐 가세를 떨치지 못하였다. 증조(曾祖) 장수 현감(長水縣監) 휘 원로(元老)와 조부(祖父) 생원(生員) 휘 교(僑)와 선고(先考) 휘 이충(以忠)은 모두 덕을 감추고 세상에 드러내지 않아, 후손들에게 복을 남겨 주었다. 어머니 한씨(韓氏) 부인이 병술년(1526, 중종21) 10월에 예천(醴泉)의 금당(金堂) 마을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처음 학업을 익힐 때에 곧바로 대의(大義)를 알아서 스승을 힘들게 하지 않았다. 가정(嘉靖) 임자년(1552, 명종7)에 성균관에 들어갔고, 무오년(1558)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처음에 교서관(校書館)에 배속되었다가, 이윽고 화려한 명성이 더욱 드러나 전적(典籍)으로 옮겼다.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을 때 일을 만나면 과감히 말하였으니, 옛날 간쟁하는 신하의 풍모가 있었다. 권신 윤원형(尹元衡)
등이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그르친 죄를 탄핵하는 등 전후로 네 사람을 탄핵했는데, 말하는 사람들이 옳다고 여겼다.
선조(宣祖) 원년(1568)에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수찬(修撰)이 되고, 예조(禮曹)와 병조(兵曹)의 정랑(正郞), 지평(持平), 교리(校理), 이조(吏曹)의 낭관(郞官),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을 역임하였다. 갑술년(1574)에 부응교(副應敎)로 있다가 승지(承旨)에 발탁되고, 도승지(都承旨)로 옮겼다.
정축년(1577)에 대사성(大司成),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부임하였다. 경진년(1580, 선조13)부터 임오년(1582)까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서는 도승지와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임명되었고,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라서는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으니, 모두 임금의 특별한 은혜를 입은 것이다.
을유년(1585) 이후로 예조와 형조의 판서를 지냈고, 두 번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냈다. 사사롭게 만나려는 사람을 멀리 배척하였는데, 청탁하러 온 사람과 안면을 마주하고 말하기를 “그대의 재주는 마땅히 등용할 만하지만, 내 집에 찾아오다니 안타깝네.”라고 하고, 끝내 등용하지 않았다.
기축년(1589)에 숭정대부(崇政大夫)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임명되었다. 마침 일본 사신이 도착하였는데, 묘당에서 답방(答訪)의 편의를 논의하였으나 결정하지 못하였다. 공이 의연하게 말하기를 “적에게서 반역의 단서가 이미 보이니, 가령 통신사를 아침에 보낸다 해도 저녁에 쳐들어온다면, 이 강화는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논의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공의 의견과 합치하였다.
경인년(1590)에 사신으로 명(明)나라 조정에 갔다가 미처 돌아오지 않았는데, 처사 최영경(崔永慶)이 아무런 죄 없이 앞서 죽은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 말하는 자들이 일찍이 그의 아우 최여경(崔餘慶)에게 공이 관직을 주었다고 거짓말을 하여 공을 파직시켰다. 겨울에 예조 판서(禮曹判書)와 좌우 찬성(左右贊成)에 서용되었다.
임진년(1592, 선조25)에 왜적이 침입하여 도성까지 다가오자 임금께서 급히 서쪽으로 행행(行幸)하셨다. 공은 그때 약방(藥房)에서 거처하다가 갑작스레 어가(御駕)를 호종하게 되었으므로, 식솔들이 어디에 있는지 묻지도 못하였다. 평양에 도착하였는데 급보가 연이어 올라오자, 임금께서 철옹성(鐵甕城)으로 거둥하려고 하셨다.
공이 “대동강 같은 요충지를 막아 지키며 회복할 계책을 도모하지 않고, 험난하고 궁벽한 곳으로 들어가 적들이 빈틈을 타서 우리를 뒤쫓게 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눈물을 흘리며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철옹성에 도착하자 과연 상하(上下)의 사람들이 크게 동요하여 이미 어찌할 수 없었으므로, 분조(分朝)의 의론이 결정되었다.
