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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19:16-30
찬송가 311장 ‘내 너를 위하여’
오늘 본문은 어제에 이어 레위인이 첩과 종을 데리고 기브아의 성읍 광장에 앉아 기다리는 장면부터 전개됩니다. 한 노인이 그들을 집으로 데려가면서, 한결같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사람들로 인해 이스라엘은 비극적인 내전으로 내몰리게 됩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노인의 환대(16-21)
(16-17) 저녁 때에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니 그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 산지 사람으로서 기브아에 거류하는 자요 그 곳 사람들은 베냐민 자손이더라 노인이 눈을 들어 성읍 넓은 거리에 나그네가 있는 것을 본지라 노인이 묻되 그대는 어디로 가며 어디서 왔느냐 하니
첩을 데리고 이동한 레위인은 한동안 기브아 성읍 넓은 거리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 일행을 집으로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이 당시 근동 지역의 관습이고 율법의 가르침이었지만, 기브아 사람들은 그러한 기본적인 하나님의 명령조차 지키지 않았습니다. 특히 성경은 그곳의 거주민들이 베냐민 자손이었음을 밝힘으로써, 앞에서 다룬 단 자손과 더불어 그들이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신명기 10:19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이스라엘은 태생적으로 나그네였습니다. 애굽 땅에서도 나그네였으며, 광야와 가나안 땅에서도 나그네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하지 못한다고 그 땅에 정착하고 나니 자신들의 나그네 되었음을 망각하고 타자를 사랑하기는커녕 오히려 배척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환대의 정신은 아브라함으로부터 나타납니다. 히브리서 13:2은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자신부터 위대한 나그네였던 아브라함은 낯선 나그네들을 정성스럽게 대접함으로써 실제로는 하나님을 대접하게 됩니다. 이러한 환대의 풍습은 유목민의 전통에서 유래된 것으로, 사막이라는 절박한 환경에서는 누구나 길을 잃어 생명이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에 길 잃은 자를 잘 대접하여 미래에 자신에게 닥칠지 모르는 재앙에 대비하는 수단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점차 손님을 환대하는 일을 숭고한 덕목으로 간주하여 극진한 환대를 베푸는 것이 자신의 품격과 위신과 명예를 높인다고 생각했습니다.
환대란 자신의 두려움이 만들어내는 편협한 마음을 깨뜨리고 낯선 사람을 포용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환대가 치유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인이 자기 자리에 확신이 있어야 하고, 자기 집에서 편안함을 느껴야 합니다. 그래야 예상치 못했던 방문자에게 두려움 없이 편히 쉴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환대는 사랑의 최고 경지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낯선 이에게 집을 포함한 우리 전체를 내어 주지만 대가나 어떠한 조건도 내세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절대적 환대를 경험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셔서 받아들여 주시고, 나그네를 넘어 원수인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주신 예수님의 환대야말로 진정한 의미로서의 환대이며, 참된 대접입니다.
그렇게 날이 저물어 가는 중 자신도 나그네인 에브라임 출신 사람이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그들을 보고 말을 겁니다. 노인은 묻습니다. 어디로 가며 어디서 왔는가? 사실 이 질문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질문으로서, 우리 모두가 나그네에 불과함을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로마서 11장 36절은 이러한 인류의 궁극적 질문에 명쾌하게 답합니다. 즉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고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에게 나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며 예수님에게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궁극적인 믿음이 분명해야만 우리는 길을 잃지 않은 나그네로 살아갈 수 있고 다른 나그네를 환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18-19) 그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 구석으로 가나이다 나는 그 곳 사람으로서 유다 베들레헴에 갔다가 이제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인데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는 사람이 없나이다 우리에게는 나귀들에게 먹일 짚과 여물이 있고 나와 당신의 여종과 당신의 종인 우리들과 함께 한 청년에게 먹을 양식과 포도주가 있어 무엇이든지 부족함이 없나이다 하는지라
그러자 그 사람은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 구석으로 간다고 밝힙니다. 그러며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이라고 말합니다. 여행의 진정한 목적을 드러내지 않는 교묘한 위장이었습니다. 게다가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이라고 하여 자신을 신실한 사람으로 포장하는 위선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갈 곳이 없어 초조하게 사람을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큰소리칩니다. 아는 사람도 없고, 머물 곳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 있다고 소리 높이는 모습이 꼭 우리의 모습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약간의 물질과 권력과 건강을 소유하고서 내게 모든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갈 곳도 없고, 머물 곳도 없으며, 당장 어떻게 긴 밤을 보낼지도 모르면서 그저 육체의 목숨 부지할 수 있는 순간의 먹을 것만 있으면 나는 괜찮고, 나는 부족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러합니까? 이러한 자기 소견 때문에 레위인은 결국 자기 아내를 잃고 맙니다.
