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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1. 02. 17(목/정월대보름)
■ 나홀로 제60차 능원묘 답사 결과
◈답 사 지 : 경기 하남/광주 권역 묘지
◈일 시 : 2011.02.12(토) 09:00 ~19:00
◈참가 인원 : 12명
▲세종의 서5자인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 묘역 전경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
1430년(세종 12)∼1479년(성종 10). 조선 초기의 종실.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침(李琛). 자는 문지(文之).세종의 다섯째 서자
이며, 모친은 신빈김씨(愼嬪金氏)이다.총명과 지혜가 뛰어나 다른 아들들보다 부왕의 남다른 사랑을 받았다.
7세에 밀성군에 봉하여졌고, 세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우애도 남달리 돈독하였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큰 일들은 반드시 그의 자문을 받았다. 오위도총부도총관, 각 시(寺)의 도제조, 의금부도위관 등을 두루 역임하였으
며, 1468년(예종 즉위)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각각 책록되었다.
시호는 장효(章孝)이며, 뒤에 효희(孝僖)로 고쳐졌다.
▲밀성군의 아들, 운산군(雲山君) 이계(李誡) 묘역 원경
●운산군(雲山君) 이계(李誡)
1453(단종 1)∼1510(중종 5) 조선전기의 왕족으로 이름은 계(誡), 자는 신옹(愼翁), 시호는 공소(恭昭). 밀성군의 장남으로 총명하고 수려하며 준수하고 밝아 세조대왕이 친히 경서와 사서를 가르쳤다. 초수 정에 이어서 1464년(세조 10) 12세의 나이로 정의대부에, 이 후 승헌대부에 승계되었다.
1480년(성종 11) 가덕대부, 1499년(연산군 5) 흥록대부에 올랐다. 곧 이어 종부시(宗簿寺) 도제조, 문소전(文昭殿) · 사옹원(司饔院) 영사로 있는 동안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으며 연산군 때 현록대부를 제수받았다. 하지만 공은 종실의 원로로 연산군을 실정의 이유로 폐위하고 중종대왕을 옹립하는 중종반정에 참여하였다.
1506년(중종 1) 병충분의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翊運靖國功臣) 2등을 하사받았다. 1510년(중종 5)에 별세하여 1511년(중종 6)에 광주군 치서면 사락리 대덕원 자좌 오향(현 경기도 하남시 초이동 산4-1)에 장지를 정하였다. 석물을 갖추었고 신도비는 이조판서 남곤(南袞)이 찬하고 종부시 정 김희수(金希壽)가 쓰고 관찰사 이언호(李彦浩)가 전(篆)해서 1518년(중종 13)에 세웠다.
사당은 충북 청원군 남이면 가마리에 아버지 밀성군과 함께 모셨다. 배위는 신천군부인(信川郡夫人) 현풍곽씨로 주부 득륜(得倫)의 딸과 오천군부인(烏川郡夫人) 연일정씨로 자숙(自淑)의 딸이다.
▲광주이씨 시조비 묘역. 광주 이씨의 시조인 이당(李唐)의 부인 인화 이씨(仁華 李氏) 묘역 전경
▲정종의 서4자 선성군(宣城君) 이무생(李茂生). 묘역 전경. 입구 자물쇠가 잠겨 있지 않아서 묘역을 둘
러 볼 수 있었습니다.
●선성군(宣城君) 이무생(李茂生).
생졸년 미상. 정종(定宗)의 4남으로 모친은 충주지씨 고려 찬성사 지윤(池奫)의 딸이다.
정종이 임금의 자리를 버리고 풍덕(豊德)의 강가로 물러나자 선성군은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렸으며 담백하고 조용한 마음을 스스로 지켜 권세와 존귀함을 싫어하였다.
이무생은 1427년(세종 9) 자동선‧간설매‧ 죽간매를 간통한 혐의로 배천(白川)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종친(宗親)의 예에 의거하여 종학(宗學)에 나왔다는 기사가 세종 12년에 있는 것으로 보아 얼마 되지 않아 유배 생활에서 풀려난 듯하다.
1444년(세종 26) 다시 주색을 좋아하고, 병을 핑계하고 학문을 게을리한 것 때문에 다시 배천으로 유배되었다.
1454년(단종 2) 3월에 중의대부에 오르고 선성군에 봉해졌다.
1457년(세조 3)에 창기 탁금아(濯錦兒)를 사랑하여 정처를 내쫓은 일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1872년(고종 9) 3월 고종 조에 상보국숭록대부 영종정경으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양정(良精)이다.
▲태종의 서6자 희령군(熙寧君) 이타(李袉)의 묘역 전경. 입구가 개방되어 있어서 이 곳도 묘역을 둘러
볼 수 있었습니다.
●희령군(熙寧君) 이타(李袉)
미상∼1465년(세조 11). 이름은 이타(李袉).태종(太宗)의 서(庶) 6남으로 숙의최씨(淑儀崔氏)의 소생이다.
고종 때에 현록대부(正一品) 영종정경으로 추증되었다.배위는 둘로 순창군부인 신씨(淳昌郡夫人申氏)는 찬성(贊成) 신숙생(申淑生)의 딸로서 자녀가 없다.
