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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약령시
요약:서울약령시는 우리나라에서 거래되는 70%의 한약재를 유통하는 약재 전문 시장이다. 한의약박물관이 있어 한방에 대한 상식과 체험할 수 있으며, 다양한 한방차도 즐길 수 있다.분류 > 지역소재지시장 유형형성 시기시장 현황특산물먹을거리같은 지역 다른 시장주변 볼거리전화번호사이트 URL
1. 서울약령시 개요
조선시대 동대문 바깥에 있던 보제원은 관리나 여행자들의 숙소로 활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고 약을 나눠주는 구휼 기관이었다. 오늘날 그 자리에는 한약재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서울약령시가 자리하고 있다. 서울약령시는 경동시장을 배경으로 성장했다. 해방 이후 당시 경춘선의 시발역이었던 성동역 주변에 경기도와 강원도 등에서 산나물과 마늘, 고추 등의 농산물을 판매하는 노점들이 형성되었다가 1960년에 경동시장이 개설되었다. 종로에서 한약재를 판매하던 사람들과 한의사들이 종로의 땅값 상승과 교통의 혼잡 등의 이유로 경동시장으로 이전해 오면서 한약재와 한의원이 증가했다.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생산된 약재가 경동시장으로 유입된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1970년대 이후 호황을 누리며 급성장한 서울약령시는 1995년에 정식으로 시장 허가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그때부터 한방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오늘날 전국에서 거래되는 한약재의 70% 정도가 서울약령시를 중심으로 유통되고 있다. 서울약령시는 2013년에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선정되었다.
▲서울약령시 입구의 일주문
2. 서울약령시의 어원
약령이라는 말은 조선시대 효종 연간부터 개설되어 정기적으로 약재를 사고팔던 시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약령에 명령을 뜻하는 영(令)이 들어 있는 것에 대해 약령시장의 개설이 관찰사 등의 명령에 의해 공주, 대구, 전주 등 주요 도시에서 도내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사들여 조정에 바치기 위해 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그 근거가 희박하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따라서 약령시는 한약재를 판매하는 시장을 의미한다. 서울약령시는 서울에 위치한 약령시라는 의미이다.
3. 서울약령시의 형성 과정
해방 이후 서울의 시장은 남대문시장, 성동시장(오늘날의 중앙시장), 청량리시장, 동대문시장 등이 핵심 상권을 형성하였다. 이들 가운데 성동시장과 청량리시장, 동대문시장은 흥인지문(동대문) 주변에 형성된 시장들이었다. 성동시장은 전국에서 유통되는 곡물이 집산되는 곡물시장으로 유명했고, 청량리시장은 청과물시장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동대문 바깥에는 1960년대에 경기도와 강원도의 산나물과 농산물 등이 집산되는 경동시장이 개설되었다.
한편 종로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한약재를 파는 점포와 상가들이 경동시장 주변으로 모여들어 한약재 판매가 특화되어 형성된 시장이 바로 서울약령시였다. 서울약령시의 기원은 대체로 조선시대의 보제원에서 유래를 찾는다. 보제원은 서울 사대문 바깥에 위치해 관리들과 여행자들의 숙소로 활용되었던 사대원 중 하나였다. 사대원은 서대문 바깥의 홍제원, 남대문 바깥의 이태원, 광희문 바깥의 전관원, 그리고 동대문 바깥의 보제원을 말한다.
보제원은 동대문에서 3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오늘날의 서울약령시가 있는 곳에서 매우 가깝다. 한편 보제원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구휼 기관이기도 했다. 보제원은 성종 때까지 한의원과 의사 등을 배치해 가난한 사람을 진료하고 약을 나누어주기도 했다. 그래서 예부터 보제원 주변에는 경기도나 강원도에서 한약재를 가져와 파는 약재 상인들이 많았다. 그것은 보제원의 역할에 더해 동대문과 가까워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까닭이다. 이렇게 약재 상인들이 모여들면서 시장이 형성되었고, 이것이 서울약령시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을지로와 종로에서 장사하던 많은 한약상들이 도시의 발달과 함께 땅값이 올라가고 교통이 복잡해지면서 과거 보제원이 있던 곳으로 대거 이주했고, 이를 통해 본격적인 서울약령시가 개설되었다고 본다. 조선시대에 한약을 거래하던 한약상들이 자리를 잡고 있던 곳은 서울의 구리개와 배오개였다. 구리개는 오늘날의 중구 을지로1가와 을지로2가 사이에 있던 작은 고개였다. 구리개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이곳의 땅이 질어서 멀리서 보면 마치 구리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배오개는 오늘날의 종로3가 인근으로, 이현이라고도 불렸다.
