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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아, 내 동포
<1884년 6월 변복령(變服令)>
가정서사에서는 성재 선생을 위주로 위정척사를 의병정신으로 이어가는 작업을 한창 하고 있었다. 인석도 글공부와 산 공부를 함께 하며 심신을 연마하고 있었다. 때가 가까워짐을 직감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공부를 게을리 할 수 없었다.
그날은 이른 더위가 와서 6월인데도 날씨가 푹푹 쪘다. 대청 문을 모두 올리니 그나마 통 바람이 불어서 가정서사는 시원 하였다. 강학이 끝나고 쉬고 있는 시간이었다. 들판에 파랗게 자라는 곡식들이 참 예뻤다. 막 모내기를 끝낸 터라 논에는 벼가 꼿꼿이 하늘을 향해 자라고 있었다. 다행히 지난 해 풍년이 들어 올해는 보릿고개를 겪지 않아도 되었다. 날씨는 더워도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하얀 조선옷을 펄럭이며 쟁기를 지고 밭으로 향하는 사람, 감자를 캐서 지게 소쿠리에 지고 집으로 향하는 사람, 물고기를 잡으러 강으로 가는 사람들이 너른 가정리 들판에서 모두 보였다. 하얀 조선옷 탓에 금방 그들이 눈에 띄었다.
성재 선생은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흡족해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왕동 집에 갔던 인석이 급히 가정서사로 왔다.
“선생님, 조정에서 조선옷을 바꾸라는 명령이 있었답니다.”
“그게 뭔 말이야?”
인석은 가정서사에 있는 성재 선생에게 변복령(變服令)에 대한 사실을 고했다.
“조정에서 조선옷의 넓은 소매를 좁은 소매로 바꾸고 흰옷을 검은 옷으로 바꾸라고 하였답니다. 지난달에 반포를 했답니다. 많은 대신들이 반대를 한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허허, 통탄할지고. 이는 우리의 옛 제도를 바꾸어서 오랑캐를 따르는 제도이다. 옛날에는 옷깃을 오른쪽과 왼쪽으로 구분해서 우리의 미풍양속과 오랑캐의 풍속을 구분 지었다. 지금 오랑캐는 복장에 일정함이 없고 좁은 소매가 무엇보다 두드러지니, 소매의 좁고 넓음으로 오랑캐와 우리 조선옷의 차이를 드러낸다. 옷소매로 조선의 아름다운 풍속이 분명하게 구분되어 밝게 드러나며, 명분과 의리에도 합당하여 죽음으로 지켜내고자 한다. 뜻대로 의복을 입는다는 내외의 주장으로 조선옷의 멋을 어지럽힐 수 없다. 조선옷은 조선의 정신이니라.”
성재 선생은 조정에서 반포한 변복령에 몹시 흥분했다. 조선옷을 왜복과 양복으로 바꾸는 행위는 우리의 미풍양속 뿐 아니라, 법과 의식을 바꾸려는 의도로 보았다. 그래서 성재 선생은 장편의 서고문(誓告文)을 지었다. 서고문은 임금이 종묘사직에 나라의 큰 변고를 고하며 지은 글인데, 성재 선생은 변복령이 나라의 큰 변고라 생각하고 조선의 조상들께 고하는 격식을 따랐다. 그리고 이 서고문의 뜻에 따라 선비들이 행해야 함을 말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부지런히 권하고 사방의 인사들에게도 조선옷을 지켜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였다.
변복령 사건은 왜국과 서양의 편에서 입신양명을 꿈꾸는 자들의 소행이었다. 변복령은 1894년 1895년 세 번에 걸쳐서 진행하였다. 이 중 1884년에 조정에서 행한 변복령이 사실상 직접적으로 조선인의 의식을 바꾼 실마리가 되었다.
<제천에서 화서학파의 종장이 되다>
“가정리가 강을 건너 가평과 가까우나 사람의 왕래가 적어 좋아했는데, 이제는 아니네. 서울과 거리도 가깝고 오랑캐들이 자주 찾아드니 몹시 불편하구먼.”
“선생님, 세월이 많이 바뀌고 있습니다. 하늘의 기운이 동양에 중심을 두지 않고 서양에 있습니다. 어찌 하겠습니까?”
변복령 사건이 있고 나서 점점 나라는 개화파 위주로 정권이 바뀌고 왜국과 서양의 세력이 들어와서 우리의 미풍양속을 해치고 있었다. 성재 선생과 인석은 나라를 걱정하며, 그렇게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중에 갑자기 인석의 후사 문제로 이야기가 옮겨갔다.
“그나저나, 인석의 후사가 걱정이네. 자네하고는 삼종제가 되니, 내 손자를 아들로 삼으면 어떻겠는가? 참판공께서도 일찍이 내게 말씀을 주셨네.”
“할아버지께서 남기신 말씀이라고요?”
“그렇다네. 후사 없음을 걱정하시면서 내게 말씀을 하셨다네.”
“선생님과 할아버지께서 뜻이 그러시다면 좋습니다. 어찌 되었든 종제 의석(毅錫)에게도 의견을 구해야 할 터인데요.”
워낙 인석과 의석은 친분이 두터운 터라 잘 알고 있는 사이였다. 함께 강학도 하고 대소사를 의논도 하고 더군다나 삼종제이기 때문에 먼 친척이 아니었다. 그래도 인석은 당사자의 생각이 중요함으로 의석의 의견이 중요하다고 했다.
“의석아, 내 먼저 얘기했듯이, 손자 제함(濟咸)으로 인석의 양아들로 보내고자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버지께서 미리 언지를 주셨기 때문에 안 사람하고도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인석 형이면 우리 제함이를 잘 키워 줄 거라 믿습니다. 아버지 뜻에 따르겠습니다.”
의석은 아버지 성재 선생의 뜻에 순순히 따랐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의석 동생 고맙네. 내 최선을 다해 훌륭하게 키우도록 하겠네.”
인석은 성재 선생의 손자이며 삼종제 의석의 아들인 류제함을 양자로 맞아들였다. 인석이 14살 때 가정리에서 양근으로 양자로 떠났던 생각이 났다. 아마 제함도 그때 인석의 생각과 같을 것이다. 함께 했던 정든 가족을 두고 새로운 곳으로 간다는 게 무척 힘든 일이라는 사실을 인석은 알고 있었다. 잘 길러 훌륭한 아들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뿐이었다. 인석의 나이 46세에 양자를 들여 새로운 가족을 구성한 것이다. 그해가 1887년 겨울이었으니 나라가 한창 요동치던 시절이었다.
인석은 아들 제함이 들어오자, 집안에 활기가 넘쳐나고 아내에게도 힘이 되어 좋았다. 게다가 후사 걱정을 하며 아내가 주선하여 받아들인 셋째 부인도 함께 즐거워했다. 집안에 기운이 도니 가장인 인석은 더욱 힘이 났다. 그 때문일까, 인석은 나이 50에 쉰둥이를 보았다. 셋째 부인이 아들을 출산했다. 돌림자를 따서 제춘(濟春)이라 이름을 지었다. 제함이 동생을 원했다며 제춘이 태어나자 가족은 더욱 활력이 넘쳤다. 가족의 대소사에 의지할 형제가 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인석은 가족의 경사에 즐거워하면서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나라와 세계정세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었다. 인석은 나름대로 마음을 가다듬고 위기에 닥친 나라를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하는 지를 고민했다. 그래서 우암 송시열 선생을 모신 청주의 화양동 만동묘도 다시 찾았다. 만동묘를 정비했다는 소식을 듣고 꼭 한 번 찾아보려던 참이었다. 예전에 찾았을 때와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역시 그때처럼 우암 선생에게 모든 백성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원했다.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에 열중하던 1989년 여름이었다. 성재 선생이 인석을 불렀다.
“예전에 내 언뜻 얘기했네만. 여기 가정리는 이제 살기가 힘들어졌어. 보기 싫은 오랑캐들이 너무 많이 찾아드네.”
“선생님, 어디 거처를 옮기고 싶습니까?”
“호서(湖西)지방에 혹시 조용하게 살만한 곳이 있는지 알아봐 주게?”
“그러겠습니다.”
인석은 성재 선생의 부탁을 받고 충청도로 여행을 떠났다. 발길이 처음 닿은 곳은 충청북도였다. 충청북도는 우암 선생의 만동묘를 찾을 때 이미 여러 차례 왔던 곳이라 익히 아는 지역이었다. 인석은 땀을 뻘뻘 흘리며 충청북도 제천지역을 답사하고 있었다. 날씨가 한창 더운 여름이라 시원한 시내가 보고 싶었다. 그때 인석의 눈에 제천천이 확 띄었다. 아울러 마음이 아늑하게 느껴지며 머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강과 들이 적당히 어우러지고 멀지 않은 곳에 산이 있으니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이었다. 게다가 서울과 거리가 멀어 조용히 살 수 있어 더 좋았다. 인석은 살 곳을 정했다. 춘천 가정리로 와서 성재 선생을 뵈었다.
“선생님, 제가 호서지역을 다니다 보니, 제천시 봉양 공전리의 장담(長潭)이라는 지역이 살기에 좋았습니다.”
“고생했네. 그러면 그리로 가세.”
인석은 성재 선생의 부탁을 받고 제천 장담으로 이사 준비를 하였다. 1906년 설립한 자양영당(紫陽影堂)이 있는 곳이다. 먼저 살집을 엮었다. 성재 선생이 1889년 8월에 장담으로 옮겨 장담서사(長潭書社)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자, 인근에서 성재 선생의 명성을 듣고 많은 유학자들이 모였다.
인석은 성재 선생이 제천으로 이사를 간 후 선생께서 운영하던 가정서사를 맡아서 돌봤다. 1895년에 장담의 구학산 아래 구탄으로 가기 전까지 가정에 있었다.
성재 선생이 1893년에 세상을 뜬 후 인석은 화서학파의 종장이 되어 후학을 이끌었다.
