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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14대 국왕 | |
본명 | 이연(李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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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 1567년 ~ 1608년 |
종교 | 유교(성리학) |
출생일 | 1552년 11월 26일(1552-11-26) (음력 11월 11일)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인달방 도정궁 |
사망일 | 1608년 3월 16일 (음력 2월 1일) (55세)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정릉동 행궁 정침(正寢) |
매장지 | 목릉 (대한민국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
왕비 | 의인왕후 박씨 인목왕후 김씨 |
부친 | 덕흥대원군 |
모친 | 하동부대부인 |
이전 왕 | 명종 |
다음 왕 | 광해군 |
선조(宣祖, 1552년 11월 26일 (음력 11월 11일) ~ 1608년 3월 16일 (음력 2월 1일))는 조선의 제14대 임금 (재위 1567년~1608년)이다.
그의 성은 이(李), 휘는 연(昖),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성상(聖上) 즉위전의 작위는 하성군(河城君)이었고, 존호는 정륜립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경명신력홍공융업(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命神曆弘功隆業) 시호는 현문의무성예달효(顯文毅武聖睿達孝)[1]이다.
중종의 서손이며 조선 명종의 이복 조카이고,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岹)와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의 아들로서, 비는 의인왕후(懿仁) 박씨, 계비는 인목왕후(仁穆) 김씨이다. 조선 최초의 서자 출신 임금이며, 최초의 방계 혈통의 임금이기도 하다.
1567년 8월부터 1608년 3월까지 재위하는 동안 1567년 8월부터 이듬해 1568년까지 이복 숙모 인순왕후 청송 심씨가 섭정을 하였고 1568년부터 1608년까지 친정하였으며 같은 해 1608년 3월 훙서(薨逝)할 때까지 둘째 서자 광해군 이혼이 세자 신분으로 잠시 대리청정을 하였다.
선조는 1552년 음력 11월 11일 중종의 서자 덕흥대원군 초(岹)와 하동부대부인의 셋째 아들로 한성 인달방 도정궁(都正宮)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이균이었으나 이연으로 바꾸었다.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다가 순회세자가 요절한 뒤 명종의 총애를 받았고, 곧 후사로 낙점되었다.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명종이 1565년(명종 20년)에 병석에서 밝힌 바에 따라, 16살의 어린 하성군 이연은 왕위에 올랐다. 이에 대하여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하성군이 왕이 된 이유가 담겨있다. 어느날, 명종이 덕흥대원군의 아들들을 불러 익선관을 써보라 하였다. 두 형(하원군, 하릉군)들은 별 말 없이 익선관을 썼지만, 하성군은 현직 왕의 익선관을 함부로 쓸 수 없다하여 삼가 물러났고, 이러한 하성군의 겸손한 태도는 명종의 마음에 들었다 전해진다. 선조의 즉위는 후궁에게서 태어난 서자가 즉위한 첫 사례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이 서자였다는 사실은 평생 선조를 따라다니며 일종의 콤플렉스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선조는 재위 도중 여러 번에 걸쳐서 생부 덕흥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사림파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명종 22년 (1567년) 음력 6월 28일에 명종이 평소 앓고 있던 병이 위독해졌으므로, 대신들이 입시하였으나 명종이 말을 할 수 없었고, 2년 전에 덕흥군의 셋째 아들 이균(李鈞)을 후사로 삼은 일이 있어 그를 따르게 되었다.[2]
1567년(선조 즉위년) 선조는 음력 6월에 즉위하였다. 그렇지만, 명나라는 바로 선조를 조선의 왕으로 책봉하는 칙서를 내려주지 않았으며, 그동안 선조의 지위는 조선국 권서 국사(朝鮮國權署國事)였다. 그해 11월에 명나라는 드디어 책봉고명을 내려, 선조는 정식으로 조선의 국왕이 되었다. [3]
선조는 생부와 생모를 1569년(선조 2)에 송(宋)나라 영종(英宗)의 생부 복왕(濮王)을 추존하는 고사(故事)를 따라 생부 덕흥군을 추숭하여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으로 하고, 생모 하동군부인은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으로 추존하였다. 즉위 초반에 선조는 아버지 덕흥대원군을 여러번 왕으로 추존하려 하였으나, 사림파 선비들이 중국 송나라의 복안의왕과 안희수왕, 중국 전한의 정도공왕에 대한 고사를 들며 이를 반대하여 성사시키지 못했다.
