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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가장 중요한 일은 죄인의 구원이다.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마태복음 9:13,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구주’라는 명칭에서 잘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라고 질문할 때, 그의 ‘그리스도’라는 명칭이 그것을 잘 나타낸다.115) 그리스도 혹은 메시야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에게 해당하는 명칭이었는데, 구약시대의 이 세 직분은 장차 오실 한 인물을 예표하였다. 그는 참선지자, 참제사장, 참왕으로 오실 자이었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잘 나타낸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참선지자, 참제사장, 참왕이시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선지자이시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하나님의 뜻, 특히 우리의 구원을 위한 그의 뜻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달하는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계실 때 친히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다 가르치셨고 지금도 하나님 오른편에서 그 일을 계속하신다. 소요리문답 24문답,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계시하심으로써 선지자의 직분을 수행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선지자의 일을 하실 것이라는 것은 구약성경에 이미 예언된 바이었다. 신명기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사도 베드로는 모세의 이 말씀을 메시야 예언으로 이해하며 인용하였다(행 3:22, 23).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을 밝히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 많은 무리들을 가르치셨다. 그의 가르치신 말씀들은 하나님의 뜻을 밝히 전달하였다. 그는 자신을 선지자라고 표현하기도 하셨다. 누가복음 13:33, “. . .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또 그는 자신의 가르침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직접 받은 것임을 강조하셨다. 요한복음 8:26, 28,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 . .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요한복음 12:49, 50,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 . .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요한복음 15:15,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제사장이시다. 제사장은 하나님 백성의 대표자로서 그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제사와 기도를 드리는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셔서 친히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고 지금도 하나님 오른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소요리문답 25문답,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키기 위하여 자신을 단번에 제물로 드리심으로써 그리고 우리를 위해 계속 중보사역을 하심으로써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대한 성경적 증거는 많다. 구약성경은 장차 오실 메시야께서 제사장이 되시고 제사장의 일을 하실 것을 예언하였다. 시편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모습]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스가랴 6:13,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위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위에 있으리니[자기 보좌에서 제사장이 되리니].” 이사야 53:10, 12,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 . . .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신약성경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속죄의 제사를 올리셨음을 밝히 증거한다. 로마서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힐라스테리온, 유화[宥和]제물)로 세우셨으니.” 에베소서 5:2,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프로스포라 προσφορά)과 생축(뒤시아 θυσία)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요한일서 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힐라스모스, 유화제물)이니.”
특히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제사장’으로 부르고(히 5:6; 7:15, 17, 21; 10:21) 또 더 빈번히 ‘대제사장’으로 부른다(히 2:17; 3:1; 4:14; 5:10; 6:20; 7:26; 8:1; 9:11). 또한 그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제사 혹은 제물이라고 증거한다. 히브리서 9:26, “자기를 단번에 제사(뒤시아 θυσία)로 드려.”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프로스포라 προσφορά, 몸의 예물)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브리서 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또한, 제사장이 백성을 위해 기도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아버지께 드리신다. 로마서 8:34,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엔튕카네이, 탄원하시는) 자시니라.” 히브리서 7:25, “그는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히브리서 9:24, “그리스도께서는 참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요한일서 2:1,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왕이시다. 왕은 자기 백성을 다스리고 보호하는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 곧 교회를 다스리시고 보호하신다. 소요리문답 26문답,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그 자신에게 복종시키심으로써, 우리를 보호하심으로써, 그리고 그와 우리의 모든 원수들을 제압하시고 정복하심으로써 왕의 직분을 수행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직에 대한 성경적 증거는 많다. 구약성경은 장차 한 왕이 오실 것을 예언하였다. 예언된 그가 오셨는데, 그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민수기 24:17,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사무엘하 7:16,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이사야 9:6, 7, “(그 이름은)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시편 110:1, 2, 5,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 . .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이라.” 다니엘 7:13, 14, “(인자 같은 이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 . .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미가 5:2,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스가랴 9:9, “시온 딸아 크게 기뻐하라.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신약성경은 예수께서 왕으로 오셨고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다스리는 머리 곧 주(主)가 되심을 증거한다. 누가복음 1:32, 33,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태복음 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계시뇨?” 마태복음 27:11,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요한복음 18:37,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마태복음 28:18,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에베소서 1:22,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요한계시록 1:5,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계시록 11:15,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 요한계시록 17:14, 19:16, “만왕의 왕.” 요한계시록 22:1, 3,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
