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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세기 초의 고어체가 변형이 안 되어 시가 온전치 안 네요 다음에 수정 하겠습니다.
개화기 기독교와 시가 문학과의 연관성
1. 서론
1.1 연구 목적
1.2 연구 방법
2. 기독교의 전래
2.1 천주교의 전래와 박해와 번역서
2.2 개신교의 전래
3. 기독교와 개화기 문학의 관련성
3.1성서과 한글
3.1.1 성서 번역의 과정
3.1.2 성서번역의 의미와 한글
3.2 찬송가와 시문학의 관련성
3.2.1 찬송가 번안의 역사
3.2.2찬송가의 번안의 의미
3.2.3 창가에 끼친 영향
4. 창가와 개화가사의 내용
4.1 <독립신문>소재의 창가의 기독교사상
4.2 <대한매일신보>소재의 개화가사의 기독교사상
4.3 <경향신문>소재의 개화가사의 기독교 사상
5. 선교사가 만든 기독교 문학집
6. 결론
1. 서론
1.1 연구 목적
지금의 한국 사람들의 옷과 머리 모양과 집들 온 나라의 전반을 둘러볼 때 우리 고유의 전통에서 비롯된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다. 불과 100여 전만 해도 모두 상투에 저고리와 한복 바지를 입거나 여인의 경우 귀밑머리나 쪽진 비녀로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던 시대였지만 지금의 한국은 나라이름도 조선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렇듯 수 천 년을 흘러오며 바뀌지 않았던 우리민족의 의식주를 바꾸고 이전에 없던 사상의 변화 그에 따른 글과 문학 노래 역시 이전의 양식과는 다르며 이전의 추구하던 가치도 바뀌어서 양반 상놈 구분이 없어지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이 대두되며 희생과 봉사에 대한 마음이 꿈틀된 개화기의 불씨는 어디서 시작이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894년 김홍집등의 개화파에 의하여 주도된 갑오경장 전후를 개화기의 본격적인 시작으로 보고 있는 것이 이제까지의 통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개화기 문학은 고전문학에서 현대문학으로 바뀌는 전환기의 문학이라고 말한다. 이시기는 기독교가 전래되어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하게 된 때이다. 따라서 조선의 개화기는 문학을 비롯한 사회전반에서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는 한국의 근대화에 끼친 영향이 실로 작은 것이 아니었음을 알고자한다.
기독교의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행하였던 선교활동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제중원 현 세브란스병원)의 설립과 기독교의 이념을 토대로 한 학교를 많이 세움으로 나라를 잃어버린 한국의 백성들에게 배움을 통한 인재양성을 일구었던 것이다.
선교활동 중의 하나인 성경번역과 찬송가의 번안과 기독교의 신앙소설의 번안은 이 땅에 새로운 문학과의 만남이며 새로운 사상의 유입이며 전통적 생활 방식인 유교적 삶에서의 출구가 아닐 수 없었다.
개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100년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개화기의 근대 시가 문학 속에 녹아 있는 기독교의 사상과 영향에 대하여 밝힐 필요가 있음에 연구를 해본다.
1.2 연구 방법
서양의 문물들이 이 땅에 들어왔다. 그 중에 성경책과 찬송가는 그 어떤 서적보다 가장 많은 영향력을 끼친 수입품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성경을 어떤 경위에 의해서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원문인 아닌 한글로 번역되어진 과정을 연구할 것이다. 성경번역과 보급은 한글의 대중화를 이끌었으며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의 불일치의 조선 사회를 언문일치의 사회로 이끌어냄으로서 우리 문학뿐 아니라 대중을 사회적 근대적으로 한 차원 높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찬송가의 번안은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니었지만 3번에 걸쳐 출간을 하였다. 찬송가의 번안을 통해 조선 시대로부터 지어지고 불려진 우리의 전통적인 음수율이 아닌 다른 시의 형태가 유입이 된다. 이는 전통적인 4.4조의 노래 가락에서 벗어난 것으로 창가와 동요 등에 쓰임으로 새로운 노래시를 형성하게 된다.
또한 번안소설로 <천로역정>이 있는데 널리 읽혀지게 되면서 기독교적 세계관과 청교도적인 삶의 구현을 나타냄으로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 볼 것이다.
그리고 신문의 등장과 함께 <독립신문>의 애국가류와 창가 < 대한매일신보>,<경향신문>에 실린 개화가사의 작품을 살피며 시조나 전통 가사의 율격과의 차이와 기독교 사상의 흔적 등을 살펴보겠다.
2. 기독교의 전래
2.1 천주교의 전래
우리나라의 천주교는 외국의 선교사의 입국이나 도움이 없이 순 조선인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해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특히나 박해를 많이 받으면서 자라나게 된 것이다. 남인계열의 실학자들의 전래를 통해 이루어진 점이 특이하다.
기독교 문서의 유입은 1610년 허균이 청나라에 사신단과 같이 입국하였을 때 <게 12장>(천주교 기도문)을 가지고 들어오면서부터이다.
그 다음은 실학파의 선구자 이수광 (1563년-1628년)의 저서 『지봉유설:1614년>로 유명한데 그의 책속에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에 대하여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창조설을 주되게 논변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청은 소현 세자와 몇몇 신하들을 볼모로 그들의 땅으로 끌고 갔다. 당시 청나라에는 예수회 독일인 신부 아담 샬 (Johann Adam Schall von Bell : 1591- 1666)이 있었는데 소현 세자는 그와 친교를 맺고 ,또 다른 선교사들의 저작에도 손댈 기회가 생겼다.
세자가 볼모 생활을 마치고 환국 할 때에 그가 지은 천문 산학 (算學), <성교정도(聖敎正道)>등의 여러 서적과 천주상을 선물로 주었다. 그러나 소현 세자는 1645년 2월 18일에 귀국을 하였지만 2 달 여만에 학질로 죽게 되었다, 따라서 서양의 여러 학문의 전달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기독교의 교리는 조선에 전달되었다.
그 후 이익의 『성호사설』에서는 “유교에 없는 것이 있다”며 유학적 가치관을 비판하고 기독교 윤리에 동조하였다.