앞에서 다룬 것처럼 환대하고 환대받는 것은 기독교의 근본정신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하나님께서 원수 된 우리를 하나님의 집으로 반겨주신 것으로 그치지 않고 가족으로 삼아주셨으며, 하나가 되자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그러한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음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그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내게는 아무 자격이 없고, 내놓을 것이 없지만 하나님이 받아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야만 인정하고, 가치를 입증하지 못할 경우에는 쓸모없다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내가 무언가를 내놓기 전에 상대방이 무엇을 줄 수 있는지 면밀하게 살핍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내가 아무리 보잘 것 없어 보이고, 무력하게 여겨져도 그렇게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즉 나 자신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를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경험, 그것이야말로 복음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자신은 어디서든 받아들여질 수 있고, 나는 어디서든 스스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고 외치는 자에게는 예수님의 좋은 소식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20-21) 그 노인이 이르되 그대는 안심하라 그대의 쓸 것은 모두 내가 담당할 것이니 거리에서는 유숙하지 말라 하고 그를 데리고 자기 집에 들어가서 나귀에게 먹이니 그들이 발을 씻고 먹고 마시니라
그 노인은 안심하라고 하며 환대합니다. 그 레위인의 말이 두려움에서 나온 허풍임을 포착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대의 쓸 것을 모두 내가 담당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집으로 데리고 가서 함께 발을 씻고 함께 먹고 마십니다. 우리 각자의 삶이, 그리고 우리 교회가 이러한 개방성과 넉넉함을 품고 있는지 돌아보기 원합니다. 나그네 된 우리의 쓸 것을 모두 담당하시고 먹고 마시게 하신 하나님을 기억하여, 다른 나그네를 먹이고 재우도록 은혜 베풀어 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똑같이 대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네 힘으로 산다고 착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삶으로 증명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도 사랑하시지만, 그와 동시에 내 옆의 저 사람도 사랑하시는 분임을 알고 누구와도 하나님 안에서 형제 자매가 되라는 당부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대의 쓸 것을 모두 내가 담당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잘났든 못났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나이가 많든 적든, 건강하든 병약하든 하나님이 우리를 조건 없이 받아주신 것처럼 우리 역시 모든 상처 받은 이들에게 그대는 안심하라, 그대의 쓸 것은 모두 내가 담당할 것이니 길거리에서 방황하지 말라고 담대하게 선포하고 실천하는 주님의 사람과 공동체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브아 사람들의 만행(22-26)
(22-24)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 집 주인 그 사람이 그들에게로 나와서 이르되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이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하나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하고 있을 때 문제가 닥칩니다.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나타나는데 불량배라는 원래 단어의 뜻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입니다. 즉 살아있을 가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자들이 문을 두들기며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 관계를 해야겠다고 행패를 부립니다. 그런데 이 모습은 굉장히 익숙하게 느껴집니다. 의도적으로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상을 재현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배치는 결국 이스라엘이 소돔과 고모라와 같았던 그 땅을 하나님의 것으로 만드는데 실패하고, 오히려 이스라엘이 그 문화에 잠식되었음을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하게 만든 남색하는 풍습이 이스라엘 안에서도 버젓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 땅에서 별 영향력이 없던 집 주인은 그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을 끌어낼 테니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라고 합니다. 여성들을 마치 물건처럼 취급합니다. 그것도 자신의 딸과 남의 아내를 말입니다.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다른 이의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이 모든 사건은 우선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던 레위인에게서 시작됐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자기 뜻대로 살자 이제 아무 가치 없는 인간들이 육적인 욕망을 따라 눈에 좋은 대로 행하는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지금까지 정상적으로 보였던 노인조차도 자신의 딸과 그 사람의 첩을 끌어내 마음대로 소견대로 행하라고 권고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면 모두가 자유롭고 행복해야 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오히려 모든 가치가 전도되며 정상이 아닌 상태가 된 것입니다. 노인은 이 사람에게는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사실 본문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이 다들 망령된 일을 하고 있습니다.
