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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보령 59코스 제3부
용두해변-보령요트경기장-남포방조제-갓바위민박촌-대천해수욕장
20230726
1.대천해수욕장, 별까지는 가야 한다
서해랑길 용두 해변에서 서해랑길 59코스 남은 거리를 탐방한다. 아직도 7km가 남아 있으며, 긴 남포방조제 제방길을 걸어야 한다. 흐느적거리던 몸이 용두 해변 해송림 그늘에서 기운을 얻었다. 아담한 용두해수욕장이 운치가 있다. 용두해수욕장의 명품은 해송림과 고운 모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해송림을 장악하고 있는 야영장 텐트, 해송림의 격조가 뚝 떨어지는 대신 해송림은 놀이터가 된다. 벌써 해송림 동백숲 야영장에 몇 가족들이 짐을 풀고 있다. 용두해수욕장 북쪽 끝에 보령요트경기장이 있으며 해상보도교를 조성 중에 있다. 이 북쪽에서 용두해수욕장을 조망하는 풍경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화려함이 없어도 우아한 품격이 느껴진다. 해송림과 고운 모래밭, 밀려오는 물결, 앞에는 파란 바다가 열려 있다. 용두해수욕장의 감추어진 비밀의 풍경 같다. 해안에 신랑바위와 신부바위, 장수바위 설명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그 위치 확인이 되지 않는다. 바위의 위치 표시를 해 두어야 탐방객들이 확인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용두해수욕장 북단 언덕을 넘어 보령요트경기장 입구 남포방조제로 나아갔다. 이제부터 3.7km 거리의 남포방조제 제방길을 걸어야 한다. 한낮의 폭염은 더욱 기승을 부린다. 용두 해변에서 기운을 얻었던 몸이 제방길 초입에서부터 흔들거린다. 길동무의 전화 소리, "괜찮으세요? 지금 위치가 어디쯤인가요? 힘드시면 교통편을 이용해 오세요." "네, 지금 남포방조제 제방길입니다. 힘들지만 종점까지 걸어서 갑니다. 저를 기다리지 마시고 그대로 진행하세요. 종점에서 만나지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제방을 내려가 택시를 부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우산을 받치고 몸을 흐느적거리며 제방길을 걷는다. 남포방조제는 보령시 남포면 월전리와 대천5동 신흑동을 연결하는 방조제로, 1985년에 착공하여 1997년에 완공되었으며 길이는 3.7km라고 한다. 제방은 죽도 섬을 중앙에 놓고 남쪽 방조제와 북쪽 방조제가 이어져 있다. 죽도는 방파제에 의해 남포방조제와 이어진 육계도(陸繫島)가 되었다. 달리 말하면 죽도방파제를 중심으로 남과 북의 두 남포방조제가 이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방조제 제방길에서 간척농지를 바라보니 푸른 숲으로 둘러싸인 최고운유적이 보인다. 최고운유적지는 예전에는 보리섬이라 불리던 섬이었으나 지금은 남포방조제에 의해 육지가 되었다. 유적지는 푸른 숲에 둘러싸여 있어서 금방 눈에 띈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신라에 돌아와서 신라 하대의 혼란기를 개혁해 보려고 했으나, 육두품 출신의 신분적 한계 때문에 실패하고 전국을 유랑하다가 경남 합천의 해인사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그가 이곳 보리섬(麥島)과 성주산 자락에 있는성주사(聖住寺)를 왕래하면서 아름다운 경치를 즐겼다고 한다. 그때 시문을 짓고 수학(修學)하면서 보리섬 병풍바위에 글씨를 새겼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성주사가 있던 절터인 성주사지(聖住寺址)에는 낭혜화상 무염(無染, 800~888)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가 있는데, 이 비문 작성자가 최치원(崔致遠)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전혀 터무니 없는 전설은 아닌 것 같다.
죽도방조제 제방길은 동해안 국도 제7호선을 걷는 느낌이 든다. 출렁거리는 동해의 바다와 백두대간의 용틀임하는 장쾌한 산줄기, 국도 제7호선 동해안 해안로에서는 이 두 풍경의 아름다움에 전율한다. 그에 버금가는 풍경이 남포방조제 제방길 풍경이라고 한다면 허풍을 떠는 꼴인가. 서쪽으로 서해의 드넓은 코발트색 바다가 펼쳐져 있다. 리아스식 해안이 구불거리며 무창포로부터 용두 해변까지 이어지고, 석대도, 황죽도, 직언도 등의 섬들이 바다에서 손짓한다. 동쪽으로는 차령산맥(車嶺山脈)에서 벋어내리는 산줄기가 굽이친다. 성주산, 옥마산, 봉화산, 잔미산으로 산줄기가 이어지며 동쪽을 감싸고 방조제 사이에 푸른 간척농지가 펼쳐져 있다. 남포천의 조류지(潮流池)가 제방길 아래 남쪽으로 길게 파고 들며 이 풍경에 화룡점정이 된다. 이 풍경의 아름다움에 가슴이 활짝 열린다. 아, 언제였지? 성주산 자락의 성주사지(聖住寺址)를 탐방하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를 살피며, 화려했던 성주사를 상상하고 무염 스님을 추모했었지. 그리고 통신탑 시설이 보이는 옥마산(玉馬山) 뒤쪽 만수산 자락의 만수산 무량사를 찾아갔었지. 5세 신동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최후를 마친 곳, 무량사에서 매월당의 초상화 부도를 살폈었지. 그 다음에 웅천천 상류의 보령호를 돌아보았던가. 한여름 폭염 속 4km에 가까운 제방길을 걷는 게 고통스러웠지만 이 풍경을 감상하며 지난 시절을 추억하는 즐거움으로 몸의 고통을 견뎠다.
죽도보물섬 관광지 조형물 앞에 갓과 장죽에 한반도 모형의 '고려정승 풍천인 임향의 귀양살이 터' 빗돌이 세워져 있다. "고려(高麗) 충신(忠臣) 풍천(豐川) 임씨 임향(任珦)은 공민왕(恭愍王)이 신돈(辛旽)을 중용(重用)하자, 이 잘못됨을 임금께 상소(上疏)하여 유배형(流配刑)을 당하여 이곳 죽도(竹島)에서 귀양살이하였다. 그는 귀양살이를 마친 후, 조선왕조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이 지역에서 은거하다가 생을 마쳤으며 그의 묘소(墓所)와 신도비(神道碑)는 보령시(保寧市) 웅천(熊川) 동막동(東幕洞)에 있다. 그의 현손(玄孫)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의 호국승장 (護國僧將)인 유정(惟政) 사명대사(四溟大師)이다." 아, 사명대사가 임향의 후손이로구나. 빗돌의 비문 내용을 통하여 임향과 사명대사를 알게 되었다. 죽도는 임향의 유배지로서 알려지기보다 조화를 숭상한다는 의미의 한옥 정원 '상화원(尙和園)'이 관광객에게 명품으로 알려져 있다. 죽도에 들어가 상화원을 감상하고 나오는 관광객을 기다리는 관광버스가 죽도 입구에 주차해 있다. 상화원에 올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날을 기대하며 죽도 입구를 지나친다.