조선시대 구리개에는 서민들을 치료하는 병원인 혜민서부터 조정이나 관리들이 주로 이용하는 한약방들이 즐비했다. 배오개에 있던 한약방은 주로 서민들이 이용했다. 오늘날에도 종로에 약국이 많은 것은 이런 전통에서 기인한 것이다. 서울약령시가 개설되어 있는 오늘날의 제기동과 용두동, 경동시장 일대는 194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미나리밭이었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때까지 동대문 바깥은 서울의 주민들이 쓰는 채소와 땔감을 공급하던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교통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먼저 일제강점기 때인 1939년 7월에 성동역이 개통되었다. 성동역은 오늘날의 지하철 1호선 제기동 주변에 있던 역으로 경춘선의 시발역이었다. 성동역은 1971년에 성동역과 성북역 구간이 폐선되면서 사라졌다. 경동시장은 이 성동역을 중심으로 1960년에 생겨났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 폐허로 변한 이 지역에 주택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며, 도시의 풍경이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1968년에 용두동에는 시외버스터미널이 들어섰다. 이 버스터미널은 마장동시외버스터미널, 동마장터미널 등으로 불렸는데 실제로는 마장동이 아닌 용두동에 있었다.
▲가지런히 진열돼 있는 약재들
4. 시장의 발달 및 변천 과정1) 서울약령시
한편 종로4가부터 6가까지 즐비했던 한약상들은 일대의 땅값이 상승하고 교통 조건이 악화되자, 차츰 청량리역이나 시외버스터미널 주변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그곳은 교통이 편리하고 땅값도 상대적으로 쌌으며, 무엇보다 경동시장이 있어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 한약 판매에 유리했다. 1960년 6월에는 경동시장이 개설 허가를 받았는데, 하나둘씩 모여든 한약상들도 자연스럽게 경동시장에 속한 한약재 전문 시장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시장 개설 이후 서울약령시로 이전해 오는 한약상은 더 늘어났다. 1970년대까지는 그 수가 점진적으로 늘어나다가 1976년을 기점으로 해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들은 동대문과 종로4가, 5가에서 옮겨 온 한약상과 경북, 강원도 등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다. 서울약령시가 가장 번영했던 시기는 1980년대였다. 한약재를 파는 점포들이 진용을 갖추고, 오랜 역사를 지닌 대구약령시를 추월하기 시작했다. 모든 물산이 집산되는 서울의 지리적인 이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서울약령시는 전국에서 유통되는 한약재의 약 70%를 판매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또 1982년 한의사 자격증이 허가제로 바뀌면서 면허가 없던 기존 한의사들이 대거 약사로 전업했다. 그들이 경동시장에 점포를 얻어 한약재를 다루기 시작하면서 경동시장에는 경동신시장이, 1983년에는 인삼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50여 개의 점포로 이루어진 인삼 전문 상가가 개설되었다. 또한 시장의 발전에 발맞추어 1980년에는 시장 현대화 작업을 통해 시장 환경을 정비했다. 1980년대 서울약령시의 상황을 보면 한의원이 68개, 약재를 파는 건재상이 108개, 약국이 48개 있었다. 이렇게 약재를 파는 건재상이 많은 것은 과거 종로의 한약방 운영이 치료 중심이었던 것에 반해, 서울약령시로 이전한 후에는 한약재 판매로 바뀌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한약과 한약재를 판매하던 경동한약상가는 계속 번창해 1984년에는 국제한약상사 쇼핑거리로 선정되기도 했다. 1985년에는 경동빌딩이 완공되어 1989년에는 모두 600여 개의 점포로 증가하며 성장세를 이어갔다.
