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의 삶을 기억하다, 성북동 길상사
서울 성북구 기사, 2019. 12. 11.
길상사는 1997년 12월에 창건한 절집이다. 길상사는 원래 대원각이라는 요정이었다. 고급 요릿집이 절집으로 탈바꿈한 데는 법정 스님과 김영한의 이야기가 있다. 법정 스님은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2010년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무소유》 《맑고 향기롭게》 《산방한담》 《오두막 편지》 《버리고 떠나기》 등 스님이 쓴 책이 많은 독자에게 감명과 울림을 전했다.
우측:김영한
대원각을 시주한 김영한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아 시주를 결심했다. 건물 40여 채와 대지 2만 3140㎡로, 당시 시가 1,000억 원이 넘는 규모였다. 대원각을 시주하려는 김영한과 무소유가 삶의 철학인 법정 스님 사이에 권유와 거절이 10년 가까이 이어졌다.결국 법정 스님이 시주를 받아들이고, 2년 동안 개·보수를 거쳐 길상사가 탄생했다. 길상사가 승보사찰인 본사本寺 송광사의 말사末寺이다.
법정 스님의 영정과 친필 원고, 유언장 등이 전시된 진영각
법정 스님의 흔적은 길상사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진영각에 있다. 전각에는 스님의 영정과 친필 원고, 유언장 등이 전시된다. 법정 스님은 “의식을 행하지 말고, 관과 수의를 준비하지 말며, 승복을 입은 채로 다비하라”고 유언했다. 유골은 진영각 오른편 담장 아래 모셨다. 진영각 옆에는 생전에 스님이 줄곧 앉은 나무 의자가 흔적을 대신한다.
김영한은 기생 교육기관이자 조합인 권번에 들어 교육을 받고 진향이라는 이름으로 입문했다. 1950년대 청암장이라는 별장을 사들여 운영하기 시작한 대원각은 군사독재 시절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3대 요정으로 이름을 떨쳤다. 김영한은 대원각을 시주할 때 “그까짓 1000억 원은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며 한 치도 미련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백석은 그녀가 사랑한 시인 백석이다. 백석은 김영한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지어줄 정도로 아끼고 사랑했다. 하지만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백석은 만주로 떠났다. 백석과 김영한의 만남은 여기까지다. 한국전쟁으로 남과 북이 나뉘며 서로 생사를 알지 못한 채 삶을 마감했다. 백석은 1996년 북한에서, 김영한은 1999년 길상사 길상헌에서 눈감았다.
시주 김영한(법명:길상화) 공덕비와 사당
길상헌 뒤편에는 시주 길상화 공덕비가 있다. 길상화는 길상사 창건 법회 때 법정 스님이 염주와 함께 전해준 법명이다. 공덕비 옆 안내판에 김영한의 생애와 백석의 시 한 편이 새겨졌다.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로 시작하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다. 백석을 그리워한 김영한은 “내가 죽거든 눈이 많이 내리는 날, 유골을 길상사에 뿌려달라”고 유언했다. 김영한은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나타샤가 되고자 한 게 아닐까? 시를 읽고 있으니 김영한과 백석의 사랑이 이곳에서 이어지는 듯하다.
이제 길상사를 천천히 둘러보자. ‘삼각산 길상사’ 현판을 내건 일주문으로 들어서면 경내다. 길상사에는 두 가지 아름다움이 있다. 걸어 올라가다 보면 키가 큰 관음보살상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천주교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가 종교 간 화해와 화합을 염원하며 기증한 작품이다. 창건 법회 때 김수환 추기경이 축사를 했고, 석가탄신일과 성탄절에는 서로 축하 현수막을 내건다. 언제 봐도 흐뭇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길상사 경내는 울창하지 않아도 숲의 느낌이 제법 진하고, 잘 가꾼 정원을 보는 듯하다. 보호수를 비롯한 고목이 많고, 철 따라 들꽃이 피고 진다. 곳곳에 있는 벤치도 이색적이다. 고목이나 계곡과 어우러진 숲에 놓인 벤치에서 길상사를 찾은 사람들이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운다. 법정 스님은 길상사에 불교 서적과 일반 서적을 갖춘 길상사도서관을 만들었다. 도서관은 2016년에 새롭게 단장하면서 북카페 ‘다라니다원’으로 운영된다. 휴식과 독서 기능을 갖춘 복합 문화 공간으로, 차 한잔 마시면서 법정 스님의 글을 읽어도 좋다.
출처:서울 성북구 기사, 2019. 12. 11./사진 일부 수정했습니다.
첫댓글 삼청동 11번지 성서백주간 사무실에 잠시 근무할 때, 방문객들이 오시면 사무원 권 베로니카가 차로 여러 번 길상사에 갔습니다. 삼청터널만 지나만 바로 길상사거든요. 시내 한복판에 너른 경내와 울창한 나무와 숲은 찾아드는 누구나 호의와 환대로 맞는 그곳, 다큐에서 보니 김영한 시주님이 불자뿐 아니라 누구라도 찾아 와 거닐고 쉬고 활력을 찾으라고 시주를 하셨더군요. 시주자의 마음을 움직여주신 부처님, 법정 스님과 그분의 책 무소유, 김영한님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 간직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