10리 길의 남포방조제 제방길 끝에 배수갑문과 남포교가 있다. 남포교에서 남포천과 조류지(潮流池)을 조망한다. 남포천이 위쪽의 남포저수지를 내려와 남포방조제에 갇혀 조류지(潮流池)가 형성되어 있다. 조류지는 수로를 형성하며 남쪽으로 벋어간다. 남포천 하구 일대에 남포면 삼현리와 보령시 대천5동 신흑동이 자리한다. 그곳에 사람들이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고 사회 활동의 시설들을 건설하여 마을과 빌딩들이 솟아 있다. 남포천 동북쪽에 보령시 중심 시가지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보령의 지붕이라 불리는 성주산은 구름안개에 가려있음에도 그 위용이 느껴진다.
대천해수욕장으로 향한다. 남포면 삼현리 들녘을 바라보며 광장진입로를 따라간다. 북쪽으로는 낮은 구릉성 산지들이 동서로 줄기를 치고 그 아래 대천5동 신흑동 여러 마을이 자리하며 들녘이 펼쳐져 있다. 서쪽으로 대천해수욕장 빌딩들이 솟아 있다. 해수욕장 동쪽 신흑동 푸른 들녘으로 나가 갓바위마을 민박촌으로 진입했다. 꾸부랑꼬부랑 민박촌 골목길을 돌아서 해수욕장길 앞에 이르렀다. 몸은 탈진 상태였다. 그때 골목길 편의점 앞에서 길동무가 부르는 소리, 구조되었다는 안도에 몸이 무너져내렸다. 길동무가 내미는 커피캔이 희미하게 보인다. 커피캔을 받아서 탈진하 몸에 캔커피를 쏟아부었다.
대천해수욕장은 화려하다. 무창포해수욕장의 화려함과 감히 견줄 수 없다. 건축물과 인공의 조형물이 대천해수욕장을 압도한다. 바다에는 작은 바위섬 다보도(多寶島)가 가까이 있고, 북쪽에는 해저터널로 연결된 원산도와 그 왼쪽의 삽시도, 북쪽 육지에서 남쪽으로 길게 원산도 앞으로 내려온 안면도의 영목항이 가늠된다. 뙤약볕이 퍼붓는데다 화려한 대천해수욕장의 백사장이 길게 이어져 있고 파라솔들이 즐비한 모습에 눈은 희미해지고 몸은 기운이 빠져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걸어온 무창포와 용두 해변, 남포방조제를 아득한 그리움으로 가늠하지만 눈의 초점을 잃는다. 59코스 종점을 찾는 데 허둥거렸다. 길동무를 그냥 따라가지만 자꾸 몸은 처지고 그대로 주저앉게 된다. 화려한 고층 빌딩 사이 조형물 숲을 헤쳤다. 무드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무드광장 옆에 서해랑길 59코스 이정목과 60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붙어 있다. 그렇지만 이정목 날개에는 종점이 아직도 900m가 남아 있음을 알린다. 이곳이 60코스 시작점이니 59코스는 이곳에서 끝나는 것이겠지. 이루어냈다는 기쁨은 솟아오르는 대신에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무너지고 쓰러지는 소리 속에 작은 외침이 일어난다. 별, 별까지는 가야 한다. 별까지, 별까지!
"우리 삶이 먼 여정일지라도/ 걷고 걸어 마침내 하늘까지는 가야 한다/ 닳은 신발 끝에 노래를 달고/ 걷고 걸어 마침내 별까지는 가야 한다// 우리가 깃들인 마을엔 잎새들 푸르고/ 꽃은 칭찬하지 않아도 향기로 핀다/ 숲과 나무에 깃든 삶들은 아무리 노래해도/ 목쉬지 않는다/ 사람의 이름이 가슴으로 들어와 마침내/ 꽃이 되는 걸 아는 데/ 나는 쉰 해를 보냈다/ 미움도 보듬으면 노래가 되는 걸 아는 데/ 나는 반생을 보냈다// 나는 너무 오래 햇볕을 만졌다/ 이제 햇볕을 뒤로 하고 어둠 속으로 걸어가/ 별을 만져야 한다/ 나뭇잎이 짜 늘인 그늘이 넓어/ 마침내 그것이 천국이 되는 것을/ 나는 이제 배워야 한다// 먼지의 세간들이 일어서는 골목을 지나/ 성사(聖事)가 치러지는 교회를 지나/ 빛이 쌓이는 사원을 지나/ 마침내 어둠을 밝히는 별까지는/ 나는 걸어서 걸어서 가야 한다." 이기철(1943~)의 '별까지는 가야 한다' 전문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28.55km
전체 소요 시간 : 8시간 2분
서해랑길은 용두 해변 끝까지 따라가서 해안 언덕을 넘어 남포방조제로 이어간다.
‘용두해수욕장’ 명칭은 용두해수욕장이 자리한 ‘용두마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용두마을은 할미재에서 내려온 긴 능선이 바다와 접하는 곳에 있다. 마을 이름은 긴 능선을 용(龍)으로 보고, 마을이 용의 머리 부분에 자리하기 때문에 ‘용두(龍頭)’로 붙여졌다. 용두마을 안에는 용이 물을 먹었다는 우물인 용샘, 용이 쉬어간 정자인 용정, 그리고 용이 승천한 용굴이 있다. 용두해수욕장은 주차장, 샤워장, 화장실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주차장에는 ‘동백관’이라는 근로자복지회관이 들어서서 숙박과 편의시설을 제공하기도 한다. 남포방조제 남단에 있는 용두해수욕장은 과거 대천해수욕장이 관광객들 차지가 되자 보령시민들이 소문내지 않고 찾아가던 한적한 곳이었다. 해변의 길이가 짧지만 아늑하다. 용두해수욕장의 일몰은 ‘보령8경’인 무창포 낙조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은 전망대 겸 소공연장 무대이다. 오른쪽 해송림에 동백관 숲속야영장이 조성되어 있다.
