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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2021년 11월 7일 주일설교
제목 : <Revival with COVID 19>1. ‘무관심증후군’에서 벗어납시다!
본문 : 빌립보서 2장 21절, 요한일서 4장 8절
한 주간도 승리하셨습니까? 하나님의 평안으로 인사드립니다. 드디어 11월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펼쳐진 11월, 무엇보다 추수의 계절에 ‘감사’를 회복하는 귀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주일을 허락하시고, 말씀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과 감사를 올려 드립니다. 오늘 11월 첫 번째 주일에도 모든 예배자들 위에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부어주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저희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에서는 특별히 11월 한 달 동안 <Revival with COVID 19>를 주제로 4번의 시리즈 설교가 준비 되어 있습니다. 지난 11월 1일부터 이른바 ‘위드코로나’로 일컫는 ‘단계적 일상회복’을 위한 첫 단계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단계에 맞추어 그동안 움츠러들어있던 교회 역시 기지개를 펴며 회복의 시기, 새로운 도약의 시기를 열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 도약에 관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들로 함께 4번의 시간동안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빌립보서 2장 21절과 요한일서 4장 8절을 본문으로 하여 ‘무관심증후군’에서 벗어납시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새번역으로 준비된 본문을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다 자기의 일에만 관심이 있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빌립보서 2장 21절, 새번역>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장 8절, 새번역>
여러 가지 매체를 통해서 듣고 계시고 또한 현장에서 경험하고 계셔서 잘 아시겠지만 이제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은 제법 '비대면 예배'에 익숙해졌습니다. 초기에는 이 '비대면 예배'에 대해서 찬반논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젠 어느 정도 ‘온라인 예배’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잡은 듯 합니다.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에 따라 대면예배의 인원이 조절되는 상황 속에서 굳혀진 것이 하나 있다면 ‘위드코로나 시대’를 맞이하게 되더라도 여전히 '비대면 예배'를 원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적은 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 교회마다 온라인으로 예배를 송출해주는 사역도 고정화되었고 점점 더 발전하고 있는 오늘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동일할 것입니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 코로나가 완전히 사라진다고 해도 대면예배와 비대면 예배의 참석률은 비슷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2년이 넘는 시간동안 익숙해진 비대면 예배의 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 할 것입니다. 오히려 비대면 예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훨씬 높은 품질의 비대면 예배를 당당하게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YOUTUBE를 통하여 관광을 하듯이 설교관광, 예배관광이 당연하게 이루어 질 것입니다. 사실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이런 형태의 관광은 좋은 비교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맞는 교회를 만나게 되는 귀한 시간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다양하고, 깊고, 넓게 만나는 장점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비대면 예배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변 분들이 저에게 물어보시면 기왕이면 비대면 예배보다는 대면예배를 추천해 드립니다. 왜냐하면 ‘교회’라는 공동체가 가진 특성이 '예배'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서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대면의 기쁨이 존재해야 하는 곳이 교회라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서로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되고, 가족이 되는 그 놀라운 은혜의 현장에 한 마음으로 모인다는 그 놀라움은 비대면 예배에서는 쉽게 느낄 수 없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비대면 예배라는 단어조차 없었던 시절에는 싫든 좋든 한 자리에 모여 얼굴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마주해야 좋은 마음도 표현할 수 있었고, 싫음도 해결할 수 있었음을 지금 확실하게 느낍니다. 싫었던 그 이도 반드시 만나야했기에, 오히려 말씀을 실천하기가 더 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마태복음 5장 23~24절, 새번역>
문자메시지를 보내서, 카톡을 보내서, 이메일을 써서, DM을 보내서 화해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가서 그 형제와 자매와 화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형제가 그 자매가 교회 공동체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내에서 직접 찾아가 얼굴을 볼 수 있었기에 화해와 용서도 모두 가능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비대면은 이 얼굴을 마주하는 기쁨을 잊어버리게 만들고 반드시 마주해야만 이루어지는 공동체의 기초를 약하게 만들 수 있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점점 함께 예배드리는 ‘동역자’에 대한 섬세한 감각이 사라져갈 수 있다는 단점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혹시라도 ‘비대면 예배’를 통해 찾아온 나비효과를 마주하고 계시진 않습니까? 그 나비효과의 결과는 바로 '무관심증후군'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도, 공동체에도, 교회에도, 동역자에게도, 심지어는 내 가족에게까지도 무관심해지는 것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무관심증후군’에 깊게 빠져 자신이 편한 대로, 자신만을 위한 비대면 예배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솔직히 어떤 이는 오히려 이 ‘무관심증후군’이라는 나비효과가 반가운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냥 아무 것에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는데, 코로나가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렇게 '무관심증후군'이 반가운 분들은 더 이상 비대면 ‘예배'라는 말은 쓰시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건 그냥 '비대면'일 뿐입니다. '무관심증후군'이 하나님을 위한, 공동체를 위한,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아가기 위한 예배가 아니라 그저 나를 위한 종교생활로 가는 지름길이 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런 현상을 미리 예상했던 것일까요? 빌립보서 2장을 보면 바울은 이미 오늘날 우리와 교회 공동체에서 발견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미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2장 21절이 결정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두 다 자기의 일에만 관심이 있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빌립보서 2장 21절, 새번역>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이렇게 비대면 예배와 ‘비대면’이란 말이 익숙해진 시대에 우리 모두가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비대면이 하나님께 대한 관심, 공동체에 대한, 교회에 대한, 동역자에 대한 관심마저 '비대면'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더 많은 관심을 쏟을 수 있어야 합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찾아 갈 순 없지만 목소리로 만날 수 있습니다. 더 많이, 충분히 교회를 위해, 공동체를 위해, 동역자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시간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매주 봐야 한다는 부담감이 줄어들어 진짜 오랜 만에 약속을 잡고 만나는 반가운 마음도 전해 줄 수가 있습니다.
