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두대간 4-56회
댓재-햇댓등-작은통골재-명주목이-
삼각점봉-통골재-작은두타산-두타산-
박달령-문바위재-학등-청옥산-연칠성령-
칠성폭포-사원터-문간재-삼화사-무릉반석
2024년 4월 7일
1.4월은 갈아엎는 달
4월이다. 3월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여 독립만세의 함성으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달이라면 4월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정선거에 저항한 혁명의 달이다. 만물이 약동하는 봄을 맞아 우리 겨레는 희망의 미래를 위하여 싸웠다. 현재의 암울에 절망하지 않고 그 암울을 떨쳐내는 데 앞장섰다. 그래서 신동엽(1930~1969) 시인은 4월을 '갈아엎는 달'이라고 하였다. 4월 혁명의 승리처럼 부패와 향락을 갈아엎기를 바랐다. 그 갈아엎은 땅에 보리를 뿌려 푸른 보리밭이 비단처럼 물결치기를 소망했다. 오늘 균스러운 부패가 어느 곳에 있는가? 오직 푸른 보리만 물결치고 있는가?
"내 고향은/ 강 언덕에 있었다./ 해마다 봄이 오면/ 피어나는 가난.// 지금도/ 흰 물 내려다보이는 언덕/ 무너진 토방 가에선/ 시퍼런 풀줄기 우그려넣고 있을/ 아, 죄 없이 눈만 큰 어린 것들.// 미치고 싶었다./ 4월이 오면/ 산천은 껍질을 찢고/ 속잎은 돋아나는데,/ 4월이 오면/ 내 가슴에도 속잎은 돋아나고 있는데,/ 우리네 조국에도/ 어느 머언 심저(心底), 분명/ 새로운 속잎은 돋아오고 있는데,// 미치고 싶었다./ 4월이 오면/ 곰나루서 피 터진 동학의 함성./ 광화문서 목 터진 4월의 승리여.// 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출렁이는 네 가슴만 남겨놓고, 갈아엎었으면/ 이 균스러운 부패와 향락의 불야성 갈아엎었으면/ 갈아엎은 한강 연안에다/ 보리를 뿌리면/ 비단처럼 물결칠, 아 푸른 보리밭.// 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그날이 오기까지는, 4월은 갈아엎는 달./ 그날이 오기까지는, 4월은 일어서는 달." - 신동엽의 '4월은 갈아엎는 달' 전문(조선일보, 1966년 4월 3일)
4월 백두대간 첫 산행은 두타산과 청옥산 산행이다. 두타(頭陀)는 세상의 모든 탐욕과 번뇌, 망상을 버리고 수행에 정진한다는 불교 용어라고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욕심과 고뇌, 망상이 없을 수 있을까? 그것을 줄이면서 타인에게 피해는 주지 않고 살아가기도 벅찰 것이다. 그럼에도 저 드높은 두타행(頭陀行)을 목표로 하여 청옥(靑玉)의 삶을 누리기를 바라며 두타산과 청옥산 산행을 감행하였다. 산행 체력과 정신력 모두 고갈되어 고통스러웠다. 두타와 청옥을 바라기는 어불성설, 오히려 더 큰 탐욕 속에서 허둥거렸을 뿐이다. 무릉계곡을 지나 속계로 귀환하니 욕망의 환희에 마음이 오히려 환해진다.
2.산행 과정
전쳬 산행 거리 : 18.44km
전체 소요 시간 : 7시간 24분
댓재 백두대간 남쪽 나들목에 백두대간 댓재 표석과 백두대간 등산로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해발 810m 댓재에 Healing810 댓재 글씨와 호랑이, 대나무 줄기 세 개가 조형물로 조성되어 있다. 왼쪽 뒤에 댓재전망대가 있다. 산죽이 많아 댓재라 불리는데 산죽 모형이 아닌 남쪽의 대나무 모형을 세웠다. 이곳에 대나무가 많은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댓재의 유래田來)
○대나무(山竹)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죽현(竹峴) 또는 죽치령(竹峙嶺)이라 말함.
○ 댓재는 과거부터 영서와 영동을 잇는 주요 관문으로 산촌민들의 애환이 서린 곳임
■ 댓재 조형물의 의미
○Healing(힐링)의 뜻은 마음 혹은 몸의 치유를 뜻하는 단어임.