즉위 직후부터 인순왕후에 의한 수렴청정의 영향권 안에 머물렀으나, 선조는 사림 출신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등용하였고, 또한 그들을 통해 친정을 유도하게 함으로써, 인순왕후를 일선에서 물렸다. 인순왕후의 퇴진 직후, 이이 등이 부패한 재상 심통원[4]을 탄핵하자 선조는 그를 바로 숙청했다. 나아가 이러한 선조의 즉각적인 행동은 심통원이 자신의 즉위를 반대한데 대한 감정도 또한 작용했다. 이어 선조는 김효원 일파가 심의겸을 공격하자 심의겸을 외직으로 축출해버렸다. 대비의 친정 일족을 제거한 소년왕의 의외의 거친 면모에, 어린 왕이라는 이유로 선조를 깔보던 신하들은 경악하였다.
선조가 즉위할 무렵 조선 사회는 성종 때부터 중앙정치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이 정계를 주도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던 시기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선조는 주자학의 보급을 장려하였고, 사림을 널리 등용했으며, 스스로 학문에 힘써 강연(講筵)에서 이황·이이·성혼 등 대유학자들과 경사(經史)를 토론했다.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를 비롯한 여러 사림인사들을 신원복구하였고, 을사사화로 귀양가 있던 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 등을 석방하여 기용하는 한편, 훈신세력인 남곤(南袞)·윤원형(尹元衡) 등의 관작을 추탈(追奪)하거나 삭훈(削勳)했다. 또한 현량과(賢良科)를 다시 설치하고, 유일(遺逸)을 천거하도록 하여 조식(曺植)·성운(成運) 등을 등용했다. 이황을 신뢰하고 그의 정치철학을 적극적으로 따르다가, 퇴계가 죽자 이이를 신임하였는데, 율곡에 대한 정치적 지원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또한 잠저시절부터 학문적 소양이 있었던 선조는 유교사상 확립을 위해 명유들의 저술과 경서의 간행에 힘써, 1575년 〈주자대전〉의 교정본을 간행하였고, 1585년에는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해 경서의 훈해(訓解)를 교정하게 했다. 1588년 사서삼경의 음석언해(音釋諺解)를 완성하고 〈소학언해〉를 간행했다.
한편 조선초부터 명나라와의 외교문제가 되고 있던, 즉 명나라의 〈태조실록〉·〈대명회전 大明會典〉 등에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아들과 함께 4명의 왕을 살해했다고 되어 있는 것을 고치기 위해 주청사를 거듭 파견했다. 그리하여 1584년 황정욱(黃廷彧)이 중찬된 〈대명회전〉의 수정된 조선관계 기록의 등본을 가져옴으로써 종계변무(宗系辨誣)의 목적을 달성했고, 1589년 성절사 윤근수(尹根壽)가 〈대명회전〉 전질을 받아옴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선조의 즉위를 계기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사림은 척신정치하에서 성장한 구세력의 제거를 둘러싸고 전배(前輩)와 후배(後輩)가 대립하게 되었다. 전배는 소윤(小尹)세력이 우세하던 상황에서 심의겸(沈義謙)의 도움으로 정계에 진출한 인물들로서 심의겸을 척신이지만 사림의 동조자로 받아들인 데 반해, 소윤세력의 몰락 이후에 정계에 진출한 후배들은 심의겸을 포함한 구세력의 제거를 주장했다.
1575년 전배는 심의겸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이, 후배는 김효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인이 되었다. 서인의 주요인물은 박순(朴淳)·정철(鄭澈)·윤두수(尹斗壽) 등이고 동인의 주요인물은 류성룡(柳成龍)·이산해(李山海) 등이었으며, 각각 이이와 이황의 학문에 영향을 받고 있었으므로 학풍·학연을 배경으로 한 대립의 양상도 띠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기축옥사를 통해 서인세력은 동인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1591년에는 건저 문제로 정철이 파면되면서 동인이 집권하게 되었으나, 정철의 처벌을 둘러싸고 온건파는 남인(南人)으로, 강경파는 북인(北人)으로 다시 나뉘었다.
이발, 정인홍 등이 우성전의 축첩을 문제삼은 것 역시 동인 강경파들의 온건파에 대한 의심과 불신의 한 원인이 되었다. 우성전은 여러 명의 첩을 두었는데 이 점이 일부 동인 소장파들에 의해 의혹으로 제기되었다.