해수욕장 뒤에는 해안사구 침식방지용 방벽이 있고, 위에 자리한 해송림은 소나무들이 굵지 않지만 개체 수가 많아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 하늘이 안 보일 정도이다. 특히 해변 뒤로 송림이 울창해 곳곳에 야영할 수 있는 터가 있어 피서객들의 캠핑장으로 유명하다. 용두해수욕장은 충청도 야생조수 고정조사지로 지정될 만큼 자연적 조건이 훌륭한 곳이다. 야생조류들이 많이 찾아오며,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숲속야영장을 살펴 보니 몇 가족들이 벌써 자리를 잡고 있다.
걸어온 용두 해안길을 뒤돌아보았다. 왼쪽 해송림에 동백관 숲속야영장, 오른쪽에 전망대가 조성되어 있다.
해변으로 나가지 않고 해송림 그늘이 있는 해안길을 따라간다.
해변의 모래가 곱다. 그 뒤쪽으로 갯벌과 파란 바다가 펼쳐지고 오른쪽에 남포면 월전리 죽도(竹島, 대섬)가 있다.
용두 해변 끝 방파제에서 바다로 뎈길 조성 공사가 진행 중이며 왼쪽 죽도와 그 사이로 열린 바다가 보령요트경기장이다.
그 앞에 용두마을 안내도와 설명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용두마을은 할미재에서 내려온 긴 능선이 바다와 접하는 곳에 위치한다. 마을 이름은 긴 능선을 용(龍)으로 보고, 머리 부분에 위치하기 때문에 붙여졌다. 마을 남쪽에는 사구(砂丘)로 막힌 골짜기가 논으로 개간되어 생활의 터전이 되었다. 보령 지방의 대표적인 동족마을로 일제강점기까지 120여 가구 중 95% 이상이 경주 이씨였고 현재도 대부분 경주 이씨가 거주한다. 경주 이씨는 17C 중엽 송은공 이의(李毅, 1615~1677) 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농업에만 종사하였으나, 19C 경부터 주변 바닷가에 노출된 애석(艾石)을 이용하여 석공업을 시작하였다. 이후 대부분의 가구가 석공업에 종사하여 부촌을 이루고 많은 토지를 소유하였다. 일제강점기 말 120여 가구 중 석공업에 종사하는 가구는 100여 가구에 이르렀다. 용두마을은 해안에 있는 마을이지만 독살이 한 곳 있었을 뿐, 어업을 전업으로 하는 가구나 배를 소유한 가구는 없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용머리의 동족 마을은 석공업과 관련하여 발전하였다고 할 수 있다. 현재는 마을에서 애석(艾石)이 산출되지 않으며 석공업의 중심지가 웅천읍 대천리, 대창리로 이동하여 석공업에 종사하는 가구는 없다. 과거 석공업에 종사하던 가구는 서울 등지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석공업에 종사하고 있다.
용두방파제에서 바다로 나가는 해상보도교 조성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어느 바위가 신랑바위이고 각시바위일까? 위치를 표시하거나 바위 모양을 그련 놓아야 한다.
용두마을에 살던 처녀와 총각이 서로 사랑하여 백년가약을 맹세하였다. 어느 날 용두 바다의 탐욕스러운 용이 둘의 사랑을 질투하여 처녀를 제물로 바치라고 했다. 사랑하는 남녀가 무척 괴로워하자 마을 사람들이 성주사 무염스님에게 간청하였다. 바다 용과 치열한 싸움을 하게 되는데 용은 머리가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고, 처녀와 총각은 각시바위, 신랑바위가 되어 영원한 사랑을 하게 되었다. 성주사 터에는 무염스님을 기리는 낭혜화상 탑비(국보 제8호)가 탑과 함께 남아있다. 비문은 신라의 학자 고운 최치원이 찬했다.
서해랑길은 용두 해변에서 앞쪽 언덕을 넘어 남포방조제로 이어간다.
장수바위는 어디에 있는가? 확인할 수가 없다. 탐방객들은 위치도가 있거나 바위에 표시해야 알 수 있다.
장수바위에는 치열한 싸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용두마을을 어지럽히던 용과 마을을 구한 용감한 장수의 싸움이었다. 탐욕스럽고 악덕한 용 때문에 마을 사람들의 일상은 늘 두려움에 떨어 괴로웠다. 그러자 마을에서 가장 힘이 세고 뛰어난 지략을 지닌 장수가 용과 맞서기로 한다. 길고 긴 싸움에서 결국 장수가 승리하며, 비로소 마을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용으로부터 마을을 지켜준 용맹 했던 장수를 기리며 이곳은 장수바위라 불린다. 현재도 장수의 말발굽 흔적이 남아 있다.
중앙 뒤쪽 할미재 고개에서 펜션들이 즐비한 열린바다로를 따라오다가 용두 해변으로 들어와 용두 해변을 걸어왔다.
수많은 갈매기들이 모래밭에서 휴식을 취하고 앞쪽으로 활짝 열린 바다가 펼쳐져 있다.
언덕을 오르다가 다시 한 번 할미재고개의 펜션촌과 용두마을 앞 바다를 뒤돌아보았다.
언덕으로 올라와 남포방조제 방향으로 해안 언덕길을 따라간다.
해안 언덕길을 빠져나가 남포방조제로 진입한다. 왼쪽에 요트경기장 주차장이 있으며 왼쪽 뒤에 죽도가 보인다.
남포방조제로 들어와서 걸어온 해안 언덕길을 뒤돌아본다. 보령국제요트대회가 2023.7.24~7.30까지 열리고 있다.
남포방조제는 죽도방파제를 중앙에 두고 두 방조제가 이어져 있다. 서해 바다를 막아 남포면 일대는 간척농지가 조성되었다.
남포면 북동부의 봉덕리·옥동리·소송리 일대, 북서부의 삼현리·제석리 일대 및 남부의 양항리·달산리·신흥리·양기리·월전리 일대는 높이 100m 이하의 저평지이고, 서부의 삼현리·양현리·월전리 일대는 간척 평야이다. 저평지와 간척 평야에서는 논농사가 주로 이루어지고, 구릉성 산지 및 산지의 완사면에서는 밭농사와 과수 농사가 국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서부 및 중서부의 삼현리·제석리·달산리·소송리·양항리·양기리·월전리 등지에 걸친 간척 평야는 대규모이며, 남포방조제(藍浦防潮堤)를 사이에 두고 서해와 접하고 있다. 해안의 남포방조제 앞에는 죽도(竹島)가 있으나, 육계도(陸繫島)[뭍과 잘록하게 이어진 모래섬]가 되어 있다. 해안 남쪽 끝에는 용두해수욕장(龍頭海水浴場)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남포방조제 제방길에서 동북쪽을 조망한다. 월전리 간척농지가 펼쳐져 있고 오른쪽 앞 숲은 월전리 보리섬 최고운유적이고, 그 뒤는 양항리 양항마을, 맨 오른쪽 뒤의 산은 옥마산, 중앙 뒤에 흐릿한 산은 성주산일 것이다.
