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와 부모를 떠난 몸, 살아서 무엇하랴”
금계 노인과 금계일기 > 1 <
금계 노인(錦溪 魯認 1566∼1622). 자는 공식(公識)이요, 호는 금계(錦溪)다. 나주 문평 태생인 금계공은 어렸을 때부터 주자학을 공부했고, 그 학재(學才)를 인정받아 17세 때 진사에 급제했다. 젊어서 나참봉 항(羅參奉 恒)에게 배웠으며 1592년 임진란이 시작되자 광주목사 권율(權慄)을 따라 적과 싸워 여러 번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년에 적에게 생포되어 왜지로 끌려갔으나 7일을 먹지 않고 버텼다. 당시 왜인들이 생선과 나물을 반찬으로 식사를 제공했으나 선생은 임금과 어버이가 어찌됐는지 알 수 없다며 생선은 먹지 않고 채소만 먹었다고 전해진다. 선생은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혔으며 1599년 봄, 명의 간첩사신 임진혁을 만나 다시 일본을 빠져나갈 계책을 꾸며 중국 땅에 이르렀다.
선생은 문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써 중국에서 해동부자로 칭찬이 자자했다고 한다. 1600년(선조33년) 봄, 드디어 고국에 귀향하니 선조대왕이 역마를 내주라 명하여 고향에 돌아가게 했다. 그러나 이미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였다. 다행히 천수를 누리고 돌아가셨다고 해 위안을 갖고 삼년상을 치른 뒤 권무과에 올라 선전관으로 제수돼 1604년 이통상 경준(李統相 慶濬)을 따라 당포에 남아있는 왜적을 물리쳤다.
1606년(선조 39년) 수원부사로 제수됐고, 1607년(선조 40년) 황해수사로 제수됐으나 얼마되지 않아 모함을 받아 군산으로 좌천됐다. 광해조에 이르러 병을 이유로 벼슬을 내놓고 돌아와 1622년(광해군 14년) 5월 4일 작고했다. 57세였다. 선생은 금계일기를 통해 일본 포로생활과 탈출, 중국에서의 생활을 남겼다. 선생의 일기를 통해 당시의 비하인드 스토리와 풍습을 알아본다.
임진년(壬辰年). 일본의 풍신수길(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조선에 출병했을 때, 당시 27세의 선생은 전라도 순찰사 권율의 부름을 받고 향리에서 의병을 일으켜 권율 군대와 합세, 이치와 행주에서 일본군과 싸워 명성을 얻었다. 잠시 양군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어 일시 휴전되자 노인도 고향에 돌아와 노친을 봉양했다. 그러나 3년여의 화의교섭이 실패로 끝나고 정유년(丁酉年) 정월, 다시 풍신수길의 군대와 교전이 개시됐고, 그 해 8월 15일 남원성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노인이 원군을 거느리고 달려갔으나 남원성은 이미 함락됐고 성을 지키고 있던 명나라 대장 양원도 패주했다. 여기서 선생은 일본군에 포위돼 부상을 당하고 결국 왜군에 잡혔다. 순천으로 호송된 선생은 단식하며 자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적선에 오르게 되었다.
선생이 통역에게 “왜 나를 죽이지 않고 가둬 여기에 이르게 하는가(何不殺我 牢銷到此)”라고 묻자 “풍신수길이 명을 내리기를 '6년동안 군대를 일으켰어도 성공한 것이 없으니 이제는 조선으로 하여금 온전한 사람이 없게 하고 말리라. 나이 젊은 자는 사로잡고 노약자는 코를 베라. 그 많고 적음에 따라 상을 주겠다'했는데 공은 나이가 젊을 뿐 아니라 글을 아는 관이기 때문에 생포해 간다”고 답했다.
선생은 8월경 일본 이예부명(伊豫浮名)에 도착해 포로생활을 시작했다. 일본 승려가 찾아와 밥 한 그릇, 채소 한 그릇, 고기 한 마리를 조석으로 주고 갔으나 그는 어육은 입에 대지 않고 채식만으로 버텼다. 본국의 국왕과 양친의 안부를 알 수 없기에 문공가례에 따라 행한 일이었다. 2년후 기해년 정월 동지. 수인과 모의해 작은 배를 타고 몰래 탈출하려고 시도하다 잡혀 참수당할 위기에 놓이게 된다. 이에 선생은 “어서 죽여라. 나라와 부모를 떠난 몸이 살아서 무엇하랴”라고 소리를 질렀으나 이를 만류하는 자가 있어 위기를 겨우 모면하고 화천(和泉)으로 옮기게 됐다. 옮긴 곳은 경도의 대외 무역항 근처로 결과적으로 노인에게는 행운이었다. 이곳은 명나라 사신과 조선사신이 머무르는 곳에서 가까웠으며, 조선에 출병했던 도진의홍(島津義弘)을 만나게 됐다. 그는 풍신수길의 죽음으로 인해 일본으로 철수됐던 사람으로 풍신수길의 조문사절을 경비하고 있었다. 그는 특사를 시켜 노인 선생의 신분을 조사하고 그가 진사출신으로 불행히 포로가 돼 잡혀온 것을 알자, 예로서 대하고 음식도 챙겨 보냈다. 당시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던 학자로는 유명한 주자학자인 강항(姜沆)과 시문에 이름난 정희득(鄭希得)이 있었다. 모두 남원성이 함락됐을 때 일본으로 잡혀갔으며 강항과 노인은 일본 이예지방에 같이 도착했다.