동인의 분당에는 우성전의 기생에 대한 파격적인 총애 역시 작용했다. 우성전이 문제가 되었을 때도 동인들은 이이를 의심했다. 우성전은 당시 동인들이 떠받들던 인물이었다.[5] 그는 학문적 소양도 폭넓었고 지략이 남달랐으며, 경세에 대한 관점이 뚜렷하였다. 동인들이 평소 "우성전이 대신이 된다면 만백성이 잘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동인들이 떠받드는 새로운 지도자였다. 이런 우성전에게도 한 가지 흠이 있었는데, 기생 한 명을 지나치게 좋아한 것이었다.[5] 심지어 우성전의 부모상 때에도 이 기생이 상례에 어긋나게 머리를 풀고 우성전의 집에 출입할 정도였다.[5] 선조는 우성전의 상중에 기생이 출입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드러내지 않았다.
상중에 기생이 우성전의 집에 출입하는 것을 보고 해괴하게 여긴 인물은 동인 이발이었다.[5] 이발은 장령으로 있던 정인홍에게 우성전의 부모상에 기생이 출입하더라고는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훗날 대북(大北)의 영수가 되는 정인홍은 재야에 오래 있던 사람으로서 자신의 깨끗한 처신을 자랑삼아 온 인물이었다.[5] 그는 예에 어긋난 이러한 일을 두고 볼 수 없다면서 앞장서서 우성전을 공격했다.[5]
정인홍이 우성전을 탄핵한 것은 이처럼 동인인 이발의 토로에 의한 것이었는데, 동인들은 이 것 역시 이이가 뒤에서 조종한 것이라고 이이를 의심하였다.[5]
동인의 내분이 강화되자 선조는 남인의 손을 들어준다. 그 뒤 선조 집권 후반의 정국은 류성룡을 중심으로 한 남인세력이 주도권을 행사하면서 이항복(李恒福) 등의 중도적인 서인세력을 포섭하는 가운데 전개되었다. 그러나 북인계열에서 곽재우, 정인홍 등의 의병장들이 쏟아져나옴으로서 전란 직후 북인에게 정권을 넘긴다. 선조대에는 집권당이 서인-동인-남인-서인-북인으로 집권세력을 교체하면서 왕권의 강화를 꾀했는데, 이는 후일 환국정치의 모범이 된다.
대내적으로 붕당간의 권력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을 때 대외적으로는 여진족과 일본의 외침이 있었다. 1583년 니탕개(尼蕩介)를 중심으로 회령지방에 살던 여진족이 반란을 일으켜 경원부(慶源府)가 함락되자, 경기감사 정언신(鄭彦信)을 도순찰사로 하여 군대를 출동시켜 이를 진압했다. 또한 1587년에도 니응개(尼應介)가 이끄는 여진족이 대거 침입하자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과 경흥부사 이경록(李景祿)이 이를 격퇴했으며, 이듬해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을 시켜 두만강 건너에 있는 여진족 근거지를 소탕했다.
한편 선조는 1590년 황윤길(黃允吉)·김성일(金誠一)·허성(許筬) 등을 통신사로 파견하여 일본의 동태를 파악하도록 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국 시대(戰國時代)를 통일하고 자신의 천하 야욕을 이루기 위해 대륙침략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서인인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兵船)을 준비하고 있어 멀지 않아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한 반면, 동인인 김성일은 침입할 조짐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대신들은 김성일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통신사와 함께 온 일본사신이 "1년 후에 조선의 길을 빌려서 명나라를 칠 것(假道入明)"이라고 통고하자 조선 정부는 크게 놀라 뒤늦게 경상도·전라도 연안의 여러 성을 수축하고 각 진영(鎭營)의 무기를 정비하는 등 대비책을 마련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 파죽지세로 북진해오자 조정은 보름 만에 한성을 버리고 개성으로 피난했으며, 이어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퇴각했다. 이곳에서 선조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평양에서 세자로 책봉한 광해군(光海君)으로 하여금 분조(分朝)를 설치하게 하는 한편, 명나라에 구원병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명나라는 그해 12월 4만 5,000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이 사이 이순신·권율(權慄) 등이 이끄는 관군이 일본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군을 격퇴했다. 이때 선조는 공사천무과(公私賤武科)와 참급무과(斬級武科)를 실시하여 천인의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등 전국민적인 전쟁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힘썼다. 일본군이 1593년 4월 남쪽으로 퇴각하자 그해 10월 선조는 서울로 돌아왔다.