○행정구역은 삼척시 하장면 번천리로 해발 810m에 이르며 주변에는 두타산 1353m, 청옥산 1404m, 덕항산 1073m, 황장산 975m 등 명산은 물론 산자락에는 거무소, 구룡골 등 아름다운 계곡과, 고려말 제왕운기를 기술한 이승휴 선생이 기거한 천은사와 조선왕조 태동의 전설과 관련된 준경묘·영경묘 등 역사·문화적인 생명이 깃든 곳이기도 하며, 금강송·단풍나무 군락지 등 울창한 숲과, 산나물축제, 등산대회, 산림생태마을 등 산림문화 스토리가 풍성한 곳이기도 함.
○또한, 댓재 정상에 위치한 산신각은 옛날 잦은 호랑이 출몰과 산적으로 부터 나그네들의 무사통행과 안전을 기원하였다.
이런 연유로 댓재가 가지고 있는 역사·인문·사회·지리적 위치를 상징하는 대나무(山竹) 형상의 조형물을 여기 세워 천년고도 삼척의 무사안녕과 풍요를 기원한다. 2019년 11월 20일 삼척시
중앙에 근산이 솟아 있고, 그 왼쪽의 삼척항을 가늠한다. 중앙 뒤쪽 멀리 울릉도가 보인다고 하는데 흐릿하다.
댓재조형물 뒤쪽에서 댓재산신각에서 오른쪽 뒤 햇댓등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을 조망한다.
왼쪽 뒤에 야외공연장이 있으며 백두대간 마루금은 오른쪽 두타산 산신각 앞으로 이어간다.
옛날부터 영동과 영서를 넘나드는 보행로로 이용되어 온 댓재는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상사전리에 위치한 고개로 해발고도 810m이며, 두타산으로부터 10km쯤 남쪽의 산줄기에 있다. 『산경표』에는 죽현, 『조선지도』, 『 해동여지도』, 『대동여지도』에는 죽령(竹 嶺)이라 표기되어 있다. 옛날부터 대나무가 많다고 하여 죽현 또는 죽치령으로 불리고, 댓재에서 발원한 하천을 죽현천(竹峴川)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두타산과 쉰움산 사이에 두타산성이 있었고, 무릉계곡을 따라 삼척에 다다르게 된다. 동쪽으로는 죽현천을 따라 내려가다가 반점치를 넘어 정선에 이를 수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의 하장면 지역으로 추정된다. 산신각이 위치하고 있어, 댓재를 넘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무사안전을 기원하였다.
두타산 산신각 앞쪽을 통과하여 햇댓등으로 올라간다.
댓재에 자리한 두타산 산신각은 고갯마루에 위치하는 유형의 산신각이다. 매우 험준한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산맥을 넘어가는 상인이나 여행객들의 안전한 여행을 기원해주는 국시(국수, 돌무지)나 산신령각이 고갯마루에는 예외 없이 있어 인근 마을의 제당으로서의 역할과 함께 길손들의 기도처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이와 같이 고갯마루에 위치한 산신당[산신령각]은 백두대간 상의 고치령·새길령·건의령·댓재·삽당령 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 고갯마루에 있는 이들 산신당은 길손들을 위한 기도처이면서, 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의 마을 제당이나 상당으로서 기능하는 예가 많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댓재 0.52km, 햇댓등 0.28km 지점의 쉼터 앞에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청타산악회에서 세운 햇댓등 표석에 댓재-햇댓등 30분, 햇댓등-두타산 3시간이라 적혀 있다. 햇댓등은 댓재등에서 온 말일까? 아니면 해를 맞이하는 등줄기라는 뜻일까?
햇댓등에서 중앙 왼쪽 뒤의 청옥산과 오른쪽의 두타산을 살폈다.
두타산 5.2km, 햇댓등 0.5km, 댓재 0.9km 지점의 작은통골재, 댓재에서 질러오면 이곳에서 백두대간 마루금과 만난다.
이곳에 올 때마다 기개를 보여주던 노송의 가지가 꺾여 땅에 떨어져 있고, 그 옆에 누군가 추모 돌탑을 세워 놓았다.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는 산봉에 '준.희'가 1029.2m 표지판을 나무 줄기에 걸어 놓았다.
