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의 철학.
모든 탐구의 목표는 평온한 마음과 확실한 도덕을 낳는 행동양식을 인간에게 제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초기 스토아 철학은 이전 철학과 달리 지식의 추구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 헬레니즘 철학을 대표한 스토아 철학은 보편적이고 평온하며, 질서있는 존재와는 거리가 먼 생활조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삶의 방편(ars vitae)을 내놓았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보기에 영원한 우주질서와 불변적인 가치의 근원을 드러내는 일은 이성만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성은 곧 인간 존재가 따라야 할 모범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이성의 빛이란 세계 전체에 경이로운 질서를 부여하며 인간이 스스로를 통제하여 질서있게 살아가는 기준이다. 스토아 도덕철학도 세계가 통일을 이루고 있는 하나의 커다란 도시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간은 이 도시의 충성스런 시민으로서 덕과 올바른 행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세상 일에 적극적이어야 할 의무가 있다. 스토아 도덕철학은 도덕 가치, 의무, 정의, 굳센 정신 등과 같은 덕목에 중심을 두고 보편적인 우애와 신처럼 넓은 자비심을 강조함으로써 가장 호소력 있는 학설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
스토아 학파는 처음 형성된 후 2세기까지 그 영향력이 가장 컸으며, 이후 사상의 발전에도 뚜렷한 영향을 미쳤다. 후기 로마 시대와 중세에 이르는 동안 스토아 도덕철학의 일부는 그리스도교·유대교·이슬람교 등이 인간과 자연, 국가와 사회, 법과 제재에 관한 이론을 형성하는 데 적용되었다. 현대에 와서도 스토아 철학의 개인중시 사상 및 갈등과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설은 실존주의와 비정통 프로테스탄트 신학에서 다시 주목받았다.
스토아 철학은 낡은 행위규범과 인식방식이 더이상 통하지 않는 변화의 시대에 생겨났지만 과거의 학파가 남긴 사상의 영향도 받았다. 최초로 나타난 그리스 밀레토스 학파는 우주의 질서와 자연의 아름다움에 주목했으며, 일원론자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와 에페소스의 헤라클레이토스는 각각 이성의 위력과 변화의 영원함을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철학자의 상징으로 지혜를 몸소 깨우쳐 준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해주었다. '스토아' 학파라는 이름은 이 학파의 창시자 키티온의 제논이 주로 강연을 했던 장소 스토아 포이킬레(채색 주랑)에서 나온 말이다. 초기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제논은 철학을 논리학·물리학·윤리학으로 나누고 각 영역에서 스토아 철학의 원리를 세웠는데, 후기 스토아 학파에서도 이 원리는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제논에 따르면 논리학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 다른 목적을 위한 도구이며, 자연학은 올바른 행동을 결정하는 수단을 제공하고, 윤리학은 자연에 따른 삶을 인간의 행복으로 본다. 제논의 뒤를 이어 학파를 이끈 아소스의 클레안테스는 유명한 책 〈제우스 찬양〉에서 우주의 질서와 이성 및 법칙을 스토아 철학의 관점에서 칭송했다. 스토아 학파의 3번째 지도자는 솔리의 크리시포스로 초기 스토아 철학의 가장 위대하고 생산적인 인물이었다. 크리시포스는 논리학 분야에서 메가라 학파와 회의주의에 맞서 확실한 지식 개념을 방어했으며 연결사를 갖는 비분석적 명제를 연구하여 고대 논리학과 그이후 논리학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또 크리시포스는 자연학에서 운명과 자유의지를 서로 배제하지 않는 개념으로 보는 스토아 철학의 원리를 세웠다.