예수 그리스도의 왕직은 주로 교회 안에서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로서 그를 믿는 자들의 심령과 삶을 주관하신다. 그는 우리의 주시요 왕이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해당된다. 소요리문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 왕권을 ‘은혜의 나라’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세속적, 정치적 왕권이 아니고, 교회적, 영적 왕권이다. 주 예수께서는 칼과 창으로가 아니고 말씀과 성령으로 교회를 다스리신다. 요한복음 3:3, 5,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18:36,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골로새서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은 교회 안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는 온 세계, 온 우주의 왕이시다. 그는 오늘도 온 세계 안에서 참된 교회를 설립하시고 보호하신다. 그의 왕권은 온 세계, 아니 온 우주에 미친다. 마태복음 28:18,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에베소서 1:22, “만물을 그[예수 그리스도의] 발 아래 복종케 하시고.” 고린도전서 15:25, “저가 모든 원수를 그[예수 그리스도의]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하시리니.” 요한계시록 1:5,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요한계시록 11:15,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 요한계시록 17:14,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세상에 오셨으나 유대인들이 그를 거절하므로 십자가에 죽으셨고, 따라서 그가 재림하실 때 왕으로 오실 것이지만, 지금 교회 시대에는 왕이 아니시라고 말한다.116) 그러나 성경은 그가 지금 왕이심을 증거한다. 교회는 현재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또한 그는 지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그는 지금 그의 백성들을 다스리시며 능력으로 보호하신다. 물론 그의 보호의 강조점은 육적인, 물질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에 있다. 누가복음 17:20, 21,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골로새서 1:13, “그가[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요한복음 18:36,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은 현재 다 드러나 있지 않다. 그것은 장차 그가 영광 가운데 재림하실 때 완전히 드러날 것이다. 그는 미래에 영광의 왕으로 나타나실 것이다. 그의 은혜의 나라도 장차 영광의 나라로 드러날 것이다. 마태복음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베드로후서 1:11,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요한계시록 11:15,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참선지자시요 참제사장이시요 참왕이시다. 우리는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깨다고 그를 통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가고 그를 통해 환난 많은 세상과 악과 사탄의 시험을 이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도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의지하며 그에게 기도하고 그를 통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자.
7.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중심은 속죄 사역이다. 속죄의 진리는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이다. 고린도전서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고린도전서 15:3, (복음의 내용) “. . .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박형룡 박사는 말하기를, “속죄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며 초점이다”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왜 필요하였는가?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기인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쁘신 뜻 가운데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다. 갈라디아서 1:4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때문에 필요하였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하나님의 공의 때문에 필요하였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인들의 죄에 대한 형벌을 요구한다. 출애굽기 34:7, “. . .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신명기 27:26,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어떤 이는 사람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속죄가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우리 죄의 형벌을 받으셔야 했음을 증거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죄의 형벌을 받지 않으셨다면, 우리에게 구원의 가망성은 없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속죄의 죽음이었음을 분명히 증거한다. 로마서 3:25, 26,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둘째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또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필요하였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적 표현이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요한일서 4:9, 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속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은 그것을 네 개의 단어로 표현한다. 첫 번째 단어는 ‘제사’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제사’라고 표현한다. 히브리서 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구약 제사의 기본적 의미는 제물이 죄인의 죄를 대신 담당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속상(贖償, expiation; 죄책과 형벌의 보상)이라고 부른다. 레위기 1:4,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너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속죄일의 아사셀 염소에 대한 규례는 안수가 죄의 전가를 의미함을 증거한다. 레위기 16:21, 22,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한적한 곳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 이 ‘산 염소’는 ‘아사셀’(아자젤)이라고 불리웠는데(레 16:10), 그것은 ‘내어놓는 염소’라는 뜻으로서 죄의 완전한 제거와 용서를 상징하였다.
