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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 광양시 향우회
 
 
 
카페 게시글
―········내고향ノノ광양 스크랩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0권 전라도 광양현
이선재 추천 0 조회 32 10.12.25 13: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0권 전라도 광양현

 

동쪽은 경상도 진주 경계까지 58리, 남쪽은 바닷가까지 6리, 서쪽은 순천부(順天府) 경계까지 13리, 북쪽은 같은 부 경계까지 8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70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 마로현(馬老縣)이던 것을 신라 때에 희양(晞陽)으로 고쳐서 승평군(昇平郡)에 부쳤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그대로 소속시켰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본조 태종 13년에 예(例)에 의해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마로(馬老)ㆍ희양(晞陽).
【성씨】 본현 김(金)ㆍ서(徐)ㆍ정(鄭)ㆍ전(田)ㆍ이(李)ㆍ유(柳)ㆍ강(康)ㆍ신(辛)ㆍ박(朴)ㆍ황보(皇甫). 아마대(阿磨代) 김ㆍ차(車)ㆍ최(崔). 본정(本井) 차(車)ㆍ최. 골약(骨若) 차, 김 속성(續姓)이다.
【형승】 땅이 남쪽 바다에 닿았다. 신영손(辛永孫)의 시.
【산천】 백계산(白鷄山) 현의 북쪽 20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산 정상에 바위가 있고 바위 밑에 샘이 있으며 샘 밑에서 흰 구름이 때로 일어난다. 무릇 빌기만 하면 문득 영험이 있고 재계(齋戒)하는 것을 성실히 하지 않으면 샘이 마른다. 증산(甑山)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가요산(歌謠山) 증산(甑山) 남쪽 5리에 있다. 업굴산(業窟山) 백계산(白鷄山)의 동쪽 지맥(支脈)이다. 바다 현의 남쪽 6리에 있다. 섬진(蟾津) 남원부(南原府) 잔수진(潺水津)이 남쪽으로 흘러 진주(晉州) 화개현(花開縣)에 이르러 서쪽으로는 용왕연(龍王淵)이 되었는데 조수가 들어온다. 또 현의 남쪽 59리에 이르러 섬진(蟾津)이 되었는데 그 동쪽 언덕이 곧 진주(晉州) 악양현(岳陽縣) 경계이다.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고려 때에 이 물이 거꾸로 흐르는 삼대강(三大江)의 하나라 했다. 남포(南浦) 현의 남쪽 2리에 있으니 어량이 있다. 골약포(骨若浦) 골약소(骨若所)에 있다. 섬거포(蟾居浦) 현의 동쪽 40리에 있다. 차의포(車衣浦) 차의소(車衣所)에 있다. 거을망포(巨乙亡浦) 현의 동쪽 59리에 있다. 보살포(菩薩浦)ㆍ천포(穿浦) 모두 현의 동쪽 59리에 있다. 굴회도(掘會島)ㆍ전경도(田耕島)ㆍ송도(松島)ㆍ외도(外島) 이상 섬은 모두 현의 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 거차도(居次島)ㆍ길도도(吉道島)ㆍ부용도(芙蓉島)ㆍ우도(牛島)ㆍ아지도(阿只島)ㆍ대안도(大安島)ㆍ아을대도(阿乙代島)ㆍ말응우리도(末應于里島)ㆍ대소치도(大所致島)ㆍ중소치도ㆍ소소치도 이상 섬은 모두 현의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신증』 동천(東川)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서천(西川) 현의 서쪽 4리에 있으니 근원이 모두 백계산(白鷄山)에서 나온다.