<성재 선생이 돌아가다>
중암 선생이 돌아가신 지도 어언 일 년여가 지났다. 인석이 52세이던 1893년 3월이었다. 봄볕이 유난히 따사롭고 바람도 없었다. 따뜻한 봄날 장담의 들에는 농사 준비에 농부들이 바빴다. 밭에는 봄꽃이 피어나고 제비가 한둘 날아 들녘을 누볐다. 평화롭고 고요한 장담의 봄은 따사롭고 활기차게 오고 있었다.
인석은 성재 선생에 대한 예감이 달랐다. 새벽에 부처바위에 올라 산 공부를 하는데 성재 선생이 환영으로 보였다. 많이 위독해 보였고, 인석을 찾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히 성재 선생님이 다른 모습이었어.”
인석은 환영 속에서 성재 선생이 평소와는 다름을 보았다. 제천 장담 앞에 있는 제천천 가에 멀뚱하게 서 있었다. 그러더니 제천천의 넓은 강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건너고 있었다. 아무도 성재 선생을 잡거나 말리지도 않았다. 도포 자락을 물바람에 휘날리며 물 위를 걸어 건너고 있었다. 마치 신선이 강 위를 걸어 건너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얼굴은 미소를 가득 띠고 있었다. 인석이 무어라고 말을 해도 들리지 않는 듯 했다. 강 건너 보이는 마을이 있는데 오색구름이 마을을 뒤덮었다. 마을과 장담까지는 아름다운 무지개가 강을 거슬러 수를 놓았다. 참 희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께서 마지막 가시는 길을 보여 주셨구먼.”
인석은 급히 제천으로 향해갔다. 성재 선생의 임종을 보려는 제천여행이었다. 4년 전 춘천에 오랑캐가 많이 와서 살기 어려우니, 호서로 살 곳을 찾아보라는 때가 생각났다. 참 정정하셔서 이렇게 빨리 가실 줄 몰랐다. 제천에 가셔서도 열흘에 한 번씩 강학을 할 정도로 건강하였다.
“선생님, 저 인석이 왔습니다. 그동안 강령 하셨습니까?”
“어서 오시게. 기다렸네. 내일이 화서 선생님의 기일이 아닌가. 내 자네와 함께 인사를 드리고 싶었네.”
“예, 선생님. 그러시지요.”
성재 선생의 안색과 몸 상태가 아주 안 좋아 보였다. 창백한 얼굴색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중심을 잘 잡지 못했다. 그런데도 한사코 부축을 마다했다. 혼자 꼿꼿이 걸어가려고 애쓰고 있었다.
화서 선생의 기일 아침이었다. 인석이 성재 선생의 처소에 와보니, 벌써 일어나 장담서사로 가시려고 했다. 장담서사에서는 성재 선생이 열흘마다 강학을 열고 매년 3월과 9월 말에 향음주례를 열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 때문에 성재 선생에게 배움을 청하고자 제천을 비롯한 청풍과 단양과 충주 일대의 선비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장담서사의 한 벽면에는 주희와 송시열과 이항로 등의 초상을 모셔놓았다.
“선생님, 벌써 기침 하셨어요?”
“그래, 어서 가세.”
성재 선생과 인석을 비롯해서, 제천의 선비 주용규와 서상렬 등도 같이 있었다. 성재 선생은 화서 선생의 초상 앞에 서서 곡을 하였다.
“선생님, 오늘이 선생님의 기일입니다. 늘 선생님께서 생전에 주신 가르침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영원히 선생님의 말씀이 이어지도록 후학(後學)들에게 힘을 주십시오. 여기 류인석을 비롯해서 많은 제자들이 와 있습니다. 이들이 모두 훌륭한 선비가 되어 나라의 동량으로 자라게 해 주십시오. 아마 저는 이제 얼마 이생에 있지 못하고 선생님을 따라가야겠습니다. 곧 가서 선생님을 뵙겠습니다.”
성재 선생은 화서 선생의 초상 앞에서 자신의 앞길을 아는 양 그렇게 말을 했다.
“인석인 나에게 가까이 와라.”
“예, 선생님.”
성재 선생은 장담서사에서 화서의 초상 앞에서 곡을 한 후 인석을 가까이 오라고 불러 앉혔다. 그리고 여러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인석에게 일렀다.
“이제 내가 얼마 안 있어 세상을 하직할 것이다. 서러워하지는 말아라. 누구나 태어나면 죽어 무덤으로 가는 게 당연하다. 내가 떠나면 인석이 우리의 학통을 이어다오?”
“선생님, 아직 정정하신데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니다. 내 몸은 내가 안다. 감이 있어.”
“선생님,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내가 인석을 부른 것은 할 말이 있어서네. 심설(心說) 때문이야.”
“심설이라면?”
인석은 성재 선생이 돌아가실 것을 이미 환영으로 봤기 때문에 담담하게 성재 선생의 말을 받았다. 성재 선생은 조금 숨을 돌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천지가 만물을 낳고, 성인(聖人)이 그 만물의 일에 응대하는 것은 바른 진리이다. 내가 돌아가신 선생님의 심설에 허망하게도 의심되는 바가 있어 구구하게 보충을 하였네. 그것은 바른 진리를 그르치지 않으려는 뜻에서였어. 그 가운데 심설정안(心說正案)의 문자(文字)는 중암의 가르침을 따랐네. 그런데 요즘 다시 생각해보니, 체면과 도리에 옳지 않은 행동이었네. 이제 그 글을 돌려받는 게 좋겠어.”
“예, 제가 중암 선생의 사당에 가서 심설정안을 돌려받아 오겠습니다.”
성재 선생은 고개를 끄덕이고 조금 있다가 화서 선생의 초상에 고하는 글을 불렀다. 제자들이 옆에서 성재 선생이 부르는 말을 받아 적었다. 다 끝나자, 화서 선생의 초상에 그 글을 다시 읽어 고하라고 일렀다.
“선생님, 외람되게. 제가 선생님의 심설에 구구하게 토를 달았습니다. 이제 생각하니, 이는 저의 허망한 행동이었습니다. 이제 모든 심설에 관한 제 생각은 원래대로 돌려놓으려 합니다. 받아주십시오.”
화서 선생의 초상에 고하는 글을 낭독하는 게 끝나자, 성재 선생은 다시 인석에게 일렀다.
“이 뜻을 중암의 영전에 가서 고해주게. 중암이 이 세상에 없지만 듣고 이해하실 게야.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모든 사우와 여기 없는 사우들에게도 심설을 돌려놓는 까닭을 자세하게 알려주게?”
“선생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성재 선생은 심설 때문에 왈가왈부 논란이 되는 게 부담이 되었다. 처음에 자신이 생각했던 뜻과는 다르게 오해를 하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튿날 아침이 밝았다. 성재 선생이 몸이 편찮다는 사실을 아는 제자들이 사방에서 찾아들었다. 성재 선생의 처소에는 아침부터 장사진을 쳤다. 성재 선생의 임종이 가까워졌음을 안 자제와 제자들이 임종을 준비하고 있었다.
인석은 천기를 보았다. 아침 해가 밝게 떴다가 갑자기 짙은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선생님께서 마지막 가시는 길이 보였다.
“이제 선생님이 가시는구나.”
인석은 얼른 성재 선생의 처소로 들어갔다. 성재 선생은 편안한 얼굴로 누워 계셨다. 그리고 조금 후 자제와 인석을 찾았다.
“얘들아, 사랑한다. 여보게, 나라에 사랑을 ….”
마지막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성재 선생은 눈을 감으셨다. 잡았던 손에 힘이 풀렸다. 눈을 감으신 모습이 아주 평안해 보였다.
인석은 성재 선생이 돌아가시자 심상 3년을 하였다. 인석과 사우들은 성재 선생의 유집을 모아 간행을 하였다.
<나라의 형세를 돌이키기 어려워지다>
인석은 성재 선생을 저 세상으로 보내고 많이 힘들었다. 성재 선생을 모시면서 모든 어려움을 의지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홀로 헤쳐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사우들과 의논이야 하겠지만 중요한 결정은 자신의 몫이었다.
갑오년(1894)이 되자, 나라는 참 빨리도 변해갔다. 김옥균(金玉均)과 박영효(朴泳孝)와 김홍집(金弘集) 등이 왜인들과 같이 정권을 좌지우지하면서 모든 게 왜국 일색으로 변해갔다. 적들과 임금을 협박하고, 나라의 연도를 왜국 연도로 고치고, 복색을 바꾸고, 관제를 변경하며, 고을의 이름을 통폐합하면서, 원래 사용하던 조종(祖宗)의 법도를 일제히 빗자루로 쓰러내 듯이 제거하였다.
인석은 만나는 사람에게는 말로 나라의 위급을 전하고, 멀리 있는 사람에게는 편지로 여러 사우들에게 알렸다.
“나라의 변고에 통곡하고 통곡합니다. 앞뒤로 개인의 이익만 취하는 못된 무리들이 임금을 속이고 있습니다. 이는 문호를 개방할 당시에 이미 그럴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미풍양속의 예악을 버리고 인류를 금수로 만들고 백성을 어육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인석은 그동안의 일을 구구절절 주변 사람에게 알렸다. 화서 선생과 성재 선생과 중암 선생을 중심으로 나라의 변고에 적극 나서서 바로 잡을 것을 행했던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참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음도 알렸다.
“누차 얘기하지만, 서양의 문물과 왜국의 문물을 받아들여도 우리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강압에 의하거나 무력의 횡포에 의해서 나라를 개화해서는 곤란합니다.”
인석은 만나는 사람마다 열변을 토하며 국가의 위기를 막을 방도를 말하고 다녔다.
“선생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우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어찌 해야 합니까?”
인석의 사우들과 제자들은 인석과 뜻을 같이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대항할만한 조직화된 사람과 경제적인 물자가 너무나 부족했다.