예수께서는 선택된 자들을 위하여 한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리심으로 그들의 죄책과 형벌을 담당하셨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성경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표현하는 두 번째 단어는 ‘구속’(救贖)이다. ‘구속’이라는 단어는 속전(贖錢)을 내고 건져낸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선택된 자들의 죄값을 다 지불하시고 그들을 사셔서 그들의 죄책과 형벌로부터 건져내셨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117)로 주려 함이니라.” 사도행전 20:28,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아포뤼트로시스)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고린도전서 6:19, 20, “. . .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디모데전서 2: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贖錢, 안티뤼트론)으로 주셨으니.”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경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표현하는 세 번째 단어는 ‘유화’(宥和, propitiation)이다.118) ‘유화’란 진노를 가라앉힌다, 누그러뜨린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셨다. 로마서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유화제물](힐라스테리온)로 세우셨으니.” 히브리서 2:17,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유화하려; 힐라스케스다이) 하심이라.” 요한일서 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유화제물](힐라스모스)이니.” 요한일서 4:10,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유화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성경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표현하는 네 번째 단어는 ‘화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적대 관계를 좋은 관계로 회복시키셨다. 로마서 5:10,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로마서 5:11,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고린도후서 5:18,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에베소서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유대인과 이방인]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몇 가지 중요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그것은 역사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2000년 전에 유대 땅에서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역사적 사건이 기독교 진리에 있어서 생명과 같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가 인류의 구속(救贖)을 이루신 사건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이 역사적 사건을 되돌아보며 이 사건을 믿고 이 사건을 전파한다. 고린도전서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음을] 전하니.” 고린도전서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디모데전서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객관적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이루어진 일이었다. 아직 죄인들의 심령에 그 사실이 알려지기 전에, 아직 죄인들 자신에게 구원이 적용되기 전에, 아직 죄인들의 심령 속에 그 죽음의 효력이 미치기 전에, 그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다. 그가 십자가 위에서 택자들을 위한 구속(救贖)을 다 이루셨다. 요한복음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요한복음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앞에서 고찰한 속죄의 네 가지 의미들은 다 속죄의 객관성을 증거한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대리적(代理的)이었다. 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택된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셨다. 그의 대속의 공로는 많은 죄인들을 구원하기에 충족하였다. 그의 속죄의 대리적 충족성은 그의 신성(神性)에 근거한다. 그의 신인(神人)적 인격은 그의 속죄사역을 무한한 가치를 가진 행위로 만들었다. 이사야 53:5, 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 . .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마태복음 20:28,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119) 마태복음 26:28,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고린도후서 5:14,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베드로전서 3:18,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은 완전하였다. 그것은 더 이상 속죄의 제사가 필요치 않을 정도로 완전하였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이 덧붙여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전하였다. 죄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만 구원을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자들을 위한 속죄를 다 이루셨다. 그 속죄사역은 택자들의 죄값의 완전한 지불이며 그들의 죄책과 죄의 형벌의 완전한 보상이었다.
다니엘 9: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70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永贖)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요한복음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고린도전서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거룩하여졌고]120)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고린도전서 1:30,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히브리서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에파팍스)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브리서 10:10,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헤기아스메노이).”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케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121) 히브리서 10:18,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예수께서 택자들의 죄 문제를 다 해결하셨다. 그는 택자들을 위해 완전한 대속 제물이 되셨다. 이제 예수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죄씻음과 완전한 의를 받았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참자유와 평안이 있고 구원의 확신이 있다. 여기에 하나님께 대한 참감사와 사랑과 헌신의 이유가 있다.
역사상, 잘못된 속죄설들 중 대표적인 것들은 다음과 같다.
사탄 속전설
어떤 이들122)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사탄에게 속전(贖錢, ran- som)으로 내어준 죽음이었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을 ‘사탄 배상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견해는 성경적 근거가 희박하며, 죄인에 대한 법적 권한을 하나님이 아닌 사탄에게 돌리는 것은 잘못이다. 그들이 제시하는 성경구절인 히브리서 2:14 123)은 그들의 생각을 지원하지 않는다.
도덕감화설 혹은 모범설
어떤 이들124)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단지 자기 희생적 사랑과 모범의 죽음이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한 모범적 선생이요 한 고귀한 순교자이셨으며 그의 모범적 사랑이 죄인을 구원에 이르도록 감동한다고 한다. 이것을 흔히 ‘도덕 감화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그의 극진한 사랑의 표현이요 확증인 것이 사실이지만125), 십자가의 의미가 그것뿐이라면 복음이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대속이 없다면, 여전히 우리의 죄는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밖에 없다. 이 견해는 결국 그리스도의 죽음과 우리의 죄가 엄밀한 의미에서 아무 관계가 없다고 보는 것이며, 그것은 성경적 복음의 핵심을 부정하는 큰 오류, 이단적 오류이다.