오른쪽에 삼척시 근산, 중앙 왼쪽은 동해시 시가지이다.
통골재로 내려가는 산봉에 댓재 3.6km, 두타산 2.6km 지점을 알리는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오른쪽 아래는 구룡골, 왼쪽 아래는 통골 지역인 것 같다.
통골목이에서 작은 두타산 오르는 가파른 비탈길을 힘겹게 오른다.
이곳에서 해발 1234m 작은두타산을 오른쪽 우회할 수 있는데, 눈이 덮여 있어서 작은두타산으로 오른다.
작은두타산 정상 서쪽 바로 아래에 김해 김씨 무덤이 있다.
해발 1234m 작은두타산 정상을 통과한다. 뒤쪽에 두타산이 솟아 있다.
작은두타산을 지나 두타산을 올려보았다.
변산바람꽃과 너도바람꽃이 진 뒤에 꿩의바람꽃이 피어난다.
백두대간 종주대원이 솜씨를 발휘한 예쁜 눈토끼가 참나무 줄기 사이에 앉아 있다.
두타산 설명 조형물 오른쪽 뒤에 청옥산과 고적대가 보인다.
두타산(頭陀山, 1353m)은 삼척시 하장면, 미로면과 동해시 삼화동에 걸쳐 있는 산이다. 두타(頭陀는 "의식주에 대한 탐욕과 세상의 모든 번뇌망상을 버리고 수행, 정진한다."는 불교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데, 부처가 누워있는 산의 형상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두타산은 백두대간의 한줄기로 예로부터 삼척지역의 영적인 모산(母山)으로 숭상되었고 오늘날까지 우리나라 100대 명산 가운데 한곳으로 전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산의 동북쪽 중턱에 있는 쉰움산은 돌유물이 50개 있어 오십정산(五十井山)이라 부르는데, 여기에 산제당(山祭堂)을 두고 봄과 가을에 제사하며 기우(祈雨)도 하였다. 고려 충렬왕 때에 동안거사(東安居士) 이승휴(李承休)는 두타산 천은사(天恩寺)에서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저술하였다. 제왕운기는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서술한 사서(史書)로서 우리 민족은 단군을 시조로 하는 단일민족임을 강조하고, 발해를 우리역사에 편입시켜 시술함으로써 "단군조선 - 삼한 - 통일신라 - 발해 - 고려"로 이어지는 역사적 정통성을 확립하였다.
두타산(頭陀山, 1353m)은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과 삼척시 하장면·미로면 사이에 있는 산으로, 예로부터 영동남부 지역의 영적인 어머니산(母山)으로 숭상되어 왔다. 동해안 지방에서 볼 때 서쪽 먼 곳에 우뚝 솟아 있는 이 산은 정기를 발하여 주민들의 삶의 근원이 된다고 믿어졌으며, 산림청이 지정한 100대 명산 중 하나이다. 『땅이름 나라얼굴』에 의하면 두타(頭陀)는 산스크리트어의 두타(Dhuta)를 이두식으로 한자화한 것이다. 이 말에는 "의식주에 대한 탐욕과 세상의 모든 번뇌망상을 버리고 수행·정진한다."는 불교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따라서 불교가 국교로 흥륭했던 역사발전 과정에서 생긴 이름이라 할 수 있다. 근처의 주요 관광지로는 두타산성과 무릉계곡, 백운동계곡이 있다.
동해시 자연보호지도위원회에서 세운 해발 1353m 두타산 표석이 두타산 정상에 서 있다.
황장산과 귀네미골의 풍력발전단지가 보인다. 그 왼쪽 뒤의 환선봉과 덕항산, 더 아래쪽 매봉산을 가늠한다.
맨 오른쪽 붉은 점부터 왼쪽으로 갈미봉, 사원터갈림목, 고적대, 망군대, 연칠성령, 청옥산, 문바위재, 박달재를 가늠한다.
맨 왼쪽 붉은 점부터 오른쪽으로 사원터갈림목, 갈미봉, 느루봉을 가늠한다.
두타산 산줄기가 무릉계곡으로 내리벋고 있다. 중앙이 천은사 갈림목이며 그 왼쪽 아래 능선에 대궐터와 두타산성이 있다. 동해시 시가지와 동해 바다가 중앙 뒤에 보인다.