중기의 스토아 철학은 BC 2세기에서 1세기초에 번성했는데, 이 시기를 대표한 사람은 로도스 출신의 파나이티우스와 그의 제자 포세이도니우스였다. 파나이티우스는 로마에서 스토아 학파를 세웠으며 이 학설에 종교적인 색채를 가미했다. 포세이도니우스는 파나이티우스와 함께 크리시포스에 반대하여 스토아 철학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관점을 고집했다. 또한 포세이도니오스는 키케로의 스승이기도 했는데, 키케로의 〈신의 본성에 관하여 De natura deorum〉 제2권은 포세이도니오스가 끼친 영향을 보여준다. 파나이티우스와 포세이도니오스는 도덕철학과 자연과학에 관심을 기울여 스토아 철학이 로마에서 대중의 인기를 누리는 데 이바지했다. 그들은 또 법률, 세계시민, 자연, 신의 섭리, 이성과 같은 주제들을 스토아 철학의 중심영역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스토아 철학이 실용적인 경향을 띠게 했다. 이러한 경향은 1~2세기에 등장한 루키우스 세네카,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같은 후기 로마 스토아 철학자의 저작에도 여전히 나타난다.
스토아 철학이 그리스도의 사도 바울로의 사상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의견 차이가 크지만, 바울로가 아테네에서 행한 강연 중 신에 대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믿음과 인간이 신 덕분에 존재한다는 믿음에 관한 논증은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잘 보여준다. 종종 라틴 그리스도교 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3세기의 퀸투스 테르툴리아누스는 초자연적 정신과 인간정신의 일치, 세계이성, 영혼과 육체의 관계 등 여러 주제에서 스토아 철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준다. 3세기에 살았던 카르타고의 주교 성(聖) 키프리아누스는 세계시민이라는 스토아 철학에 대한 관점에서 노예도 주인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법칙에 따라 살고 똑같은 영혼과 육체를 부여받은 존재로 보아 당시의 노예학대 관행을 비난했다.
스토아 사상은 윤리학 면에서는 주로 키니코스 학파의 계보를 좇고, 자연학에서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영향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는 갖가지 요소가 혼재하며 절충되어 있어 선행하는 특정 학파와 관련짓는 것은 타당치 못하다. 다만 이 학파의 사람들에게서 지배적인 현상은 외적 권위나 세속적인 것을 거부하고 금욕과 극기의 태도를 갖고자 하는 것인데, 실천적 경향과 유물론적 일원론은 각각 키니코스 학파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영향을 받은 흔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살던 시대가 이전과 같이 좁은 특정의 폴리스(도시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한 동·서 양세계에 걸친 지배권의 확립이나 로마 제국의 성립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생활 공간이 확대된 시대이며, 또한 정치적으로도 과도기이던 사실에 기인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시대에 개인은 생존 근거를 추상적인 공론이나 정치적·사회적 현실 중에서가 아니라 자기의 의지라든가 감각을 통해 얻어지는 사실 중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스토아의 근본 특징은 이 세계(우주)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물체이며, 어떤 불과 같이 미세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자연학에 있다. 신 조차도 예외는 될 수 없이 인간이나 그것을 둘러싸는 자연과 마찬가지로 물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만물은 이 근원적부터의 생성과 그 곳으로의 환귀의 과정을 반복하도록 결정지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물체로서의 신이 마치 봉밀이 벌집 속으로 번져나가듯이 우주 만물을 관철하여 순환하는 것이 섭리이며, 인간의 측면에서 말하면 운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스토아에게는 우주 만물은 동질이며 상호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 한발 나아가 신·자연·운명·섭리는 동의어로 되어 있다. 다만 작용을 하는 것과 작용을 받는 것과의 상위가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작용의 원천도 감각(물체로부터의 자극과 그것에 대한 반응)에서 구해지고 있다.