【토산】 은어[銀口魚]ㆍ오징어ㆍ조기ㆍ숭어ㆍ농어ㆍ병어ㆍ준치ㆍ낙지ㆍ대하(大蝦)ㆍ홍합ㆍ전복ㆍ미역ㆍ감태(甘苔)ㆍ김ㆍ생강ㆍ석이버섯ㆍ꿀ㆍ표고버섯ㆍ송이ㆍ차ㆍ감ㆍ닥종이ㆍ석류ㆍ유자ㆍ대, 죽전(竹箭) 섬거역(蟾居驛) 계곡산(戒谷山) 등에서 난다. 옻[鐵] 현의 동쪽 10리 목곡(木谷)에서 난다. 옻[漆]ㆍ울금(鬱金)ㆍ복령.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9백 74척이요 높이가 13척이며, 안에 우물 5개와 못 1개가 있다.
【봉수】 건대산(件臺山) 봉수 현의 동쪽 18리에 있으니 남쪽으로 순천부(順天府) 진례산(進禮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같은 부 성황당산에 응한다.
【누정】 주변루(籌邊樓) 현 성 남쪽 문루(門樓)이다. 옛날에는 망해루(望海樓)라고 하던 것을 영락(永樂) 무술(戊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권가루(勸稼樓) 현의 남쪽 3리에 있다. 운주루(運籌樓)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 윤향(尹向)의 시에, “순유(巡遊)하다가 월(鉞)을 옛 성루(城樓)에 세워두니, 사업한 것 만리후(萬里侯)라 칭하기 부끄러워라. 밭두렁에 있는 보리와 벼 풍년든 것을 알겠고, 발[簾]에 가득한 바람과 비는 잘못 가을인가 놀라네. 여러 봉우리는 서쪽으로 구름 열린 밖에서 바라다 보이고, 큰 바다는 남쪽으로 땅이 다한 곳에서 보겠네. 날이 저물어 어둑어둑 연기와 안개 합하여 장안이 보이지 않으니 홀로 시름겹네.” 하였다. 『신증』 암연정(巖淵亭)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학교】 향교 현의 북쪽 5리에 있다.
【역원】 익신역(益申驛) 현의 동쪽 7리에 있다. 섬거역(蟾居驛) 섬거포(蟾居浦) 위에 있다. 아마대원(阿磨代院) 아마대부곡(阿磨代部曲)에 있다. 섬진원(蟾津院) 섬진(蟾津) 언덕에 있다. 지장원(地藏院) 현의 남쪽 3리에 있다.
【불우】 옥룡사(玉龍寺) 백계산(白鷄山)에 있으니 당(唐) 나라 함통(咸通) 5년에 도선(道詵)이 세웠다. ○ 최유청(崔惟淸)이 지은 비문에, “사(師)의 휘(諱)는 도선이요, 속성(俗性)은 김씨이니 신라 영암(靈巖) 사람이다. 그 세계(世系)의 부조(父祖)는 역사에 전하지 않는데 어떤 이는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서손(庶孫)이라고 한다. 어머니 강(姜)씨가 꿈에 누가 구슬 한 알을 주면서 먹으라고 하더니 드디어 태기가 있어, 달이 차자 훈채와 비린 음식을 먹지 않고 오직 불경을 외우고 염불(念佛)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아기를 낳자 보통 아이와 다르더니 나이 15세에 이르자 총명하며 숙성했고 기예(技藝)에 통했다. 드디어 월유산(月遊山) 화엄사(華嚴寺)에서 머리를 깎았는데, 여러 해가 되지 않아 문수(文殊)의 신묘한 지혜와 보현(普賢)의 현문(玄門)을 모두 빠짐없이 터득하니 학도(學徒)들이 모두 신총(神聰)이라고 여겼다. 문성왕(文聖王) 8년에 이르러 나이 20세가 되자 갑자기 혼자 생각하기를, ‘대장부가 마땅히 법을 떠나서 정(靜)해야지 어찌 융통성 없이 문자 사이에서 머문단 말인가.’ 하였다. 이때 혜철(惠徹)은 서당지장(西堂智藏)에게 법통(法統)을 전해 받아서 동리산(桐裏山)에 법석(法席)을 열었다. 사(師)는 이에 선문(禪門)에 들어가 제자가 되기를 청해서 이른바 설(說)함이 없는 설법(說法)과 법이 없는 법을 허심(虛心)으로 받고 투철히 깨달았다. 나이 23세에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고 이미 불법의 깊은 뜻을 통달하자, 다니는데 일정한 곳이 없이 구름과 안개를 밟고 자연에 임하여 그윽한 곳을 찾고 경치를 따라 다니며 게으르거나 쉬지 않았다. 운봉산(雲峯山) 아래에 동굴을 뚫고 좌선(坐禪)하기도 하고 혹은 태백암(太伯巖) 앞에 초막을 짓고 여름을 지내기도 하여 도행(道行)의 감동되는 바에 신령스러운 기적이 자못 많았다. 희양현(曦陽縣) 백계산(白鷄山)에 옛 절이 있으니 옥룡사(玉龍寺)이다. 