도덕적 통치설
어떤 이들126)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단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미워하심의 표시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도덕 세계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복과 유익을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그가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는지를 교훈하셨다고 한다. 이것을 흔히 ‘도덕적 통치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견해는 하나님의 형벌적 공의의 개념과 조화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공의의 심판을 내리신다. 그것은 단지 피조물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또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런 교훈적 의미뿐이라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우리의 죄는 엄밀한 의미에서 아무 관계가 없으며 따라서 복음도 없다. 그것은 성경적 복음을 부정하는 이단적 오류이다.
신비설
어떤 이들127)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육신으로 그의 인성이 정결케 되셨고, 사람들이 그를 믿음으로 그의 새 인성에 신비적으로 연합됨으로써 의(義)를 주입받아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을 흔히 ‘신비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견해는 그리스도의 죽음보다 그의 성육신을 중시함으로써 그의 죽음의 중요성을 부정하며, 또한 하나님의 형벌적 공의의 개념을 바르게 가지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속량하신 자들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대상에 대해서는, 역사상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보편속죄설이고, 다른 하나는 제한속죄설이다. 보편속죄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셨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 견해의 전제는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고, 그 견해의 핵심적 생각은 구원이 궁극적으로 사람의 결정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알미니우스주의라고 부른다. 이와 구별하여, 제한속죄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죄만을 대속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인류 전체를 구원하기를 원하셨는가, 아니면 인류 중 일부 즉 그가 영원 전에 선택하신 자들만을 구원하기를 원하셨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전체를 위해 즉 인류 전체의 죄책과 죄의 형벌을 담당하시기 위해 돌아가셨는가, 아니면 오직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죄만을 위해 돌아가셨는가? 이것은 구원받은 자들의 구원의 보장(保障)의 문제와도 관계되며, 또 전도할 때 전도자의 실제적 마음가짐에도 관계된다. 그러나 좀더 중요한 문제는, 사람의 구원이 오직 인간 자신의 결심에 달려 있는가, 혹은 달리 표현하여, 하나님께서 실제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주이신가이다.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한성을 성경적 진리로 고백해 왔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의 근거는 다음 3가지 요점으로 서술될 수 있다.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는 구원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밝히 가르치며 또 구원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가르친다. 시편 3: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요나 2:9,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마태복음 19:26,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요한복음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로마서 9:16, 18,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 .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야고보서 4:12, “(하나님은) 능히 구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그 외에도, 마태복음 16:17,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사도행전 11:18,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사도행전 16:14,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신명기 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또 하나님의 예정이 효력이 있다는 사실도 구원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확증한다. 요한복음 6:39, “하나님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10: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사도행전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이러한 모든 말씀들을 볼 때, 사람의 구원이 오직 자신의 결심(회개와 믿음)에 달렸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또 사람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하거나 제한해서도 안 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류 전체를 구원하시려고 뜻하셨다면, 인류 전체를 구원하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시는 일이 없다. 그런데 보편속죄설은 사람의 구원이 자신의 결심에 달렸다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구원의 능력을 부정하는 잘못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전능하시지만 사람의 마음과 의지를 변화시키실 수는 없고 또 변화시키시려고도 하지 않으신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제한적이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는 또한 하나님의 구원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선택의 진리와 선택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의 제한성을 보인다. 하나님의 구원이 제한적이 않다면, 선택이라는 용어가 사용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성경은 인류 전체와 구별하여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자기 백성, 자기 사람들, 자기 양들에 대해 분명히 증거한다.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요한복음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요한복음 17:9,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0:15,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28)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 민족들과 구별하여 사랑하심도 하나님의 구원의 제한성을 증거한다. 호세아 11: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하도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말씀도 구원의 제한성을 암시한다. 이사야 53:5, 6, 8,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가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 .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또한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말씀도 구원의 제한성을 암시한다. 이사야 53:11, 12,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의롭다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 . .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마태복음 20:28,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6:28,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알미니우스주의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히 크심을 옹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구원 의지의 제한성을 부정한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어떻게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인류의 일부분만 구원하기를 원하시고 그 나머지를 영원한 멸망 가운데 버려두실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러나, 알미니우스주의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믿는 보편 구원을 주장하지 않는 한--그리고 물론 보편 구원론은 명백히 비성경적이다--그들의 보편적 속죄설은 하나님의 사랑을 참으로 옹호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구원의 능력을 가진 전능자가 죄로 멸망하는 인생을 관망만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옹호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두려운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 인류의 일부분을 영원한 멸망에 버려두셨다는 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속죄는 실제로 죄의 형벌을 대신 받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속죄의 본질적 성격에 있다. 속죄란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우리의 죄책과 형벌을 담당하신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고 사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사도행전 20:28, “주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는 결코 헛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어떤 사람을 위해 속죄의 피를 흘리셨는데 그가 멸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 영원 전에 선택된 자들, 곧 그의 양들을 위하여 속죄의 피를 흘리셨고,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그들, 바로 그가 피흘려 사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하신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셨다면, 멸망 받을 죄인이 세상에 한 사람도 남지 않아야 하고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논리적이다. 왜냐하면 속죄의 본질적 성격상 피값을 주고 사신 자들은 다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보편속죄설은 논리적으로 보편구원론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나 보편구원론은 성경적 진리일 수 없다. 마태복음 7:13,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누가복음 13:23, 24, “구원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 . .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죤 오웬(John Owen)은 제한속죄의 진리를 다음과 같이 증명하였다.