당시 광해군(光海君)이 세자의 신분이었는데, 공이 이사(貳師)로서 호종하여 서둘러 이천(伊川)으로 가니, 동쪽 길은 왜적의 기세가 더욱 거셌으므로 험한 산길로 돌아 용만(龍灣)으로 향했다. 일행이 두려워하여 대부분 변복(變服)하고 행색을 속이며 앞설까 뒤처질까 관망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준다면 결코 이런 일은 없을 테지만, 만약 불행하다면 지략으로 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정월에 정주(定州)에서 대조(大朝)와 만났다.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새로이 평양성의 왜적을 공격하였는데, 경략(經略) 이하의 여러 장수들이 우리나라를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공이 접대하고 위로하느라 거의 하루도 쉴 겨를이 없었다.
칙사 사헌(司憲)을 따라 평산(平山)에 도착했을 때, 길에서 분조를 호위하여 남쪽으로 내려가라는 명을 받고 호서 지방에서 동궁의 행차를 따라잡았다. 당시 서울은 겨우 안정되었으나 적들이 여전히 해안 일대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의론이 왜적을 어찌할 수 없다고 하여 회유하고자 하였다.
공은 왜적이 반드시 패망할 것이라고 힘써 진달하였는데, 의론이 당당하였다. 임금께서 재위한 지 오래되어 공의 고결함과 정직함을 평소에 잘 알고 있는 데다, 다급한 때를 만나 언제나 한결같은 공의 성실함을 더욱 믿게 되셨다. 혼란스럽고 위태로운 상황을 구제하는 데에는 모름지기 유자(儒者)를 등용해야 한다고 여겨 공을 우의정(右議政)에 임명하셨으니, 갑오년(1594, 선조27) 2월의 일이었다.
공이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여 대궐에 나아가 사은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정욱(黃廷彧)과 그의 아들 황혁(黃赫)이 죄를 짓고 조정에서 신문을 받게 되었다.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물어 황정욱이 예전에 공을 세웠고 연로하므로 국문을 면제하고 유배 보내려고 하였다.
공이 “형벌을 신중히 처리하고 공신을 보전하는 것은 모두 성대한 덕을 베푸는 일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추관(推官)들이 죄인을 가볍게 처리한 잘못에 대해 양사(兩司)에서 논의하였는데, 그 말이 공에게까지 미쳤다. 이에 공이 소장을 올려 고사(固辭)하니, 임금께서 공의 뜻을 돌이키지 못할 것을 알고 체직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하셨다.
이전에 공이 이순신(李舜臣)과 김덕령(金德齡)은 장수가 될 만한 재주를 지녔다고 천거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이순신은 전공(戰功)을 세워 해방사명(海防使命)이 되었고, 김덕령은 용맹하게 잘 싸웠지만 살인죄에 연루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다. 공이 “원수 같은 왜적들이 우리 땅을 차지하고 있는데, 먼저 장수를 죽인다면 이러한 말을 적들이 듣게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임금께서 서둘러 풀어 주라고 명하셨다.
병신년(1596, 선조29) 여름, 임금께서 선대 왕릉에 배알하는 날을 정하셨는데, 궁궐에 우레와 번개가 쳤다. 공이 말하기를 “노(魯)나라는 생쥐가 재앙을 암시했다고 하여 교제(郊祭)를 중지하였습니다. 지금 하늘이 꾸짖고 경고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으니, 마땅히 하늘의 경계를 삼가서 때가 아니면 거둥하지 않는 의리를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라고 하자, 임금께서 행차를 그만두셨다.
그해 가을에 호서 지방에서 역적 이몽학(李夢鶴)이 사로잡혔는데, 잔당을 문초한 문서에 임금이 선대 왕릉을 배알하는 날에 일을 벌이기로 약속했다가 실행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러자 듣는 사람들의 마음이 서늘해졌다. 정유년(1597)에 왜적이 호남 지방을 유린하니, 급보가 끊임없이 올라왔다. 공이 거듭 차자를 올려 스스로 전장(戰場)으로 가겠다고 청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백성들이 큰 피해를 입어 형세가 무너지려 하는데, 조정의 명령은 원근 어디에도 통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찌 조종(祖宗)의 2백 년 기업(基業)을 한 번 내던진 채 아무런 대책 없이 망하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신이 애통해하시는 전하의 덕음(德音)을 받들고 가서 군민(軍民)과 부로(父老)를 위로하고 자제(子弟)들을 독려하여 형편을 헤아려 적들의 요충지를 막는다면, 만에 하나라도 천행(天幸)을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어리석고 머지않아 늙어 죽을 몸이라 군중(軍中)에 달려 나가는 것은 진실로 하기 어렵지만, 사졸들보다 앞서서 한 번 죽음으로써 은혜에 보답한다면, 평소에 쌓은 뜻을 저버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조정에서는 공의 마음을 애틋하게 여겨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지를 품은 자들은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힘써 싸울 것을 생각하였다.