두타산 0.6km, 박달령 1.6km 지점을 통과한다. 눈이 녹지 않고 쌓여 있어서 눈길 헤치기가 힘겹다.
두타산 1.3km, 박달령 0.9km 지점이다. 이곳에서부터는 눈이 녹아 있지만 문바위재를 지나면서는 계속 눈이 쌓여 있다.
두타산 2.3km, 청옥산 1.4km 지점의 박달재에서 무릉계곡으로 내려가는 등산로는 폐쇄되었다.
연칠성령 2.5km 지점을 알리는 이정목이 세워져 있는 이곳이 실제적인 박달령인 것 같다.
두타산 2.5km, 청옥산 1.1km 지점에 문바위라 불리는 암석군이 있어서 문바위재라 이르는 것 같다.
문바위재에서 청옥산 남쪽 비탈면을 가로질러 오는 길을 뒤돌아본다.
청옥산 능선으로 올라섰다. 학등까지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간다.
문바위재에서 청옥산 능선으로 진입하여 청옥산 정상으로 오르다가 뒤돌아서서 두타산과 동해 시가지를 조망하였다.
두타산 남쪽의 작은두타산과 통골재를 내려본다. 통골재에서 왼쪽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 1234m 작은두타산에 올랐다.
고적대에서 동쪽으로 왼쪽 갈미봉과 중앙의 느루봉으로 내리벋다가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이기령, 상월산으로 이어진다.
두타산 3.7km, 청옥산 50m 지점의 학등에서 무릉계곡으로 내리벋는 골짜기를 학등골이라 이르는 것 같다.
학등골 등산로는 폐쇄되었다.
청옥산 정상에서 남쪽 110m 지점에 샘터가 있다고 한다.
청옥산에서는 두타산 3.7km, 연칠성령 1.3km, 고적대 2.3km 거리이다.
해발 1403.7m 청옥산에는 정상 표석 두 개가 세워져 있다.
청옥산(青玉山, 1,403m)은 북으로 고적대, 동으로 두타산과 연결되어 있는 해동삼봉(海東三峰)중의 하나로 예로부터 보석에 버금가는 청옥(靑玉)이 발견되고 약초가 많이 자생함에 청옥산(靑玉山)이라 불리웠다 한다. - 설명안내판
서쪽의 청옥산 정상 표석에서 청옥산을 바라본다.
강원도 삼척시 하장면과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경계에 있는 청옥산(靑玉山)은 해발고도 1404m로 백두대간의 고적대[1357m]와 두타산[1353m] 사이에 있으며, 태백산맥과 백두대간의 주능선이다. 청옥산·두타산·쉰움산으로 연결되는 산맥을 햇대등이라 한다. 횟대처럼 생겼다고 해서 유래한 이름인데, 햇대라 발음한다. 햇대등에서는 청옥(靑玉)이라는 약초가 많이 생산되므로 청옥산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과거에는 청옥산이 인근에 있는 두타산보다 51m나 높음에도 불구하고 청옥산과 두타산 전체를 일컬어 두타산이라 부르기도 했다. 1963년에 발간된 『삼척사지』에 의하면 청옥산 주봉의 소나무는 1865년(고종 2)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가장 적합한 동량재(棟梁材)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청옥산에서 10분 정도의 휴식을 취하고 연칠성령으로 내려간다.
백두대간은 고적대에서 동쪽으로 오른쪽의 갈미봉, 맨 오른쪽에 솟은 작은 느루봉으로 벋어내리다가 북쪽으로 꺾어진다.
고적대 바로 아래에 망군대가 보인다. 연칠성령은 그 아래쪽 굽이도는 곳에 보인다.
맨 왼쪽은 고적대, 중앙 오른쪽 암릉 아래는 사원터 갈림목,그 오른쪽은 암릉 지대이다.
맨 왼쪽에 느루봉이 보인다. 내려가야 할 무릉계곡이 아래에 있고 동해 바다와 동해시 시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중앙 뒤에 고적대가 솟아 있다.
왼쪽에 고적대, 오른쪽 암릉 아래에 사원터 갈림목, 그 오른쪽은 암릉지대이다.
중앙에 암릉 지대, 맨 오른쪽에 갈미봉이 보인다.