약령시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1990년대의 일이었다. 이전까지는 경동시장에 속한 한약거리로 불렸다. 1995년에 서울시에서 서울 경동약령시 전통 한약 시장으로 승인하면서 약령시라는 이름을 얻었다. 서울약령시가 전국 최고의 약령시장으로 성장했고, 한약으로 특화된 시장을 형성한 덕분이었다. 이 해부터 서울약령시 대축제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서울약령시라는 이름이 생기면서 전문 상가로서의 입지가 탄탄해졌고, 고객들의 발길도 꾸준히 이어졌다. 이에 따라 주변에 건물도 많이 들어섰고, 새롭게 이전해오는 한약상도 많아지면서 서울약령시는 번영을 구가했다. 2000년대에 들면서 서울약령시는 한방 산업 특구로 지정되었다. 그 후 곳곳에 한방 전문 빌딩들이 들어서면서 한약 상가는 북쪽으로는 홍파사거리 방향으로, 남쪽으로는 과거 마장터미널이 있던 곳으로 확장되어 규모가 더욱 커졌다. 2008년에는 주변 보도와 차도, 가로등 등을 정비했고, 시장을 알리는 간판 대신 일주문 형태의 약령문 등을 건립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주자창이 없어서 시장을 찾는 사람들이 불편을 호소하고 있다.
한편 이 무렵부터 서울약령시는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답보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그 이유로 가장 먼저 기존에 서울약령시에 있던 한의사들이 시장을 빠져나가면서 진료보다는 약재 중심 시장으로 변화한 것을 들 수 있다.
두 번째 이유는 한의원이 집 근처에 생기면서 굳이 치료를 받기 위해 서울약령시를 찾을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약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는 일반인들의 발길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결국 서울약령시는 차츰 소매보다는 도매로 판매 형태를 바꾸었고, 이런 상황이 되풀이되면서 고객의 발길이 더 감소했다. 세 번째는 1991년 한때 물밀듯 밀려들던 중국산 약재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중국산 한약재의 무분별한 수입과 불분명한 원산지 표기에 대한 불신은 개인의 약재 구입을 망설이게 만든 측면이 있다.
▲인삼을 파는 가게
마지막 이유는 병의 치료가 상당 부분 병원을 통해 이루어지면서 젊은 고객층의 유입이 크게 줄어든 점이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예방 의학이 발달하면서 한약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형성되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서울약령시는 2013년 문화관광형 시장 육성 사업에 선정되면서 이러한 인식 변화를 위한 모색을 도모하고 있다.
2) 경동시장
경동시장은 한국전쟁 이후 경기 북부와 강원도 일대의 주민들이 직접 생산한 농산물과 임산물 등을 가져와서 옛 경춘선의 시발역이던 성동역과 청량리역 주변에 모여들어 장사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특히 양평과 가평 등지에서 산나물과 농산물을 팔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이곳에 노점 상인들이 몰려들었던 것은 논과 밭을 매립한 공터가 있어 노점을 펼치기 편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형성된 노점을 중심으로 1960년에 제기1동 1036번지에 허가를 얻어서 경동시장이 개설되었다. 경동시장 초기에는 내력에서 알 수 있듯이 농산물과 임산물, 산나물 등을 취급했다. 당시 경동시장에는 경기 북부의 양주와 포천, 동쪽의 양평 등에서 농산물과 산나물이 공급되었다. 그리고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까지 강원도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마늘, 고추, 산나물이 집산되는 전문 시장으로 성장했다.