보다 구체적인 신앙의 실천은 1777년 권철신, 정약전, 이벽을 비롯한 수명의 학자들이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기 위하여 조직된 교리 연구회에서 비롯 되었다. 이들은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아침 저녁 기도회, 주일 노동 금지 등의 신앙규범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최초의 세례교인 이승훈(1756~1801)은 1783년에 베이징 남천주당에서 영세를 받고 교리를 익히고 1784년 교리서와 십자고성, 성화 등의 천주교 신물들을 가지고 왔다. 그 후 이벽 ( 1754-1786)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의 장인 안정복에게도 세례를 주었다. 주로 중인계급에 전도를 하였다.
1785년 서울의 명례방(지금의 명동) 김범우의 집에서 미사를 드리다가 적발되어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는데 양반은 처벌을 면하였지만 중인이였던 김범우가 단양에 유배되어 1년 만에 죽음으로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1791년 정조 신해년에 윤지층, 권상연이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사르는 사건이 충격을 주어 신해교난(1791년)을 유발시켰다. 그 후 남인의 정권으로 큰 박해는 없었으나 1801년 신유교난의 큰 박해가 있었는데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300여명이 처형을 당했으며 향후 30년간 산부가 없는 교회로 조선천주교는 어려움을 겪었다.
1815년 에는 신유교난을 피해 화전민으로 도망을 간 교인 500여명이 처형을 당했고, 194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등은 순교자 외국인 신부 9명과 8000 여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천주교의 교리서가 한글로 번역되어 일반 신도들에게 읽힌 것이 정조 12년 1788년이다. 또한 프랑스 선교사들이 만든 『한불사전』이 한국어 사전의 효시로서 한국어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인 교리서로는 정약종의 『주교요지』 정약전의 『십계명가』 이벽의 『천주공경가』 등이 있다.
2.2 개신교의 전래
조선의 천주교의 역사는 순수 조선인들의 노력과 헌신이 큰 공헌을 하였고, 박해와 탄압에도 꿋꿋하게 전개되어 갔다면 개신교의 수용과정은 주변 제국주의의 압력과 문호개방의 시기를 통하여 선교사들이 교육사업과 의료 활동으로 비교적 순탄한 가운데 기반을 확충해 갔다.
개신교 선교사로 한국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네덜란드 선교회의 구츨라프(K.A.F Gűtzlaff, 1803-1851)였다.
그는 1832년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로드 암허스트 (Lord Amherst)호를 타고, 황해도 장산곶을 거쳐 충청도 고대도에 닿아 잠시 머물며 한문성서를 주민들에게 나누어주며 전도하다가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1865년 9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의 토마스 (Robert jermain Thomas, 1840 -1866)목사가 잠시 황해도 해안에 머물면서 주민들에게 성경책을 나누어 주고 북경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듬해 1866년 선교를 목적으로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 (general sherman)호 에 동승하여 대동강 유역까지 왔으나, 조선 병사에게 죽임을 당 하였다. 그 순교의 현장에서도 토마스 목사는 병사들에게 성경책을 건네주었다. 그가 순교 하면서 뿌린 한문 성서를 주워 읽거나 그 순교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 가운데 후일 기독교인이 된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토마스 목사의 뒤를 이어 사역한 선교사는 스코트랜드 출신의 알렉산더 윌리엄슨 Alexander Williamson) 이었다. 그도 대원군의 쇄국 정책으로 한국에 직접 온 것은 아니었지만 1867년 만주에 드나드는 조선인들과 접촉하며 전도 문서를 배포하며 선교하였고 한국에 대한 자료를 모아 저널 (Journeys in North china, Manchuria, and East Mongolia, with some account of Corea, Londen, 1870)에 싣기도 하였다.
1872년 만주에서 선교를 하던 로스(John Ross)목사는 압록강 상류 임강 부근의 조선인 마을에서 처음으로 조선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 후 조선의 선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의 동료 메킨타이어(John Mcintyre) 목사와 중국에서 조선인들을 위한 성서를 번역하여 보급하는데 힘을 기울이면서 개신교 선교에 기틀을 마련하였다.
1875년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등 네 명의 청년은 메킨타이어 목사의 어학 선생이 되었고 1876년 기독교에 귀의하여 최초의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1878년 의주 청년 서상륜이 우장으로 건너와 로스 목사의 세례를 받고 성서번역사업에 가담하였다.
로스 목사와 매킨타이어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던 서상륜은 1884년 봄 자신의 고향 황해도 장연의 솔내에 정착하여 복음을 전하였고 한국인 최초의 개신교 교회당을 설립하였다. 이것이 솔내 교회이다.
한편 국내에서는 1884년 12월 김옥균등의 개화파의 갑신정변으로 민영환이 칼에 몸이 베이는 큰 부상을 입었다. 그때 알렌 (H.N. Allen : 1858 - 1932) 선교사가 서양 의술로 민영환을 살려주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알렌은 고종과 민비의 왕실부 시의관으로 임명되었다. 고종은 1885년 알렌에게 광혜원(제중원)이라는 최초의 병원을 설립하게 해 주었고 이것이 조선 선교의 큰 활로를 마련케 하는 역할을 하였다.
1885년 4월 제물포를 통해 2명의 미국선교사가 입국하였다 한사람은 그 유명한 언더우드( H.G. Underwood : 1859-1915) 선교사이고 또 한명은 아펜젤러(H.G. Appenzeller : 1858 - 1902) 선교사인데 아펜젤러선교사는 부인과 함께 왔다. 그러자 여인의 입국을 제한한 조선의 방침으로 아펜젤러는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2달 후에 재입국을 하는 사태가 있었다. 다음 달 인1885년 5월 스크랜톤 (W.B. Scranton)의사가 그의 모친 메리 스크랜톤 여사 (Mra.M.F.Scranton)와 입국하여 시병원(정동병원)을 설립하였다.
1887년 치료받지 못하는 가난한 여성들을 위해 '보구여관'이라는 의료시설과 여성 문맹 퇴치를 위해 '매일학교'를 열었다. 또 사대문 밖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남대문 밖 상동과 서대문 밖 애오개, 동대문에 시약소라는 진료소를 세워 그들을 돌보며 복음을 전했는데 이곳이 항일 운동의 본산지인 상동교회, 아현 감리교회, 동대문교회가 되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이 땅에서 일군 다양한 사역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근대교육의 기초를 놓은 일이다. 앨런에 의해 시작된 제중원에서 약제사로 일한 것을 시작으로 1886년 3월부터 제중원에서 시작된 의학교에서 화학과 물리를 가르쳤다 그 후 1886년 2월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은 후 고아 3명을 모아 보육원을 설립하였는데 그 중 한명이 독립운동가 김규식이다.