맨 왼쪽 붉은 점부터 오른쪽으로 사원터 갈림목, 암릉 지대, 갈미봉, 느루봉이 가늠된다.
뒤쪽에 청옥산이 솟아 있다. 연칠성령에서 무릉계곡 관리사무소까지 6.7km 거리이다.
연칠성령에 돌무지(국수)가 있고, 그 뒤에 청옥산 1.3km, 고적대 1km를 알리는 이정목과 연칠성령 설명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망경대(望京臺)는 이후 임금을 그리워한다는 의미의 망군대(望君臺)로 바뀌어 불리고 있다.
예로부터 삼척시 하장면과 동해시 삼화동을 오가는 곳으로 산세가 험준하여 난출령(難出嶺)이라 불리웠다. 이 난출령 정상을 망경대(望京臺)라 하는데 인조 원년 명재상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중봉산 단교암에 은퇴하였을때 이곳에 올라 서울을 사모하여 망경(望京)한 곳이라 전해진다.
중앙 뒤에 두타산, 두타산 능선이 무릉계곡으로 내리벋고 있다.
이곳에서 백두대간 암릉 지대로 올라가는 등산로는 폐쇄되었다.
학등골 등산로는 폐쇄되었다.
오른쪽으로 신선봉에 올라갔다가 내려와야 하지만 시간에 쫓겨 그냥 통과한다.
청옥산 동쪽 사면에는 문간재(門間峙)가 있다. 무릉계곡에서 호계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해방 후 없어진 동석산성(혹은 두타산성)의 성문(城門)의 이름을 따서 문간재라 하였다. 문간재 넘어 계곡을 호계라 하는데, 호계 상류에 옛날 상원사가 있었다 하여 속칭 “상원터”라 한다. 지금도 그 옛터가 있다. 1963년에 발간된 『삼척사지』에 의하면 청옥산 주봉의 소나무는 1865년(고종 2)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가장 적합한 동량재(棟梁材)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하늘문길로 가면 두타산성을 잘 조망할 수 있는데 문간재길에서는 두타산성 방향을 가늠만 한다.
오른쪽 위는 하늘문으로 올랐다가 용오름길로 내려오며 아래쪽은 무릉계곡 용오름길을 따라 내려가는 길이다.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두타산성과 베틀바위산성길, 대궐터, 두타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한국의 그랜드 캐니언 무릉계곡명승지 학소대(鶴巢臺) : 상류의 동굴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이곳을 지나는데 이 바위에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고 하여 학소대라고 한다. 무릉정공(武陵亭公) 최윤상(崔潤祥, 1810년~1853년)의 무릉구곡가(武陵九曲歌) 중 제3곡(三曲) 학소대(鶴巢臺) 게시판이 세워져 있다.
三曲清冷泛我船(삼곡청평범아선) 삼곡이 맑고 서늘하여 내 배를 띄우니
臺空鶴去已多年(대공학거이다년) 대는 비어 학이 떠난 지 이미 여러 해이고
登高俯瞰塵間事(등고부감진간사) 높은 곳에 올라 속세의 일들을 굽어보니
逝者如斯堪自憐(서자여사감자련) 흘러가는 것도 이와 같아 스스로 가련해짐을 견디네
삼화사 경내의 12지신상(十二支神像)은 2010년 5월 15일~18일에 걸쳐 인천국제공항 동편 입국장에서 전시하였던 것을 2015년 9월경에 주지 효령 스님이 삼화사로 옮겨왔다고 한다. 십이지신 신장(神將)은 열두 방위에 맞추어서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의 얼굴 모습을 가지며 몸은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낸다.
반석교에서 무릉구곡(武陵九曲) 중 이곡(二曲) 와룡추(臥龍湫) 아래쪽을 내려본다.
二曲溪環萬疊峯(이곡계환만첩봉) 이곡의 시냇물 만 겹의 산봉우리 둘러 흐르고
臥龍湫下步從容(와룡추하보종용) 와룡추 아래서 한가로이 거니는데
江湖遠處看牛斗(강호원처간우두) 강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우두성 바라보니
銀漢遙應接九重(은한요응접구중) 은하수는 멀리 구중에 닿아 있네
구곡(九曲) 영귀탄(詠歸灘) 위치는 무릉반석 일원이라고 한다. 뒤쪽에 무릉반석이 펼쳐져 있다.