게다가 왜국과 양국의 힘을 업고 칼과 행정으로 백성에게 휘두르는 개화당의 횡포를 막을 수는 없었다. 개화당 사람들은 자신의 공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동방에 나라가 있은 이후 우리가 자주적으로 청국과 조약을 맺은 일은 역사가 생긴 이래 큰 경사입니다. 병자호란 때 인조 임금이 남한산성에서 항복한 치욕을 씻은 것이지요. 이보다 나라에 더 큰 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개화당은 왜국의 힘을 빌려 자신들의 힘을 키워갔다. 그러면서 중국과 대등한 차원에서 나라가 바로 섰다고 자랑을 하였다.
인석은 점점 더 나라가 이상한 쪽으로 기울어짐을 직감할 수 있었다. 개화당이 왜국의 힘을 빌면, 언젠가는 왜국의 놀음에 놀아난다는 사실이었다. 왜국의 도움을 받았으니, 왜국이 무엇인들 요구를 하면 뿌리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 큰 일이 났습니다. 그 일의 처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요. 저는 지금 개화당이 조정에서 하는 일은 큰 경사가 아니라 큰 불행이라고 봅니다. 그들이 큰 공적을 세운 것이 아니라 큰 죄를 얻은 것입니다.”
“선생님, 어떻게 큰 죄를 얻은 것이라 봅니까?”
인석과 함께 있던 사우들과 제자들은 공과 죄에 대한 견해가 궁금했다.
“모름지기 스스로 힘을 가지고 임해야 합니다. 옛날 효종(孝宗) 임금님과 우암 선생의 대의(大義)를 아실 겁니다. 북벌을 주창했던 일은 자주적인 힘을 갖자는 뜻이지요. 우리가 힘을 키워 자주적으로 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놈들이 지금 하는 일이 어찌 우리를 위해 하는 일입니까? 반드시 저들의 계책을 위해 하는 일입니다. 간계(奸計)일 뿐입니다.”
인석은 사우들과 제자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계속해서 말했다. 사우와 제자들은 모두 공감을 하고 있었다.
“저 개화당이 왜놈을 높이고 추한 짓을 하면서, 옛날 남한산성에서 항복한 수치를 씻었다고 합니다. 어찌 가소롭지 않습니까? 만약 저들이 남한산성의 항복이 매우 부끄러운 일임을 안다면, 오늘 왜놈을 위해 모의하는 일이 어찌 큰 공이 되겠습니까? 이는 예의의 나라인 우리의 미풍양속을 더럽힐 뿐이니, 이것이 큰 죄입니다. 저들은 이번 일을 기회로 한 걸음 두 걸음 계속 나아갈 겁니다. 자꾸 죄를 만드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필연코 임금과 나라를 파는 일도 할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제부터 어지러운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테니까요. 우리들은 편안히 앉아 글만 읽을 처지가 아니지요.”
“선생님,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사람을 모으고 힘을 길러야 합니다. 이 일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일단 주변 사람들을 만나면 나라가 위기에 처했다는 사정을 말해야 합니다.”
인석과 사우들은 너나없이 나라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문제는 온 백성들이 나라가 위기에 처했음을 인식하는 일이었다.
“선생님, 드디어 변복령이 강화되었습니다. 조정에서 조선옷을 버리고 흑복(黑服)인 검은 옷을 입는 답니다. 곧, 백성들에게도 명령이 내려지겠지요.”
1895년 1월이었다. 강촌에 있던 이소응이 가정리에 있는 인석을 찾아왔다. 이소응은 을미 변복령이 내려진 사실을 인석에게 알렸다.
“아! 애통하다. 4천년 예악이 이제 끊어지는구려. 선비가 지켜야 할 일은 선왕의 법도를 지키는 것이지요. 사람은 죽지 않는 이가 없는데,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영예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오늘의 일은 죽음이 있을 뿐이구려.”
“어찌 죽음을 말씀하십니까?”
“이제 나라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죽어야 다시 태어나지요. 이제 우리의 힘을 빨리 뭉쳐야겠습니다.”
“예, 그런 뜻이었군요. 저도 죽을힘을 다해서 나라의 미풍양속을 되찾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인석과 이소응은 하루 종일 환담을 나누며, 나라의 위기에 대처할 방도를 생각했다.
“내 이번에 제천으로 이사를 갈까 합니다. 제천 장담에 가서 성재 선생님께서 하시던 일을 맡아 후학을 양성하고, 나라의 위기에 대처하는데 젊은이들도 모아야 할 겁니다.”
“예, 알겠습니다. 저도 춘천에서 할 일을 찾아보지요.”
인석은 1895년 5월에 제천 장담으로 이사를 했다. 제천에 간 인석은 제천 인근의 네 개 군(제천, 단양, 청풍, 영춘)의 사우들을 급히 모았다. 춘추(春秋)를 강론하고, 향음례(鄕飮禮)를 행할 참이었다.
“주입암(朱立菴)과 서경은(徐敬殷)이 네 군의 사우들을 모이도록 해라. 향음례를 행한다고 하게.”
“그러겠습니다. 선생님.”
주입암과 서경은은 각자 구역을 나누어서 사우들에게 연락을 취해 의암 선생이 향음례를 행한다고 알렸다. 의암(毅菴)은 인석의 호이다. 인석은 자신의 호를 이봉(尼峰)으로 쓰다가 의암이라 하였다.
비가 몹시 내렸다. 장담 주변에는 온통 빗소리가 요란했다. 장마로 접어들자 더욱 비가 자주 내리기는 했으나 그날은 유난했다. 비가 내리는 데도 불구하고 인근에서 의암의 강론을 듣고 향음례에 참석하기 위해서 160여 명의 선비가 모였다. 장담서사에는 사람들로 가득 차서 더 이상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모름지기, 성현(공자)께서는 춘추를 저술하여 난신적자(亂臣賊子)를 바로 잡고자 하였습니다.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 신하와 부모의 뜻을 거스르는 자식은 세상의 공동체를 혼란에 빠뜨리게 합니다.”
의암은 공자께서 춘추를 저술한 의도부터 시작해서 세부적인 사항까지 이어가며 강론을 하였다. 장담서사에 모인 160여 명의 선비들은 의암의 강론에 모두 집중해 있었다. 그 많은 선비들이 강당에 가득 찰 정도인데도 숨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았다.
“언제나 나라가 주권을 잃으면 난신적자들이 들끓어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서 날뛰게 되어있습니다. 지금 김홍집 등 여러 역적들이 왜국을 등에 업고 백성 두려운 줄 모르고 나라의 정사를 제 맘대로 좌지우지 하고 있습니다. 임금의 뜻과는 무관한 일입니다.”
의암은 드디어 나라의 정세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장담서사에는 더욱 적막이 흘렀다. 오로지 의암의 강론만 이어질 뿐이었다.
“의관을 갖춰 입은 선비의 모임이 이로부터 영원히 끊어질 것 같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미풍양속은 한 번 끊기면 회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천에는 제천의 수령 김익진(金益軫)이 박영효를 등에 업고 변복시행에 대해 더욱 극성을 부리고 있었다. 의암이 제천의 현장에 와보니 가관이 아니었다. 원래 김익진은 왜군의 통역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제천 수령으로 온 후에 박영효와 김홍집 등의 명령에 따라 행동대장처럼 왜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었다. 특히 선비들이 유독 조선옷을 즐겨 입고 있는 장담에서 더욱 혹독하게 굴었다.
의암이 장담에 와서 제일 눈에 거슬린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김익진이 앞장서서 조선옷을 버리고 흑복으로 갈아입으라고 억압을 하면서 다니는 현장이었다. 그 때문에 의암은 본격적으로 춘추를 빌어 강론을 하면서 나라의 위기에 대해서 말을 덧붙였다.
강론을 하는 중에도 일찍 온 장맛비는 멈출 줄 몰랐다. 다행히 비가 온 탓에 김익진의 감시가 덜해 다행이었다. 의암이 생각하기에 비를 맞으며 음식을 나눠 향음례를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이튿날 장담서사에 온 선비들과 향음례를 하였다. 이때는 이미 의암이 말을 하지 않아도 정세를 알고 있는 터였다. 때를 기다려 백성들을 위해서 나라를 구할 길을 모색하고 다짐을 했다.
<왕후 시해 사건>
청일전쟁에서 왜국이 이기자 그 기세는 더욱 등등하였다. 그야말로 안하무인이었다. 조정에서는 김홍집과 유길준 등이 정권을 잡고 왜국의 앞잡이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전하, 아무래도 왜국의 제도를 따라 옷을 바꿈은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 고유의 예복을 도로 입음이 좋겠습니다.”
“왕후도 그렇게 생각하오. 짐도 많이 불편했소이다.”
“그럼 전하께서 예복의 복구를 명하십시오.”
“저들이 가만히 있을까 염려되오이다.”
고종과 왕후는 일본이 변복령을 내려 조정의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강압적으로 조선옷을 바꾸어 새로운 복장을 입으라고 하는 일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왕후의 부탁이전에 임금도 항상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이보게 총리대신.”
“예, 전하.”
“난 자네를 믿고 싶네.”
“전하,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왜국과 러시아와 청국 등이 우리 대한제국에서 다툼이 심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 터이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 풍속은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먼 훗날 우리 후손들에게 우리는 주체적인 나라였음을 보여주어야지 않는가. 내 비록 힘이 없어 혼자 할 수 없네만, 여러 신하들이 도와만 준다면 가능할 걸세.”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전하.”
“먼저, 조선옷을 돌려주게. 옷은 상징이네. 여러 나라 사람이 함께 있어도 누가누군지 알 수 있잖은가?”
“전하, 왕후마마의 뜻이옵니까?”
김홍집은 임금의 얘기를 들으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김홍집은 나름대로 조선의 총리대신이란 자부심은 있었다. 그러나 왜국의 입장에서 개혁을 하려 한 김홍집은 전하와 왕후께서 조선옷을 원래대로 돌려야 한다는 말에는 수긍을 할 수 없었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개혁의 표상이기에 더욱 그랬다.