코로나라는 상황 때문에 예배를 드리는 그 시간만 '비대면'이었던 것이지, 오히려 다른 모든 신앙생활에는 더욱 적극적인 '대면'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적극적인 대면이 무엇인가하면 바로 '적극적인 관심'입니다. 역시나 빌립보서 2장에 등장하는 이 말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을 대표하는 특징, ‘이웃을 향한 마음’입니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존재가 ‘그리스도인’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빌립보서 2장 4절, 새번역>
'비대면 예배' 역시 진정한 예배가 되려면, 여전히 그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가 예배를 통해 부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어야 하고 그 마음을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비대면 예배를 드리는 분들이 예배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가 예배자인지 아닌지는 하나님과 그 본인만이 알기 때문입니다. 절대 우리는 누군가의 예배에 대해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가 ‘예배자’라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삶에서 반드시 흘러나와야 할 것은 흘러나올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것이 바로 '무관심증후군'이 아니라 '적극적인 관심'이라는 것입니다. 예배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적극적인 관심'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괜스레 나의 적극적인 관심을 다른 사람이 부담스러워할 것이라고 핑계대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나의 이웃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 하나님이 필요하다면 하나님과 이웃을 연결해 주는 다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쁨이고, 행복이고, 소망이라고 말하는 존재가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그렇게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 새번역>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예수님이 먼저 보여주신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장 8절, 새번역>
비대면이 불러온 나비효과로 '무관심증후군'에 빠져 있다면 결코 '사랑'에 대해서 관심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결국 '무관심증후군'은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단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대면 예배에 익숙해지더라도, '적극적인 관심'을 통한 사랑의 실천만큼은 놓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먼저 교회에 오고가는 시간을 아낀 만큼 그 시간동안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에 투자해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가기 위해 준비했던 시간을 예배를 준비하는 시간으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집으로 돌아오는데 걸렸던 시간만큼의 양부터라도 말씀을 실천하는 시간으로 만들어 보시면 어떨까요?
예배에 대해서, 기도에 대해서, 찬양에 대해서, 헌금에 대해서, 동역자에 대해서, 섬김에 대해서, 교회라는 것에 대해서 단어부터 의미까지 더 깊이 생각해보고 관심을 가져 보시는 것을 어떨까요?
그리고 평소에 바빠서 자주 연락하지 못했던 이들 한 명, 한 명에게 연락을 취해보시기 바랍니다.
남는 시간만큼 공동체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지금이야말로 더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볼 이유가 생긴 때입니다. 비대면 예배가 오히려 우리의 관심을 더 많은 영역으로, 더 넓고 깊은 영역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코로나시대로 인해 생겨난 ‘비대면’이 가져온 나비효과인 '무관심증후군'을 반드시 경계 하셔야 합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닙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입니다. 하나님은 그 무관심이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무관심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무관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마태복음 25장 45절, 새번역>
이 말씀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냥 넘어가야 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역으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라’ 라는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위드코로나’ 시대에 다시금 회복을 꿈꾸는 우리 앞에 열리게 될 것입니다.
부디 그리스도인 모두가 이 '무관심증후군'이란 덧에 빠지지 않게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그리고 무관심 증후군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로 다시 한 번 회복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함께 기도해 주시고, 실천 해 주십시오. 마지막으로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에스겔서 16장 49절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하신 말씀처럼 들려집니다. 이 말씀을 교훈 삼아 ‘무관심 증후군’의 늪을 벗어나 말씀의 반석 위에 서서 우리가 다시 회복하기 위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 지 고민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너는 그들보다 더 타락하여 그들이 가는 길보다 한 걸음 더 나갔고, 그들이 저지른 악한 행동보다 더 심하게 행동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삶을 두고 맹세하지만 네 아우 소돔과 그 딸들도 너와 네 딸들처럼 그렇게 악하지는 않았다. 네 아우 소돔의 죄는 다음과 같다. 소돔과 그의 딸들은 거만하였다. 많이 먹어서 살찌고 평안했지만 다른 사람들에 대해선 무관심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지 않았다. <에스겔 16장 47~49절, 쉬운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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