1594년(선조 27년) 8월 선조는 유성룡과 왜란의 진행 상황을 논의하던 중, "이순신이 혹시 일에 게으른게 아닌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유성룡이 "이때까지 지탱한 것도 이순신의 공이고, 수륙의 모든 장수들 중 가장 우수합니다"라고 대답했다.[6] 그러나 선조는 유성룡이 이순신과 개인적으로 친하지 않느냐며 그의 답변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많은 학자들은 선조가 이후 이순신을 크게 의심하면서 원균을 특출한 용장으로 보기 시작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6] 실제로 선조는 두 사람의 체직(遞職)에 관한 전교를 내리면서 "군율을 범한 것은 이순신도 (역시) 같고, 오히려 그 죄가 원균보다 심하다.[6]"라고 언급한 바 있다.[6]
개전 초기에 이순신은 기근과 전염병 등으로 병력이 고갈되자 그 대책으로 둔전 경영과 병력 징발 등에 주의를 기울여 일본 수군의 북상을 저지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6] 그러나 전쟁 초기부터 원균의 지원군 요청을 거절하다가 그와 갈등하게 된다.
하지만 이순신은 조선 수군의 총지휘자인데도 동료인[6] 원균과의 갈등을 밖으로 드러냄으로써 선조의 의심을 샀다.[7] 선조가 원균보다 이순신의 죄가 더 크다고 한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7] 동인이 집권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할 때, 이순신은 여러 면에서 원균보다 유리한 입장이었다. 실제로 우의정 이원익은 체찰사로 있으면서 이순신과 수시로 만나 대책을 의논했다. 선조가 이원익이 이순신을 아주 호의적으로 평가했는데도 원균을 더 신임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7] 한편 선조는 원균이 동인 강경파 일부와 서인 의 지지를 받는다는 점도 인식했다.
선조는 이순신과 원균 간 갈등에 관한 보고를 받고 곧 이순신을 수군통제사에 유임시킨 채 원균을 전라병사로 교체해 임명할 뜻을 밝혔다.[7] 이는 그간 이순신이 세운 공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신료들 중에는 원균을 더 뛰어난 용장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탁(鄭琢)이 원균을 적극 옹호하면서 수사의 자리에서 체직시키지 말 것을 청했다. 결국 원균은 충청병사로 전임되었다.[7]
그러나 충청병사로 부임한 원균은 1595년(선조 28년) 8월 사헌부에서 탐욕스럽고 포악하다는 등의 죄목으로 탄핵을 받았다.[7] 이때 원균을 적극 옹호하고 나선 사람이 선조였다.[7] 선조는 "원균은 분수를 알아 넘치지 않는다. 이런 때 명장을 이처럼 해서는 안된다."라며 반박했다. 심지어 선조는 사헌부가 계속 원균의 파직을 건의하고 나서자 크게 노해 "오늘날 장수로 원균이 으뜸이다. 설사 정도에 지나친 일이 있더라도 어찌 가벼이 탄핵해 그의 마음을 헤이하게 만들수 있겠는가?"라고 했다.[7] 신하들의 계속된 원균 탄핵을 두고 선조는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했다.
시간이 갈수록 선조는 원균을 더욱 높이 평가했다.[7] 이는 동인이 원균을 배척하며 이순신만을 높이 평가하는 데 따른 반발로 볼 수 있다.[7] 동인 중에서는 이산해 등 소수만이 원균의 편을 들었다. 반면 선조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순신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는 이순신이 명령을 거부한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당시 이순신은 광해군이 무군사(撫軍司)에서 이순신을 불렀을 때 응하지 않았다. 이는 곧 선조의 명령에 대한 불복을 의미한다.[7] 이순신을 불신한 선조는 "이순신은 처음에는 힘껏 싸웠으나 이후 성실하지 않았다.[8]"라고 평가했다.