기해년(1599, 선조32)에 광해군(光海君)을 모시고 수안(遂安)에 가서 중전(中殿)께 문안을 드렸다. 돌아와 보니, 조정에서는 지난번 위급할 때에 처자식을 보호하려고 먼저 나서서 집안의 사사로움을 도모한 대소(大小) 신료(臣僚)들의 성명을 써서, 조당(朝堂)에 방을 붙여 관료들에게 보게 하였다. 공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왜적이 다시 쳐들어왔을 때 사람들이 사소한 것에 연연했던 것은 대개 그 이전의 난리에 일찍 스스로 몸을 빼내지 못하여 왜적에게 욕을 당한 자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진실로 본분과 의리를 지키지 못한 죄를 지었으나, 나라의 큰 경사를 맞아 은택을 내리고 널리 명령을 베풀어 죄를 말끔히 씻어 주어 다시 시작하게 하는 것 또한 허물을 용서하는 임금의 큰 정사일 것입니다.” 그러자 임금께서 마침내 풀어 주셨다. 공이 법을 적용할 때 반드시 너그럽게 행한 것이 이와 같았다.
처음 공이 정승에 임명되었을 때 연세가 이미 70세였으므로 분수에 넘침을 깊이 두려워하였으나, 나라의 전란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벼슬을 그만두고 조정을 떠날 의리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나라가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어서 신하가 평소의 뜻을 펼 수 있게 되자, 마침내 휴가를 요청하여 남쪽으로 돌아가 성묘를 하고, 벼슬을 그만두고 여생을 마치려고 하였다.
이듬해 봄에 좌의정(左議政)에 임명되어 서둘러 조정에 들어오라는 부름을 받았으나, 병으로 고통스러워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수 없다고 아뢰어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임금께서 공의 요청을 윤허하고, 지방관으로 하여금 명절마다 안부를 묻고 물품을 후하게 주어 위무하게 하셨다.
4년 뒤인 계묘년(1603, 선조36)에 78세의 나이로 소장을 올려 치사(致仕)를 청하였다. 임금께서 또 공의 뜻을 어기기 어려워 사관(史官)을 보내 선유(宣諭)하셨는데, 그 가운데 “육정신(六丁神)이 만류해도 뜻을 빼앗을 수 없으니, 한 세대를 통틀어 진실로 드문 일이오.”라는 말씀이 있었다. 그해 겨울에 호종훈(扈從勳)에 책록하고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하였으며, 본도(本道)에 명령하여 봉조하(奉朝賀)의 녹봉을 지급하셨다.
이에 공이 또 사양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신(老臣)은 이미 때에 맞춰 조청(朝請)에 참여하거나 맹부(盟府 충훈부(忠勳府))의 모임에 배석하지 못하는데, 구차하게 나라의 관례를 원용하여 하는 일 없이 녹을 받는 것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주고받는 데에 있어 도리를 잃게 됩니다.” 임금께서 너그럽게 비답(批答)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원훈대신(元勳大臣)으로서 시골에 물러나 거처하면서, 지금 또 봉록을 사양하니 더욱더 서운하오. 본도에서 봉록을 지급하는 것은 실로 훈구(勳舊)를 우대하는 뜻에서 나왔으니, 어찌 굳이 사양하여 자신만 깨끗하게 하고 조정의 성대한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단 말이오.”
공은 집안 살림이 매우 빈약하였는데, 낙향한 뒤에는 가난이 더욱 심하여 방안에 물건이 하나도 없고 심지어 제수(祭需)를 갖추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사양하고 받는 의리가 시종 구차하지 않았고, 임금께서 공을 예우하는 뜻 또한 시종 쇠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군신 관계를 볼 수 있다. 공은 평소 건강하고 병이 없었다. 봄가을에 명절이 되면 반드시 몸소 선영(先塋)에 가서 성묘하였는데, 걸음걸이가 젊었을 때와 같았다.
