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호남문화기행
제주문화포럼에서 해마다 실시하는 중국문화기행은 벌써 7년째다. 근래 중국과의 관계가 소원하다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이번의 행사를 마다할 수는 없는 것이다. 늘 그랬듯이 여행 전에 3회에 걸친 강좌가 있었다. 여행의 주관을 맡고 있는 심규호 교수가 열강을 해 주셨는데 이러한 예습은 매우 중요한 것 같다. 여행지의 역사와 문화를 알고 떠나는 것은 그 여행의 의미를 더해주기 때문이다.
10월 20일 12시 우리 19명은 제주국제공항에 모였다. 우리를 실은 중국동방항공 여객기는 1시간 반을 날아 우리를 상해공항에 데려다 주었다. 거기서 우리는 장가계행 비행기로 갈아탔다. 장가계에 도착하여 저녁식사를 마친 우리는 장가계 구경은 뒤로 미룬 채 야경으로 유명하다는 봉황고성을 향하여 달렸다. 4시간을 달린 대절버스는 밤 12시가 다 되어 목적지에 닿았다. 그러나 야경은 잔불만 남아 꺼져가고 있었다.
봉황고성! 약 2,200년전 진시황이 귀주를 포함하여 이곳까지 영토를 넓힌 적이 있었지만 그 후 중국과 적대관계에 있은 적이 많았던 곳인데 17세기말 청의 강희제가 명의 항장(降將) 오삼계의 번국이었던 곳을 평정하여 여기에 무역항을 개설했던 곳이다. 양자강의 지류인 타강(沱江)을 끼고 있는 봉황고성은 은의 산지인 귀주와 근접(35km)해 있어 무역이 성행했고 그로 인해 여관과 식당 그리고 유곽이 들어서게 되었다. 은은 중국에서 화폐의 재료였기에 여기에서 동정호, 양자강, 대운하를 통하여 북경으로 실려 갔다. 강을 끼고 2층의 목조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데 지금도 여관과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봉황고성에는 묘족이 주를 이루어 살고 있는데 거리를 걷다 보면 노파들의 벙거지 같은 모자와 젊은 여인들의 은제 모자가 눈길을 끌며 각종 과일과 삶은 돼지고기를 작대기에 매달고 호객하는 행상들이 지천이다. 우리는 시가지를 설렁설렁 걷다가 배를 띄어 강상을 유람했다. 양쪽 강변에 나무로 받쳐 지은 집들이 길게 뻗어있는데 밤에는 조명이 황홀하다고 한다.
우리는 낭만주의 향토작가 심종문(沈從文, 1902-1988)의 고택을 찾았다. 그는 중국의 격동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순수한 사랑을 그리고 묘족의 평화로운 생활상을 잔잔한 필치로 썼는데 특히 <변성(邊城)>이 알려져 있고 노벨상에 추천되었으며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있다.
오후 들어 우리는 장가계로 되짚어갔다. 장가계는 수많은 석봉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어 장관을 이르며 석봉 사이로 깊은 계곡과 호수는 별유천지를 이루어 마치 신선이 사는 무릉도원과 같은 곳이다. 일설에 한나라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자 한신‧팽월‧경포 등을 제거함에 모사였던 장량이 위험을 느껴 피신했던 곳이라고 한다. 장가계에는 토가족이 집단을 이뤄 살아왔는데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산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집집마다 창에 창살을 했는데 고층아파트까지도 창살이 설치되어 있다.
시내에서 시작되는 케이블카가 천문산(天門山, 1,518m) 정상 가까이까지 설치되어 있는데 그 길이가 7,455m, 높이가 1,277m라고 하며 30분이 걸린다. 케이블카에 몸을 실으니 공중에 부양하는 느낌이 얼떨떨하고 눈을 들어 올려다보면 빼곡한 절벽이 다가오고 사방을 둘러보면 기암괴석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며 굽어보면 땅은 멀어져 간다.