스토아의 사람들은 종종 "인간은 우주라는 큰 도시의 시민(코스모폴리티스)이다"라고 주장하는데 이 발상도 이상과 같은 관점과 관련이 있다. 이런 견해를 취하는 한 스토아의 입장은 유물론적 일원론 결정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유물론은 근원적 물체가 '프네우마'라고 표현되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어딘가 포착될 수 없는 것으로, 유물론과 표리 관계에 있는 유심론으로 전체계를 전환시켜 버릴 가능성을 갖고 있다. 사실 스토아는 후기로 접어들면서 그런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스토아의 유물론적 일원론은 앞서 본 신과 세계와의 관계에서 알 수 있듯이 일종의 범신론과 표리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스토아의 사상은 전체로 볼 것 같으면 이러한 모순된 면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표면상의 주장 내지 학파가 창설된 당시의 주장과 상반되는 사실이 점차 강조되어 온 경우가 있다. 가령 윤리학 면에서 우주를 지배하는 필연성 중에서 "인간이 여하히 자유를 획득하여 사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필연과 자유와의 관계가 문제이다. 스토아의 사람들은 "일관하여 산다" "자연에 순종하며 산다"라는 것을 목표로 하여 강조한다. 이는 본시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을 통찰함으로써 인간의 유덕한 생활에 의해 유익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선택하면서, 우주의 커다란 흐름에 순응하여 조화있게 살고자 하는 주체적·적극적 태도를 의미했다. 논리학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우주법칙의 인식수단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후기가 되면서 자기의 권능내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하여 후자를 선악과는 무관한 것으로 무시 내지 체념하는 태도를 취하려 한다. 스토아의 사람들은 종종 아파테이아(어떤 것에도 마음의 동요를 받지 않는 것)라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것도 후기로 옮아감에 따라 소극적 의미로 강조되었다.
스토아(stoa)란 원래 전방을 기둥으로, 후방을 벽으로 둘러싼 고대 그리스 여러 도시에 있어서의 일종의 공공건축(公共建築)을 의미한다. 이 학파의 창시자 제논이 아테네의 한 '주랑(柱廊)'(스토아)에서 강의를 한 데서 연유하여 이 말이 학파 전체를 나타내는 명칭으로 쓰이게 되었다.[편집]
역사
이 학파는 통상 역사적으로 3기로 구분되어 기원전 3세기를 '고(古) 스토아' 시기(제논, 클레안테스, 크리시포스), 기원전 2~1세기를 '중기스토아' 시기(파나이티오스, 포세이도니오스), 기원후 1~2세기를 '후기 스토아' 시기(세네카,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고 부른다.
지리적으로 고찰한 경우 고스토아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전개하고, 중기 이후는 주로 로마로 활동무대를 옮기고 있다. 또 파나이티오스를 제외하고 이 학파에는 순수한 그리스인이 없고, 대부분 소아시아의 신흥무역도시 출신의 셈계(系)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더욱이 그들의 출신계층과 직업도 상인의 자제·고학생·노예·황제와 같이 잡다했다.