밭두둑 사이를 배회하면서 한 언덕과 한 시내를 바라보며 날을 보냈는데, 오직 두세 명의 문인과 벗, 가마와 지팡이만 함께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공이 예전에 정승을 지낸 분이라는 사실을 시골 농부들이 알지 못하였지만, 마을의 사우(士友)들과 술을 마시며 회포를 풀어서 흥취를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여씨향약(呂氏鄕約)》에서 현재에도 시행할 만한 것들을 채록하여 존비(尊卑)를 정하고 예양(禮讓)에 나아가게 하려고, 상(喪)을 당하면 서로 도우며 다급하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서로 협조하는 것을 조목으로 정한 다음, 우리말로 풀어서 백성들이 알기 쉽게 하고 봄과 가을에 강회(講會)를 열었다. 예천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만두지 않고 이를 준수하고 있다.
을사년(1605, 선조38) 9월 19일에 집에서 운명하였다. 관찰사가 역마(驛馬)를 보내 보고하니, 임금께서 조회를 파하고 매우 슬퍼하셨으며, 관청에서 장사에 필요한 물품을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 많이 마련해 주었다. 임금께서는 승지(承旨)를 보내고, 동궁(東宮)께서는 관리를 보내 조문하고 제사하게 함으로써 예우를 각별히 하셨다. 이듬해 2월에 예천군 관아 남쪽 위곡(位谷)의 등성이에 안장했으며, 고을 사람들이 향현사(鄕賢祠)에 추배(追配)하여 제사를 받들었다.
공은 청명(淸明)하고 화락하였으며, 고요하고 침착한 자세를 스스로 지켰다. 타고난 자질이 도(道)에 가까워 마치 순수한 금과 좋은 옥 같았으니, 한 번 보면 내면에 보존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일찍부터 퇴계(退溪)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참되게 알고 실천하는 데에 힘을 쏟았고 덕성을 기르는 데 방도가 있었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선기옥형(璿璣玉衡)에 대해 조예가 있었으니, 보는 사람마다 정밀한 이해에 탄복하였다. 천문과 지리, 상수(象數)와 병법을 두루 섭렵하여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중용》과 《대학》을 대단히 좋아하여 만년(晩年)에 이르러서도 밤에 앉아 조용히 암송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허노재(許魯齋)가 ‘나는 《소학(小學)》을 신명(神明)처럼 공경하고 부모님처럼 존중한다.’ 하였으니, 사람들이 만약 노재처럼 공경하고 믿는다면 성현에 이르지 못할 것을 어찌 걱정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여러 책들을 초록(抄錄)하여 입교(立敎), 명륜(明倫), 경신(敬身)의 뜻을 넓히고자 《소학연의(小學衍義)》를 지으려 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했다.
공이 처음 관직에 나갔을 때 공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으나, 정승 이준경(李浚慶)이 한 번 보고 큰 그릇으로 여겨 말하기를 “얼굴 생김새가 암용[雌龍]과 닮았으니, 뒷날 반드시 크게 귀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북경(北京)에서 관상가(觀相家)를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그대는 참으로 어진 사람이니, 만백성을 구제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용모는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지 않았지만, 우뚝하기가 마치 들판의 학이 무리에서 빼어난 것과 같았으니,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사모하여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다. 마음가짐이 진실하고 너그러웠으며, 겸손한 자세로 스스로를 단속하였다. 만물과 내가 다르다는 생각을 벌레 같은 미물에게도 갖지 않았고, 천한 노비에게도 오만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 세수한 다음 옷을 단정히 입고 반듯하게 앉았으며, 비단이나 채색된 옷을 입지 않았고, 노래나 광대 등의 놀이를 전혀 보고 듣는 일이 없었다. 가산(家産)을 경영하는 일에 대해서 입을 닫고 말한 적이 없었기에, 공이 돌아가신 뒤에 자식들이 모두 집을 마련하지 못했다.
시종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마침내 성대한 지위에 올랐으나, 마치 오물에 더럽혀질 것처럼 권세를 피하였으니, 조촐하기가 절로 산인(散人)과 같았다. 비록 조정 의론이 어그러져 당(黨)을 만들어 서로 다투는 것으로 이로움을 삼았으나, 공은 매번 의리(義理)로 판단하여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영합하려고 하지 않았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너져 내리는 물결에 휩쓸리듯 당론에 휩쓸리는 가운데에서도 그 지조가 우뚝하였다.
일 꾸미기를 좋아하여 단서를 만들고 기회를 틈타 교묘하게 취하는 자를 보면, 번번이 깊이 미워하고 통렬히 절교하여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혹시라도 죄를 지어 예측하기 어려운 형벌을 받을 처지에 놓이면, 비록 소원하고 취향이 다른 사람이라도 반드시 “오직 약포공만이 나를 살려줄 수 있다.”라고 하였다. 공 또한 그들을 위하여 살 방도를 찾아서 구제한 뒤에 그만두었다.