이어서 우리는 천야만야한 절벽에 매달려있는 귀곡잔도를 걷는다. 사람들은 난간에 기대어 걸으면서 까마득한 밑을 내려다보며, 건너편에 우뚝우뚝 솟은 봉우리들을 건너다보며 환호성을 지르건만 고소공포증이 심한 나는 절벽에 기대어 걸으며 건너편 봉우리만 올려다보았을 뿐이다. 그래도 오금이 떨려 아내의 겨드랑이에 매달려 아내를 지팡이 삼아 한 걸음 두 걸음 발을 옮겨 놓는다. 내 꼴이 우스워서 웃어대는 아내가 밉살스럽다.
얼마쯤 가니 유리잔도가 나타나는데 길이 60m의 유리판대기를 밟을 용기가 나지 않아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이 벼랑을 낀 잔도는 어디서 끝날 것인지 겁도 나고 혼도 빠져 있는데 다시 흔들다리가 나를 기다린다. 조심조심 다리를 건너 정상에 이르니 저 앞의 봉우리에 활 같은 큰 구멍이 뚫려 있다. 이 터널의 이름은 천문동(天門洞)이라 하는데 1999년 세계 곡예비행 대회에서 세 대의 비행기가 이곳을 통과했다고 한다.
정상에서 계단을 한참이나 내려오니 소형버스가 기다린다. 날은 어둑어둑해지는데 버스는 99구비를 돌고 돌아 가파른 길을 곡예하듯 내리닫는다. 밝은 대낮이었으면 이리저리 쏠리면서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셋째 날 우리는 원가계로 향했다. 영화 아바타의 촬영지다. 케이블카를 타고 산정에 올랐고 미혼대(迷魂臺)를 오르고 셔틀을 5번 갈아타며 기묘한 형상의 바위봉우리가 빚어내는 원시의 자연을 감상했다. 아! 사람의 넋을 송두리째 빼앗는 아름다운 정경, 송곳처럼 솟아있는 석봉, 비탈에 매달려 봉우리를 장식하는 나무들, 내려다보면 까마득하고 아찔한 계곡.
그리고 우리는 에스커레터에 이른다. 12개가 연결된 에스커레터의 내리닫이는 길이가 897m, 고도가 340m라 한다. 우리는 다시 313m의 엘리베이터로 순식간에 내려온다. 사람의 정신을 사정없이 빼버린 행로였다. 여기야말로 신선들이 사는 선경으로 가히 무릉도원이라 할 만하다.
장가계에서 늦은 점심을 마친 우리는 6시간을 달려 모택동의 고향인 장사(長沙)의 소산(韶山)으로 달렸다. 모택동이 소년시절에 공부했다는 남안(南安) 사숙(私塾)을 둘러보고 언덕을 오르니 말끔하게 정돈된 모택동의 생가가 있는데 농가 치고는 꽤 큰 규모였다. 집안을 들어가니 부모 방을 비롯해 모택동 3형제가 기거하는 방이 각각 있고 가재도구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모택동은 14세 때 신학문을 익히기 위하여 가출하여 그 후 대업을 이뤘다고 한다.
우리는 모택동 기념관을 둘러보고 장사(長沙)로 달렸다. 장사는 동정호로 흐르는 상강(湘江)을 끼고 있는데 동정호에서는 남쪽으로 50km 거리에 있다. 우리는 호남대학교를 들렀다. 경내에 있는 악록서원(嶽麓書院)을 관람하기 위해서다. 악록서원은 호상학파의 거두 장식(張栻)과 주희(朱熹)가 만나 2개월간 성리학에 대한 대토론을 벌인 곳으로 유명하다.
악록서원을 나온 우리는 맛깔스런 음식으로 이른 저녁식사를 마치고 장사공항으로 이동했다. 거기서 상해로 비행하고 다음날 우리는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4박5일간 우리는 많은 곳을 다녔고 많은 것을 보았으며 일행들의 우정은 더욱 도타워졌다. 특히 장가계에서의 짜릿하고 잊을 수 없는 경험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중국 속담에 ‘백세가 되어도 장가계를 못 보았다면 어찌 늙었다고 말하랴(人生不到張家界 百世豈稱老翁)’라고 하지 않았는가.
끝으로 우리가 편답한 지역의 역사와 유적과 유물을 해박한 지식으로 해설해 주신 심규호 교수께 감사를 드린다.
첫댓글 글을 읽고 나니 새녹새록 다시 천문동과 장가계 가 머릿속에 떠오르네요ㅡ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