1902년에 연못골 (현 서울 종로구 연동)에 대지를 구입, 건물을 지어 ‘존 디 웰스 기독교지도자학교’(John D Wells Academy for Christian Workers)를 개교했다. 이것이 오늘날의 경신 중·고등학교다.
1895년에 새문안교회 경영으로 영신학당을 세우고 후에 감리교와 연합, 수창동에 교사를 신축하고 협성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1911년 뉴욕의 화이트 박사 일행이 내한을 계기로 피어선 성경학교를 세웠다. 오늘의 평택대학교가 됐다.
1911년 6월 교육조사국(Educational Information Bureau)을 설립, 회장으로 취임했다. 각종 교과서의 편찬, 각기 다른 분야에서 사용되는 술어 조사의 통일, 표준 교과서 편찬을 목적으로 일했다. 이곳에서 전국의 모든 학교에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교육 공지사항을 번역, 배포 하는 일도 했다. 언더우드는 자기 집에 사무실을 두고 각종 교회학교를 관리했다.
1915년 3월 미국북장로교회 캐나다장로교회 북감리교회 연합으로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60명의 학생으로 ‘경신학교 대학부’라는 간판을 걸고 출발했다. 일제가 한국에 대학 설립을 허가하지 않고 전문학교만 인정했기 때문에 ‘연희전문학교’로 출발했다. 광복 후 교명을 바꾼 연희대학교는 1957년 1월 세브란스의과대와 병합, 오늘의 연세대학교가 됐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에서 이룬 많은 사역들 중 교육의 근대화에 끼친 영향은 한국 근대교육의 초석을 놓았다는 데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교육이 국가의 백년대계라고 한다면 언더우드 선교사야말로 그가 선교하던 시대로부터 100 년후 인 오늘 한국 근대화의 근간을 이룬 공로자라고 말해야 마땅하다.
3. 기독교와 개화기 문학의 관련성
3.1성서과 한글
3.1.1 성서 번역의 과정
성서를 우리말로 번역하는데 큰 공을 세운 선교사로 로스 (John Ross)목사와 매킨타이어(John Mcintyre)목사이다. 1872년 만주에서 선교를 하던 로스목사는 압록강 상류 임강 부근의 조선인 마을에서 처음으로 조선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로스 목사는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입국을 하려 했으나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들어올 수 없자 고려문이라는 정기 시장을 통해 조선인들과의 접촉을 가지게 되었다. 1874년 조선에 대한 선교 정책으로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는 일을 결심하게 되었고 고려문에서 의주에서 온 청년 이응찬을 선정하였고 그에게 조선어와 조선역사를 공부하였다. 1875년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등 네 명의 청년은 멕킨타이어 목사의 어학 선생이었는데 1876년 기독교에 귀의하여 최초의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1877년 로스목사와 매킨타이어목사는 『A Korea Primer』라는 우리말 회화책을 출간하였고, 1880년에는『Corea It's History, Manners and Customs』라는 역사책을 출간하였다.
1878년 의주 청년 서상륜이 우장으로 건너와 로스 목사의 세례를 받고 성서번역사업에 가담하였다.
1882년 이들 목사는 이응찬 등의 도움으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간행하였다. 이후 1887년 『예수 셩교젼서』라는 신약전서 전권을 간행하였다.
한글 성서의 번역은 만주에서 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이루어졌다. 박영효가 이끄는 수심사의 일행으로 1882년 일본에 건너갔던 이수정은 일본에서 세례를 받은 첫 개신교 신자로서 1883년 4월에 한문으로 된 『사복음서 (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을 사설로 토를 달았으며, 미국성공회는 그것을 3,000부 정도 인쇄했다고 한다. 1884년 이수정은 마가복음서』를 한국어로 번역하였고, 이듬해는 『누가복음서』를 번역했고 1884년에는 이두로 토를 단 한문 복음서의 일부와 『사도행전』1000부가 출판 되었고 1885년에는 이수정역 마가복음서가 초기에 인쇄되었다. 그러나 훗날 입국하여 선교사역을 하던 선교사들이 보니 그리 적합한 번역이 아니었다. 과장된 문체, 지나친 한문투와 사투리의 표현 등이 많으므로 새로운 성서 번역의 필요서을 절감하고, 1887년에 성서위원회와 번역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린튼, 해론(John W. Heron, 1856 -1890 제중원 2대 원장을 역임. 한국에 온지 2년 만에 이질을 치료하다 전염 되어 순교함), 레이놀즈(William David Reynolds 1867 - 1951), 게일(,James Scarth, Gale, 1863~1937)등 이었고, 한국인으로는 최병헌, 조한규, 정동명, 이창식 등이 번역 위원회로 일 하였다. 그 결과, 1904년 신약성경 전권이 출판되고, 1911년에 신,구약 성서가 완전히 번역되었다.
1911년엔 성경판매 부스는 26만부수를 넘어섰고, 1924년에는 60만여 부수, 1936년에는 86만여 부수에 달하였다.
3.1.2 성서번역의 의미와 한글
로스 역의 성서가 가지는 큰 의미는 한문의 고투가 많았다고 하지만 순수한 한글 특히 서민층의 쉬운 말들로 최초의 번역이란 점이다. 따라서 한글 발전에 끼친 공로는 실로 지대하다. 당시 유교적 세계관과 한글을 경시하던 조선민에게 보급된 번역 성서는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되면서 즉 믿는 자의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 점차 그 내용을 담은 한글을 존중하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국문학자의 글을 참조한다.