주차장 오른쪽으로 보령요트경기장 진입로가 있다. 왼쪽은는 옥마산, 중앙 오른쪽은 봉화산일 것이라 추정한다. 왼쪽 옥마산 뒤쪽 만수산 자락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에 매월당 김시습이 삶을 마친 부여 무량사가 있는데, 매월당의 초상화와 부도가 있다.
오른쪽에 보령요트경기장 주차장과 그 뒤에 선수숙박장이 가늠된다.
월전리 용두방파제에서 바다로 나가는 해상보도교를 조성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용두 해변 오른쪽 보령요트경기장에 해상보도교를 조성 중이고, 중앙 뒤에 모창포, 오른쪽에 석대도가 가늠된다.
왼쪽 뒤에 봉화산, 중앙 오른쪽에 잔미산, 간척농지 중앙 왼쪽에 최고운유적이 확인된다.
잔미산은 보령시 남포면 옥서리와 웅천읍 두룡리·대천리·성동리·수부리로 둘러싸인 높이 416.8m의 산이다. 남북으로 긴 능선을 이루고 있다. 북쪽에는 옥미봉 봉수대가 있고, 중앙에는 대천리산성이 있으며, 북동쪽 골짜기에는 고려 시대 남포현의 치소를 보호하던 수부리산성이 있다. ‘잔미산’이라는 이름도 꼭대기에 있는 성(城)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등산로는 이어니재에서 오르는 길, 대천리 철로 건널목에서 오르는 길, 남포면 옥서리 새아니재로 오르는 길, 수부리 불근댕이마을로 오르는 길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앞쪽에 보령시 남포면 월전리 간척농지, 숲이 있는 뒤쪽은 양항리 지역이다. 오른쪽에 월전리 최고운유적, 그 뒤쪽이 양항리 양항마을, 오른쪽 산이 봉화산, 왼쪽 산이 옥마산일 것이라 추정한다.
최고운유적은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 월전리 보리섬의 서쪽에 있다. 최고운유적에는 높이 3m, 너비 1.8m 되는 바위 8개가 병풍처럼 서 있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이 바위에 글을 글을 남겼다고 하는데, 거의 마멸되었고 병풍석도 흐트러져 있다. 이 바위를 ‘병풍바위’라고 부른다. 최치원은 신라 하대의 혼란기를 비관하여 전국을 유랑하였는데, 이곳 보리섬[麥島]과 성주사를 왕래하면서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면서 시문을 짓고 수학(修學)하면서 병풍바위에 글씨를 새겼다는 전설이 있다. 최고운유적은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고, 보령시에서 관리한다. 보리섬은 남포방조제가 건설되기 전에는 해안에서 떨어진 아담하고 운치 있는 섬이었으나, 방조제 건설로 육지가 되었다. 최치원은 신라 시대를 대표하는 한학자이며, 당나라 유학 시절에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써서 이름을 날렸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남포면 일대를 조망한다. 앞쪽은 남포면 월전리 간척농지, 오른쪽 뒤는 양항리 간척농지일 것이다.
본래 남포군(藍浦郡) 신안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양아리, 의항리, 방항리(防項里)를 병합하고, ‘양아(梁牙)’와 ‘의항(蟻項)’의 이름을 따서 ‘양항리(梁項里)’라 하고, 보령군 남포면(藍浦面)에 편입되었다. 소구릉지를 제외한 서부와 중부 일부를 비롯한 나머지 대부분의 지역은 간척평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간척평야는 ‘간석지들’로 불리운다. 간석지들에서는 논농사가 대규모로 이루어지고 있다. 소구릉지 일부의 완사면에서는 국지적으로 밭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간석지들은 남포방조제를 사이에 두고 서해 바다와 접하고 있다. 양항리는 남포면의 서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은 달산리·신흥리에, 서쪽은 삼현리 및 서해에, 남쪽은 월전리·양기리에, 그리고 북쪽은 삼현리·달산리에 각각 접하고 있다. 행정리는 양항1~2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양항1리에 방목, 신전, 양촌 등이, 양항2리에 밤섬, 수리섬, 의항, 양아 등이 각각 있다. 주요 시설로는 남포농협미곡처리장, 남포방조제, 에스앤골프리조트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은 남포면 월전리 죽도(대섬), 중앙 뒤에 보이는 곳은 보령시 신흑동 대천해수욕장 지역이다.
왼쪽에 죽도항, 죽도의 명소 '상화원(尙和園, 조화를 숭상하는 한국식 정원)이 죽도 서쪽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남포방조제에 의해 조류지가 형성되어 간척농지 남쪽으로 올라오고 있다. 다리 건너편 지역은 남포면 양항리 지역이다. 조류지(潮流池)란 썰물과 밀물 때에 농경지로 바닷물이 밀려 올라오지 못하도록 물을 잡아두는 큰 못을 이른다.
남포방조제는 죽도방파제에 의하여 2구간으로 나뉘어 있다. 죽도는 육계도(陸繫島, 뭍과 이어진 섬)가 되었다.
죽도는 방파제에 의해 육지와 이어진 육계도(陸繫島)이다. 이 죽도방파제를 중심으로 남과 북의 두 방조제가 이어져 있다. 죽도보물섬 관광지 조형물 앞에 '고려정승 풍천인 임향의 귀양살이 터' 빗돌이 세워져 있다.
오른쪽 앞에 죽도항, 그 뒤쪽에 석대도, 중앙 뒤에 무창포해수욕장, 그 오른쪽 뒤에 직언도가 가늠된다. 무창포로부터 웅천읍 해안이 왼쪽 남포면 월전리 용두 해안으로 이어지고 그 앞에 보령요트경기장이 있으며 왼쪽에 남포방조제가 가로막고 있다.
용두방파제로부터 죽도방파제로 남포방조제가 이어지고 있다. 보령요트경기장과 해상보도교, 용두 해안이 정면에 보인다.
죽도 입구에 세워져 있는, 갓과 장죽에 한반도 모형의 '고려정승 풍천인 임향의 귀양살이 터' 비석이다.