원균과 이순신이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은 이순신의 보고 때문이었다.[9] 그는 원균의 측실 소생인 원사웅이 12살 밖에 되지 않는데, 전쟁에 공이 있는 것처럼 장계를 올렸다고 조정에 보고했던 것이다. 이런 개인적인 문제는 적을 앞둔 마당에 장수끼리 자중지란이 일어날 위기로 조정에 비쳐진 선조는 "수군 여러 장수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다고 하니 그런 습관을 모두 버리라"는 교시까지 내리게 된다.[9]
그러나 이 사건은 진상을 조사하러 간 이덕형에 의해 그 내용이 완전히 밝혀진다. 원균의 외동아들 원사웅은 원균의 측실 소생이 아니라 정실 소생으로 당시 18세였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쫓아다니며 적을 여러 명 베기도 하는 등 공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이순신이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원균을 모함한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 이순신이 하옥될 때 거론되기도 하며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원균을 제함했다고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9] 이후 선조는 이순신에 대한 인간적 불신을 키우게 된다.
그러나 위에 적힌 원균의 10살 아들의 모함에 관한 내용은 사실관계가 완전히 틀린 잘못된 내용이다. 먼저 이덕형이 이순신과 원균에 대해 조사한 1차 보고내용이다.
이덕형(李德馨)이 아뢰기를
“이순신(李舜臣)이 당초 원균을 모함하면서 말하기를 ‘원균은 조정을 속였다. 열두 살짜리 아이를 멋대로 군공(軍功)에올렸다.’라고 했는데, 원균은 말하기를 ‘나의 자식은 나이가 이미 18세로 활쏘고 말타는 재주가 있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이서로 대질했는데, 원균은 바르고 이순신의 이야기는 군색하였습니다.”
하지만 3년 전의 김수의 사료를 보면 이순신이 원균이 10살 된 첩의 아들의 공을 올린 거 때문에 불만을 가졌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덕형의 말에 나온원균의 아들은 정실부인의 아들인 원사웅이다. 즉, 이순신은 서자를 문제 삼았는데 적자를 내세우며 되려 이순신을 몰아붙인 것입니다. 또한 이 증언은 이덕형 자신의 입으로 다시 한번 부정된다.
“이순신(李舜臣)의 사람됨을 신이 직접 확인해 본 적이 없었고 한 차례 서신을 통한 적 밖에 없었으므로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전일에 원균(元均)이 그의 처사가 옳지 못하다고 한 말만 듣고, 그는 재간(才幹)은 있어도 진실성과 용감성은 남보다 못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신이 본도에 들어가 해변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니, 모두가 그를 칭찬하며 한없이 아끼고 추대하였습니다. 또 듣건대 그가 금년 4월에 고금도(古今島)로 들어갔는데, 모든 조치를 매우 잘하였으므로 겨우 3∼4개월이 지나자 민가와 군량의 수효가 지난해 한산도(閑山島)에 있을 때보다 더 많았다고 합니다. 그제서야 그의 재능이 남보다 뛰어난 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유 제독(劉提督)이 힘껏 싸우는 데 뜻이 없다는 것을 간파한 뒤에는 국가의 대사(大事)를 전적으로 수병에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이 주사에 자주 사람을 보내어 이순신으로 하여금 기밀의 일을 주선하게 하였더니, 그는 성의를 다하여 나라에 몸바칠 것을 죽음으로써 스스로 맹세하였고, 영위하고 계획한 일들이 모두가 볼 만하였습니다. 따라서 신은 나름대로 생각하기를 ‘국가가 주사의 일에 있어서만은 훌륭한 주장(主將)을 얻어서 우려할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가 전사하였으니 앞으로 주사의 일을 책임지워 조치하게 하는데 있어 그만한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울것입니다. 참으로 애통합니다. 첩보(捷報)가 있던 날 군량을 운반하던 인부들이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듣고서 무지한 노약자라 할지라도 대부분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문하기까지 하였으니, 이처럼 사람을 감복시킬 수 있었던 것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습니까.그리고 양향(糧餉)을 조치하는 등 모든일에 있어서 요리해야 할 일들이 매우 광범위한데 하루 아침에 주관하는 사람이 없다면 필시 죄다 산실될 것입니다. 특별히 새 통제사를 임명하시어 마음을 다해 요리하고 장병들을 위무하여 뿔뿔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소서.이순신이 나라를 위하여 순직한 정상은 옛날의 명장에게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포장(褒奬)하는 거조를 조정에서 각별히시행하소서.”