당시 동대문 바깥에는 곡물시장으로 특화되었던 기존의 중앙시장에 더해 채소와 산나물로 특화된 경동시장이 상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한편 1960년대부터 강원과 경기, 충청도에서 약초를 구입하던 약재상들이 경동시장으로 모여들면서 한약재 시장을 형성했다. 경동시장의 점포 수는 115개였고, 산나물을 비롯한 마늘과 고추 등의 농산물과 약재를 함께 판매하며 농산물 전문 시장으로 번영했다. 이 때문에 서울시는 경동시장을 특수농산물시장으로 지정했다. 1981년 경동시장주식회사는 8월에 대지 약 4,959m2에 점포 270개 규모의 시장을 신축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시장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공사 대금을 두고 갈등을 빚어 1984년 경동신시장 지하 점포의 분양과 관련해 사장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 사이 1982년에는 인삼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상가가 형성되었고, 송이버섯 등 각종 약재를 취급하는 한약 상가가 형성되었다. 나중에 경동시장 신관에 인삼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상가가 6곳이 들어섰다.
경동시장 내에 인삼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상가가 들어오면서 인삼의 집산지로 부상했고, 자연스럽게 한약재를 도산매하는 시장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당시 경동시장은 청과시장, 고려인삼 유통 판매장, 중앙 인삼 전시장, 경동한약상가, 서울약령시, 마늘광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경동시장은 시간이 흐르면서 한약재시장으로 특화되었다. 가장 큰 계기는 서울시가 1995년 전통 한약 시장 지역으로 지정한 뒤의 일이었다. 그 이후 경동시장은 약령시로 변화했다. 이처럼 경동시장이 약령시로 변화하자 주변에 동의보감타워, 한솔동의보감타워, 롯데불로장생타워, 삼환동의보감타워, 한방천하 등 한방타운을 형성했다. 오늘날 경동시장은 서울약령시는 물론 광성상가, 경동신시장 등을 포괄하는 거대 시장이다. 광성상가와 경동신시장에서는 제수 용품, 잡곡, 채소, 꿀 등을 판매하고 있다.
▲경동시장 건물의 외관
▲광성상가 골목이 보이는 시장 입구
▲생표고버섯을 파는 채소가게
▲인삼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상가의 모습
* 청량리시장
청량리시장은 1949년 3월 청량리동 176번지에 사설시장으로 개설되었다. 관리를 맡은 것은 청량리시장주식회사로 당시 점포는 290여 개에 달했다. 청량리시장은 남대문시장, 성동시장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시장 중 하나였다. 한국전쟁으로 청량리시장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전쟁 이후 시장을 복구해서 1952년 160여 개의 점포를 가진 시장이 되었다. 그러나 설립 당시보다는 규모가 줄어들었다. 1961년경에는 점포가 300여 개로 늘어나 큰 시장으로 성장했지만 그해 6월에 큰 화재가 발생해서 점포가 모두 불타고 말았다. 주변에 있던 청량리백화점과 동일백화점도 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청량리시장은 1963년에 2층짜리 건물을 지어서 새로 개장했고, 300개가 넘는 점포가 입주했다. 그러나 1992년 8월에 다시 화재가 발생해 160여 개의 점포가 불에 탔다.
청량리시장은 1949년 개설 때부터 청과물시장으로 유명했다. 당시 남대문시장은 어물, 성동시장은 곡물, 청량리시장은 청과로 특화된 시장이었다. 그러나 청량리시장은 도매시장으로 허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서울시에서 1997년에 구리농수산물도매시장을 개장해 농산물의 도매를 맡겼다. 동시에 청량리시장에서는 더 이상 농산물을 취급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많은 상인들은 구리농수산물도매시장 입주를 거부하고, 그대로 남았다. 오늘날 여전히 청량리에 시장이 남아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다양한 수산물을 판매하는 수산시장
▲시장 여기저기에 마늘이 수북이 쌓여 있다.
5. 시장의 위치와 거래 품목
서울약령시와 경동시장은 지하철 1호선 제기동역에서 내리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또한 따로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자동차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편리하다.