나랏일을 논의하는 데 있어서는 대체(大體)를 앞세우고 명분(名分)을 중요하게 여겨, 반드시 원대한 계획에 힘쓰고 눈앞의 공로를 구하지 않았다. 당시에 군정(軍丁)을 많이 모집하고자 사천(私賤)을 속면(贖免)해 주려고 하였다. 한편으로는 군량 조달이 부족할 것을 걱정하여 공신문서(功臣文書)로 군량미를 거두자고 의논하였다. 이에 공은 불가함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기자(箕子)가 법을 만든 이후로 노비와 주인의 신분이 정해져, 마치 임금과 신하의 관계와 같다. 어찌 주인을 배반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자가 있겠는가. 이러한 정책은 장차 윗사람을 배반하게 이끌어서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벼슬을 파는 것은 본래 한(漢)나라 때의 잘못된 정사이다.
지금 또 훈신(勳臣)의 격을 무너뜨려, 편안히 앉아 곡식이나 팔아먹던 무리를, 죽음을 각오하고 화살과 돌이 날아다니는 전장에 뛰어든 사람들과 나란히 공신의 대열에 놓는다면, 어찌 투사(鬪士)를 권면하여 적장을 베고 적기(敵旗)를 꺾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자 논의하는 자들이 더 이상 따지지 못하였다.
이미 집에서 지내며 일을 사양하였으나, 조정의 득실(得失)을 들으면 밤에도 잠들지 못하였다. 집안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임금의 은혜를 받았으나 갚지 못했으니, 죽어서도 눈을 감을 수 없겠구나. 후세의 자손 가운데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나의 정성을 알아 내 뜻을 잇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한이 없겠다.”라고 하였다.
부인 거제 반씨(巨濟潘氏)는 3남 1녀를 두었다. 큰아들 윤저(允著)는 일찍 죽었고, 둘째 아들 윤위(允偉)는 주부(主簿), 막내아들 윤목(允穆)은 찰방(察訪)이다. 딸은 덕원 도정(德原都正) 이추(李樞)에게 시집갔다. 손자와 손녀, 증손자와 증손녀 몇 명이 있다.
선조(宣祖)께서 밝은 덕으로 왕위에 오르셔서 뛰어난 선비들이 많았는데, 풍모와 업적이 있는 사람은 몇 사람을 꼽을 만하다. 그러나 맑은 자질과 바른 인망을 지니고 경학(經學)까지 보태어, 위태로운 때에는 충성을 다하고 임용될 즈음에는 사임하여, 때에 맞게 행하고 때에 맞게 멈춰서 절의를 지키고 명예를 이루며, 명철하여 고상하게 일생을 마친 사람을 꼽는다면 공이 아마도 그런 사람일 것이다.
아아, 나 민구(敏求)는 일찍이 아이 때에 공을 섬겨 공의 맑게 수련한 겉모습만 보고서 삼가 공경하였을 뿐이다. 공이 돌아가신 지 지금 30년이 지났으니, 일이 오래되었고 전하는 기록도 적은데, 공의 자식들마저 다 고인(故人)이 되어 공의 생애를 기술할 사람이 없다.