대체로 근세의 이국문 발달 경과를 보면 거기는 서학 발전의 중대한 영향을 잊을 수 없는데, 서학이 전래하자 그 교리를 널리 일반 대중에 보급시키기 위하여 곧 서어의 조선어번역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고종 17년에는 벌써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번역 되었고, 고종 21년에는 미국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 의하여 신약전서의 번역이 시작되어 동 27년에 완역되었다, 이로 인해 기독교의 전파가 용이하였던 것은 물론이나, 또 그로인해 일반 평민 대중에 신문화가 널리 보급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 국문의 발달에 지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즉 현대의 국문이 기독교에 힘입은 바가 극히 크다고 믿어지나 과거에는 公私用文이 한문이 아니고서는 안 될 줄만 알았던 것이 이제 와서는 국문으로써 능히 만족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나아가서는 국문이 아니고는 그 능릉 다 할 수 없음 조차 알게 되었다. 이미 과거에는 문화가 일부 특수자의 상대가 아니라 국민 전체 곧 일반 대중의 산대로서 문화가 존재 할 수 있고, 또 존재하였기 때문에 기실 국문이 아니고는 근대적인 문화의 전신을 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가 성서를 통한 한글 보급에 힘쓴 결과 많은 문맹한 교인들이 한글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한글에 현실적 가치를 부여 했으며 한글을 통하여 널리 학문을 배우고 개화의지를 촉진 시킬 수 있었다. 더불어 교회는 한글의 문법적인 면을 거론하기도 하고 한글 서적을 보급하기 노력하였다. 실제로 한글의 문법과 초창기 어문체계의 구성에 열정은 다한 자들은 대게가 기독교인들이었다.
또한 성서가 번역 언어로서 편이한 언문일치의 한글을 채용함으로써 문자생활과 언어생활에 일대 혁신을 일으켰고, 또 동시에 문법과 어문체계를 갖춘 국어로 발전시켜 주었다. 개화기 이후에 등장한 소위 신소설과 몇몇 신문들이 한글 문체를 채용한 것은 언문일치운동의 일환이었다. 성서의 번역은 우리언어의 비유성과 풍자성을 풍부하게 해주었고 , 우리나라의 언해체 산문문장을 좀 더 근대적인 산문 스타일문장으로 발전시켜 주었다.
또한 한문이 가져다주지 못했던 대중성의 측면에 있다. 성서 번역이 광범위한 민중층을 동원한 것은 사회성을 갖는 것이며 사회를 근대화로 이끄는 계기가 됨을 묵인할 수 없다.
3.2 찬송가와 창가의 관련성
3.2.1 찬송가 번안의 역사
첫 번째 찬송가는 1892년 감리교 선교사였던 존스(G. H Johns)와 로드와일러 (Louis. c Rothweiler) 의 공역으로 된 『찬미가를 그 효시로 보고 있다. 1894년 언더우드( Horace Underwood)가 『찬양가를 펴낸다. 서문에 “ 찬송가에 대한 요구는 약 2년 전에 존스 목사가 출판한 책에 의해 충족 되었다. 그것은 다시 사용 되던 찬미를 거의 다 포함하지만 가사만을 실었다”라고 한다. 따라서 『찬미가를 우리나라의 첫 번째 찬송가임을 알 수 있다. 찬미가에 들어있는 찬송가의 수는 모두 27편 이제 이것은 음곡이 붙어 있지 않은 가사만으로 된 소형본으로 감리교회에서만 전용한 찬송가였다.
두 번째 찬송가는 위에서 밝혔듯이 1894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출간 한 찬양가집이다. 모두 117편이 들어 있으며 음곡과 악보가 있는 지금의 찬송가의 모습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오선악보가 있는 음악책으로 한국 음악사에 미친 영향도 굉장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주로 장로교 측에서 불리었다고 한다.
세 번째로는 1895년 그리암리(G. lee)와 기포드 (Mrs. M. H.Gifford) 여사의 공역으로 된 『찬셩시로서 수록된 찬송가의 수가 54편이다. 이는 그분 들이 사역하던 북쪽 지역에서 불리었다.
위의 세 종류의 찬송가는 우리나라 선교 초기의 찬송가집으로 각각 편수를 증가해 가면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네 번째의 찬송가 찬숑가가 1908년 장로교와 감리교의 협력으로 초판 발행 되었다. 총 262편이 수록 되었고, 이중 5편이 우리나라의 고유의 가락으로 만들었다는 데에 의의를 가진다. 그 후 1931년 과 1935년 등의 각각의 교단 별로 여러 번의 찬송가집이 발행되었다.
그러나 찬송가를 번안하는 작업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중 첫 번째가 선교사들이 우리말 구사력이 미숙했다는 점이다. 기록상으로보면 언더우드가 135편, 베어드 부인이 34편, 피터스 (Mr .Pieters) 8편 밀러 (Mr. Miller)5편 존스 3편, 스월른 (Mr. Swallen)3편 , 노블부인 (3편 , 밀러부인 2편 존스부인, 페리양 게일, 베어드, 펜위크, 트와일러양 ,스월른부인 각 1편 순으로 찬송가를 번안하였다.
그러나 한국어가 서툴렀고, 어휘력이 풍부하지 못했으며 한국인의 정조를 표현 할 수는 없었다. 선교사들을 도와서 일한 한국인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반대로 영어에 조예가 깊지 못했기에 한계가 있었다.
두 번째의 문제는 음곡에다 가사의자수를 맞춰야 하는 일이다. 언어의조법과 언어의 색채가 다른 영미시를 축자적 번역은 너무나 장음이 되고 음곡에다 자수를 맞추자니 시어의 묘미를 살릴 수 없는 고통이 있었다. 국어의 성질상 원문의 정밀한 표현을 그대로 음곡에 맞출 수 없기에 적절하게 원래의 의미를 전달하는데 의의를 가지고 번안을 한 것이다.
세 번째는 한국어는 감각어가 많고 관념어가 적다는 것이다 찬송가는 기독교 신앙의 논리적 성격 때문에 관념어를 내포하는 수가 많은데 대응되는 어휘가 부족 하였다. 그래서 관념어가 풍부한 한문에서 어휘를 차용하였다.
3.2.2찬송가의 번안의 의미
실제적으로 찬송가집은 번안되기도 이전에 불려 진 노래였다. 만주에서 로스 목사의 한글 성서번역 사업에 참여하였던 백홍준은 1884년에 귀국하였는데 그의 따님 되시는 백관성 여사의 말에 의하면 매일 새벽마다 “주예수애워 주예수애워 (主耶蘇愛我)”를 불렀다고 한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입국 후부터는 대중을 상대로 하는 전도가 시작 되었고, 예배도 행하여 졌으므로 찬송가가 번역되어 불러졌음을 짐작한다.
