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허락되지 않는 자리, 엄마!
“정환맘~ 우리 딸 진통이 와서 병원으로 갔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딸의 출산 소식을 전하는 옆집 언니의 음성이 살짝 떨려온다. 남들은 다 본 손주를 환갑이 넘어 맞이하는 언니의 마음을 조금은 알 듯하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맞이하는 새 생명. 결혼하고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엄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는 줄 알았는데 엄마의 자리도, 할머니의 자리도 쉽게 허락되지 않는 곳이라는 걸 언니도, 나도 안다. 엄마의 이름을 얻기까지 무려 6년이란 시간을 견딘 나이기에 지금 이순간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 정말 잘 안다.
언니는 연일 기록적인 폭염을 토해내고 있는 이 여름, 딸 산후조리를 해주고 있다. 손녀딸 몸에 행여 땀띠라도 날라 하루 종일 에어컨을 켜고 두문불출하며 딸과 손주 뒷바라지를 하는 언니가 존경스럽다. 한 생명을 지켜낸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도대체 엄마란 뭘까?
엄마, 그 자리에서
여기 엄마가 있다. 양손으로 가슴을 살포시 감싸 안은 우리 모두의 엄마. 소중한, 감히 너무도 소중하여 누구에게도 내보일 수 없는 그 어떤 존재를 감싸 안은……. 『엄마의 선물』이다.
면지를 들추자 텅 빈 공간이 나를 맞이한다. ‘엄마의 선물’이라. 찰나에 많은 것들이 스치고 지나간다. 받은 것이 하해와 같아 헤아릴 수가 없다. 그래서일 게다. 이렇게 빈 공간으로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엄마가 되고 나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되고,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리게 되었다’는, ‘엄마에게 전하지 못한 말들을 이 책을 빌어 전한다’는 작가의 말에 깊이 공감하며 그림책 속으로 들어간다.
두둥실 떠가는 구름을 따라 들어간 곳에서 엄마는 말한다.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질하면, 언젠가는 너에게 돌아온단다.” “주먹으로 아프게 하면, 그것 또한 너에게 돌아오지.” “이겼다고 기뻐하거나 졌다고 슬퍼하지 말아라. 이기고 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단다.” “비 맞을까 두려워 너의 길을 멈추지 마. 너에게는 커다란 우산이 있잖니.” “떨어질까 두려워 너의 꿈을 접지는 마. 너에게는 커다란 날개가 있으니까.” “힘이 들면 가만히 손을 내밀어 보렴. 나는 항상 너의 곁에 있단다.”
자라면서 수도 없이 들었던 말.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내 눈에서는 피눈물이 난다.” “여자도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사는 세상이다. 움츠리지 말고 너 하고 싶은 것을 해 보렴.” “밥은 먹었니? 부모는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을 볼 때가 제일 좋다.” 나의 엄마가 하던 말이 나를 훑고 지나간다. 살면서 나를 있게 한 이 말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엄마가 “너는 내게 가장 소중하고 자랑스런 아이란다.” 라고 한 말에 아이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엄마, 저도 엄마가 너무나 소중해요.” 하듯이, 나 또한 엄마에게 들었던 이 말들이 내 가슴에 오롯이 새겨져 오늘을 살게 한다. 너무나 소중한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엄마에게 못했던 이 말을 “엄마, 저도 엄마가 너무나 소중해요.”
딸이 자라 어느덧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엄마가 내게 했던 말들을 내 아이에게 하고 있다. “엄마 밥이 먹고 싶을 때는 언제든 와라. 네가 지치고 힘들 때면 쉬어갈 곳이 여기란 걸 잊지 마라.” “너는 내게 가장 소중한 존재다. 언제까지나 너를 지켜주는 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라.”
독특한 그림책
이 책은 그림책 치고는 제법 두툼하다. 가격 또한 만만치 않다. 면수는 여느 그림책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종이 낱장이 두꺼워서 책 자체가 두꺼워진 것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한 장면을 한쪽은 그림으로, 다른 한쪽은 OHP 필름에 아이 손, 엄마 손을 사실적으로 그려 표현했다. 한 장면을 넘기면 필름에 그려진 손이 다른 장면의 그림과 만나면서 글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전한다. 손이 이야기를 이끌고 있다. 아이 손은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손이 되었다가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손이 되기도 하고, 가위바위보에서 이기고 지는 손이 되기도 한다. 엄마 손은 비 맞을까 두려워하는 아이의 우산이 되기도 하고, 꿈을 펼치다 추락할까 겁먹은 아이의 날개가 되기도 한다.
그림이 참 독특하다. 아이의 몸은 색깔을 입혔으나 아이의 손과 엄마의 손, 몸은 무채색이다. 색깔을 입히고 입히지 않고의 차이는 무엇일까? 색깔이 있는 것은 슬쩍 보아도 그 속내를 알 수 있다. 색이 말을 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색깔이 없는 것은 오래 보아야 그 깊이를 알 수 있다. 자세히 뜯어보아야 말하는 이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다. 색깔을 입히지 않아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색을 입힐 수도 있다. 보드라운 갓난아이의 될 수도 있고, 털 숭숭 난 사춘기 소년의 손이 될 수도 있다.
글이 간결하다. 한 편의 시를 읽는 듯하다. 꾹꾹 눌러 담은 엄마의 말들 속에서 아이에게 일어난 수많은 일들을 읽어낸다. 은은하게 읊조리는 말들에서 아이의 성장과정을 엿본다. 말과 말 사이에 엄마와 아이의 이야기가 풍성하다. 그래서 좋다. 간결한 엄마의 말이. 내가 더 많은 이야기할 수 있으니. 그래서 좋다. 비워진 하얀 여백이. 내가 더 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
쉽게 허락하지 않는 자리,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게 표현한 이 책은 2015년 볼로냐국제아동 도서전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도서전에 발표한 제목이 『Message of Hands』다. 그런데 왜 제목을 <엄마의 선물>이라고 했을까? 엄마에게 받은 선물? 엄마가 받은 선물? 한참을 곱씹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둘 다 맞다. 엄마에게 받은 선물은 엄마의 사랑이고, 엄마가 받은 선물은 사랑할 수 있는 존재, 아이다. 엄마의 선물의 주체는 엄마인 내가 될 수도 있고, 아이가 될 수도 있다. 아이가 자라 엄마가 되면 그 아이 또한 엄마에게 받은 사랑을 그 아이의 아이에게 줄 테니까. 내가 그러했듯이. 옆집 언니가 그러하듯이. 사랑은 내리사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