지금 공의 손자 시형(時亨)이 일을 맡아서 내게 찾아와 요청하므로, 삼가 그 대략을 위와 같이 써서 시호(諡號)를 내려 주는 은전(恩典)을 청한다. <끝>
ⓒ충남대학교 한자문화연구소 | 강원모 오승준 김문갑 정만호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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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議政府左議政西原府院君鄭公諡狀 甲戌
公諱琢。字子精。號藥圃。鄭氏籍西原。高麗世大將軍顗。以節死畢玄甫之亂。其後䫨與弟誧。用文雅競爽。遭讒南竄。再起爲司徒西原伯。卒葬於安東。子孫遂爲嶺南人。連蹇世不振。高祖長水縣監諱元老。祖生員諱僑。考諱以忠。俱隱德不耀。以裕後慶。母韓夫人。以丙戌十月生公于醴泉金堂鄕。自幼穎秀。始受學。卽通大義。不爲師困。嘉靖壬子。陞上庠。戊午。擢文科。初隷校書館。旣而華聞彌彰。遷典籍。拜司諫院正言。當事敢言。有古爭臣風。劾權倖尹元衡等迷罔誤國之罪。前後四人。談者韙之。宣廟開元。入玉堂爲修撰。歷禮兵正郞,持平,校理,吏曹郞,政府舍人。甲戌。以副應敎擢授代言。轉都承旨。丁丑。由大司成,禮曹參議。出按關東。自庚辰至壬午。陞嘉善則拜都承旨,吏曹參判。陞資憲則拜漢城判尹。皆特恩也。乙酉以後
判禮刑二曹。再長天官。斥遠私謁。輒面謂干請者。君才當調。惜乎踵吾門。竟不用。己丑。進崇政大夫兵曹判書。適日本使至。廟議報聘便宜未決。公毅然曰。賊逆端業見。藉令信使在朝。兵鋒在夕。此講之悔也。議者多與公合。庚寅。使中朝未還。而處士崔永慶用非辜前死。言者謬謂公嘗官其弟餘慶。罷公職。冬敍禮曹判書,左右贊成。壬辰。賊內逼傳國都。上遽起西幸。公方起居藥房。倉卒從駕。不問家累何在。到西京。警報絡屬。上將移蹕鐵甕。公謂不拒守浿江天塹。規剋復之策。而迤入巖僻。縱賊乘虛以躡我。非計也。涕泣爭之不得。旣至。果上下震撓。已無可爲。而分朝之議定矣。時光海爲世子。公以貳師從。急趣伊川東路。賊益盛。崎嶇阻折。轉向龍灣。一行危慄。多變服詭行。觀望先後。公笑曰。天佑東方。保無此事。若其不幸。非智計可免。正月。與大朝會定州。提督李如松新擊平壤賊。自經略以下將官之管理東事踵相躡。公儐候慰犒。殆無一日暇。隨司勑使至平山道。受命衛護分朝南下。追及於湖右。時京邑甫定。賊屯據沿海一帶如故。時議以不可奈何於賊。欲與羈縻。公力陳賊必敗亡。秉議凜然。上在位久。雅知公潔修持平。値時劻勷。益信夷險一誠。以爲濟亂定傾。須用儒者。晉拜公右議政。甲午二月也。公感上恩。出謝未久。而黃廷彧與其子赫得罪廷訊。上問大臣。以廷彧有舊勳且老。欲免考發配。公謂欽恤刑章。保全功臣。俱盛德事。兩司論推官失出之過而語及公。於是公露章固辭。上諒公意不回。遞授知中樞府事。初。公薦李舜臣,金德齡其才可將。至是舜臣立戰功。爲海防司命。金德齡勇健善鬪。坐殺人當辟。公言讎賊據我彊域。而先殺壯士。不可令敵聞。上亟命原釋。丙申夏。上朝陵卜日。而雷震禁內。公進言曰。魯以鼷鼠示災止不郊。今譴告非常。宜克謹天戒。深惟非時不擧之義。上爲寢行。其秋。湖西賊李夢鶴就擒。支黨招款。約以拜陵日慝作而不果。聞者寒心。丁酉。賊躪湖南。羽報蜂午。公再上箚請自行邊曰。民罹大創。勢將土崩。朝廷命令。遠邇不通。烏可以祖宗二百年基業付之一擲。而束手待亡。臣奉哀痛之音。往布德意。慰諭軍民父老。率勵子弟。相度形便。控扼賊路要衝。庶幾萬一天幸。臣愚朝夕老死。馳突行間。誠難自力。顧先士卒一死報效。無負素蓄耳。朝廷閔其意不許。然有志者咸扼腕思奮矣。己亥。奉光海候中殿于遂安。還則朝廷以向危急時。大小臣工保妻子先出。圖便家私。榜其人姓名朝堂。以示其僚。公爲言海寇再逞。