아펜젤러의 1887년 4월 11일 부활절의 일기를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로 찬양하였다라고 적혀있다. 또한 1887년 12월 25일 성탄절 일기에도 이날의 전체 예배순서 중 찬송가 “내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이 들어있다.
그가 배재학당은 1886년에 세웠는데 학교 교과목에는 영어·산수·일반과학·한문·국어와 노래 부르기가 들어있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배재학당은 이미 1886년에 창가를 가르쳤던 것이다.
또한 이화학당에서도 “처음 공부를 배울 때 “주기도문”과 “예수사랑하심”의 찬송가를 영어로 배우며 예배를 보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미션계 학교에서는 교과 과정에 음간을 넣어 찬송가를 가르쳤다.
또한 선교사들의 선교활동과 예배 그리고 지방전도 여행을 통해 찬송가는 삼천리강산에 울려 퍼진 것이다.
최초의 잡지 최남선의 『소년』은 1908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의 찬송가 발행부수는 6만이었고 1910년에는 22만 5천부가 더 발행되어 1884년부터 1912년까지 20년간의 발행 부수는 87만 4천 5백부에 달한다 이는 우리사회에 찬송가가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3.2.3 창가에 끼친 영향
찬송가의 보급 시기는 창가형성의 시기와 같이 한다. 한국문학에서 가창을 전제로 한 창가형식에는 기독교의 찬송가가 영향을 미쳤음을 간과할 수 없다. 앞에서도 언급 하였듯이 찬송가는 이전에 우리 전통 시에 보이지 않는 율격이 있다.
찬송가와 한국 근대시의 관련 중 가장 의미 있는 대목은 찬송가가 한국의 전통적 음율인 4.4조가 주는 단조로운 서정을 변혁한 점이이다.
1893년에 동학의 창시자 최수운의 『용담유사』는 전통적인 가사체의 4·4조의 노래이다. 다음은 <교훈가>의 일부이다
유도불도 누천년에 운이역시 다했던가
윤회같이 돌린운수 내가어찌 받았으며
억조창생 많은사람 내가어찌 높았으며
일세상 없는사람 내가어찌 있었던고
아마도 이내일은 잠자다가 얻었든가
꿈꾸다가 얻었는가 측량치 못할네라
그러나 당시의 번역되어 기록상에 자주 보이는 찬송가⎾예수의 피 밖에 없네⏌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내 죄를 씻거
예수의 피밧긔업네
다시 셩케기도
예수의 피밧긔업네
(후렴) 예수 흫닌거
나 희게피
귀도 귀다
예수의 피밧긔업네
-중략 -
이 찬송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이미 전통시가의 4·4 조나 4·3조의 율격이 해체되었음을 보여준다.
가창을 위한 새로운 시 형식이란 애국가류의 분절형식을 말한다. 당시의 새로운 노래가락은 서양음곡을 말하며 특히 찬송가를 가리킨다. 이 애국가류와 찬송가의 분절 형식사이의 유사점이 있다.
< 독립신문>에 가장 먼저 발표 된 <셔율 슌청골 최셩돈의 글>을보면
대조션국건양원년
쥬독닙깃버셰
뎐디간에사되야
진츙보국뎌일이니
님군츙셩고
정부를보호셰
인민들을고
나라긔를놉히달셰
나라도을각으로
사죵여일동심셰
....<이하 생략>.....
언더우드 편 『찬양가』 3장 <놉흔일흠 찬양고>의 내용을 보면
1. 놉은일흠찬양고
너은혜감샤야
우리들의노래소
곡됴로놉혀보셰
2. 아브텨귀랑
져녁지된말
노래로찬숑기가
고일이거실셰
최돈셩의 애국가와 <놉흔일흡 찬양고>를 놓고 볼 때, 두 노래 다 4.4조의 2행이 짝을 이루어 한 구절이 되고 4행이 각각 2행씩 짝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가사와 곡을 알 수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창가는 1896년 7월 25알 고종황제의 탄신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만든 <황제탄신가>이다.
높으신 상주님 자비론 상주님 긍휼히 보소서
이 나라 이땅을 지켜 주옵소고
오 주여, 이 나라 보우하소서
우리의 대군주 예하 만세 만세로다 만만세로다
복되신 오늘날 은혜를 내리사
만수무강케 하여 주소서
상주의 권능으로 우리의 대군주 폐하 등극하셨네
이 나라 이 땅은 영세불멸하겠네
대군주 폐하여 만만세로다
상주님 은혜로 만왕의 왕이여 찬미 받으소서
상주니 경배는 나라와 백성들
국태민안 부귀영화 틀림없이 받겠네
이 창가는 새문안교회 교인들이 황제의 탄신일을 맞이하여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노래이다 교회에서 임님의 생일 축하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생소하다.
이 노래 역시 전통 자수율이 아니 새로운 형태의 율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를 찬송가의 영향이 아닐 수 없다.
다음은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정초식을 거행 할 때 배재학당 학생들이 부른 애국가이다.
셩신숀오년은 우리황실이요
산고슈려동반도 우리본국일셰
(후렴)무궁화쳔리 화려강산
대한사대한으로 길이보젼셰
국렬심의긔 북악치놉고
츙군일편단심 동치깁허
쳔만인도직 나라랑샤
롱공샹귀쳔업시 직분다셰
우리나라우리황뎨 황텬이도으샤
국민공략만만셰에 태평독립셰
이 애국가의 작사는 윤치호이며 곡은 스콜트랜드의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이었다. 이 창가도 『독립신문』에 나타난 애국 독립가처럼 개화시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내용을 살펴보면 황실과 국토의 무궁함을 칭송하고 있다. 4절에 보이는 황텬이라는 단어는 지금의 하느님을 의미한다고 본다 즉 지금의 찬송가 1절에 가사 ‘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의 내용과 일맥 상통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애국가는 이전의 창가에서 보이지 않은 새로운 율격인 8.6조라는 점이다. 이것은 19세기 말 한국 찬송가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형태이다.