-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11]
위의 언급과 달리 자신은 이순신과 대질한 적이 없으며 오로지 원균의 말만 들었는데 나중에 다시한번 조사해보니 원균의 말이 틀리고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료이다.
이를 입증하는 사료가 하나 더 존재하는데 백호전서를 쓴 남인 윤휴에 의하면 이 보고를 접한 이원익(李元翼)이 체찰사로 증거를 찾아내려 했으나 오히려 이순신이 충성심이 강하다는 사실만 확인했다고 한다.[12]
임진왜란 직후 정유재란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조선과 일본은 잠시 휴전 상태가 되었다. 이 때를 노리고 왕족 서얼인 이몽학은 의병을 모집한다는 핑계로 장정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하여 결국 반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김덕령 등이 하옥되는 등 전라도 지역이 불안해지자, 선조는 이를 빨리 수습하기 위해 원균을 다시 전라병사로 임명했다.[8] 이 반란은 결국 홍주 목사 홍가신에 의해 진압되긴 했으나 선조는 이몽학의 난으로 인하여 자신의 정치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다.
선조는 전쟁의 와중에도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싸우는 것을 개탄했고, 동인이 다시 정철의 처벌 문제로 동료끼리 헐뜯고 규탄하자 동인을 불신하고 서인 정철 등을 등용한다. 명나라에 뇌물을 바쳐 지원군을 더 파견하자는 조정 중신들의 의견과 달리, 정직과 성실로서 상대해야 된다며 뇌물 제공 거부의사를 명백히 밝힌 역관 홍순언을 신뢰, 총애하기도 하였으나, 홍순언은 중인 출신의 역관이라는 이유로 조신들의 반발에 부딪치게 된다.
이후 1594년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조총과 탄환을 만드는 기술을 배우도록 했다. 1597년 일본은 명과 진행되던 강화회담이 깨지자 다시 침입하였다(정유재란). 그러나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승리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었고, 때마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여 일본군이 총퇴각함으로써 7년에 걸친 전쟁은 끝났다.
임진왜란 직후 조총과 화승총 기술이 발달했고, 선조는 왜군과 명나라가 남기고 간 군사 무기를 수집을 명하여, 병장기를 개선시켰다. 그러나 7년간에 걸친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되어 경작지가 크게 줄어들었다. 이를 회복하고 전쟁으로 소실된 토지대장을 재정비하기 위해 1601년과 1603년에 어사를 파견해 전국적으로 양전(量田)을 실시했다.
또한 전쟁중에 명군의 식량 조달을 위해 실시했던 납속(納粟)을 더욱 확대했다. 납속책의 실시는 부유한 상민·천민의 신분상승을 가능하게 해 조선 후기 신분제 변동의 한 계기가 되었다. 각 궁방(宮房)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해주기 위해 임시변통으로 왕자·옹주 23명에게 예빈시(禮賓寺)에 소속되었던 어전(漁箭)·염분(鹽盆)·시전(柴田)을 획급했는데, 이후 궁방전의 시초가 되었다.
1604년 호성(扈聖)·선무(宣武)·정난(靖難) 공신 등을 녹훈함으로써 전쟁중에 공을 세운 사람들을 표창했다. 그리고 유정(惟政)을 일본에 보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강화를 맺었으며, 왜관(倭館)을 열어 개시(開市)하는 것을 허락하고 포로로 잡혀가 있던 사람들을 데리고 오게 했다.