사(師)는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여기에 이르러서 그윽한 경치를 사랑하여 당우(堂宇)를 수리하고 깨끗이 개축하여 일생을 마치려는 뜻이 있어서 좌선(坐禪)하여 말을 잊은 지 35년이었다. 헌강왕(獻康王)이 그 높은 덕을 공경하여 사신을 보내 맞아다가 궁중에 머물게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서울에 있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고 돌아갈 것을 간청하여 본사(本寺)로 돌아갔다. 갑자기 하루는 제자를 불러 말하기를, ‘내 장차 가리로다. 대개 인연이 있으면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가는 것은 이치에 떳떳함이니 무엇을 슬퍼하리오.’ 하고, 말을 마치자 입적(入寂)하니 때는 대당(大唐) 광화(光化) 원년 3월 17일이요 나이는 72세였다.” 하였다. 또 김정언(金廷彦)이 지은 중 이엄(理嚴)의 비문이 있다. 송천사(松川寺)ㆍ운암사(雲巖寺) 모두 백계산(白鷄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성 동쪽에 있다. 여단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아마대부곡(阿磨代部曲) 현의 동쪽 25리에 있다. 사오곡부곡(沙於谷部曲)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율곡부곡(栗谷部曲)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본정향(本井鄕)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골약리부곡(骨若里部曲) 현의 동쪽 27리에 있다. 대곡소(大谷所) 현의 동쪽 15리에 있다. 옥곡소(玉谷所)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공촌소(孔村所)ㆍ다사천소(多沙川所) 현의 동쪽 65리에 있다. 문현소(蚊峴所) 현의 동쪽 60리에 있다. 공을도소(孔乙道所)ㆍ차의포소(車衣浦所) 현의 동쪽 46리에 있다. 구량포소(仇良浦所) 현의 동쪽 45리에 있다.
【명환】 고려 윤택(尹澤) 충정왕(忠定王) 초년에 나주 목사(羅州牧使)에서 강등되어 감무(監務)가 되었다. 일찍이 시에 이르기를, “온종일 군재(郡齋)에 아무 일도 없으니, 망건 바람으로 이따금 다시 계당(谿堂)을 구경하네.” 하였다. 조정에 들어가서 밀직 제학(密直提學)이 되었다.
【인물】 고려 김황원(金黃元) 선종조(宣宗朝) 때 사람으로, 어려서 과거에 합격하여 힘써 고문(古文)을 배워 해동(海東) 제일이란 이름을 들었다. 맑고 정직하며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다. 이월(李?)과 같이 한림(翰林)에 있으면서 문장으로서 이름이 나서 세상에서 김이(金李)라고 일컬었다. 뽑혀서 우습유 지제고(右拾遺知制誥)가 되고 나가서 경산(京山)의 수령이 되었다. 뒤에 예부시랑 국자좨주 한림학사 첨서 추밀원사(禮部侍郞國子祭酒翰林學士簽書樞密院事)를 지냈다. 김약온(金若溫) 힘써 배우고 과거에 올라 벼슬이 수사공 상주국(守司空上柱國)에 이르렀다.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며 청렴하고 고요하여 일찍이 자기의 부귀로서 사람에게 교만하게 굴지 않았다. 그때 이자겸(李資謙)이 국구(國舅)로서 국가의 권력을 차지하니 선비들 중에 이로운 것을 좋아하는 자들이 다투어 그에게 붙었다. 그러나 약온(若溫)은 자겸(資謙)과 더불어 사촌 형제가 되면서도 서로 가까이 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그가 올바른 것을 지키는 것을 훌륭하게 여겼다. 이무방(李茂方) 공민왕(恭愍王) 때에 밀직 학사(密直學士)가 되었는데 임금은 무방(茂方)이 청빈(淸貧)하다 해서 쌀 50석을 주었으나 무방은 말하기를, “대신으로서 이유없이 받을 수가 없다.” 하여 사양했다.