스토아는 하나의 핵을 중심으로 형성·계승되어 고정화된 사상체계는 아니다.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그 사상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고 내용은 다양성을 갖고 있다. 스토아파 사람들은 학문을 우주의 구성·생성을 주된 대상으로 하는 '자연학'과 '논리학'·'윤리학'의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이러한 3개 부문은 각각 독립하고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논리학을 매개로 하여 상호 관련되어 자연학에서 윤리학에 이르는 독특한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다. 다만 사람과 시대에 따라 초첨의 추이는 엿보여 고스토아에서 후기로 넘어감에 따라 윤리학에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스토아 사상은 윤리학 면에서는 주로 키니코스 학파의 계보를 좇고, 자연학에서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영향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는 갖가지 요소가 혼재하며 절충되어 있어 선행하는 특정 학파와 관련짓는 것은 타당치 못하다. 다만 이 학파의 사람들에게서 지배적인 현상은 외적 권위나 세속적인 것을 거부하고 금욕과 극기의 태도를 갖고자 하는 것인데, 실천적 경향과 유물론적 일원론은 각각 키니코스 학파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영향을 받은 흔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살던 시대가 이전과 같이 좁은 특정의 폴리스(도시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한 동·서 양세계에 걸친 지배권의 확립이나 로마 제국의 성립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생활 공간이 확대된 시대이며, 또한 정치적으로도 과도기이던 사실에 기인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시대에 개인은 생존 근거를 추상적인 공론이나 정치적·사회적 현실 중에서가 아니라 자기의 의지라든가 감각을 통해 얻어지는 사실 중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스토아의 근본 특징은 이 세계(우주)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물체이며, 어떤 불과 같이 미세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자연학에 있다. 신 조차도 예외는 될 수 없이 인간이나 그것을 둘러싸는 자연과 마찬가지로 물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만물은 이 근원적부터의 생성과 그 곳으로의 환귀의 과정을 반복하도록 결정지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물체로서의 신이 마치 봉밀이 벌집 속으로 번져나가듯이 우주 만물을 관철하여 순환하는 것이 섭리이며, 인간의 측면에서 말하면 운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스토아에게는 우주 만물은 동질이며 상호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 한발 나아가 신·자연·운명·섭리는 동의어로 되어 있다. 다만 작용을 하는 것과 작용을 받는 것과의 상위가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작용의 원천도 감각(물체로부터의 자극과 그것에 대한 반응)에서 구해지고 있다.
스토아의 사람들은 종종 "인간은 우주라는 큰 도시의 시민(코스모폴리티스)이다"라고 주장하는데 이 발상도 이상과 같은 관점과 관련이 있다. 이런 견해를 취하는 한 스토아의 입장은 유물론적 일원론 결정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유물론은 근원적 물체가 '프네우마'라고 표현되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어딘가 포착될 수 없는 것으로, 유물론과 표리 관계에 있는 유심론으로 전체계를 전환시켜 버릴 가능성을 갖고 있다. 사실 스토아는 후기로 접어들면서 그런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스토아의 유물론적 일원론은 앞서 본 신과 세계와의 관계에서 알 수 있듯이 일종의 범신론과 표리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스토아의 사상은 전체로 볼 것 같으면 이러한 모순된 면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표면상의 주장 내지 학파가 창설된 당시의 주장과 상반되는 사실이 점차 강조되어 온 경우가 있다. 가령 윤리학 면에서 우주를 지배하는 필연성 중에서 "인간이 여하히 자유를 획득하여 사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필연과 자유와의 관계가 문제이다. 스토아의 사람들은 "일관하여 산다" "자연에 순종하며 산다"라는 것을 목표로 하여 강조한다. 이는 본시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을 통찰함으로써 인간의 유덕한 생활에 의해 유익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선택하면서, 우주의 커다란 흐름에 순응하여 조화있게 살고자 하는 주체적·적극적 태도를 의미했다. 논리학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우주법칙의 인식수단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후기가 되면서 자기의 권능내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하여 후자를 선악과는 무관한 것으로 무시 내지 체념하는 태도를 취하려 한다. 스토아의 사람들은 종종 아파테이아(어떤 것에도 마음의 동요를 받지 않는 것)라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것도 후기로 옮아감에 따라 소극적 의미로 강조되었다.
고대말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종교·문학 분야에서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가령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을 스토아의 관점에서 해석함으로써 이른바 '신플라톤주의'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나 오리게네스도 그리스도교를 신학으로 체계화하는 데 있어서 스토아의 입장을 원용하고 있다. 자연사상의 성립이나 브루노·스피노자의 사상 등 근세에 있어서도 신과 자연을 동일시하려는 스토아의 관점이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 후기 스토아의 윤리사상은 몽테뉴등의 모랄리스트들에게 일종의 처세훈으로 애독되었다. 현대에 있어서는 논리학 분야에서 말과 말의 관계가 아니라, 명제 상호의 관련을 문제 삼으려는 스토아의 논리학이 재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