이곳 죽도(竹島)는 고려조(高麗朝)의 절의충신(節義忠臣) 풍천인(豐川人) 임향(任珦)께서 귀양살이 하시던 곳이다.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신돈(辛旽)을 중용(重用)하자, 공(公)께서는 중(僧)을 재상(宰相)으로 들이심(入相)은 천하의 부끄러움이라고 임금께 직접 글을 올림 (直諫上疏)으로써 임금의 노여움을 사고 유배형(流配刑)을 당하시게 되었다. 처음에는 홍주(洪州) 고구도(高丘島)로 유배되었다가 후에 이곳으로 이배(移配)되었다. 이씨조선(李氏朝鮮)의 건국(서기 1392년) 으로 공은 사면(赦免)되었고 조정(朝廷)으로부터 입사(入仕)의 권유(勸誘)도 받았으나, 공께서는 려조(麗朝)의 신하(臣下)로서 이조(李朝)에 출사(出仕)할 수 없다 하여 단호이 물리치고 남포현(藍浦縣) 주산(珠山) 오상동(五相洞)에 숨어 들어가 글과 벗하며 여생(餘生)을 마치셨다고 전하여진다. 공의 묘소(墓所)와 신도비(神道碑)는 보령시(保寧市) 웅천(熊川) 동막동(東幕洞)에 있다. 한편,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의 호국승장 (護國僧將)이신 유정(惟政) 사명대사(四溟大師)는 공의 현손(玄孫)이다. 이곳이 공께서 외로움과 고난(苦難)으로 힘드셨던 귀양살이 터였음을 이 빗돌에 새겨 길이 기념하고자 한다. 2008년 5월
죽도보물섬 관광지 조형물 앞에 '고려정승 풍천인 임향의 귀양살이 터' 빗돌이 보인다.
왼쪽 바다와 오른쪽 조류지(潮流池) 사이로 남포방조제가 길게 이어진다. 중앙 뒤에 대천해수욕장 건물들이 보인다. 남포방조제는 보령시 남포면 월전리와 신흑동을 연결하는 방조제로, 1985년에 착공하여 1997년에 완공되었으며 길이는 3.69km라고 한다.
남포방조제 조류지(潮流池) 건너편에 남포면 양항리 간척농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건너편 중앙 지역이 보령시 중심 시가지 명천동 일대이고, 오른쪽 맨 뒤에 희미하게 성주산이 가늠된다.
왼쪽 앞에 죽도, 중앙 뒤에 무창포, 오른쪽에 석대도, 석대도 뒤 왼쪽은 직언도, 석대도 뒤 오른쪽은 황죽도일 것이다.
맨 오른쪽 뒤에 무창포, 오른쪽 앞에 죽도, 왼쪽에 남포방조제 조류지(潮流池), 왼쪽 뒤의 산은 잔미산일 것이라 추정한다.
남포방조제 조류지(潮流池)가 앞에 있고, 중앙 왼쪽 뒤에 옥마산, 남포면 일대의 간척농지가 드넓다. 옥마산 뒤 만수산 자락에는 만수산 무량사가 있으며, 그곳에서 매월당 김시습이 삶을 마쳤으며, 매월당의 초상화와 부도가 있다.
옥마산(玉馬山)은 보령시 명천동과 남포면 동쪽에 병풍처럼 두른 높이 601m의 산으로 성주산과 같은 줄기다. 과거에는 산의 곳곳에서 석탄을 채굴하였다. 정상에는 통신중계탑, 정상 부근 능선에는 패러글라이더 이륙장이 있다. 산의 동쪽에는 석탄박물관, 청소년수련관이 있고, 서쪽에는 남포읍성, 남포향교, 경순왕영모전 등이 있다. 등산로는 대영사에서 오르는 길, 명천폭포에서 오르는 길, 청소년수련관에서 오르는 길, 말재에서 오르는 길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남포방조제 조류지(潮流池)와 간척농지가 펼쳐지고, 왼쪽 맨 뒤에 성주산, 중앙 오른쪽에 옥마산이 있다.
남포면의 동부는 차령산맥(車嶺山脈) 주맥의 일부여서 비교적 높은 산지를 형성하고 있다. 동부 산지는 북동-남서 방향으로 연속적 산지를 이루고 있는데, 북동쪽 경계의 옥마산(玉馬山)[599.0m]은 높이가 가장 높고, 남동쪽 경계의 잔미산[413.5m]은 두 번째로 높다. 동부 산지의 중간에는 봉화산(烽火山)[329.0m]도 있다. 남부는 높이 270여m의 구릉성 산지[274.6m]를 중심으로 북동-남서 방향의 연속적 산지를 형성하고 있다. 동부 산지와 남부 산지는 남동쪽에서 연결되어 있다. 북부는 제석리·봉덕리·소송리 일대에 걸쳐 당경산[180m]이 구릉성 산지를 이루고 있다. 동부, 남부 및 북부 일부 산지들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대부분은 대체로 높이 100m 이하의 저평지이거나 간척 평야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조류지(潮流池)와 간척농지 건너편 중앙은 보령시 명천동 일대일 것이고, 오른쪽 맨 뒤에 구름에 가린 성주산이 보인다.
성주산(聖住山)은 ‘보령의 지붕’이라 불리는 산으로 보령시 중앙부의 동쪽에 있는 산지를 통칭한다. 최고봉은 높이 680m이다. 백월산-성태산-문봉산-장군봉-왕자봉-바래기재로 이어지는 능선과 문봉산-비로봉-전망대-문수봉-칠성봉-꾀깔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포함하는 큰 산이다. 과거에는 곳곳에서 석탄을 채굴하였다. 산자락에는 심원동계곡, 물탕골계곡, 화장골계곡 등 계곡과 성주사지, 백운사 등의 절, 폐광을 이용한 냉풍욕장, 성주산자연휴양림 등의 명승지가 있다. 등산로는 백월산에서 성태산으로 향하는 능선길, 광불사에서 왕자봉으로 오르는길, 바래기재로 오르는 길, 심원동에서 오르는 길, 백운사로 오르는 길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남포방조제 건너편은 보령시 신흑동 일대이다. 중앙에 흰 건물이 있는 지역이 신흑동 대천해수욕장이 있는 곳이다.