윤치호가 역술한『찬미가』 재판 (1908)년에 수록된 애국가를 보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대한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이 역시 8.6조가 주도를 이루며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곡으로 불렀다.
『보중친목회보』제 1호에 실린 김인식 작사.작곡 ,<애국가> 를 보면
華麗江山 東半島 우리 本國이오
稟質됴흔 檀君子孫 우리 國民일세
(후렴) 無窮化三千里 華麗江山
大韓 사 大韓으로 길이 保全하세
愛國 義氣熱誠 白頭山과 같고
忠君 一片丹心 東海 갓치깁다
二天萬人 오직마암 나라랑야
士農工商貴賤업서 職力을 다셰
우리나라우리皇上 皇天이 도으샤
萬國同樂 萬萬歲에 泰平獨立셰
이도 역시 8.6조로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곡으로 불렀다.
즉 위에 나열한 3가지 애국가류의 창가가 모두 8.6조로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곡으로 불렀다.
8.6조의 시형은 우리의 전통 시가의 율격가 아니다. 그러나 8.6조는 영국민요의 율격이며 영국 찬송가에 많이 사용되어진 시형이다. 따라서 선교사들의 찬송가 번역과정에서 이 시형을 그대로 답습 했으며 우리나라의 창가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 분명하다. 이는 지금의 교회에서 찬송가로 불리우는 (천부여 의지 없어서)란 제목의 곡이다.
4. 창가와 개화가사의 내용
개화기를 맞아 개화에 임하는 사상계는 크게 둘로 갈라졌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개화는 자주독립이라고 생각하는 급진파이고, 다른 하나는 전통적 기반위에서 신문화를 수용하되 외세 즉 제국주의의 희생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경계배천 해야 한다는 점진파가 있다. 두 입장은 ,독립신문과, 대한매일신보로 대변되었다. >독립신문의 발표된 창가는 급진파의 입장이였고 대한매일신보의 개화가사는 점진파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4.1 <독립신문>소재의 창가
독립신문에 발표된 창가사사는 27편인데 그 가운데 애국가 또는 독립가라는 제목이 붙은 것은 16편이나 되고 그중 기독교적 사상을 담고 있는 작품은 9개로 보고 있다. 그 중 5개의 내용을 살펴보겠다.
(1) 우리나라흥기를
비이다하님
문명화열닌세샹
말과일과게세 - 서울 슌청골 최셩돈의 글.
(2) 랑고휼셰
우리만민휼셰 - 금강 김교익의 글.
(3) 하님셩심긔도
국평과민안락을
샹하만민동심야
문명례의일워보셰
님군봉축정부랑
헉도병졍슌검랑
젼국인민깁히랑
부강셰계쥬야빌셰 - 달셩회당 예수교인 애국가
(4) 우리나라위랴면
하님기도야
자혜와힘을비러
우리나라돌아보셰 - 배재학당 문경호 자주독립사 중
(5) 텬디만물챵죠후에
오쥬구역텬텽이라 - 최병현 독립가에 내용 중
위의 글 (1) (3) (4)에 보면 모두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
또한 서로 사랑하자라는 내용을 볼 수 있다. 이는 나라를 사랑하고 국민을 사랑하자는 애국 애족의 마음을 담고 있는데 , 이것은 기독교의 중심인 사랑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 들이다 특히나 (5)번의 애국가는 ‘천지만물 창조 후에’ 라는 내용 창세기의 천지창조를 의미한다. 따라서 독립신문의 애국가류는 기독교의 근본 사상에 애국정신을 결부시켰음을 알 수 있다.
4.2 <대한매일신보>의 개화가사
다음은 <대한매일신보>와 <경향신문>에 나타나는 기독교 경향의 개화가사 작품을 살펴보겠다. 그 중 <대한매일신보>의 4편과 <경향신문>의 3편을 살펴보겠다. 이 두 신문에 발표 된 개화가사는 개화사상이나 계몽적인 내용, 또는 그 당시의 세태풍습과 풍자적이고 비판적인 전치문제 , 기타 시사평을 다룬 시대적인 산물이다. 따라서 문학적 형태나 미학적 요소보다는 고발적이고 비판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전문적인 작가가 쓰기 않고 일반 민중들의 시이므로 목적의식을 그대로 노출시켜 쓴 형태이다.
韓國內에 某某奸賊
死從不免 此獄이오
엇던獄門 열야다가
開金聲에 놀니
南柯一夢 怳惚다
어화韓國 罪人들아
改過遷善 량이면
至仁且愛 上帝셔
贖脫罪過 시리니
아무조록 悔改야
뎌地獄을 免보소 - <地獄慘況>에서
<地獄慘況>은 1908년 12월 20일에 기재된 것으로 나라가 매국노에 의해 일제에게 빼앗긴 상황을 탄식하고 있다. 세상에는 마귀 같은 사악한 관리와 척신과 소인배 간적들이 가득한데 죽어서 지옥에 간다는 뜻의 노래이다. 그러므로 죄를 회개하고 개과천선하기를 권면하고 있다. 이는 성경에 두루 나오는 회개에 대한 촉구를 일으킴으로 기독교적 사상을 드러내고 있다.
무삼죄를 더짓고저
화중취선 보랴고
운침부지 깁흔곳에
松下問童 쓸잇나
心頭惡魔 掃除고
利國便民 兩瑞間에
好事業이 計多니
어셔밧비 회개야
將功 贖罪 여보소 - < 勸告舊政府 >에서
<勸告舊政府 >는 1909년 1월 29일에 기재된 것으로 친일파에 대한 권고를 나타내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본의 압자비가 된 자들에게 미제라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고 하루속히 회개하라는 내용이다. 회개한 후 나라를 위해 애국할 것을 충고한 점에서 기독교적 삶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新門內外 도라드니
救世軍營 宏壯다
耶蘇民의 功德으로
上帝셔 보셧나
檀君始祖 靈魄셔
우리同胞 살리고져
冥冥중에 周旋일셰
完全成立 希望이오 - < 希望歌>에서
<希望歌>는 1909년 5월 5일에 발표된 것으로 1908년 설립된 구세군을 두고 읊은 것으로 인류를 위하여 자기희생적인 사람을 베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동포를 위하여 희생하면 구세군이 승리한다는 내용이다.