그이전 선조는 여진족을 정벌하기위해 북벌을 감행하게 되는데 32년(1599 기해 / 명 만력(萬曆) 27년) 7월 5일(임자) 1번째기사 에 의하면 여진족은 함경도를 넘어 수시로 약탈을 감행하여 백성들이 크게 힘들어하는데 선조는 32년(1599년)7월 5일에 여진족 토벌을 추진하게되고 윤승훈은 크게 반대를 하지만 선조는 끝내 반대의견을 뿌리치고 북벌을 감행함으로써 1600년 4월 기병5천을 중심으로 노토부락 정벌을 감행한다. 명천현감(明川縣監) 이괄(李适)·회령부사(會寧府使) 조경(趙儆)·길주목사(吉州牧使) 양집(梁諿)이 4월 14일 초저녁에 좌위, 우위, 중위 3갈래로 나뉘어 좌위는 어유간(魚游澗)에서 중위는 함경북도 무산(豊山)에서 우위는 풍산(茂山)에서 각각 나뉘어 진격한다. 여진족 복병 4~5명이 조선군 척후를 발견했고 이들은 즉시 달아나 온 부락에 침공사실 알렸다. 조선군 기병5천은 적들의 노토부락을 공격하여 여진족들의 집은 흙을 발라 매우 견고해서 지붕의 풀은 타도 벽은 불에 타지 않았는데 조선의 정예병은 도끼로 다 때려부수고 다시 태워서 방한칸 남기지 않았고 무려 1천채가 넘는 집을 한꺼번에 태우니 연기는 하늘에 치솟았으며 땅속에 묻어둔 곡물까지 다 파내어 불태웠고 밭에 심은 곡식은 모조로 짓밞아버렸고 마을외 부락의 성채도 태워버리니 그때까지 다른 부락과는 비교가 안되는 넉넉함을 누리던 노토부락 예하 6개 마을은 한순간에 쑥밭이 되었고 여진족은 도망가기에 이른다. 조선군 전사자는 7명에 불과했으나, 반면에 여진족 참수된 군사들만 115명에 이르렀다. 조선군의 완벽한 승리였다. 선비들은 선조의 이런 면을 두고 이렇게 평하였다.
>선조께선 북로(北虜, 여진) 에 대처함은 명석하고 뛰어났으나, 남왜(南倭, 일본)를 대처함은 명석하지 못했다."
서자의 후손으로, 부친 덕흥대원군이 서자라는 점과 방계 승통이라는 점이라는 두가지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선조는 계비 인목왕후에게서 얻은 적자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자 소북의 유영경은 선조의 뜻이 옳다하며 영창대군을 추대하고 인목왕후(인목대비)의 섭정을 계획하였으나, 5세부터 18세까지 13년간 섭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소화불량으로 고생하던 선조는 임진왜란 때에도 분조를 경영한 적이 있던 광해군을 결국 왕세자로 승인한다. 1608년 3월 16일 (음력 2월 1일) 대신들에게 영창대군을 잘 부탁한다는 고명을 남기고 중풍으로 인한 증세가 악화되어 55세를 일기로 재위 40년 7개월 간의 치세를 마감하게 된다. 이후 선조의 독살설이 의혹으로 제기되기도 하였다.
선조는 부친 덕흥대원군을 끝내 임금으로 추존하려다가 추존하지 못하고 실패한다. 선조는 이후 생부 덕흥대원군을의 묘를 덕릉(德陵)이라 불렀는데, 선조는 사람을 시켜 남양주 근처에 나무하러 오는 나무꾼 중 ‘덕묘’나 ‘덕흥대원군 묘’라 하지 않고 덕릉(근처)에 다녀온다 라고 하는 나무꾼에게는 후한 돈을 주고 나무짐을 샀다 한다.
선조는 전쟁 후 전란을 수습하면서 많은 대군(왕자),옹주(공주)들이 넉넉하게 살기를 원했고 그래서 선조는 국가에서 관리하는 토지 궁방전 정책을 시작하였지만 이러한 정책은 조선 후기에 농민 봉기의 발단이 되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로 궁방전을 관리하는 관리의 만행이라고 볼수있다. 이들은 국가의 권력을 지고 대대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온 토지에 가서 멋대로 장부에 기록하면서 땅을 빼앗았고 산을 개척하여 토지를 만든 농민의 땅을 국가의 땅이었다는 이유로 빼앗았고 이에 거절하면 관아에 가서 국가의 재산을 뺏은 자 라는 명목으로 처벌을 하고 토지를 뺏는 만행을 저질렀다. 두번째로, 백성의 생필품에 대한 비리를 저지른것 인데 이들은 토지를 빼앗는것도 모자라서 백성들의 필수품목인 땔깜을 패러 갈때마다 지금 이 산은 왕가의 토지이니 입산료와 땔깜비를 내라고 협박하는 식의 만행을 저지른것도 모자라 백성들을 동원하여 강제 공사를 시키고는 품삯도 안주는 등의 횡포를 저지르자, 백성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게 된다. 세번째로, 이렇게 뺏은 토지 혹은 강제동원하여 개척된 토지를 소유하게된 왕실의 자손들은 왕가의 특혜로 인해 세금을 내지 않고 비리를 많이 저질렀으며 언관들이 이에 대해 아무리 상소를 하여도 왕은 이걸 묵인시키는 관행이 생겨나면서 결국 조선 국고의 낭비가 이어지게 되었고 이로인해 후반기에 들어서 농민봉기가 일어나게 된 원인중에 하나로 속하게 되는 잘못된 정책으로 평가된다.
