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世 이경일(李敬一)
[세계] 백사공파(白沙公派)
[문과] 영조(英祖) 51년(1775) 을미(乙未) 정시4(庭試) 을과(乙科)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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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4년(영조 10)∼1820년(순조 20).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경기도 포천 가산면 방축리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원회(元會), 호는 청헌(聽軒), 본관은 경주, 오성부원군 이항복의 6대손, 삭령군수(朔寧郡守) 세장(世章)의 증손, 증 좌찬성 문좌(文佐)의 손, 진사 종열(宗悅)의 자이다. 훗날 도사(都事-從5品) 종악(宗岳)에게 출계하였다.
1768년(영조 44) 음직으로 관직에 나와 온릉참봉(溫陵參奉-從九品)에 임명되었다가 사옹원 직장(司甕院 直長)을 역임하고 그 후 6품으로 승진하여 광흥창 주부(廣興倉 主簿)를 지내고 북부도사(北部都事)를 거쳐 덕산현감(德山縣監-從六品)에 임명되었다.
1775년(영조 51) 문과정시(文科庭試)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예조좌랑(禮曺佐郞-正五品)을 역임하고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正六品)을 거쳐 강진현감(康津縣監-從六品)으로 나갔다.
1777년(정조 1) 홍문관 수찬(弘文館 修撰)이 되어 영조실록(英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교리(校理)로 승진되고 남학교수(南學敎授), 봉상시정(奉常寺正), 장령(掌令) 등을 역임하고 영광군수(靈光郡守)로 나갔다.
1786년(정조 10)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하고 병조, 형조의 참의(參議-正三品)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가 동래부사(東萊府使)로 나갔다. 1788년(정조 12) 승지를 배수 받은 후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광주부윤(廣州府尹)을 지내고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從二品)로 제수되었다.
1793년(정조 17)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호조참판을 제수 받고 오은군(鰲恩君)의 봉호를 세습하였다. 그후 병조와 형조의 참판을 지내고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거쳐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역임한 뒤 영흥도호부사(永興都護府事)로 외직에 나갔다.
1799년(정조 23) 도총관(都摠管)을 역임하고 1800년(정조 24) 공조판서(工曹參判- 從二品)를 거쳐 좌참찬(左參贊-正二品)에 제수되어 비변사 제조(備邊司 提調)를 겸임하였다.
1801년(순조 1) 형조판서(刑曹判書-正二品)에 임명되고 이어서 광주유수(廣州留守)를 거쳐 한성판윤(漢城判尹-正二品)을 지내고 동영부지사(同寧府知事), 대사헌(大司憲-從二品), 병조판서를 지냈다.
1804년(순조 4) 우의정(右議政-正一品)에 올랐다. 이때 성학(聖學)에 힘쓰고 정치기강을 바로 잡을 것 등을 왕에게 건의하여 받아들여졌으며 이듬해 좌의정(左議政-正一品)을 제수 받고 1808년(순조 8) 나이 75세에 봉조하(奉朝賀-이품이상의 관원이 사임한 후에 특별히 준 벼슬, 실제 사무는 보지 않으며 의식이 있을 때만 참여하고 종신토록 녹봉을 주었다.)가 되었다.
1820년(순조 20) 87세로 세상을 떠났다. 공(公)은 오성부원군 이항복(李恒福)의 사손(祠孫)으로서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기어 효자정문(旌門)이 내려지고 예장(禮葬)을 명하였다. 저서에는 시문을 모은 《청헌유고-聽軒遺稿》가 있다. 시호(諡號)는 효정(孝定)이다.
묘는 포천 가산면 가산리 시우동에 자리한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