二千萬同胞中 十餘萬名예수교인
世上救援는 理致앗스니
을사람키 自己몸과치며
自由를랑미 生命이經도다
歐美州名國에 文明人을 볼작시면
同胞와自由爲 生命이 草芥로셰
自己의나라를 예수우에세운후에
自由를保全하고 安樂을 누리거든
大韓國敎人은 그런理致모름으로
天國일世上일을 空然히分間네 - <順天歌>에서
<順天歌>는 1907년 9월 4일 발표된 것으로 가사체인 4.4조의 자수율을 벗어나 있으나 어조는 여전히 구투이다. 한일합방이 가까워져 갈수로 혼미하기만한 정국에 대한 불안함과 난국의 타개를 기독교에 의존하고자함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마지막 행을 보면 한국의 교인들은 현실의 사회와 역사적 시점 앞에 나라의 걱정은 하지 않는다고 꾸짖는 말투를 보이고 있다.
4.3 <경향신문>의 개화가사
1906년 10월19일자로 창간된 <경향신문>은 총 220호로 종간된다 천주교회에서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순 한글로 발간된 것으로 민족자주와 개화운동을 제창하도 있다. 일본의 침략야욕을 경계하면서 근대화운동을 촉진하고 있다.
일슬커던 먹지말고
먹으랴면 일을소
노서 협잡나고
근시 덕이나네
랑온 졔형들아
노지말고 버려보셰
.......<중략>..........
랑업시 부국강병
아니되니 랑셰
랑랑 쥬인
뎨일가 랑일셰
우리서로 랑야
호이지 말지어다 - <탄식가>에서
<탄식가>는 노동의 중요성을 알리는 노래로 성경에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마라라는 구절을 이용한 것으로 당시 유교적 사상이 남아있던 시대( 양반은 노동하지 않는다)에 근대적인 사고였다. 마지막 부분에 나라, 부모, 형제, 동포까지에 사랑을 강조하며 기독교 근본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도다 도다
원조아담 범명이여
무셥도다 쥬의엄벌
만셰만 손지
무궁셰에 찬류셰샹
죽벌을 어이고
댠당문이 닷치이고
디옥문이 크게열녀
범명이후 모든사
가길이 디옥이라
..........<중략>........
실망마라 우리창성
자뎡신 구셰쥬는
선지쟈의 말대로
일병번 오시니라 - 예수셩탄경축가에서
아기예수 탄생을 경축하며 지은 것 인데 아담의 원죄로 시작하며 선지자들의 예언부분과 탄생까지의 긴 구절을 담고 있다. 사천년의 한국 역사 속에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이 있을 것과 예수를 믿을 것을 권고하고 있다.
따라서 찬송가와 기독교사상은 창가의 형식적인면 뿐 만 아니라 개화가사에 담고 있는 사상적 측면에서도 종래의 사상이 아닌 새로운 사고를 가지고 온 것이다. 유교적 가치관에서 기도를 하는 원리는 없었고 사랑 (아가페적인 사랑)을 담고 있는 시어를 새롭게 구사하게 되었던 것도 기독교의 사상적 영향이 아닐 수 없다.
5. 선교사들의 기독 문학
좁은 의미로는 가치있는 체험의 예술적 기록만을 문학이라 하지만, 넓은 으미로는 문자로 기록된 문헌 일체를 문학이라한다. 여기서 말하는 문학은 넓은 의미로서 선교사들이 저술한 한국학 관계의 문헌과 한글로 번역한 책들을 살펴본다.
선교사들의 성서번역과 찬송가의 번안은 이 땅에 인쇄문화에 기술을 근대화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아펜젤러는 1888년 중국에서 선교를 하던 울링거 (F. Ohlinger)를 초빙하여 배재학당에 인쇄소를 설치하였다.
영어로 ‘Trilingual Press' '미이미 활판소’였는데 지금의 삼문출판사이다. 이는 한글, 한문, 영문 등 세 나라 말로 인쇄를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삼문풀판사는 한국최조의 잡지인 『교회지』를 (1889년 5월)와 The Korean Repository (1892년 1월 ,올링거)를 창간 발행하여 한국잡지의 효시를 만들었으며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 『독립신문』을 인쇄하였다.도한 한국 최초의 교회신문이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1897년』)를 발간하여 교회신문의 효시가 되었다.
5.1 한국문화에 대한 책들
그리피스(W. E. Griffis)의 『은둔의 나라 한국』(corea the hermit nation, London 1889, 로스의 『한국의 고대 및 근대 역사』( The History of Corea, ancient and Modern with Discriptions of Mannersand Customs, Language and Geography, London, 1891,), 기포드 (D.L Gifford)의 『 한국에서의 일상생활』( Every-Day Life in Korea, New York.1898), 허버트( H. B. Hulbert)의 『한국사』 (The History of Corea , 2 Vols , Seoul, 1905)와 『한국의 흐름 』, 게일의 『한국민사』 ( The History of Korean People, Seoul, 1927 )등이 있다. 이 책들은 모두 과학적 연구 방법론을 채용하여 쓴 한국사 관계의 연구서들로서 순수문학적 가치는 없지만 한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들이다. 이런 분야의 연구가 전무하던 시대에 선교사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학문적 가치를 논하기 이전에 고마움을 표할 수 밖에 없다
5.2 한국어 연구서에 대한 책들
로스의 『한국어 입문서』를 우선 들 수 있다. 이 책은 외국인이 시도한 최초의 한국어 연구라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로스는 일본어, 몽골어, 중국어 등과 한글을 비교하면서 한국어의 어법과 음가를 연구 했는데 성서번역과 국어 발전에 이바지함이 큰 선교사였다.
제임스 스코트는 『언문 말책』을 써서 외국인들이 실용을 도왔다고 한다. 헐버트는 한국어를 남태평양이나 인도의 여러 말들과 비교하여 연구한 논문들을 『한국유기』와 『한국선교지』에 실었는데 『고유의 한국어』 , 『한국어와 대만의 생번족어』 『한국어와 대만』 등이 있다. 언더우드는『한국어 회화 입문서』를 출간하였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만든 것으로는 『한불사전』 이 있는데 이는 한국어 사전의 효시로 한국어 발달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여기서 잠깐 한국인보다 더 한글과 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선구자 게일을 소개하겠다.