▲아케이드를 설치한 경동시장의 내부 모습
주로 한약재를 도산매하는 서울약령시는 전국에서 유통되는 한약재의 약 70%를 취급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약령시이다. 경동시장에서는 채소와 과일, 제수 용품, 잡곡, 꿀 등을 판매하고 있다. 경동시장과 가까운 곳에는 청량리시장이 있다. 오늘날 청량리라는 이름이 붙은 시장은 청량리종합시장과 청량리수산시장, 청량리청과물시장, 청량리전통시장, 청량리종합도매시장, 청량리농수산물시장 등으로, 6개의 시장이 경동시장을 에워싸듯이 포진하고 있다. 청량리시장들은 대체로 지하철 1호선 청량리역 주변과 청량리역과 제기동역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서울약령시, 경동시장, 청량리시장들은 서로 인접해 있어 어디로든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몸에 좋은 토종 도라지, 마, 우엉, 연근, 생강 들을 잔뜩 쌓아 놓은 노점상
▲건어물 가게가 모여 있는 골목
6. 시장의 지리적 배경과 인근 볼거리
서울 동대문구는 흥인지문(동대문)에서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동대문구라는 이름은 동대문 바깥에 위치해 붙은 이름이다. 동대문구는 서울의 중앙에 위치하고, 남쪽으로는 성동구, 동쪽으로는 중랑구, 북쪽으로는 성북구, 서쪽으로는 중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대문구에서 대표적인 볼거리는 홍릉수목원이다. 홍릉수목원의 홍릉은 고종의 비였던 명성황후의 능을 가리킨다. 원래 홍릉은 오늘날의 홍릉수목원에 있었다. 하지만 1919년에 경기도 남양주군 금곡동으로 옮겼고, 그 자리에 수목원을 조성했다. 그래서 홍릉수목원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조성된 수목원이다. 과거 황학동 벼룩시장의 고미술상가가 이전해서 형성된 답십리 고미술상가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고서화와 고가구 등 다양한 옛날 미술품과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점포들이 밀집해 있으며, 외국 관광객들을 비롯해 옛 물건들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또한 설렁탕이 유래했다는 말이 전해지는 선농단도 동대문구에 위치하고 있다. 선농단은 인류에게 농사를 가르친 중국의 신농씨와 후직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단이었다. 과거 선농제가 끝나면 소의 고기와 뼈 등을 끓여서 선농탕을 만들어 백성들과 나누어 먹었다는 것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 외에도 비구니 도량으로 유명한 청량사, 연산군의 생모였던 윤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찰인 연화사, 정조와 인연이 깊은 배봉산 등이 동대문구에 위치하고 있다.
7. 먹을거리
서울약령시와 청량리시장 주변에서 유명한 음식점 거리를 꼽는다면 제기동역에서 용두동 사거리 쪽에 위치하고 있는 용두동 주꾸미골목과 청량리역 주변에 있는 청량리 통닭골목이 손에 꼽힌다. 용두동 주꾸미골목은 1990년대 초반에 주꾸미 음식점이 개점하면서 차츰 소문이 났다. 그 후 주위에 주꾸미를 파는 음식점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골목이다. 골목 입구에는 230cm의 주꾸미 동상이 있어서 찾는 사람들을 반겨준다. 음식점들마다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매운 주꾸미와 계란찜, 볶음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량리 통닭골목은 50여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음식 거리로 7곳의 음식점이 자리하고 있다. 청량리 통닭골목에서 파는 것은 가마솥에서 튀긴 옛날통닭으로, 저렴한 가격과 지하철역과 가까운 접근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참고문헌
《중구의 시장, 어제와 오늘》 중구문화원, 2000년
《서울의 시장》 서울특별시시사편찬위원회, 2007년
〈서울의 경동시장 한약상가의 경관변화〉 김혜숙, 한국지역지리학회지 제13권, 2007년
조영혜, 한양대학교 공학대학원, 2013년서울특별시 www.seoul.go.kr
〈전통적 산업을 기반으로 한 지역의 장소성에 관한 연구-서울 약령시를 대상으로〉
동대문구청: http://www.ddm.go.kr/ 경동시장: http://www.kyungdongmart.com/
출처:(국내 시장백과,가디언 출판사,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2024-09-05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