성부께서 그의 진노를 부과하시고 성자께서 그 형벌을 받으신 것은 (1) 모든 사람들의 모든 죄들을 위해서든지, (2) 일부분의 사람들의 모든 죄들을 위해서든지, 혹은 (3) 모든 사람들의 일부분의 죄들을 위해서이다. 각 경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만일 마지막 경우가 참되다면, 모든 사람들은 책임을 져야 할 어떤 죄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따라서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두 번째가 참되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의 모든 선택된 자들의 모든 죄들을 위해 그들을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셨을 것이고 이것이 진리이다.
그러나 만일 첫 번째가 참되다면, 왜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죄로 인한 형벌로부터 자유하지 못하는가? 불신앙 때문이라고 여러분은 대답한다. 나는 묻는다. 이 불신앙은 죄인가 죄가 아닌가? 만일 그것이 죄라면,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으로 인한 형벌을 받으셨거나 그렇지 않거나 할 것이다. 만일 주께서 받으셨다면, 왜 그것이 주께서 대속하신 그들의 다른 죄들 이상으로 그들에게 방해가 되어야 하는가? 만일 주께서 그것의 형벌을 받지 않으셨다면, 그는 그들의 모든 죄들을 위해 죽지 않으셨다는 말이 될 것이다.
보편속죄설을 지지하는 듯한 구절들
에스겔 18:2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의 공평함과 의로움을 강조하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악인의 멸망을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셨다. 이것은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반적 의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의롭고 공평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반적 의지가 그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그의 적극적 의지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위에서 언급된 진리들, 특히 선택의 진리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 구절도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를 보이는 듯하다. 과연 그러한가? 만일 그러하다면 이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 의지의 제한성을 보이는 여러 구절들, 특히 선택의 진리의 구절들과 모순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도 다른 구절들과 조화시켜 해석되어야 한다고 본다. 세 가지의 가능한 해석이 있다.
(1) 이 구절은 에스겔 18:23과 비슷하게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반적 의지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반적 의지가 곧 그의 적극적 구원 의지와 동일하지는 않다.
(2) ‘모든 사람’이라는 말이 대략적 의미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성경에서 특히 디모데전후서에서 ‘모든’이 대략적 의미로 사용된 예들이 많다. 디모데전서 2:1,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하되].” 디모데전서 4:15,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디모데전서 5:20,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디모데후서 1: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디모데후서 4: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3) ’모든 사람‘이라는 말이 ’선택된 자들 모두‘라는 제한적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요한복음 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디모데전서 2: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이것도 보편 속죄를 보이는 듯한 구절이다. 그러나 이 구절도 역시 다른 많은 구절들과 조화시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모든 사람’은 대략적 의미 혹은 제한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1)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를 가리키든지, (2) 각계 각층의 사람 모두를 가리키든지, 혹은 (3) 택한 받은 사람 모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베드로후서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 구절의 ‘너희’는 신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으므로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한속죄의 진리는 어떤 이들이 오해하듯이 결코 전도의 필요성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선택과 속죄 뿐만 아니라, 또한 전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는 죄인을 구원하는 필수 과정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죄인 구원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과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를 믿는 동시에 담대히 복음을 전해야 하고, 바로 그러한 진리들을 믿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담대히, 낙심치 말고 전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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