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제수했을 때 임금이 매양 말하기를, “정당(政堂)이 국가만 알고 자기집은 잊어버리며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비록 옛 사람이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하였다. 신우(辛禑)가 왕위에 오르자 무방으로서 스승을 삼았다. 공민왕(恭愍王)이 기르던 비둘기가 궁중에 있어 우(禑)는 이것을 항상 좋아했다. 무방이 《서경(書經)》 여오(旅獒) 편을 진강(進講)하다가 말하기를, “비둘기도 진기한 새이니 원컨대 기르지 마시옵소서.” 하니, 우는 명하여 비둘기를 내보냈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광양부원군(光陽府院君)이 되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제영】 우과서산상기신(雨過西山爽氣新)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비가 서산을 지나니 서늘한 기운 새롭고, 서리맞은 단풍, 이슬맞은 국화, 다시 봄이 돌아온 듯, 가을바람이 싸늘하여 이불과 베개 찬데, 푸른 술 붉은 치마 점점 가까워질 것같네.” 하였다. 지진창명근(地盡滄溟近) 윤향(尹向)의 시에, “옛 성첩(城堞)이 산기슭에 의지했으니 동쪽과 서쪽 두 물이 나뉘었네. 숲 속에 돌아오는 지친 새 어여쁘고, 멧부리에서 나오는 한조각 구름 사랑스러워. 육지 끝나니 바다 가깝고 하늘이 개었는데도 안개 어두워. 임금 계신 곳 점점 멀어지니, 돌아갈 꿈 다시 아득해라.” 하였다. 연촌다록죽(煙村多綠竹) 정인지(鄭麟趾)의 시에, “한해가 도중에 저무니 산천이 말 위에서 나뉘네. 연기 낀 마을에 푸른 대 많고 가을 들에 누런 구름 누런 곡식 자욱하네. 술잔 잡으니 마음 오히려 장해지고, 글을 보니 눈이 어두워지려 하네. 난간에 의지하여 때로 혼자 서 있으니, 귀밑의 털 희어지는 것 탄식하네.” 하였다. 염조어가접해방(鹽?漁家接海傍) 최수(崔修)의 시에, “어두운 안개 자욱한 옛 싸움터에 지금 요순(堯舜) 시절 맞아 한낮이로세. 변방 봉화(烽火) 일지 않아 백성들 편안히 자니, 소금 가마 어촌의 민가 바다에 접해 있네.” 하였다. 바다가 어두우니 물은 구름에 연했네 이발(李潑)의 시에, “하늘이 개니 산은 달을 토하고, 바다가 어두위 물이 구름에 연했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선조(宣祖) 31년에 합하였다가 얼마 후에 다시 세웠다.
【방면】 우장(牛莊) 동쪽으로 3리에 있다. 칠성(七星) 서쪽으로 3리에 있다. 사라곡(沙羅谷) 본래 사오곡(沙於谷). 부곡(部谷)은 동쪽으로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골약(骨若) 본래 골약리(骨若里). 부곡은 동쪽으로 처음이 15리이고 끝이 30리이다. 월포(月浦) 동쪽으로 처음은 50리이고, 끝은 60리이다. 진상(津上) 동쪽으로 처음은 35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진하(津下) 동쪽으로 처음은 45리이고, 끝은 60리이다. 옥곡(玉谷) 본래 옥곡소(玉谷所). 동쪽으로 처음은 25리이고, 끝은 35리이다. 미내(彌內) 북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인덕(仁德) 남쪽으로 처음은 1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옥룡(玉龍) 북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30리이다. 다압(多鴨)
동북쪽으로 처음은 50리이고, 끝은 90리이다.
○ 본정향(本井鄕)은 동쪽으로 10리에 있다. 아마대(阿磨代)부곡은 동쪽으로 25리에 있다. 율곡(栗谷)부곡은 동쪽으로 5리에 있다. 대곡소(大谷所)는 동쪽으로 15리에 있다. 다사촌소(多沙村所)는 동쪽으로 65리에 있다. 성현소(城峴所) 동쪽으로 60리에 있다. 차의포소(車衣浦所)는 동쪽으로 60리에 있다. 궤량포소(机良浦所)는 동쪽으로 45리에 있다. 공촌소(孔村所)ㆍ공을도소(孔乙道所).