“여보시오. 오늘 우리가 여기 이렇게 모인 까닭은 다들 아실 게요. 우리가 추구하는 개혁을 빨리 이루고자 함이오.”
그 자리에는 김홍집과 유길준을 비롯해서 소위 10적이라 하는 당시 열 명의 적당들이 있었다. 그리고 주한일본공사로 있던 미우라고로(三浦梧樓) 등이 있었다. 이들은 조선옷을 백성들에게 돌려주고 변복령을 취하하려는 국모인 왕후를 그냥 두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우리가 왕실을 어떻게 하려는 일은 아니오. 다만, 우리가 추구하는 개혁이 잘못 될까 그게 걱정일 따름이오.”
김홍집은 거기에 모인 사람들과 그렇게 의논을 하고는 모두 헤어졌다.
1895년 음력 8월 20일이었다. 양력으로는 10월 10일이었다. 미우라고로는 자신이 큰 공을 세우고 싶었다.
“제군들은 오늘 내 뜻에 잘 따른다.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된다. 알았나.”
“하이, 제대로 처리하겠습니다.”
미우라는 김홍집 등이 돌아간 다음에 자신이 거느린 일본군 수비대, 일본공사관원,영사경찰, 신문기자, 낭인 등을 모두 불러 각자 역할을 주고 지시를 했다. 밤이 깊어 모두 고요히 자고 있는 중이었다. 경복궁으로 쳐들어간 미우라는 왕후인 중전 민 씨를 참혹하게 살해 하였다. 그리고 시신은 근처의 숲속으로 옮겼다. 미리 준비해둔 장작더미에 왕후의 시신을 올리고 석유를 뿌려 불태웠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끼었다. 고요한 숲속에는 붉은 불꽃이 슬프게 타고 있었다. 조선의 백성들이 모두 자고 있는 한 밤에 그렇게 국모인 왕후 민 씨는 세상을 떠났다. 다만, 둥지에서 잠을 자던 새들만이 요란하게 불꽃을 피해 날아올랐다. 정말 천인(天人)이 공노(共怒)할 일이었다. 세상 천지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왕후께서 비명에 돌아가셨다.”
아침에 날이 밝자 왕후가 비명에 간 사실이 알려졌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왜국 일본의 군대에 의해 궁궐은 포위돼 있었고, 그들 앞잡이가 정권을 쥐고 있는 터였기 때문이다. 서울의 거리에는 긴 칼과 소총을 든 일본 군대와 경찰이 온통 쫙 깔려 있었다.
“지금 짐이 들은 일이 사실이오.”
“사실입니다. 왕후께서 지난 밤 강도의 습격으로 돌아가셨소이다. 이는 왕후께서 잘못을 했기 때문이오.”
“아니, 왕후가 뭔 잘못을 했단 말이냐? 어찌 짐이 모르는 왕후의 잘못이 있단 말이냐!”
임금이 신하들을 향해 불호령을 내렸다. 김홍집을 비롯한 왜국의 앞잡이들은 왕후의 잘못이 뭔지는 말을 하지 않았다.
“전하, 지금 전하께서 화를 내실 일이 아닙니다. 돌아가신 왕후의 잘못을 인정하시고, 왕후를 서인으로 폐하십시오. 그리고 백성들에게는 상복을 입지 못하게 하십시오.”
김홍집을 위시한 역도들은 임금을 겁박하고 감금하며 자신들의 뜻대로 백성들에게 상복을 입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나라는 온통 뒤집어졌다. 왕후를 비명에 잃은 슬픔도 슬픔이지만, 그 슬픔을 함께 하지 못하게 하는 조정의 간신들에게 화가 났다.
“내가 상복을 입으리라. 어찌 국모의 상복을 입지 않아 원수들에게 국모의 강등을 실제로 증명하게 할 것인가!”
의암은 스스로 상복을 입었다. 그리고 왕후의 죽음을 애도하며 서울을 향해 바라보며 곡을 하였다.
“선생님, 안 됩니다. 다른 사람 같이 모른 척 하십시오. 그래야 무사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처럼 남들이 다 알게 상복을 입으시면 그들이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재앙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제자와 주변의 인물들은 모두 의암의 행동에 불안해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내 알아서 하겠습니다.”
의암은 그렇게 왕후의 상복을 입고 애도를 하였다.
<처변삼사를 논의하다.>
의암은 국모를 잃고 많이 애통해 했고, 이제는 그동안 공부했던 터전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위해 나서야 할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아버지, 할머니가 위독합니다.”
“뭐라고. 어머니께서 ….”
아들 제함이 아버지 의암에게 헐레벌떡 달려와서 어머니 이 씨가 위독함을 알려왔다. 의암은 강학을 준비하다가 미루고 곧바로 어머니 처소로 달려갔다.
“어머니, 저 인석입니다. 눈을 떠보세요.”
“….”
의암은 임종에 임한 어머니를 향해 눈을 뜨고 아들을 봐 달라고 외쳤다. 그러나 어머니 이 씨는 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후 인석이 잡은 손에서도 힘이 빠졌다.
“어머니!”
의암은 어머니 이 씨를 마지막으로 친가와 양가의 부모님을 모두 떠나보냈다. 의암은 초종과 장례와 제례를 모두 예를 갖춰 행하였다. 3년 상을 치를 준비에 들어갔다. 그렇게 어머니 상을 치르며 망극해 하고 있을 때였다.
“선생님,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나라의 정세가 이제 위기에 닥쳤습니다. 김홍집 내각이 단발령(斷髮令)을 내렸습니다.”
“단발령을 내렸다. 머리카락을 자르라고.”
인석은 혼잣말처럼 말을 내뱉었다. 그날은 음력으로 11월 15일이었다. 엄동설한에 모두 꽁꽁 얼어붙었다. 나라도 얼어붙고 백성도 얼어붙고 하늘과 땅도 모두 하얀 눈과 얼음으로 얼었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행위는 조선옷을 왜복이나 양복으로 입는 일보다도 더 얼어붙게 만들었다. 김홍집과 유길준 등의 횡포가 왜국의 군대를 앞세워서 극에 달하였다. 아무나 붙잡아 머리를 자르기 일쑤였다. 말을 듣지 않으면 마구잡이로 폭행을 일삼았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앞장 서 주세요.”
많은 제자들과 사우들은 의암에게 앞장서서 의병을 일으켜 달라고 했다.
“내, 자네들도 알다시피 지금 어머니 상 중일세.”
“선생님, 저승에 가신 어머니께서도 이해하실 겁니다. 때를 놓치면 안 됩니다.”
국모인 왕후의 원수를 갚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육체를 온전히 지키며, 동시에 백성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모두 같았다. 전국에서 의병들이 겨울의 마른 벌판에 불길이 일어나듯 창칼을 들었다. 공부를 하던 유생들은 붓을 던지고 총칼을 들었고, 농사를 짓던 농부들과 소를 기르던 목동들도 창이나 칼을 들고 구국항일투쟁에 나섰다.
“여보게, 장담서사에 급히 사우들이 모이도록 연락을 취하게. 내일 오전 중에 말일세.”
의암은 제자들과 사우들을 모아 나라의 위기에 대처하는 법을 말하려 하였다. 의암이 연통을 넣자 바로 인근의 사우들에게 연락이 닿았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밤을 틈타서 곳곳에서 사우들이 모였다. 장담서사에는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우들로 가득 찼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했습니다. 내 여러분을 급히 모이시라 한 것은 강학도 향음주례를 하려 한 것도 아닙니다. 왕후께서 비명에 가시고, 단발령까지 내려서 이제 우리의 미풍양속은 모두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런 국난을 당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의논하고자 합입니다. 기탄없이 말씀을 해 주십시오.”
“선생님, 지금의 국난은 싸움으로만 가능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힘이 없으니, 어떻게 대처하면 좋겠습니까?”
의견들이 분분했다. 힘이 약하지만 그냥 있을 수 없으니 나가 싸우자는 사람, 좀 더 두고 보자는 사람 등등 아주 분분했다. 의암은 미리 준비한 의견을 말했다.
“우리가 선비로서 국가의 위기에 대처하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거의소청(擧義掃淸)입니다. 곧, 의병을 일으켜서 나라의 원수를 소탕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거지수구(去之守舊)입니다. 곧, 해외로 망명하여 선비로서 우리의 전통문화를 지키는 것입니다. 셋째는 치명수지(致命遂志)입니다. 곧, 자결하여 나라에 목숨을 바쳐 뜻을 이루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셋은 모두 정당합니다. 사람의 이치가 모두 같지 않으니, 각자의 처지에 맞게 하십시오.”
의암이 세 가지 일에 대처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이를 사람들은 변고에 처하는 세 가지 일이라 하여 처변삼사(處變三事)라 했다. 또 어떤 이는 의리에 처하는 세 가지 일이라 하여 처의삼사(處義三事)라 하기도 했다. 의암이 처변삼사를 발표하자, 갑자기 장담서사는 조용해 졌다.
“난 알다시피 어머니 상을 입고 있습니다. 고국을 떠나 잠시 피하여 힘을 기른 후 일을 도모할까 합니다.”
“전 싸우다가 죽겠습니다.”
대부분의 사우들은 첫 번째 거의소청을 택하였다. 의병을 일으켜 싸워서 원수를 소탕하겠다고 했다.
<원주에서 의병이 일어나다>
의암이 처변삼사를 발표한 후 각각의 사우들은 제 생각에 따라 행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몇몇 제자들은 가지 않고 남아서 의암에게 의병을 일으켜 앞장 서 주기를 부탁했다. 그렇게 세월은 급박하게 지나갔다.
“선생님, 그럼 저희들이 먼저 앞장서겠습니다.”
경기도 양평군 지평(砥平)에 살고 있는 이춘영과 안승우 등이 의암을 찾아 의병을 일으키겠다고 했다.
“지평에서 하겠는가?”
“그러겠습니다.”