과거의 보령은 주포를 중심으로 한 지금의 보령시 북부 지역으로, 백제 시대에는 신촌(新村)으로 불렸으며, 통일신라 시대에는 신읍(新邑)이라 불리다가 고려 태조 23년에 보령현으로 개정되었다. 1895년 지방 제도 개편에 따라 보령군으로 개칭되었다. 남포군은 남포를 중심으로 한 보령시의 남부 지역으로, 백제 시대에는 사포(寺浦)로 불리다가 통일신라 시대에 남포현으로 개칭되었고, 1895년 지방 제도 개편으로 남포군으로 불리게 되었다. 오천군은 오천을 중심으로 한 보령시의 서북부와 도서 지역으로, 옛 충청수영을 중심으로 생긴 군이다. 그러다가 1906년 10월 면상면과 면하면은 태안군으로 이속하였고, 1914년 부군폐합령(府郡廢合令)에 의하여 하남면의 연도, 개야도와 하서면의 어청도가 전라북도 옥구군으로 이속되고 나머지는 보령군에 편입되었다. 보령시 지역은 1914년 3월 일제의 부군통폐합령에 따라 과거의 보령군·남포군·오천군이 통합되어 보령군으로 개편되면서 하나의 지역 사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후 1963년에 대천면이 대천읍으로 승격하였고, 1986년에 대천읍이 대천시로 승격하여 분리되었다. 1995년에 도농 통합에 따라 대천시와 보령군이 통합되어 지금의 보령시가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남포방조제 조류지(潮流池)와 간척농지 일대는 남포면 양항리와 삼현리 일대이다. 보령 중심시가지 뒤쪽에 성주산이 구름안개에 가려 흐릿하게 보인다. 성주산 아래에는 성주사지(保寧 聖住寺址)가 있다.
보령 성주사지(保寧 聖住寺址)는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2 일원, 성주산 남쪽 기슭에 있는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사가 있던 절터이다. 성주사(聖住寺)는 백제 시대 오합사(烏合寺)라는 절로 창건된 후, 삼국 통일 직후 김인문(金仁問)[629~694]의 원찰(願刹)로 크게 중창되었다. 9세기 전반경 김헌창(金憲昌)의 난으로 소실되었다가, 이후 통일 신라 후기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성주산문(聖住山門)으로 새롭게 개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주사는 몽골의 침략기 이후 소실되었다가 다시 중건되어 임진왜란 직후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주사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는 사찰 경내에 있는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保寧 聖住寺址 大郞慧和尙塔碑)가 대표적이다.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라고도 불리는데, 낭혜화상 무염(無染)[800~888]이 888년(진성여왕 2)에 입적하자 낭혜화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탑비이다.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는 최치원(崔致遠)[857~?]이 왕명을 받고 890년(진성여왕 4)에서 897년(효공왕 원년) 사이에 비문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밖에 성주사와 관련된 중요한 사료로는 조선 전기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숭암산 성주사 사적(崇巖山 聖住寺 事蹟)’이 있다. ‘숭암산 성주사 사적’에 따르면 성주사는 백제 법왕이 599년(법왕 원년)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위무하려는 뜻에서 세운 절이라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중앙에 무창포와 그 앞 석대도, 그 오른쪽 뒤에 황죽도, 왼쪽 앞에 죽도와 그 뒤 용두 해변이 가늠된다. 파도와 해일을 막기 위하여 가지가 4개 달린 마름쇠 모양의 콘크리트 구조물 테트라포드가 쌓여 있다.
남포방조제에 의해 조류지(潮流池)가 형성되어 있다. 보령 시가지 뒤쪽에 성주산이 흐릿하다. 그 자락에 성주사지가 있다.
김인문 일가에 의해 창건된 성주사 이전의 선대 가람은 150여 년간 존속한 후 822년(헌덕왕 14) 발생한 김헌창의 난에 연루되어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주사’라는 이름의 사찰은 무염이 주도하여 9세기 중반경 대대적으로 개창하였다. 무염은 신라 후기의 승려로 821년(헌덕왕 13) 당나라로 유학을 간 후 845년(문성왕 7) 귀국하였다. 이후 보령의 성주사에서 40여 년 동안 주석(住錫)하였으며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문의 개산조(開山祖)가 되었다. 보령 성주사지는 절터의 남쪽에서부터 중문지, 성주사지석등(聖住寺址石燈),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 금당지가 차례로 배치되어 있다. 금당지 뒤편에는 통일 신라 후기에 조성된 삼층석탑 3기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다른 사찰 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석탑 배치이다. 삼층석탑 3기의 뒤편에는 강당지가 있다.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는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에서 서쪽으로 80m 떨어진 곳에 있다. 보령 성주사지는 유서 깊은 역사를 간직한 장소로 인정되어 1984년 8월 13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남포천 하구 남포방조제 북단 해안이다. 해변은 국군휴양 해수욕장인 것 같다. 곶(串) 구릉지 뒤편이 대천해수욕장이다.
오른쪽에 남포방조제 준공탑, 왼쪽에 배수갑문이 있으며 남포천은 방조제에 갇혀 조류지(潮流池)가 형성되었다. 배수갑문 옆 계단을 통과하여 '남포방조제로'로 내려간다. 보령시 남포면 월전리에서 보령시 신흑동으로 넘어왔다.
오른쪽 방조제길에서 남포방조제로로 내려왔다. 왼쪽에 남포방조제 준공탑이 서 있다. 남포방조제는 보령시 남포면 월전리와 신흑동을 연결하는 방조제로, 1985년에 착공하여 1997년에 완공되었으며 길이는 3.69km라고 한다.
남포방조제 배수갑문 앞 지방도 제607호선 남포방제로의 남포교를 건넌다.
남포교에서 보령시 신흑동 일대와 중앙 오른쪽 남포면 삼현리 지역을 바라본다. 중앙 뒤쪽에 성주산이 늠름하다.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 읍내리에서 발원하여 남포저수지를 지나 소송리를 지나 삼현리에서 서해로 합류하는 지방하천이다. 금강권역 서해권 수계의 지방하천으로, 하천의 수계는 본류인 남포천과 지류인 읍내천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천연장은 4.5㎞, 유로연장 4.5㎞, 유역면적 9.6㎢이다.(두산백과)
남포천은 방조제에 가로막혀 남포면 삼현리 일대에 조류지(潮流池)를 형성하였다. 왼쪽에 성주산, 오른쪽에 마옥산이 보인다.
남포교에서 지방도 제607호선 남포방조제로를 따라와서 횡단보도를 건너 갓배교차로 방향으로 올라간다.
지방조 제 607호선 남포방조제로를 따라 갓배교차로로 올라간다. 오른쪽 건물은 국군복지단 대천콘도 제2별관이다.
남포교를 건너 남포방조제로 왼쪽 보도를 따라오다가 횡단보도를 건너 오른쪽으로 건너왔다. 왼쪽에 국군복지단 대천콘도 제2별관 건물이 있다.
갓배교차로 건너편에 국군복지단 대천콘도2관과 그 왼쪽에 제1별관이 있으며, 위쪽에 (주)동원냉동산업이 있다.
갓배교차로 건너편 왼쪽에 국군복지단 대천콘도2관, 오른쪽에 대천콘도2관 제2별관이 있다.
갓배교차로에서 북쪽 광장진입로를 따라 대천해수욕장 방향으로 진행한다.
공군미사일방어사령부 사격지원대 입구를 지나 계속 광장진입로를 따라간다.