人情顧戀棧豆。蓋以懲異時不早自拔。汚賊者多故耳。此輩誠得罪分義。當國大慶濡澤屢降。普施渙汗。蕩除更始。亦王政宥過之大。上竟釋之。公持法必傅寬而行類此。始公大拜之年。已登耋耇。深以履滿爲懼。念國家喪亂未夷。無可去之義。至是時。駸駸向安。人臣得伸雅志。遂請暇南歸省墓。爲懸車終老計。翌年春。拜左議政。趣召入朝。自陳病憊。無以稱報上恩。控辭不赴。上旣允公請。令長吏歲時存問。加賜厚撫。後四年癸卯年七十八歲。迺拜疏乞致仕。上又重違公意。遣史官宣諭有曰。挽六丁而志不可奪。擧一世而事固罕聞。其冬。策扈從勳。封西原府院君。下本道。給奉朝賀祿俸。公又辭曰。老臣旣不得以時朝請陪盟府之會。苟援國例虛受寵祿。於公私受授交失 。上優旨答曰。元勳大臣退處田野。今又辭祿。尤增缺然。本道賦俸。實出於優待勳舊。何可固讓自潔。不體朝家盛意。公家業甚薄。歸而貧益甚。四壁懸罄。至不具二簋。而辭受之義。終始不苟。上所以禮遇公亦終始不衰。諒以見君臣矣。公素彊無疾。遇春秋俗節。必躬往展掃塋域。蹈履如少壯。而時徘徊田壟間。一丘一水。瞻眺竟晷。唯二三門故肩輿杖几而已。田夫野人不知爲故相。而與鄕士友引觴陶寫。未嘗不盡興。採呂氏鄕約可行於今者。定尊卑進禮讓。死喪相恤。急難相救助。條爲式目。譯以方言。令甿俗易曉。春秋講行。醴泉人至今遵之不廢。以乙巳九月十九日考終于寢。觀察使驛聞。上罷朝震慟。官它葬事具如例有加。而上遣承旨。東朝令官僚臨弔祭以異其數。越明年二月。定于郡治南位谷之原。邑人追配鄕賢祠以奉俎豆。公淸明豈弟。恬穆自守。天資近道。如精金良玉。一見知其所存。早遊退陶先生之門。用功於眞知實踐。充養有方。未弱冠。造璿璣玉衡。觀者服其精解。旁涉天文地理。象數兵家之流。靡不淹貫。篤好中庸,大學。迨晩年猶夜坐默誦不倦。嘗曰。許魯齋有言。吾於小學。敬之如神明。尊之如父母。人苟敬信如魯齋。何患不至聖賢。抄錄群書。欲以廣立敎明倫敬身之旨。作小學衍義而不果成。公初釋褐。人無知者。李相浚慶一見器之曰。顏狀類雌龍。後必大貴。在帝都遇相者謂曰。君眞仁人。當濟萬民。身貌不踰中人。而亭亭如野鶴出群。人皆敬慕而不敢狎焉。秉心忠信寬平。卑謙自牧。物我之懷。不施於蟲豸之微。敖慢之色。不設於僕隷之賤。晨興盥濯。整襟端坐。身不服錦綵。音伎玩好。一無接於耳目。絶口未嘗言營修家產。公沒而諸子俱不能家。終始歷淸貫。遂都盛位。而避權若浼。蕭然自同散人。雖時議乖張。立門戶相傾敓爲利。而公每裁以義理。不肯詭隨。卓然頹流茅靡之中。見有喜事造端抵巇以巧取者。輒深惡痛絶。不少假借。然人或得罪叵測。雖在疏逖異趨。必曰惟藥圃公活我。公亦爲之求其生道。全濟乃已。至論國家事。先大體重名分。必務遠大規畫。不徼近功。時廣募軍丁。欲許私賤贖免。且患軍餉乏興。議以功券收之。公執不可曰。自箕子設法以來。奴主分定猶君臣也。安有主叛而國忠者。是將道之叛上而國不爲國矣。賣爵本漢時弊政。今又壞敗勳格。安坐販穀之徒。與出萬死犯矢石者竝列帶礪。奚以勸鬪士。令斬將艾旗哉。議者無以難。旣家居謝事。聞朝政得失。夜不能寐。謂家人曰。銜恩莫報。死不瞑目。後世子孫知吾愛君憂國之誠。有能繼吾志者。吾無憾矣。夫人巨濟潘氏。擧三男一女。長允著。早歿。次允偉主簿。次允穆察訪。女嫁德原都正樞。孫曾男女若干人。宣廟以明德當乾。俊乂之士林林。風猷器業屈指數公。而至於淸資雅望。輔以經學。竭忠於危亂之際。抽身於嚮用之辰。時行時止。保節完名。旣明且哲。高朗令終。公庶幾其人哉。嗚呼。敏求嘗以童子事公。徒得公淸修之表。竦然起敬而已。公歿今三十年。事遠寡傳。公諸子又皆淪喪。無能述公始末者。今因嗣孫時亨承事來請。謹次其梗槩如右。請易名之典。<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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