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서울 수돗물 사고 통곡서(痛哭書)
한·일 무역 전쟁이 달아오르면서 정치권에서 이순신장군을 조명하는 것을 보고 정치는 구실만 있으면 무엇이든 떡방아를 찧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환경산업이 워낙 활기를 잃어버린 상황에서 일본과의 무역마찰에 국내 환경기업들의 염려도 높아진다.
그나마 인천시 적수사태와 서울문래동 상수도 사고로 인천시 300억 원, 서울시는 800억 원 가까이 관로공사를 서둘러 수도업계가 반짝 소란스럽다.
두 지역의 사고가 보름사이로 발생되어 그 파장이 전국적으로 국민들을 불안케 하고 있다.
이들 사고의 공통점은 100% 인재이며 오랫동안 모든 행정에 가장 하급부서로 터부시하고 외면한 결과이다.
그 중 가장 큰 근본원인은 전문 인력의 증발이다. 서울과 인천 모두 고령화 집단이며 수도전문가가 전멸상태라는 점도 동일하고 고위직 수도전문가가 고작 1명씩 잔존하고 있는 점은 수도 산업을 내팽개친 것과 같다.
그러나 사고수습과정은 서울과 인천이 판이하게 다르다.
서울에는 숨겨진 맹장 이규상 시설안전부장이, 인천시에는 공로연수 직전에 있던 김수환 급수부장이 사건을 지휘했다. 모두 30여 년간 수도에서 근무한 인물이다.
결과는 서울시는 24일 만에 무탈하게 사고수습을 하고 백서를 출간할 예정이지만 인천시는 65일로 종결한다고 했지만 여전히 화산지대이다.
인천시는 수도인 자존심을 송두리째 날린 사건으로 더 이상 거론하고 싶지 않다. 본 글에서는 서울시를 통한 오늘날 수도행정의 단면을 투영해보고자 한다.
이규상 부장은 서울시 상수도본부에 잔존하는 유일한 수도인이다.
하지만 전 이창학 본부장 재임시절에는(올 6월 말까지) 단 한마디도 본부장과 말을 섞지 못하고 변방에서 홀로 업무를 진행했던 인물이다.
이본부장은 이부장이 진행하고자 하는 사업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사업을 중단시켰으며 타 부서로 전출시키기 위한 노력 아닌 노력을 하기도 했다.
이 전 본부장은 상수도본부장으로 1년 6개월간 근무하면서 풍겨진 채취는 상수도분야에 대해 지독히도 열심히 공부하고 학습하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수도정비기본계획에 따라 추진해야 할 각종 사업은 대부분 중단되었다. 140km에 달하는 대형관 정비사업과 불록 단위의 원격검침사업도 중단되었다.
스마트그리드 사업은 물론 상수도요금인상도 불필요한 사업으로 조기 폐업했다.
더구나 환경부의 20억 원 예산을 받아 사업을 수행할 예정이던 내시경을 통한 노후진단사업도 실행하지 못하고 결국 국가에 헌납해야 했다.
대형관정비사업의 경우 일본 동경은 40년, 어느 도시는 80년이 관로 수명이라고 하는데 서울은 왜 30년이냐는 일본견문기에 의한 반박논리가 전임 상수도본부장의 생각을 지배했다.
일본은 지속적으로 관로에 대한 정비와 세척 등을 하면서 유지관리를 하고 있지만 국내 현실은 유지관리에 전혀 예산이 투자되지 않는 상황에서의 반론이기에 수도인들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인순왕후의 궁녀였던 안빈김씨를 유독 사랑했던 선조시대 조선을 할퀴고 간 임진왜란이 발생한다.
이이는 10만 군사를 양성하여 위급 시 대비해야 한다고 했지만 유성룡과 조정 대신들은 나라에 위급함이 없는데 군대를 기르는 것은 오히려 화를 부른다고 거부했던 그 시절이다.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황윤성은 반드시 전쟁을 일으킬 것이니 대비하라고 진언했지만 김상일은 전혀 군사를 일으킬 조짐이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한다.
백성들의 울분과 분노로 피신하기조차 어려웠던 선조가 평양에 도착하자 가장 보기 싫었던 광해군을 부랴부랴 세자로 책봉하게 된다.
평양에서 또다시 의주로 피난길에 오른 선조는 할 수 없이 미운 세자 광해군에게 나라의 반을 맡긴다.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눈부신 활약을 한 이순신은 정유재란이 발발하면서 원균과 서인의 모함으로 삭탈관직 되어 투옥된다.
원균이 왜군에게 대패하자 또 다시 조정은 이순신에게 중책을 맡긴다.
왜군 5백 척에 명나라와 우리 배는 고작 2백여 척의 싸움은 이순신의 죽음과 함께 나라에 승전보를 안겼다.
그 7년간의 전쟁의 참혹성을 남긴 책이 유성룡의 ‘징비록’과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이다.
징비록은 시경에 나오는 ‘지난 일을 경계하여 후환을 삼간다’를 인용하고 있다.
바다를 호령하던 대장군인 이순신도 아들이 죽은 후 쓴 난중일기에는 ‘너를 따라 함께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으니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내 마음은 이미 죽고 형상만 남아 있어 울부짖을 뿐이다, 하룻밤을 지내기가 길어 1년 같구나’라고 쓰고 있다.
그 이순신이 옥고를 치르다 사형에 처해져있을 때 200여명의 대신들은 모두 이순신을 처형하라고 했지만 당시 영의정 겸 도체찰사(국가비상총사령관)인 이원익은 ‘전하가 전쟁 중에는 신을 폐하지 못하는 것처럼 신 또한 전쟁 중에는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의 해임을 못한다.’라는 진언으로 목숨을 구한 이순신.
그가 남긴 명량해전에서 결사항전의 비장한 각오의 말이 떠오른다.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상수도본부에는 아직 노쇠한 수도인 몇 명이 남아 있습니다.’라는 소리가 메아리 되어 되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