평산군부인신씨(平山郡夫人申氏)는 군수(郡守) 신사렴(申士廉)의 딸로 3남을 두었다.
장남은 화성군(花城君) 이감(李堪)이고, 차남은 영원정(寧原正) 이배(李培)이며, 3남은 곡강도정(曲江都正) 이게(李垍)이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군 동부읍 덕풍리(현 하남시 덕풍동) 산67 유좌(酉座) 언덕에 있다.
배위인 순창신씨는 합폄부좌(合窆附左)하고, 평산신씨는 그 계하(階下)에 있다. 시호는 이정(夷靖)이다.
▲희령군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하남 권역 묘역들은 대부분 아파트가 전방을 가로 막고 있습니다.
▲하남 동사지 오층석탑(보물 12호)과 하남 동사지 삼층석탑(보물 13호)에서...
▲광주 향교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지만 결국, 내부에 들어가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남 교산동 마애약사여래좌상(보물 981호) 전경
▲7~8년전 봄에 가 본 곳이지만, 겨울도 너무 좋네요... 마애불은 사진 좌측 상단에 있는데, 그늘이 져서..
▲조선 초기 문신이며, 대학자였던 동량 최항(崔恒)선생 묘역 뒤에서 바라 본 모습. 북향이어서 겨울에는
묘역에 항상 눈이 가득...
●최항(崔恒)
1409년(태종 9)∼1474년(성종 5).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정부(貞父), 호는 태허정(太虛亭)‧동량(㠉梁). 증영의정 최사유(崔士柔)의 아들이며, 서거정(徐居正)의 매부(姉夫)이다.
1. 세종대의 활동과 관력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집현전부수찬이 되고, 이해에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 등과 같이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1444년 집현전교리로서 《오례의주(五禮儀注)》를 상정(詳定)하는 일에 참여하였으며, 같은해 박팽년‧신숙주‧이개(李塏) 등과 함께 《운회(韻會)》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1445년 집현전응교로서 《용비어천가》를 짓는 일에 참여하고, 이어 《동국정운》‧《훈민정음해례》 등을 찬진하였다.
1447년 문과중시에 5등으로 합격하여 집현전직제학 겸 세자우보덕에 임명되었다. 그 당시 세종은 세자(뒤의 문종)로 하여금 섭정(攝政)하게 하였는데 이때 서연관(書筵官)으로서 정치에 보좌함이 컸다.
1450년(문종 즉위)에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였고, 같은해 언관(言官)으로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해 7월 다시 집현전으로 돌아와 부제학이 되었고,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주석하는 일을 맡았으며, 《고려사》의 열전을 집필하였다.1452년 2월 《세종실록》 편찬 때는 수찬관으로 참여하였다.
2. 단종‧세종대의 활동과 관력
이어 동부승지가 되어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협찬한 공이 있다 하여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1등에 녹훈되고, 도승지가 되었다. 이해 12월에 이조참판에 임명되고, 영성군(寧城君)에 봉해졌다.
1454년 10월에는 〈공신연곡(功臣宴曲)〉 4장(章)을 지어 올렸으며, 1455년 정난공신 1등의 교서가 내려졌다.
그해 2월 대사헌이 되고, 6월에 세조가 즉위하면서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이어 7월에 서연의 우부빈객이 되었고, 그뒤 호조참판‧이조참판‧형조판서‧공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세조는 즉위한 직후 육전상정소(六典詳定所)를 설치하고 《경국대전》 편찬에 착수하였는데 이때 그는 김국광(金國光)‧한계희(韓繼禧) 등과 함께 육전상정관(六典詳定官)으로 임명되었고, 1458년(세조 4)에 《신육전(新六典)》의 초안을 작성하여 올렸다.
그 해 부친상을 당하였으나 왕명으로 기복(起復)되어 다음해에 중추원사세자빈객 겸 성균관대사성이 되고 1460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1461년 양성지(梁誠之)의 《잠서(蠶書)》를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하였다. 1463년 의정부우참찬이 되고, 1464년 9월 왕명으로 《병장설주(兵將說註)》를 산정(删定)하였다.
이듬해 좌참찬 겸 세자이사(左參贊兼世子貳師)가 되었고, 사서오경의 구결(口訣)을 바로잡는 일에 참여하였다.
1466년에 판병조사로 임명되자 그는 군사관계는 적임이 아니라고 간절히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467년 4월 좌찬성, 5월 우의정, 7월 좌의정, 9월 영의정이 되었다.
1468년(예종 즉위) 9월 신숙주‧한명회(韓明澮)‧김국광 등과 함께 원상이 되었으며, 1469년 경국대전상정소 제조(提調)를 겸하여 《경국대전》을 찬진하였고, 이어 《무정보감(武定寶鑑)》을 찬수하였다.1470년(성종 1) 부원군에 봉해졌고, 《역대제왕후비명감(歷代帝王后妃明鑑)》을 찬진하였다.
1471년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 1등에 녹훈되고 다시 좌의정이 되었으나 1474년 4월에 죽었다.