선생은 기해년 3월 17일 명나라 배에 승선, 일본을 탈출해 3월 28일 중국 남부 장주의 하문에 도착했다. 선생은 북경까지 가는 길에 흥화부(興化府)에 주문공생사당(朱文公生祀堂)이 건립돼 주회암(朱晦庵)이 모셔져 있어 사당에 사배(四拜)했다. 선생은 임차관(林差官)이란 중국 관리와 동행했는데, 그는 다른 향관과 다투다 4년간의 옥살이를 한 뒤 임진란과 정유란때 조선에서 맹위를 떨친 도진(島津)을 이간질시킬 목적으로 일본으로 갔던 장주의 유생이다. 그런 그가 조선 포로를 대동하고 본국으로 귀환하자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선생은 임차관을 따라 성내 관리들을 만나 조선의 풍속과 학문, 일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선생의 학문과 지식에 중국 관리와 유생들은 감탄했으며, 양현사 서원(兩賢祠 書院·양현-주송과 주자를 가르킴)으로 인도받아 참강유관(參講留館)을 허락받았다. 이 곳은 많은 수재들이 면학하는 곳으로 선생이 조선의 풍속과 혼인상례, 과거제도를 설명하니 “참으로 조선의 문헌은 천하가 아는 바지만 예법을 지키기를 이렇게 할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하며 감탄했다. 선생은 또한 “대마인을 이용하여 민중을 훈련시키고 전선 1천여척을 만들면 장차 일본에 복수할 수 있을 것”이라며 “우리 조선은 수전(水戰)에 강하기 때문에 그들의 단점을 찌르면 가능하다”면서 설전을 노린다.
6월 군문에서 노인 선생의 상주문(上奏文)을 중국 조정에 전송하자 7월 보름이 지나면 군문도야는 말과 마부를 갖춰 노인을 북경으로 호송하라는 답을 받았다.
당시 명나라 황제는 병부에 하명해 선생이 포로로 잡혀가 몸으로 고생 끝에 탈출하여 중국으로 건너왔음을 위로하고 어마를 하사, 원외랑사여매(員外郞史汝梅)로 하여금 본국으로 호송케 해 귀국을 도왔다. 마침내 고국에 돌아온 선생은 선조 33년 경자년 정월 고향으로 귀향한다. 선생의 금계일기는 강항의 간양록보다는 덜 알려졌으나 포로생활과 중국에서의 행적을 소상히 담아 결코 뒤지지 않는다.
위주영기자
居平祠는 1789년(정조 13) 錦溪公 魯認의 태생지인 동원리 무鶴山 기슭에 터를 잡고 祠號를 錦溪祠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1814년(순조 14)에 노인의 9대조 武烈公 岳隱 魯愼을 추앙하게 되자 사호를 居平祠라 다시 고쳐 이름지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사당과 내.외삼문을 갖추었으며, 강당으로는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 구조의 經義齋가 있다. 사당에는 고려 正尹 上護軍으로 홍건적을 물리친 魯愼, 임진왜란때 전공을 세우고 「錦溪日記」 (국보 제311호)를 남긴 병조판서 魯認, 唐浦해전 勝捷圖를 하사받은 副正 魯鴻 등 3위의 우패가 안치되어 있다. 1789년(정조 13) 초창된 이후로, 1882년(고종 23) 設壇, 1934년 복설, 1951년 중건을 거쳐 1992년 5차 중수가 이루어졌다. 錦溪祠遺墟碑(72x180)가 거평사 좌측에 있다. 비의 건립연도는 1844년(헌종 10)으로 추정된다. 楊州 趙重煥의 撰記가 있다.
[위치설명]
전라남도 나주시 문평면 동원리 동아마을
문평면사무소에서 북쪽 300m 학교뒤에 위치
[교통편]
문평면사무소에서 도보로 10분
[규모]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사당과 내.외삼문을 갖추었으며, 강당으로는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 구조의 經義齋가 있다.
[유래]
居平祠는 1789년(정조 13) 錦溪公 魯認의 태생지인 동원리 무鶴山 기슭에 터를 잡고 祠號를 錦溪祠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1814년(순조 14)에 노인의 9대조 武烈公 岳隱 魯愼을 추앙하게 되자 사호를 居平祠라 다시 고쳐 이름지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사당과 내.외삼문을 갖추었으며, 강당으로는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 구조의 經義齋가 있다. 사당에는 고려 正尹 上護軍으로 홍건적을 물리친 魯愼, 임진왜란때 전공을 세우고 「錦溪日記」 (국보 제311호)를 남긴 병조판서 魯認, 唐浦해전 勝捷圖를 하사받은 副正 魯鴻 등 3위의 우패가 안치되어 있다. 1789년(정조 13) 초창된 이후로, 1882년(고종 23) 設壇, 1934년 복설, 1951년 중건을 거쳐 1992년 5차 중수가 이루어졌다. 錦溪祠遺墟碑(72x180)가 거평사 좌측에 있다. 비의 건립연도는 1844년(헌종 10)으로 추정된다. 楊州 趙重煥의 撰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