九曲詠歸眼豁然(구곡영귀안활연) 구곡에서 시를 읊으며 돌아옴에 눈 앞이 환히 트이고
難頭煙歇見平川(탄두연헐견평천) 여울가 물안개 사라져 평천이 보이는데
聊知攀木緣崖處(요지반목연애처) 나뭇가지 휘어잡고 절벽을 기어올라야 하는 곳임을 알아
抛得奇觀咫尺天(모득기관지척원) 기이한 경치 지척에 두고 포기하였네.
※무릉구곡(武陵九曲)은 최윤상(崔潤祥, 1810년~1853년)이 35세가 되던 1844년 무릉계 중대사(中臺寺) 옛터 남쪽에(현재 삼화사 일원) 복숭아 나무 일만 그루를 심고 띠집 3간을 지어 무릉정(武陵亭)이라 하고, 성리학의 심오한 이치를 탐구하며 무릉도원 (武陵桃源)을 꿈꾸었다. 중국 남송(南宋)시대에 성리학을 완성한 주자(朱子) 주희(朱熹, 1130년~1200년)가 복건성의 무이산(武夷山) 계류(溪流)에 1184년 무이구곡(武夷九曲)을 설정하고 무이도가(武夷櫂歌)를 지었다. 이 무이도가를 차운(借韻)하여 무릉구곡(武陵九曲)의 시를 지어 읊었다. 최윤상의 무릉구곡은 향토인(鄕土人) 원로의 오랜 기간 연구 검토와 부단한 노력으로 2019년 동해시에 건의, 강원대학교 교수와 함께 비정(比定)하여 무릉구곡의 곡별 시문을 게시하였다.
武陵亭上仰仙靈(무릉정상앙선령) 무릉정 위에서 선령을 쳐다보니
岩下寒流曲曲淸(암하한류곡곡청) 바위 아래 차가운 물줄기 굽이굽이 맑은데
箇裡真源誰溯得(개리진원수소득) 그 속에서 진원을 누가 거슬러 올라가 찾겠는가
付余歌櫂數三聲(부여가도수삼성) 나에게 뱃노래 두 서너 곡 불러주게나
※본 무릉구곡에 대한 설정은 현재의 시점으로 해석한 것이며, 다소 견해의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해량하시고 음미하시기 바랍니다.
석장 또는 석장암(石場岩)으로 지칭하기도 하였던 이곳 무릉반석(武陵盤石)은 5천㎡나 되는 넓은 반석이 펼쳐져 있는 것이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하며 주변의 기암괴석과 함께 천하절경을 이룬다. 반석 위에는 이곳을 찾은 명필가와 묵객(墨客) 등이 음각하여 놓은 여러 종류의 글씨가 있다. 이들 중 백미는 무릉선원(武陵仙源) 중대천석(中臺泉石) 두타동천(頭陀洞 天)이라는 초서체로 크게 새긴 제자(題字)로 현세(現世)와 이상향(理想鄉)을 넘나드는 옛 선인들의 기개와 풍류를 엿볼 수 있다.
무릉반석 암각서(武陵磐石 岩刻書) : 무릉계곡 초입에 있는 무릉반석에 가로로 쓴 살아 움직이는 듯 힘이 있고 웅장한 글씨이다. 무릉선원(武陵仙源) 중대천석(中臺泉石) 두타동천(頭陀洞天)이라는 암각서로, 그 아래에 옥호거사서신미(玉壺居士書辛未)라는 각서가 있는데, 신미년에 옥호거사가 썼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릉선원은 도교(신선)사상을, 중대천석은 불교 또는 유교사상을, 두타동천은 불교사상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 글씨는 봉래 양사언이 강릉부사 재직(1571~1576) 기간에 전임 정두형 부사의 부친상 관계로 신미년(1571)에 광천[비천]을 방문했을 때 무릉계곡을 방문하여 썼다는 설이 있고 또 하나는 옥호자 정하언이 삼척부사 재직 (1750-1752) 기간 중인 신미년(1751)에 무릉계곡을 방문해서 썼다는 설도 있다. 동해시에서는 오랜 세파에 글자가 희미해지고 마모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보존하기 위해 1995년도에 모형 석각을 제작하였다. - 설명안내판
신선교 앞에 베틀바위 산성길 출입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