3. 평가
그는 18년 동안 집현전관원으로 있으면서 경연관‧지제교(知製敎)로서뿐만 아니라 유교적인 의례‧제도를 마련하기 위한 고제연구와 각종 편찬사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그에 대한 평가는 서거정이 찬한 비명, 《필원잡기(筆苑雜記)》, 김육(金堉)이 지은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의 것과 《성종실록》에 있는 그의 졸기의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전자에서는 그의 성품이 겸공(謙恭)‧간정(簡靜)‧단개(端介)‧무화(無華)‧공정(公正)하고 정관(正冠: 의관을 바로함.)‧위좌(危坐: 무릎을 꿇고 몸을 바르게 하여 앉음.)하며, 침착 신중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청백하여 재산을 탐하지 않으며, 40년간 벼슬하였으나 한번도 탄핵을 받지 않았다고 극구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후자에서는 겸근과언(謙謹寡言: 겸손하고 삼가며 말이 적음)과 정관‧위좌하였다 한 것은 거의 비슷하나, 일을 처리하는 데 결단성이 없고, 정승자리에 있었으나 한번도 인사(人事)를 건의하는 일이 없이 우물쭈물 넘겼으며 자기의 의견을 내세우지 못하였다고 하였고, 문형(文衡)에 있던 사람이 의정으로 임명되면 반드시 문형직을 사양하는 것이 예였는데 그는 오히려 이를 사양하지 않고 겸하였다고 못마땅하게 평하고 있다.
특히, 가정문제에서도 부인의 성품이 사나워서 집안일은 부인의 주장대로 행해져 자유가 없었다고 하고, 혼사에 있어서도 인품으로 보지 않고 재산만을 보고 사위와 며느리를 얻었다고 혹평하고 있다.
《성종실록》 졸기에 보이는 이와같은 혹평은 당시 삼사(三司) 계통에 진출하여 훈구대신들을 공격하던 사림(士林)계통의 신진관료들의 활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저서로는 《태허정집》‧《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가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고려말 조선초의 무신인 조영무선생 묘역 뒤에서 바라 본 모습. 묘역으로 오르는 계단은 너무 높고 길어...
●조영무(趙英茂)
미상∼1414년(태종 14). 고려말 조선초의 무신. 본관은 한양(漢陽). 중국에서 귀화한 조지수(趙之壽)의 고손으로, 조순후(趙珣厚)의 손자이며, 조세진(趙世珍)의 아들이다. 개국공신 1등 조인옥(趙仁沃), 개국공신 2등 조온(趙溫)이 그의 당내이다.
1392년(공양왕 4) 이방원(李芳遠)의 명으로 조영규(趙英珪) 등과 함께 정몽주(鄭夢周)를 격살한 뒤 그해 이성계를 추대, 조선개국에 공을 세우고 판전중시사(判殿中寺事)에 올라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으며, 한산백(漢山伯)에 봉하여졌다.
1394년(태조 3)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로서 강계등처도병마사(江界等處都兵馬使)를 겸임하고, 1397년 충청도도절제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제1차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정사공신(定社功臣)1등에 봉하여졌다.
태조는 그의 배은망덕을 크게 개탄하였으며, 1402년(태종 2)에 일어난 조사의난(趙思義亂)은 조영무‧이무(李茂) 등을 죽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방원의 극진한 총애를 받아 판중추원사‧의흥삼군부중군동지절제사(義興三軍府中軍同知節制使)를 거쳐 참찬문하부사에 승진하였다.
1400년(정종 2) 도독중외제군사도진무(都督中外諸軍事都鎭撫)로 병권을 장악하여 제2차왕자의 난에도 이방원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1등에 봉하여졌다. 사병혁파가 실시될 때 이를 거부하고 무기를 수납하는 군관을 구타하였다가 황주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와 서북면도순문사 겸 평양부윤으로 나갔다.
그뒤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권행의정부사(權行議政府事)‧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를 거쳐 영승추부사(領承樞府事)로 병조전서(兵曹典書)를 겸임하였다.1405년 우정승에 올랐으며, 이듬해 판이병조사(判吏兵曹事)를 겸직한 뒤 1408년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었다.
1409년 훈련관도제조(訓鍊觀都提調)를 지내고, 영삼군부사(領三軍府事)가 되어 병으로 사직하였다.
1412년 수군첨절제사에 임명된 박영우(朴英祐)의 위임거부로 물의가 일어나자 추천한 장본인으로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이듬해 우정승에 복직되었으며, 죽은 뒤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태종의 서11녀인 숙안옹주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묘비는 옹주가 아닌 공주로 새겨져 있어...
▲숙안옹주 위에 위치한 남편인 회천군 황유 묘역 전경
▲신흠선생 신도비 모습. 3호차의 늦은 합류로 광나루는 묘역에 가지 않고...
▲신흠선생 신도비의 머릿돌(이수)에 새겨진 조각이 멋집니다.
▲답사를 오후 5시에 마치고, 수타 자장면 한 그릇씩 맛있게 먹고... 집결지로 이동 및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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