“지평은 서울과 가깝고 다른 지역과 통하기 쉬우니 장소는 괜찮네. 하지만 그쪽에는 감역(監役)으로 있는 맹영재(孟英在)가 생각이 불분명하니 조심해야 하네.”
“예, 그러겠습니다.”
이춘영과 안승우는 지평에서 병사를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맹영재가 어떻게 알고 지평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것을 반대했다. 오히려 김백선에게 포수들을 빼앗겼다고 생각해서 갖가지로 방해를 했다. 의암 선생의 언지도 있고 해서 이춘영은 지평에서의 거병을 망설였다. 그렇게 날짜가 지나자, 이춘영은 지평에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원주로 가기로 했다. 논의 끝에 원주 안창으로 모였다.
긴장감이 넘치는 밤이 지나고 새벽이 왔다. 멀리 산 위에서는 동이 막 트고 있었다. 이춘영, 안승우, 김백선 등은 최대한 일제의 눈을 피하려 했다. 알음알음으로 통문을 했는데도 모두 연락이 닿았던지 의병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 역할을 담당하겠다고 의지를 불태웠다. 원주 안창에는 날이 다 밝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모여서 하얗게 물결을 이뤘다. 조선옷을 입은 의병들은 소나무 가지에 학이 깃들 듯 하얀 물결을 이루었다. 비록 군대로서 잘 정비가 되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이미 숙달된 장병들이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여러분이 진정 이 나라의 영웅들입니다.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 개인의 이익만 생각하는 조정의 무리들은 이미 우리 형제가 아닙니다. 게다가 남의 나라에 쳐들어와서 주인 노릇을 하면서 살육을 저지르는 저 왜국의 무리들은 무엇입니까? 왕후를 살해하고, 변복에 변발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미풍양속이 모두 사라져 오랑캐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 숨을 쉰들 어찌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살리고자 목숨을 걸고 나선 진정한 애국자입니다.”
이춘영은 문인답게 일장 연설로 거병을 위해 모인 사람들의 가슴을 콕콕 찔렀다. 원주 안창에 모인 의병들은 모두 목숨을 내놓고 싸우겠다고 의기를 하늘까지 세웠다. 비록 시원찮은 무기를 가졌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이춘영, 안승우, 김백선 등은 대열을 정비하고 분대를 나누었다. 그리고 제천에서 만나기로 한 서상렬․이필희․신지수․이범직 등과 합류하려고 행군을 했다.
의암은 제자와 사우들이 병사를 일으켜 나서는 데도 불구하고 함께 할 수 없어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그래서 어머니 상 중이지만, 주변의 사우들을 불러서 자신의 뜻을 말했다.
“천지의 마음을 위하여, 성현의 도를 위하여, 종사(宗社)를 위하여, 생민을 위하여, 우리 집을 위하여, 우리 몸의 처지를 위하여, 하는 모든 행위는 의로운 일입니다. 크게 의로운 일이거든 이를 어떻게 저버리겠습니까?”
“선생님의 뜻이 이춘영 등에게 분명 전달될 것입니다.”
“그렇지요. 대의를 위해 싸우면 반드시 하늘과 조상의 도움이 있을 겁니다.”
의암은 곧바로 편지를 써서 의병을 일으킨 이춘영 등에게 보냈다.
“오늘날의 변고는 천하 만고에 다시없는 큰 변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여러분이 거병을 함은 천하 만고에 다시없을 큰일입니다. 여러분들은 몸에 천하 만고에 더 없는 대사(大事)를 짊어졌으니, 또한 중대하지 않습니까? 노력하고 노력하십시오. 그러나 이 일의 성패와 날카로움과 무딤은 미리 볼 수 없습니다. 오직 대의(大義)를 천하 후세에 펴면 성패와 날카로움과 무딤 사이에서 크게 일을 이룰 것입니다.
이는 만 가지 모두를 온전하게 하는 거사라 할 수 있으며, 천지를 저버리지 않고, 우리 임금과 우리 조상을 저버리지 않으며, 선성(先聖)과 선사(先師)를 저버리지 않으며, 우리가 배운 것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이와 같이 우리가 하는 일이 옳으니, 태연하게 갈 수 있어 다시 의심하거나 두려워함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두려움이 없는 중에 또 반드시 일에 임하여 두려워해야 하며, 의심이 없는 중에 또 반드시 계획을 잘하여 이룩해야 합니다. 노력하고 노력하십시오.”
의암은 그렇게 편지를 보내고, 나라를 떠나려 하였다. 곧, 처변삼사 중에 ‘해외로 망명하여 선비로서 우리의 전통문화를 지키는 일’을 하려는 참이었다.
한편, 제천에서 만난 의병들은 이필희를 추대하여 장군으로 삼았다.
“이필희 장군은 무관 출신이라, 아무래도 문인인 우리보다는 전투에 능할 게 아니오. 우리를 이끌어 주시오,”
“부족하지만, 제가 우리 군대를 맡아서 원수를 쳐부수는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무관 출신인 이필희가 의병을 이끌었다. 이날이 1895년 11월 28일이었다. 이춘영과 이필희 등이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춘천을 비롯한 전국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여러분, 대의를 위해서 진격합시다.”
이필희가 대장을 맡아 진격을 서둘렀다. 비록 오합지졸과 같았지만 의기 하나는 대단해서 대오가 갖춰졌다. 의병들은 모두 전력을 다해 싸웠다. 이필휘는 의병을 이끌고 제천을 거쳐 단양으로 진격하여 장회(長淮)에 이르기까지 거침없이 나아갔다. 의병이 일어나 밀고 나올 줄 몰랐던 제천과 단양의 군수와 몇몇 왜군과 순사들은 도망가기가 바빴다.
“와아, 만세!”
의병들은 모두들 좋아했다. 그러나 날이 지나면서 의병들 간에 기율(紀律)이 문제가 되었다.
“이필희 장군은 전술도 없고, 통솔력도 떨어지지 않소.”
“뭔, 대장을 맡았으면 솔선해서 앞장서고 그래야지. 뒤에서 명령만하면 어떡하오.”
의병들은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아직 전투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훈련을 체계적으로 받지도 않았다. 오로지 나라와 백성들을 왜국의 지배에서 구하고자 의기만 가지고 나선 참이었다. 그러다 보니, 처음의 뜻과는 달리 각자 행동을 일삼았다. 군대의 기율이 전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필희 대장님, 전 아무래도 집에 노모가 계셔서 고향에 가봐야겠어요.”
“저는 집 사람이 많이 아프다고 전갈이 왔습니다.”
의병들은 대장의 지휘력과 기율이 무너지자 너나없이 모두 부대의 대열을 이탈했다. 도저히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흩어지고 말았다.
“이춘영 장군님, 장군님이 아무래도 군대를 맡아야 할 것 같소이다. 나를 따르는 병사보다 장군을 따르는 병사가 더 많습니다.”
“장군이 정 그러시다면 제가 맡아서 수습해 보겠습니다.”
이필희 대장은 이 위기를 지휘관을 바꾸어 넘겨보려고 지휘권을 이춘영에게 넘겼다. 이춘영은 영남과 제천 등지의 호서지방에서 재기를 노려 다시 병사를 모았다. 그러나 지원자가 생각보다 적었다. 거의 군대를 형성할 수 없을 정도였다. 위기에 처한 것이다.
한편, 의암은 어머니 상중이라 의병에 가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해외로 나가 대의를 지키려 하였다. 해외에서 우리의 미풍양속을 보전했다가, 천하가 맑아지기를 기다려 우리의 미풍양속을 다시 이루자는 생각이었다. 이때 의암을 따르는 제자들이 많았다. 주용규(朱庸奎), 박주순(朴冑淳), 이정규(李正奎), 이조승(李肇承), 정화용(鄭華鎔) 등이 의암을 따라 나섰다.
“동생은 내가 떠났다가 올 때까지 조상의 사당 및 가족들을 부탁하네.”
의암은 종제 의석(毅錫)에게 집안일을 부탁했다. 의석은 제함의 친아버지기도 하므로 든든했다. 그 후로 의석은 수십 년을 정성을 다해서 집안일을 보았다. 의석이 동서남북으로 의병활동을 함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선생님, 이춘영입니다. 잠시만 멈춰 주십시오.”
“아니, 제천에 있어야할 사람이 어떻게 이리로 왔는가?”
의암 일행이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라 막 가고 있을 때였다. 이춘영과 안승우 등이 군대를 모아 다시 의병을 꾸리고자 했으나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훗날을 도모하고자 잠시 남은 병사를 이끌고 의암을 찾았다.
“선생님께서 의병을 맡아 주셔야겠습니다. 도저히 저희들의 역량으로는 오랫동안 적들과 맞서기가 부족합니다.”
“내 알다시피, 지금 어머니 상을 입고 있잖은가. 그러니 내 역량이 의병대장이 되기에는 부족하네. 그래서 이렇게 해외로 망명하고자 함이었네.”
의암은 어머니 상중에 있는 몸이라 군대를 거느려 피를 보기가 어렵다고 사양을 했다. 그러자 모두들 일어나 의암에게 말했다.
“대도(大道)가 흥하고 망함에 거상(居喪)은 가볍습니다. 또 국가에 난리가 있고 임금의 명령이 있으면 그 일을 피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국가의 난리뿐만 아니라 대도가 망하려 하니, 이 거사를 하는 것이 바로 천명입니다. 상도로 지키는 것은 적절치 않고 마땅히 권도(權道, 임기응변)로 해야 합니다.”
“내 그 뜻을 모르는 바가 아니오.”
의암은 난감했지만 처음부터 하고자 하는 바를 굽히지 않았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렸다. 당장이라도 나서서 사우들을 이끌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백성들을 도탄에서 빼어 나오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형세를 읽은 터라 나름대로 다른 방도를 취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선생님이 아니면 사람들에게 신임을 받아 대중을 다스려서 대의(大義)를 잘 마칠 수 없습니다.”