걸어온 광장진입로를 뒤돌아보았다. 공군미사일방어사령부 사격지원대 입구 위쪽에 전농 보령농민회에서 사격장을 폐쇄하라는 알림막을 설치하여 놓았다.
광장진입로에서 동쪽을 조망하였다. 가로수가 있는 남포방조제로 뒤쪽은 남포면 삼현리 일대이고 중앙의 산은 당경산인 듯. 보령시 북부는 제석리·봉덕리·소송리 일대에 걸쳐 당경산[180m]이 구릉성 산지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보령시 중심 시가지는 왼쪽 뒤에 위치하는 것 같다.
광장진입로에서 동북쪽을 조망한다. 오른쪽 2번째 벚나무 뒤로 성주산이 보이고 보령 시가지는 오른쪽 뒤에 위치하는 듯.
광장진입로를 따라가다가 왼쪽으로 꺾어 갓바위마을로 진행한다. 보령시 대천5동이 동서로 펼쳐쳐 자리하고 있다.
충청남도 보령시에는 대천1동, 대천2동, 대천3동, 대천4동, 대천5동 등 5개 행정동이 있다. 대천5동은 신흑동·요암동·남곡동 및 내항동을 법정동으로 구성하고 있다. 대천5동의 남부·서부 및 북동부의 일부에 각각 90~120m의 낮은 구릉성 산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서부의 생앵산[93.5m], 중북부의 해망산(海望山)[114.3m], 북동부의 왕대산[123.9m]의 구릉성 산지들이 그것들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광장진입로 갓바위마을 입구에 갓바위마을 민박촌 표석과 서해랑길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종점까지 2.3km가 남았다.
대천5동의 들녘과 중앙 왼쪽의 생앵산이 가늠된다. 오른쪽으로 해망산과 왕대산이 이어진다.
대천5동의 남부·서부 및 북동부의 일부에 각각 90~120m의 낮은 구릉성 산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서부의 생앵산[93.5m], 중북부의 해망산(海望山)[114.3m], 북동부의 왕대산[123.9m]의 구릉성 산지들이 그것들이다. 낮은 구릉성 산지 사이에는 소규모의 곡저지가 있고, 곡저지에는 충적지가 형성되어 있어서 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남서부의 해안 인접부에는 비교적 규모가 큰 간척평야가 조성되어 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낮은 구릉성 산지들의 사면 말단부와 곡저지 사이의 골에는 자연마을이 입지해 있다. 남서부를 포함한 서부의 해안지대에는 시가지가 북서-남동 방향으로 형성되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대천해수욕장 뒤쪽으로 대천5동 마을들이 동쪽으로 이어지고 들녘이 펼쳐져 있다.
대천5동은 1914년 전국적 행정구역 개편 시 보령군 대천면 신흑리·요암리·남곡리·내항리 지역이었다. 1963년 대천면의 대천읍 승격으로 대천읍 신흑리·요암리·남곡리·내항리가 되었다. 1986년 1월 1일 대천읍이 대천시로 승격되면서 신흑동(新黑洞)·요암동(蓼庵洞)·(藍谷洞)·내항동(內項洞)이 되었고, 신흑동이 신설된 행정동인 현포동(玄浦洞)의 관할로, 요암동·남곡동·내항동이 신설된 행정동인 왕대동(王臺洞) 관할이 되었다. 왕대동(王臺洞)은 동의 중앙에 있는 왕대산(王臺山)의 이름을 딴 것이다. 1998년 10월 28일 왕대동이 현포동으로 통합되었고, 1999년 7월 20일 현포동이 대천5동으로 변경되었는데, 당시 행정동으로서 대천5동은 신흑동·남곡동·내항동·요암동 등을 법정동으로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대천해수욕장 뒤쪽에 대천5동 들녘이 펼쳐져 있다. 들녘 뒤 갓바위마을 민박촌으로 이어간다.
대천5동 해안 인접 시가지의 바다 쪽에는 해안사빈이 북서-남동 방향으로 길게 띠 모양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이 해안사빈을 기반으로 개설된 것이 대천해수욕장(大川海水浴場)이다. 대천5동은 보령시의 중서부에 있으며, 동쪽은 죽정동·명천동에, 서쪽은 서해에, 남쪽은 서해와 남포면에, 그리고 북쪽은 서해와 대천천에 각각 접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신흑동에 군입·고령·상주막·고잠·강당·마루뜰·갓바위·흑포·군헌·고사울 및 신대말, 요암동에 사곡·요곡·군마루 및 육골, 남곡동에 장벌·남서·방골·빈돈·탑동·갈산동, 남동 및 심방골, 내항동에 내동 중뜸·음지뜸·장성·외송 및 녹문 등이 있다. 국도 제77호선은 대천항, 보령해저터널 및 원산도를 거쳐서 안면도 영목항 일대로 유입된다. 주요 시설로는 신흑동에 대천항(大川港), 대천등대, 오천면어항출장소, 충남해양과학고등학교, 대천서중학교, 청파초등학교, 한화리조트 대천파로스, 청용초등학교, 대천연안여객선터미널, 대천5동 행정복지센터 및 대천해수욕장 등이 있다. 대천해수욕장에는 호텔, 모텔, 횟집, 음식점, 유흥시설 등이 대규모로 자리해 있다. 북서부의 해안 쪽 끝자락에는 대천항이 있고, 근접해서 소규모의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 시가지에는 대천연안여객선터미널, 수산시장, 수산물 판매업소, 수산물 가공시설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에 국군복지단 대천콘도가 있고, 갓바위마을 민박촌은 오른쪽 갓바위1길로 진입한다.
갓바위1길 왼쪽으로 돌아가 해동민박 앞으로 이어간다.
갓바위마을 민박촌 해동민박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어 갓바위1길을 따라간다.
갓바위1길에서 왼쪽 대천민박 앞 갓바위2길로 진입한다.
갓바위마을 민박촌 갓바위2길을 따라간다.
갓바위2길과 해수욕장 2길이 교차하는 사거리에서 대천해수욕장은 직진한다. 잠시 오른쪽에 있는 GS25 편의점을 들른다.
갓바위2길의 GS25 편의점 앞 탁자에서 캔커피를 마시고 출발한다.
갯바위2길 GS25 편의점 앞에서 사거리로 나가 오른쪽으로 꺾어 해수욕장2길로 진입한다.
갯바위2길에서 해수욕장2길로 진입하여 해수욕장2길을 따라 대천해수욕장으로 나간다.
해수욕장2길에서 대해로로 나와 대천해수욕장 입구로 나간다.
대해로를 따라 계속 진행해도 괜찮지만 해수욕장으로 내려가 해변길로 이어간다.