선조가 1608년 3월 16일(음력 2월 1일)에 승하하자, 명나라에서 시호를 소경(昭敬)으로 올려주었다. 묘호는 선종(宣宗)이라 했다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극복한 공로가 있다는 점과 새 왕통을 시작하는 군주라는 점이 감안되어 선종에서 선조(宣祖)로 묘호가 격상되었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목릉(穆陵)이며, 전(殿)은 영모전(永慕殿)이다. 목릉은 선조와 정비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이 있다. 동구릉 중의 하나로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래의 목릉에는 의인왕후의 유릉(裕陵)이 위치하고 있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새로 능을 건설할 여력이 없었던 탓으로 정자각을 선조의 능침 쪽으로 옮겨 지금과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훗날 조선의 정치와 경제 등 모든 것의 발목을 잡는 붕당정치를 묵인한 최초의 왕으로 비판을 받는다. 서자 출신의 정통성이 취약한 왕이라는 것 때문에 왕권에 맞서려는 자들과 신권을 누르지 못하여 생긴 일이지만 이를 역이용하여 왕권을 강화를 하려 하였다. 선조 대에 와서 훈구세력을 몰아냈지만 자기 잘못을 다른 이에게 떠넘기기 일쑤였는데, 대표적 예가 임진왜란과 관련된 사건들이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막을 수 있던 기회는 여럿이 있었다. 특히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인 쓰시마 국주 소 요시토시가 전쟁이 발발하면 중간 상륙지인 자신의 땅인 대마도에 10만 군대를 주둔하면 본인 영토의 경제에 불이익이 될 거라는 것을 인식하여 조총을 조공하는 것과 동시에 일본 본토의 상황을 돌려서 말을 하여 위험성을 전달했으나 선조는 오로지 왕권 강화에만 집중했다. 전에는 율곡 이이가 조선의 각 관아와 성을 둘러본 결과 짓다만 성이 있고 함선은 쓰지 않다보니 더 이상 운영을 못할 지경에 무기는 다 녹이 슬어있고 병졸들이 근무와 훈련조차 태만하자 이에 위기감을 느껴 10만양병설을 제안했으나 선조는 구체적인 방안을 계획하지 않았으며, 신하들의 반발이 거셌지만 재정을 낭비할 수 없다며 이를 무시를 하였다. (이이는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었으나 나중에 다시 와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음.) 후일 일본본토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통신사를 보내고 통신사가 돌아온 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이야기와 전쟁 준비 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변변치 않은 왜국, 오랑캐라 여기고 있던 선조는 결국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말을 한 동인 측 인물인 김성일의 보고를 믿고 다시 축성중인 성을 멈추게 하였는데 이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의 일이니 2년 동안이라도 다시 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차버린 셈이다. 그리고 선조는 서자 출신 이였기에 왕권에 대한 집착이 강함을 엿볼 수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예로 이순신에 대한 견제이다. 임진왜란말기 도성을 버려 선조는 이미 민심이 멀어진 무렵 이순신의 거듭된 승전보와 승전이 날 때마다 백성들은 이순신을 칭송하였으나 처음에는 호의적이었던 선조도 점차 민심이 이순신에게 쏠리고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잘 훈련된 정예병인 조선 해군과 그 모든 조선 해군을 움직일 수 있는 이순신이 딴 맘을 먹으면 자신의 권좌를 빼앗을까봐 두려워하여 정유재란발발 전에 명령불복종과 반역을 꾀한다는 죄목으로 파직 [13]과 동시에 그 죄로 한양으로 압송해 와 형벌을 가하고 그동안의 공적으로 백의종군을 시켰을 정도였다.
선조 (1552 ~ 1608 / 재위: 1567 ~ 1608) - 40년 7개월
제14대 조선 왕 | ||
전 임 명종 |
1567년 7월 3일 ~ 1608년 음력 2월 1일 | 후 임 광해군 |
전 임 중종 |
조선의 권서국사 1567년 8월 ~ 1567년 11월 |
후 임 광해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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