이춘영 등은 의암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울면서 말했다. 정말 이렇게 슬피 우는 모습은 처음 봤다. 덩치가 큰 젊은이들이 땅에 엎드려서 펑펑 눈물을 쏟아내었다. 의암은 국내의 거병은 이 사람들에게 맡기고, 해외에서 일의 해결점을 찾아보려 했던 것이다.
“여러분들이 정 그러시다면, 내 앞장서겠습니다. 영월에서 시작하겠소. 내일 모두 영월로 모여 주시오.”
“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 만세!”
울면서 고하던 사우들이 일제히 만세를 부르며 좋아했다. 의암은 바로 몇몇 사람들을 불러 준비를 시켰다. 그리고 자제와 몇몇 친지들을 불렀다.
“내, 어머니 상을 당해 예법대로 할 수 없게 되었구나. 평생 한으로 남게 되었구나. 앞으로 너희들은 내 헌수례(獻壽禮, 수명을 비는 행사)를 행하지 마라.”
의암은 멀리 산을 향해 한참을 바라보다가 자제들에게 헌수례를 하지 말라고 말을 했다. 얼굴에는 슬픈 기색이 서려 있었다. 하얀 눈이 들녘과 산에 가득했다. 어쩌면 산에 가득 쌓인 눈 마냥 의암의 얼굴도 창백해 보였다. 의암의 나이 54세였다.
드디어 1895년 12월 24일 의암이 영월에 도착했다. 각 군영에서는 의암이 대장으로 등극한다는 소문에 인근 사방에서 병사들이 모여들었다. 화서학파의 맥을 잇는 선생이기도 했지만 익히 의암의 명성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무려 3천여 명이나 되었다. 서상열, 이춘영, 안승우, 이필희, 김백선 등 영월, 제천, 청풍, 단양, 충주 등지에서 모인 사람들이었다.
이 중에 김운선(金雲仙)이란 사람이 있었다. 원주에 사는 평민인데, 부부만 살았다. 그는 의병에 가담하고자 하나, 혼자 있는 아내가 마음에 걸려 나서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보, 난 당신이 참 좋소. 아들딸 낳아 잘 기르면서 평생 살고 싶소. 그런데 나라가 이 모양이라 우리가 자식을 낳아도 사람답게 살 수 없을 게요. 그래 내 의병이 되어 나라를 구하고 싶소. 그런데 그대가 불쌍해서 가지 못하겠소.”
“무엇 때문에 저를 생각하겠어요. 제가 죽겠사오니, 낭군님께서는 의병에 나가 왜적을 많이 죽여주세요.”
운선의 아내는 자못 비장했다. 그러더니 운선이 말릴 틈도 없이 그만 자살을 했다. 운선은 아내를 급히 장사지내고, 의병 행렬에 들어왔다. 훗날 운선은 총을 들고 혼자 걸어가면서 왜적을 보는 족족 쏘아 40여명이나 쓰러 눕히자, 왜놈들이 운선을 보면 벌벌 떨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의군 수백 명이라도 겁날 것 없는데 김운선 하나가 두렵구나.”
김운선의 용맹이 대단했다. 사람들은 김운선 부부를 가리켜 지아비는 충성하고 지어미는 열녀였다며, 부충부열(夫忠婦烈)이라 했다.
영월 고을에 날이 밝았다. 의암이 영월에서 의병대장에 등극을 한 이유는 영월군수가 의병에 호의적이었다. 영월 성문에서 의암이 대장으로 등극하는 행사를 알면서도 모른 체 했다. 후에 영월에서 의병이 가장 많이 나온 이유도 무관하지 않다.
의암은 복수보형(復讎保形)이라 쓴 깃발을 높이 세웠다. 이는 영월에서 국모의 원수를 갚고 우리의 고유문화를 지키겠다는 의미의 깃발이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오늘 우리는 역사의 중심에 있습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들은 모두 한 가정의 아버지이고, 아들이고, 남편이며, 형제입니다. 정말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중한 가정을 왜국의 침략으로 잃게 되었습니다.”
의암은 그렇게 의병들이 모인 자리에서 연설을 시작했다.
“지금 여러분이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소중한 가족을 지키기 위한 행위입니다. 또 사랑하는 이웃을 지키고, 나아가 백성들의 아름다운 삶을 지켜내기 위한 것입니다.”
“대장님, 만세!”
영월 성문에 모인 의병들은 의암이 한 마디 할 때마다 함성을 지르면서 의기를 세웠다. 그 모습이 자못 군대다웠다. 그러나 일사불란한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모두 제각각이었다.
“여러분은 죽음으로 싸워야 합니다. 여러분의 죽음은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백성을 위해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었노라고 말입니다.”
영월 성문이 들썩들썩 하였다. 의암의 연설이 이어질 때마다 의병들은 마음이 하나로 되어 갔다. 의암은 연설을 끝내고 이어서 각 분대를 조직하고 각각의 분대를 지휘할 중군장을 임명했다. 이제 군대는 어느 정도 대오를 갖췄다. 하지만 의병이라고 모인 사람들이 의기만 충천할 뿐 오합지졸이었다.
영월에서 의병대장으로 의암이 등극하고 하루가 지났다. 아침 햇살이 하얀 눈 위로 찬란하게 빛을 발했다. 영롱한 햇살이 눈 위에서 반짝였다. 눈보라마저 불지 않았다. 바람이 없는 겨울이라 따스한 느낌이 들었다.
“정규는 여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같은 마음이라 생각하는가?”
의암의 안부를 물으러 간 이정규에게 갑자기 의암이 물었다. 이정규는 의암의 제자이면서 의암을 가장 성심으로 따르던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의암이 작고한 후 의암의 일대기인 <행장>을 쓰기도 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정규는 여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나라와 백성들을 사랑해서 모였다고 생각해서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래, 그런데 내가 병사들의 얼굴과 눈빛을 하나씩 ᄁᆊ뚫어보고 그들의 마음을 살폈네. 그런데 4명은 다른 사람과 마음이 달랐네. 조금 후에 내 그들을 잡아 낼 터이네.”
“그 많은 사람들을 다 보았습니까?”
이정규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의암과 이정규가 대화를 나누고 조금 후 아침 점호가 시작되었다. 의암은 단상에 올랐다.
“여러분 잘 잤습니까?”
“예~~~.”
병사들은 너나없이 우렁차게 대답을 했다. 바로 그때였다.
“지금 내가 호명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시오.”
“….”
병사들은 무슨 뜻인지 몰라서 다들 어리둥절하였다.
“이민옥, 최 진사, 박 주사, 신 처사. 이 네 사람은 앞으로 나오시오.”
“예.”
의암은 갑자기 네 사람을 불러내었다. 네 사람은 영문도 모르고 사람들 앞으로 불려 나왔다.
“여러분 이 네 사람을 포박하시오.”
“….”
“아니, 포박을 하라는데, 왜 다들 가만히 있으시오?”
진영 안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왜 네 사람을 불러냈는지. 그리고 왜 포박을 하라고 하는지. 도대체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들 넷은 모두 동학농민군의 지도자이며, 글도 아는 박식한 사람들로 이미 전투 경험이 있는 자들이었다. 여기 모인 어떤 사람들보다도 뛰어난 전투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안창 의병진이 의거할 때부터 의진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특히 이민옥은 안승우와 이춘영의 인척이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중군장들이 나와서 이들 넷의 손발을 밧줄로 묶었다.
“너희들은 죄를 자백해라!”
의암이 포박한 네 명에게 불호령을 내렸다.
“저희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오해를 푸십시오.”
한사코 앞으로 불려나온 네 명은 죄를 부인했다. 아무리 다그쳐도 입을 열지 않았다.
“최 진사와 박 주사의 상의를 벗겨 자세히 살펴라.”
“예.”
최 진사와 박 주사의 윗옷을 벗겨 살폈다. 너무나 의외였다. 그들의 옷에서는 일본어로 쓴 쪽지가 나왔다. 개화 정부에서 김홍집 등이 첩자로 파견한 인물임이 밝혀졌다. 그동안 의병의 동태를 파악해서 김홍집 등에게 보고를 해왔다.
“이민옥과 신 처사는 바지단의 각반을 벗겨 살펴라!”
이민옥의 각반에서는 맹영재가 써 준 글이 있었고, 신 처사의 각반에서는 꽤 많은 의병의 명단과 특징이 적혀 있었다. 이민옥은 맹영재의 지령을 받고 의병에 잠입해 있었고, 신 처사는 의병을 빼내서 동학군으로 데려가려고 잠입해 있었다.
“대장님, 살려주세요.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우리가 병사를 일으킨 목적이 무엇인가?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들을 살려주면 우리가 병사를 일으킨 목적이 사라집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 이들을 처형해서 일벌백계의 교훈을 삼고자 합니다.”
“….”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고요가 한참을 지나갔다.
“여기 있는 모든 분들은 내 생각에 동의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겠습니다. 이의 있는 사람은 말하시오?”
“….”
역시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들 너무 의외라는 사실과 믿을 수 없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면 이제 이들의 죄상에 따라 군율을 시행하겠습니다. 목을 치시오.”
“….”
진영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바람을 가르는 칼날의 시린 소리와 함께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하얀 눈 위로 핏자국이 뿌려졌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목에서 피가 솟구치고, 머리는 나뒹굴었다.
“이 나라와 백성을 지키는 이는 왜국의 앞잡이 군인이 아닙니다. 이 나라와 백성을 지키는 이는 우리와 같은 백성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의암은 네 명의 첩자를 신통하게도 찾아 그 증거까지 제시했다. 그리고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머리를 잘랐다. 병사들은 순간 오합지졸에서 벗어났다. 군기가 서고 눈빛이 반짝였다.
“여러분,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으시오. 여러분은 이 나라의 종사와 백성의 안위를 책임질 유일한 병사입니다. 조선 최고의 젊은이들입니다.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임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나를 따라 하십시오.”
의암은 첩자들의 머리가 뒹구는 것을 그대로 둔 채 부장들과 병사들에게 일렀다.