게일(Gale·한국 이름 奇一·1863~1936)은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이었던 선교사다. 1888년 6월, 토론토 대학에서 문학사학위(BA)를 받고 대학을 졸업한 후 곧바로 조선에 오게 되었다. 영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조선어만 배울 수 있는 곳으로 서상윤을 찾아갔다. 그는 현지어를 배우는 일이 선교에 가장 먼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서상윤의 집에서 조선어를 상당히 잘 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머물며 언어와 조선의 관습을 배웠다. 그러면서 철저히 한국음식만을 먹으며 조선을 배워간 것이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는 조선어에 아주 능통한 사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언어학자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특히 1897년, 즉 조선에 온 지 불과 9년 만에 최초의 영어사전인 『한영대자전(Korean-English Dictionary)』을 출간하였고 그 외에도 한국의 많은 고전을 영어로 번역하여 세계에 알리는 일을 하였다.
1917년에는 천로역정』」을 한글로 번역하고, 김만중의 『구운몽』을 영어로 번역, 출판하는 것을 시작으로 1922년까지 단행본 저서가 43권에 이른다.
대표작으로 『춘향전』『심청전』과 『한국어의 변천 (Korean in Transition)』『한국근대사』'등의 역사책도 저술 하였으며 『한양지』 등의 저서도 남겼다. 또 한글에 대한 생각도 남달랐다고 한다. 다음은 그의 보고서의 일부이다.
“그것(한글)은 너무나 쉬웠기 때문에 결코 쓰여지지 않고 멸시만 당했다. 여자들조차도 한글을 한 달쯤이면 배울 수 있으니, 이렇게 쉬운 글자, 이런 보잘 것 없는 글자가 어디 쓸 데가 있는가?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로 그것은 성경과 기독교 문서들을 기다려 왔다. 4백 년 동안이나 잠에 빠져 거의 쓸모없었던 이 놀라울 정도로 쉬운 언어가 이제 깨어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일들을 말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천한 말' 언문이라고 부르니, 그것은 이것이 중국 상형 문자에 견주어 너무나 간단하고 쉽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인생의 천한 것들을 사랑하시며, 그리고 쓸모없는 것을 들어 이미 있는 것을 없애신다.”
게일 선교사는 놀라운 역사적 통찰력을 가지고 한글을 바라보며 한글 운동을 통해 조선 사람들을 계몽하고 일깨울 수 있었다.
존 번연의『 천로 역정』을 이창직의 도움으로 1895년에 한글판을 내게 된 일이다. 이 천로역정은 당시로서는 가장 많이 팔린 책이었으며, 구한말 독립협회 사건으로 한양감옥에 갇혀 있던 이승만, 이상재, 김정식 등이 모두 천로역정을 읽고 감옥에서 예수를 믿었으며 이들이 출옥한 후 한때 연동교회에 출석을 했던 일도 있었다. 그래서 천민만 다니는 교회로만 알던 연동교회는 이들이 출석하면서 교인을 다시한번 쳐다보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기독교는 조선의 근대화와 역사적 어려운 시절에 조선의 새로운 사상과 힘이 되어 한국민의 정신과 마음을 살찌우게 하는 데에 큰 역할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4. 결론
개화기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민족에게 커다란 아픔과 대변혁을 가져 온 시기임에 틀림없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큰 전쟁 이후에 조금씩 움터 온 민중의식과 유교적 전통과 관습 속에 메어 살던 시대에 실학이라는 학문의 유입은 개화기의 전조였으며 1800년대 중반부터 일어나는 주변국을 포함한 서구세력의 압력은 가히 위협적인 형상이 아닐 수 없었다.
국내의 역시 대원군과 명성왕후의 정치적 대립으로 고통 받고 있을 때임을 감안하면 암담하기 그지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사심 없는 마음으로 예수그리스도의 희생과 봉사정신을 이 땅에 섬기는 자로 온 수많은 선교사들의 수고와 땀으로 우리민족은 근대화를 이루어 왔다.
선교사들은 기독교 전파의 사역 이외에도 신학문으로서 의학과, 수학, 과학, 미술, 음악, 그리고 문학 그리고 터부시 해 오던 우리의 글 한글의 위상을 찾게 되었다.
성경번역과 보급은 한글의 대중화를 이끌었으며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의 불일치의 조선 사회를 언문일치의 사회로 이끌어내었고 문맹률을 떨어놓았으며 우리 문학뿐 아니라 대중을 사회적 근대적으로 한 차원 높였다
의료사역으로 많은 인명을 구제하였다. 또한 구제사역으로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우며 양육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데 이는 기독교의 박애 사랑에 기인한 것이다.
신분의 귀천과 남자 여자의 상하구조의 차별성에서 여인들의 사회 참여도를 높인 점도 기독교의 평등사상과 민주주의 사상에서 기인하였음 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개화기 성경의 번역과 찬송가의 번안을 통해 기독교 사상에 영향을 받은 창가와 개화가사 대하여 알아보았다.
개화기 < 독립신문>, < 대한매일신보>, < 경향신문>의 발간과 함께 전문적 작가가 아니어도 자신의 의견을 시가로 나타냄으로 여론의 뜻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또한 시가의 형태론적인 변화가 뚜렷이 일어났는데 4.4조의 주류를 이루던 시가가 8.6조나 8.8조 등의 다양한 율격으로 나타났다, 성서에 나오는 천지창조, 죄와 회개, 천국에 대한 기대, 예수 탄생에 기쁨 주제로 삼는 것을 보며 기독교의 사상적 영향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옛 고전시가에서 느낄 수 있는 감흥이나 예술성의 성격이 아닌 교리적이고 직설적인 어법인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본 연구가 기독교의 전래를 통한 한국 문학 중에 개화기의 시문학을 일부에 대한 것이어서 아쉬움을 가지며 다음에 기회에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과 작가와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직접 쓴 저서들에 대하여 연구해 보고자 한다.
첫댓글 기독교 역사속에 찬송가에 대한것 잘 알게 되었습니다. 좋은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 합니다.
잠시쉬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