(25-26)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 그들이 그 여자와 관계하였고 밤새도록 그 여자를 능욕하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동틀 때에 여인이 자기의 주인이 있는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 엎드러져 있더라
그럼에도 그들이 말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위협하자, 레위인이 직접 자기 첩을 붙잡아 끌어냅니다. 그날 아침만 해도 사랑의 회복을 이야기하며 장인에게 잘살아보겠다고 다짐했던 그가 위험에 처하자 가차 없이 자기 여자를 끌어내 불량배들에게 넘기는 모습이 너무나 비정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상하게도 그 레위인을 요구하지 않고 밤새도록 그 여자를 능욕하고 겁탈합니다. 윤간을 한 것인데 동틀 때에 여인은 자기의 주인이 있는 그 집에 이르러 엎드러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 여인과 레위인의 관계는 종과 주인의 관계로 대체됩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건이 발생한다면 대서특필 될만한 참혹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가나안을 거룩하게 만들겠다고 입성한 이스라엘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레위인의 대응(27-30)
(27-30) 그의 주인이 일찍이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고자 하더니 그 여인이 집 문에 엎드러져 있고 그의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하나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 이에 그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행하여 자기 곳에 돌아가서 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가지고 자기 첩의 시체를 거두어 그 마디를 찍어 열두 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 그것을 보는 자가 다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 이 일을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 하니라
이제 남편이 아닌 주인인 레위인은 일찍 일어나 집 문을 열고 거기를 떠나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 여인이 문에 엎드러져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두 손이 문지방에 있다는 말은 그 여인이 생명을 살려 달라고 기어와 울부짖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 집 안에 있는 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주 잘 자고 일어난 것 같이 보입니다. 더 나아가 레위인은 그 여인에게 일어나라고 명합니다. 정말로 참혹한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짐을 싣듯이 나귀에 시체를 옮겨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는 끔찍하게도 사체를 12등분하여 이스라엘 사방에 보내 그 처리 방법을 논하고자 합니다.
사사기를 규정하는 말씀인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구절은 양가 감정을 일으킵니다. 우선 하나님을 왕으로 삼지 않은 그들의 마음을 울립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런 죄악과 배역 속에서 뼈 아픈 대가를 치루면서 이스라엘은 부족 중심 시대를 끝내고 왕정 시대로 나아가려는 서막을 올리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보면 국가에 대한 정의가 나옵니다. 그에 따르면 국가란, 폭력·강권력을 독점으로 행사하는 정치 결사체입니다. 물론 그것이 통상적이거나 국가가 의존하는 유일한 수단은 아니지만, 폭력·강권력은 국가를 국가이게 하는 유일한 원천으로 보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국가는 폭력을 독점으로 행사하는 정치 결사체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러한 폭력을 규제하는 결사체가 없을 때 일어나는 무질서를 규탄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애굽의 포악한 전제정치에서 고난받았던 이스라엘이 이제는 무정부주의와 같은 사사기 시대를 거쳐 왕정으로 나아가면서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하나님은 왕정이든 부족 연맹체든 어떤 정치체제를 갖더라도 내가 너희의 영원한 구원자이며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사실을 그들의 실패를 통하여 인지시키십니다. 하지만 결국은 인간 지도자를 의지함이 아니라, 왕이신 하나님을 모시고, 그 하나님을 경배하며 순종하는 방법만이 이스라엘로 이스라엘 되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것이 왕이 없어 방황하는 가나안의 이스라엘 뿐 아니라 현대를 사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사사기의 교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합니까?
사람이 태어나서 절대 피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세금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입니다. 저는 세금을 얼마 내겠다고 누구와 합의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또 군대에 가서 복무하겠다고 이야기한 적도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태어나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네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런 저런 혜택을 받았고, 앞으로도 그런 혜택을 누릴 테니까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규정을 받았을 뿐입니다. 소위 국민의 4대 의무로서 납세, 국방의 의무를 진 것입니다. 국가는 어떻게든 그 구성원의 삶을 규제하고 통제합니다. 그래서 모세와 사무엘이 각각 신명기와 사무엘서에서 그 폐해를 나열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정치, 어떤 왕, 어떤 국가, 어떤 지도자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고 있는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정치 체제도 하나님의 왕국과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민주주의조차도 우리의 우상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주인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와 같지 않습니다. 기독교와 교회는 항상 대안을 제시하고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공동체이지 어떠한 정치 체제를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주창하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그 자리에서 그 책임을 다하며 나그네로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주인 되어 우리 소견대로 행한다면 큰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의 신실한 통로로 살아내기를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모습은 너무나 연약하고 무참합니다. 환대하지 못하며, 자기 소견대로 살아갈 때 남을 억압하지 못하고는 베기지 못합니다. 불쌍히 여겨주시고, 우리의 소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우리가 환대하지 못하고 적대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묵상해 보십시오.
2. 우리를 조건없이 받아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해 보십시오.
3. 우리를 하나님 대신 구원해 주리라 믿었던 사람과 체제와 국가는 없었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작성: 이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