【성지】 읍성(邑城) 둘레는 9백 85보이며, 옹성(甕城)이 5개가 있고, 치성(雉城)이 4개가 있으며, 5개의 못[池]과 2개의 우물이 있다. 마로고성(馬老古城) 동쪽으로 7리이며, 둘레는 6백 리이다. 중흥산고성(中興山古城) 북쪽으로 10리에 있다. 불암산고성(佛巖山古城) 동쪽으로 50리에 있다.
【진보】 섬진보(蟾津堡) 동쪽으로 60리에 있고, 섬진강의 입구에 있다. ○ 별장(別將)이 1인이다. 통제영의 관할지역이다.
【창고】 창(倉) 3 읍내에 있다. 외창(外倉) 동쪽으로 40리에 있다. 강소창(舡所倉) 현 동쪽으로 50리에 있다.
【진보】 섬진(蟾津) 현 동쪽으로 60리에 있다. 즉, 하동 두치진(河東豆治津)이다.
【토산】 뽕ㆍ차ㆍ소금.

 

[주D-001]월(鉞) : 월(鉞)은 왕명을 받들고 나가는 관리에게 임금이 하사하는 큰 도끼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輿]

 

목판본. 55권 25책. 조선은 건국 후 통치상의 필요에서 지리지 편찬의 중요성을 통감, 세종의 명에 따라 맹사성() ·신색() 등이 1432년(세종 14) 《신찬팔도지리지()》를 찬진()하였다. 그 후 명나라에서 《대명일통지()》가 들어오자, 양성지() ·노사신() ·강희맹() ·서거정() 등이 성종의 명으로 이 체제를 본따고 《신찬팔도지리지》를 대본으로 하여 1481년(성종 12)에 《동국여지승람(輿)》 50권을 완성하였다. 이를 다시 1486년에 증산() ·수정하여 《동국여지승람》 35권을 간행하고, 1499년(연산군 5)의 개수를 거쳐 1530년(중종 25)에 이행() ·홍언필()의 증보에 의해 이 책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내용은 권1∼2는 경도(), 권3은 한성(), 권4∼5는 개성(), 권6∼13은 경기도, 권14∼20은 충청도, 권21∼32는 경상도, 권33∼40은 전라도, 권41∼43은 황해도, 권44∼47은 강원도, 권48∼50은 함경도, 권51∼55는 평안도로 되어 있다. 책머리에 그 도의 전도()를 싣고 이어 연혁(沿) ·풍속() ·묘사() ·능침() ·궁궐 ·관부() ·학교 ·토산() ·효자 ·열녀 ·성곽 ·산천 ·누정() ·사사() ·역원() ·교량 ·명현()의 사적, 시인의 제영() 등을 실었다. 이어서 이행 등의 진전문(), 서거정 등의 서문이 있으며, 책끝에 김종직() 등의 발문이 있다. 역대 지리지 중 가장 종합적인 내용을 담은 것으로서 정치사 ·제도사의 연구는 물론, 특히 향토사 연구에도 필수불가결한 자료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06년(광무 10) 일본인 후치카미[]가 서울에서 활판본으로 간행한 데 이어, 12년에 고서간행회()에서 역시 활판으로 간행하였고, 1958년 동국문화사()에서 영인본으로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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