“대안(大眼), 눈을 크게 뜨시오.”
“대안, 눈을 크게 뜨시오.”
의암은 대안(大眼)이라 쓴 깃발을 번쩍 들어보였다. 그리고 크게 따라 하게 하였다. 소나무 가지 위에 걸려 있던 눈 뭉치가 소리에 울려 떨어질 정도로 병사들은 크게 의암을 따라 소리쳤다. 그리고 다들 눈을 크게 떴다.
“활흉(活胸), 가슴을 활짝 펴시오.”
“활흉, 가슴을 활짝 펴시오.”
병사들은 의암을 따라 소리치면서 가슴을 활짝 폈다.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경척(硬脊) 등뼈를 곧추 세우시오.”
“경척, 등뼈를 곧추세우시오.”
역시 병사들은 크게 소리 내어 따라하면서 등뼈를 곧추 세웠다.
“건각(健脚) 씩씩하게 걸으시오.”
“건각, 씩씩하게 걸으시오.”
병사들은 씩씩하게 걷는 모습으로 양손을 위 아래로 움직이기도 했다.
“여러분 모두 전쟁에 임해서는 이 넷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여러분들이 각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적을 맞아 싸울 때 이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알겠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내, 이를 오늘부터 ‘차렷’이라는 구호로 삼을 것입니다.”
“예.”
“그럼 연습을 해 보겠습니다. 차렷!”
병사들은 눈을 크게 뜨고, 가슴을 활짝 펴고, 등뼈를 곧추세우고, 씩씩하게 걸을 준비를 하였다. 한 순간 군율과 병사의 기강이 섰다. 어제까지 보였던 흩어진 모습은 병사들에게서 어디서든 볼 수 없었다. 완전히 달라진 늘름한 모습이 되었다. 의암은 의병을 강한 군대로 만들고자 했다. 다행히 병사들은 의암을 잘 따랐다.
병사들은 의암이 첩자를 어떻게 찾았는지 모두 궁금했다. 그것도 단 하루 만에 증거물까지 찾아내서 꼼짝 하지 못하게 했다. 병사들은 의암을 귀신이라고 했다. 도저히 귀신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의암은 영월에서 의병대장으로 등극한 후 곧바로 <모든 백성에게 고하는 글[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과 <모든 관료에게 고하는 글[격고내외백관문(檄告內外百官文)]>을 지어서 전국에 돌렸다. 의병을 일으킨 당위성을 글로 적어 돌리자 전국에서 뜻있는 젊은이들이 모여 들었다.
<충주성을 점령하다>
의암은 의병대장으로 등극한 후 곧바로 제천으로 향했다. 이제 어제의 오합지졸 군대가 아니었다. 군기가 서서 일사분란한 모습이었다.
의암이 의병 대장이 되고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그때 조정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이윤용(李允用), 이완용(李完用) 등이 임금을 러시아공관으로 옮기고 친러정권을 수립했다. 칼로 이룬 내각이 다시 칼에 의해서 바뀌었다. 개화정권으로 불리던 김홍집, 정병하(鄭炳夏), 유길준 등을 잡아 주벌하였다. 이때 김홍집 등은 허겁지겁 경복궁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벌써 친러정권의 관리들은 경복궁 앞에 경관들을 배치해 놓았고 보부상(褓負商) 수천 명을 동원해 경계를 서고 있었다. 김홍집 일행은 갈 곳이 없었다. 우왕좌왕 하다가 붙잡히고 말았다. 이때 일본 수비대가 김홍집을 피신하라고 말했다.
“나는 명색이 조선의 총리대신이다. 내가 조선인을 위해 죽는 것은 떳떳한 천명이거니와 다른 나라 사람에 의해 구출된다는 것은 짐승만 같지 못하니라.”
김홍집은 자기 나름대로 나라를 위해 일했다고 외쳤다. 그러나 김홍집의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살기등등한 보부상들은 김홍집을 가마에서 끌어내렸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김홍집에게 집단으로 주먹을 날렸다. 그리고 발길질이 사방에서 한꺼번에 날아왔다. 왜국을 등에 업고 자기 맘대로 조정을 좌지우지 하던 총리대신 김홍집은 그렇게 백성들의 손에 의해서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길거리에서 객사를 했다.
한편 김홍집과 내각을 함께 이끌었던 탁지부대신 어윤중(魚允中)도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용인군 장서리에서 백성들이 던진 돌맹이에 맞아 죽었다. 하늘같이 권력을 누리던 그들이 버러지처럼 우습게 봤던 백성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김홍집 내각이 밀려나고, 이완용 등이 다시 내각을 세웠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졌다.
“허허, 충신이 역적을 주벌한 것이 아니네. 이익으로 권세를 빼앗은 게야.”
의암은 이완용 등이 김홍집 내각을 내치고 죽게 한 것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완용 내각은 처음 정권을 탈취한 후 김홍집 내각이 하던 폐단을 없애는 듯하였다.
“의복 제도는 편리한 대로 따라 하고, 삭발은 잠시 정지한다.”
이완용은 그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김홍집 내각보다도 더 백성들을 못 살게 통치를 하였다. 뒷날 이들의 행각은 모두 밝혀졌다. 일제와 손을 잡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개인의 욕심을 채우는 데만 급급했다.
때는 1895년 12월 28일이었다. 영월에서 의병대장으로 등극한지 나흘이 지났다. 의병 일행은 제천에 진격하여 주둔하였다. 제천에 주둔한 의암은 충주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충주는 친일정부의 개화정책을 주도해 나가는 중심지였다. 충주를 점령하면 서울로 갈 수 있는 길목을 확보하게 되었다. 게다가 부산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교통망을 차단하는 효과도 얻을 수 있었다. 의암은 조선 팔도와 주변국의 정세를 머리에 떠올리며 앞으로 왜군과 관군에 대항해 싸울 계획을 떠올렸다.
“여러분, 먼 길 행군하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이곳은 알다시피 제천입니다. 우리가 제천에 온 이유는 충주관찰사 김규식을 처단하고자 함입니다. 김규식은 일본의 앞잡이로 누구보다도 더 단발령을 앞장서서 행했습니다.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김규식을 잡아 백성이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일벌배계로 백성들을 괴롭히는 저들에게 보여줍시다.”
“예, 대장님!”
의병들은 의암 대장의 계획을 듣고 모두들 환호를 했다. 목소리가 무쇠라도 깨뜨릴 정도로 크고 우렁찼다.
의암은 의병들에게 사기를 북돋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첫 목표가 전국 20개 관찰부의 하나인 충주성의 관찰사를 처단하고자 했다.
“이조승과 이정규는 충주성에 잠입해서 적의 동태를 파악해 와라.”
“예, 대장님.”
의암은 충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충주성의 사정을 먼저 파악했다.
“대장님, 보고 올립니다.”
“어떻게 됐는가?”
“저희가 충주성에 잠입해 본 결과 다행히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대부분이 이곳을 떠나고 포군 50명만 남았습니다. 지방군대를 포함해서 8백 50명 정도 됩니다.”
“때가 왔구나. 지금 시작하자.”
이조승과 이정규가 충주성에 잠입했다가 와서 충주성의 동태를 보고했다. 이에 의암은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때는 1896년 1월 4일이었다. 의암의 나이 55세였다.
“중군장들은 막사로 모이시오.”
의암은 드디어 중군장들을 불러 모아 작전을 말했다.
“지금부터 두 팀으로 나눌 것이오. 내가 지휘하는 부대는 박달재를 넘어 충주로 가고, 신지수 장군과 조달승 장군 등이 이끄는 부대는 청풍을 거쳐 충주로 갈 것이오. 지금 총을 가진 포군이 400명에 불과하오. 이를 둘로 나누어서 앞장세우고, 나머지 창과 칼을 든 병사 3천 명은 둘로 나누어 각각 따르게 합시다.”
“예, 알겠습니다.”
“천지신명과 조상의 도움이 있을 겁니다.”
“예, 대장님. 충주성에서 의기를 꽂고 뵙겠습니다.”
“모두 차렷! 잊지 마시오.”
의암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서 밤을 틈타 충주성으로 향해 갔다. 차가운 겨울밤. 눈이 하얗게 내린 제천 일대는 더욱 싸늘하였다. 다만, 의기에 넘친 의병들만이 힘차게 진격을 하고 있었다. 어느덧 의병 부대는 충주성에 거의 다가왔다.
“안승우 장군님!”
“그래 어찌 되었는가?”
선발대로 보낸 안흥원과 정술원이 숨을 헐떡이며 급히 달려와서 안승우에게 보고를 했다.
“지금 이쪽 방면으로 해서 충주성에 가려면 북창나루를 반드시 건너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날씨가 따뜻해서 북창나루에 얼음이 얇습니다. 얼음을 딛고 병사들이 가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어찌 할까요?”
“염려 마시오. 우리에게는 의암 대장이 있지 않소.”
안승우 장군은 의암의 신통력을 믿었다. 안승우가 보면 가끔 의암은 신비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고요히 눈을 감고 하늘과 땅을 손으로 가리키면 거대한 힘이 솟아올랐다. 그 힘은 의암의 주변에 후광(後光)으로 서리기도 하였다. 광배(光背)는 한참동안 서려 있다가 의암이 손을 내리면 사라졌다. 드디어 안승우 장군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북창나루에 도착했다. 얼음이 얇아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고요한 밤공기를 타고 요란하게 들렸다. 병사들은 모두 강을 건너기를 두려워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안승우는 칼을 빼어들고 병사들을 향해 소리를 쳤다.
“우리가 지금 류인석 장군을 받든 것은 만고의 대의를 위한 일이다. 천지신명이 반드시 도와줄 것이니, 나루터의 얼음이 어찌 두려운가?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어라. 만약 주저하고 나아가지 않는 자가 있으면 목을 베리라!”
이에 의병 부대는 두려움을 떨쳐내고 용기를 내어 북창나루를 건넜다. 여전히 얼음 갈라지는 소리가 ‘쩍~~쩍~~’하고 났다. 그 많은 병사들이 모두 다 건널 즈음 마지막에 짐을 지고 오던 병사 4,5명이 물에 빠졌다.
“이걸 잡게.”
안승우는 미리 준비한 밧줄을 던졌다. 그리고 물에 빠진 병사를 모두 무사히 건졌다.
“천지신명이 우리를 돕고 있구먼.”
“아닐세, 의암 장군의 신통력이 하늘에 닿은 걸세.”
의병들은 북창나루의 살얼음을 딛고 모두 무사히 건널 수 있었던 사건에 천지신명이 돕는다느니, 의암 장군의 신통력이라느니 하였다. 의병의 사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돌격!”
드디어 의병들은 충주성을 향해 공격을 했다. 아직 날이 채 새지도 않은 새벽이었다. 총소리와 병사들의 함성이 충주성에 가득했다. 조금 있으니, 아우성과 싸우는 창칼이 부딪치는 소리까지 가세했다. 충주성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시체들이 곳곳에 쌓이고. 피비린내가 숨을 멈추게 하였다.
“김규식을 잡아라!”
어디선가 싸우는 중에 들여오는 소리였다. 이미 김규식은 충주성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의암은 김규식을 잡을 별동대를 꾸려 뒤를 쫓게 하였다.
의병이 충주성의 관군과 일본군을 맞아 싸운 지 얼마 안 되어 충주성을 접수했다. 충주성을 지키던 일본군과 관군은 대부분 도망을 가거나 죽거나 하였다. 게다가 충주에서 자체적으로 선발하여 성을 지키던 지방군대는 의병이 오자, 성문을 열고 의병들에게 협조를 했다.
“여러분, 고생했습니다. 여러분은 진정한 애국자입니다. 백성의 안위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싸운다는 사실을 이곳 충주성에서 보여주었습니다. 이 나라의 주인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이번처럼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기로 바꾸면 꿈은 이루어집니다.”
“와아! 대장님 만세!”
의병들의 기세는 더욱 충천하였다. 그렇게 충주성을 점령한 의암은 곧이어 일본군이 반격을 가할 것에 대비했다. 사실 물자나 총이 모자라서 제대로 일본군과 맞서기가 쉽지 않았다. 군대를 정비하고, 병기를 다시 고쳤다. 비록 낡은 병장기이지만 새로 구입할 수 없어 다 고쳐 쓰고 있었다.
“대장님, 김규식을 잡아 왔습니다.”
도망간 충주 관찰사 김규식을 별동대가 쫓아 이틀 만에 잡아왔다. 김규식은 두 팔을 오랏줄에 묶인 채 붙잡혀서 의암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평소에 그렇게 거들먹거리며 조선 사람을 우습게보던 행세는 모두 어디로 사라졌다. 조선 사람의 상투를 잡고 두들겨 패며 강제로 자르던 며칠 전의 호기롭던 김규식이 아니었다. 너무나 초라했다.
“김규식은 고개를 들라!”
많은 병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규식은 두 무릎을 꿇고 의암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사방은 조용해졌다. 김규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의병들이 허름한 옷차림에 창칼을 들고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김규식은 들어라, 모름지기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예의와 사랑이 짐승과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미풍양속을 지키고 함께 삶을 영위하는 이웃을 지켜야 함이다. 이는 우리의 의리이다. 그런데 김규식은 김홍집과 박영효 일당의 개화를 빙자삼아 왜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죄 없는 백성들을 수없이 괴롭히고 죽였다. 너는 짐승만도 못한 일을 저질렀는데, 어찌 도망을 쳐서 살기를 바랐느냐?”
“나를 죽여라. 나와 같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어찌 감히 살기를 바라겠는가? 나도 또한 사람인지라 당초에는 왜놈을 죽이려는 마음이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마음이 바뀌어 지금은 골수까지 왜놈이 되어버렸다. 이는 나라를 저버려 은혜를 잊고 선조를 등져서 하늘에까지 미치는 큰 죄이다. 내가 만약 살아날 수 있다면 하늘의 이치가 없는 것이다.”
“네가 죄를 뉘우치고 바른 길로 나아간다면 혹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의암은 김규식이 의병에게 붙잡힌 후 삶을 포기한 것을 알고 넌지시 마음을 떠 보았다.
“나를 살려준다면 마땅히 빠르게 화약을 준비하여 왜놈을 제압할 대책을 올리겠다. 살려 달라.”
김규식은 곧 죽을 위기에서도 거짓으로 변명을 했다. 의암은 김규식을 더 이상 심문해서는 오히려 넋두리만 길어질 것 같아서 심문을 멈추고 처형하기로 마음먹었다.
“김규식은 적의 도당으로서 의리를 저버린 죄로 처형한다.”
김규식은 그렇게 의병들이 보는 앞에서 목이 달아났다. 일제의 앞잡이로 백성의 고혈을 빨아 개인의 부귀를 누렸던 김규식은 구천으로 사라졌다.
의병들은 사기가 더욱 충천하였다. 의암은 그 기세를 몰아서 호서지방과 강원도 영서지방 및 영남일대의 친일군수들을 처형했다. 이범직(李範稷)에게 명하여 공주군수 이종원(李鐘元)을 처형했으며, 서상렬에게 명하여 예천군수 유인형(柳仁馨)을 목 베어 처형했으며, 단양군수 권숙(權潚), 청풍현령 서상기(徐相耆), 평창군수 엄문환(嚴文煥) 등을 처형하였다.
의암의 의병은 전국으로 기세를 넓혀 갔다. 가는 곳마다 승전을 올려 그 기세는 더욱 강해졌다. 의암이 직접 지휘하지 않아도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의암도 충주와 가까운 수안보(水安堡)와 가흥(佳興) 등지를 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의암의 의병부대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의병을 처음 일으켰던 이춘영이 안보참에서 출전하였다가 적의 탄환을 맞아 숨졌다. 의암은 놀라면서 무척 애통해 했다. 배시강(裵是綱)을 보내어 시신을 거두게 하였다. 또 주용규가 충주성 북문에 올라 싸움을 독려하다가 적의 탄환에 맞아 숨졌다. 의암은 아끼는 장수들과 병사들이 전사할 때마다 깊은 애도를 표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이 다가왔다.
일제는 충주성 탈환을 위해서 병력을 보강하였다. 인근의 수안보로 가 있던 병력을 모두 충주성으로 집결시키고 화력도 집중하였다.
“장군!”
“왜 그러는가?”
의암이 충주성 진영에서 작전을 구사하고 있을 때 안승우가 의암을 찾아왔다.
“적의 공격이 범상치 않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 번도 멈추지 않고 포탄을 날립니다. 성 안에는 온전한 집이 한 채도 없습니다. 성 밖으로 향하는 길이 끊겨 물자를 공급할 수도 없습니다. 집을 뜯어 불을 때고 말을 잡아 양식을 대고 있습니다. 며칠 못 가서 말라죽게 되었습니다.”
“나도 눈으로 보아 알고 있소이다. 그래서 지금 작전을 구상하고 있는 중인데, 안승우 장군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장군님의 의향이 어떠한지는 모르나, 제 생각에는 충주성에서 일단 퇴각하였다가 다음을 기약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런데 말이요. 지금 충주성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날 구실을 주고 힘써 싸울 기운을 줄 상징적인 곳이란 말이요. 그래서 적들도 모든 화력과 병력을 이곳으로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오.”
“여기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군님이 행여나 잘못되면 모든 게 끝입니다. 장군님은 우리 조선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의암과 안승우와 참모들은 오래도록 충주성을 놓고 의논을 이어갔다.
“그럼 일단 충주성을 버립시다. 제천으로 퇴각합시다. 판국이 급박하니, 청주와 공주 등지의 인재와 물자를 모아 다시 싸우도록 합시다. 지금 왜군과 관군이 충주성을 포위하고 있으니, 퇴각을 할 때 보다 철저히 주의하도록 하시오.”
“장군님, 제가 낮에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동서남북 중 서문만 경계가 허술했습니다. 서문으로 가는 게 어떻습니까?”
안승우가 이미 충주성에서 퇴각할 것을 생각해서 적군의 동태를 살폈다. 그런데 유독 서문 쪽에만 분주하지 않고 조용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의암은 안승우 장군이 이미 살폈다기에 그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모두들 충주성에서 퇴각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의암은 산 공부를 할 때처럼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을 몸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사방을 강력한 기운으로 살폈다. 그런데 낮에 안승우 장군이 봤던 장면과는 다르게 서문 쪽에 왜군이 매복을 하고 있었다. 아주 강력한 적군의 기운이 의암에게 느껴졌다. 의암은 얼른 주역점을 쳤다. 역시나 서쪽을 조심하라는 점괘가 나왔다.
“안승우 장군, 서문 쪽의 상황을 빨리 알아봐 주시오. 복병이 있는 것 같소이다.”
“예, 장군님.”
의암은 안승우 장군에게 일러 서문에 가서 왜군이 있는지 살피라 했다. 안승우가 서문에 가보니, 역시나 문이 굳게 밖으로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그래서 적이 있을 만한 곳을 짐작해서 화살에 불을 붙여 날렸다. 의암의 생각은 적중했다. 그곳에는 왜군이 매복을 하고 있었다. 불화살이 떨어지자, 불을 피하느라 분주히 움직이는 왜병이 눈에 띄었다.
“장군님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서문 쪽에 복병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의병들은 의암의 선견지명에 다들 놀랐다. 모두 신명이 도왔다고 말했다. 그 이후도 의암은 여러 차례 왜군의 동태를 산 공부 방법과 주역점을 쳐서 알아 피할 수 있었다.
“나를 따라 동문으로 나갑시다.”
의병은 의암의 인솔에 따라서 충주성을 버리고 동문으로 향해 빠져나왔다. 동문 쪽에는 아무도 길을 막는 왜병이 없어 무사히 제천까지 이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