해수욕장 내려가는 계단에서 대천해수욕장과 바다의 다보도를 조망한다.
백사장의 모래질이 동양에서는 보기 드물게 조개껍데기가 잘게 부서진 패각분으로 이루어져 있어 몸에 달라붙지 않으며 물에 잘 씻긴다. 평균 수심 1.5m로 얕은 수심에 경사가 완만하고 수온 역시 적당하여 가족을 동반하여 해수욕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해안에는 30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백사장을 따라 줄지어 있고, 소나무 숲이 울창한 송림이 있어 야영장으로 이용된다. 백사장 남쪽으로 4㎞ 지점에 자리한 무인도인 다보도에는 기암괴석이 잘 발달되어 있어 풍치가 아름답다. - 디지털보령문화대전
바다로 돌출한 곶(串) 뒤쪽에 국군복지단 대천콘도가 있으며 해안은 국군휴양 해변이다.
오른쪽 언덕의 노을광장 아래 해변길을 따라간다. 바다 왼쪽에 원산도, 그 위쪽에 안면도,원산도 왼쪽에 삽시도를 가늠한다.
대천해수욕장 해변에서 왼쪽 뒤의 다보섬을 조망한다. 그 왼쪽 뒤의 작은 섬은 용섬일 것이다.
다보도(多寶島)는 대천해수욕장 앞바다에 있는 무인도(無人島)로 기암괴석과 파도에 씻긴 하얀 차돌 해변으로 이루어진 섬이다. 대천해수욕장 해변가에서 쉽게 육안으로 볼 수 있다. 오래 살던 주민들이나 옛 보령군 웅천면 주민들이 ‘다슬기암’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다보도(多寶島)’가 되었다고 한다. 보령시 신흑동에 있는 대천해수욕장 앞바다 4㎞ 지점에 있으며, 면적 245㎡의 바위섬이다. 섬 밑에는 흰 자갈이 깔려 있어 경치가 아름다우며, 폭이 매우 좁은 섬이다. 기암괴석이 멋을 더하고 있으며 한쪽에는 보석처럼 아름다운 조약돌이 깔려 있고, 섬 전체가 해안사빈(海岸沙濱)[파랑 등의 작용으로 바닷가에 모래가 쌓여 이루어진 해안 지형] 없이 전부 돌과 자갈로 이루어져 있다. 다보도에 가기 위해서는 대천해수욕장과 다보도 간을 왕복 운항하는 비정기 유람선을 이용한다. 유람선은 7월과 8월에만 한시적으로 운항하며, 운항시간은 20~25분 정도 소요된다. 바닥이 훤히 들여다 보일 정도로 깨끗한 바닷물이 자랑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원산도는 대천항에서 해저터널로 갈 수 있다. 그 오른쪽 위에 안면도 영목항, 원산도 왼쪽에 삽시도를 가늠한다.
대천해수욕장은 파도의 작용으로 해안에 모래가 장기간 퇴적되어 생긴 모래 퇴적 지형, 즉 해안 사빈을 중심으로 구성되는데, 해안 사빈은 일반적으로 백사장이라고 불린다. 해안 사빈의 뒤편에는 본래 해안 사빈의 모래가 바람에 날려 형성된 모래 언덕, 즉 해안 사구가 대규모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해수욕장 개발 이래 가옥 및 상가 입지, 도로 건설, 산업용 모래 채취 등으로 상당 부분이 훼손되어 있다. 해수욕장으로 이용되는 해안 사빈은 밀물 때는 대부분 해안 사구 아래까지 바닷물에 잠긴다. 서해안 최대의 해수욕장으로 백사장의 면적은 30,000㎡, 길이는 3,500m, 폭은 100m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대천해수욕장 2023년 머드축제가 열리고 있다. 오른쪽 위의 안면도, 그 아래 왼쪽의 원산도, 그 왼쪽의 삽시도를 가늠한다.
대천해수욕장은 1932년 7월 15일 경남철도주식회사의 승객 유치 수익 사업의 일환으로, 시설 설비와 여객 운임 할인 등을 통한 해수욕객 유치와 운영, 지역 유지의 노력으로 해수욕장 통로 도로를 개수하면서 서해안 최고의 해수욕장으로 개장되어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9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서해안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해수욕장이다. 1969년 1월 0.8㎢에 대하여 당시 교통부로부터 관광지 지정을 받게 되었으며, 1978년 11월 22일 2.15㎢에 대하여 관광휴양지역으로 고시되면서 「관광사업법」에 의한 관광지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개발 사업이 제대로 진전되지 못했는데, 관광지 개발에 따른 막대한 사업비 확보가 곤란하고 일부 주민[특히 어민]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이다. - 디지털보령문화대전
대천해수욕장 남쪽 해변을 뒤돌아본다. 해변 왼쪽은 노을광장이다. 바다 중앙 왼쪽에 무창포 앞의 석대도가 확인된다.
대천해수욕장에서는 해마다 7월 중순이면 보령머드축제가 열린다. 머드를 이용한 다양한 게임을 즐길 수 있어 색다른 체험을 해볼 수 있다. 이 축제는 해외에도 많이 알려져 축제 기간이면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대천해수욕장에서 바다의 여인상이 서 있는 ‘여인의 광장’은 구광장, 시민헌장탑이 서 있는 ‘노을광장‘은 신광장으로 불린다. 대천항 가까운 곳에는 분수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해수욕장에서 직선거리로 약 4㎞ 떨어져 있는 다보도는 무인도이다. 여름철이면 여인의 광장 앞에서 다보도를 오가는 유람선이 운행된다. 대천해수욕장은 해양 스포츠의 제반 요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와이어를 몸에 달고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짚트랙, 대천해수욕장부터 대천항까지 이어지는 2.3㎞의 스카이바이크, 카트와 겨울철에만 운영되는 스케이트장 등의 레포츠 등을 즐길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대해로의 관광안내센터를 바라보며 대천해수욕장 해변길을 따라 계속 이어간다.
관광안내센터를 지나 해변길을 따라가다가 계단을 올라 해수욕장4길 '만남의 광장'으로 올라간다.
대천해수욕장 만남의 광장에 '머드가족' 대형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다.
본 조형물은 세계적인 해양관광지 대천해수욕장에서 개최되고 있는 보령머드축제 2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 설치하였다. 대천해수욕장을 거니는 관광객을 형상화하여 머드축제와 함께하는 가족의 일상을 표현했다. 스테인리스 스틸에 최고의 가치를 상징하는 골드와 역동의 상징인 브론즈 컬러를 채색하여 인체의 아름다운 특징과 동세를 자연스럽게 나타냈다. 조형물의 높이는 아빠 8.8m, 엄마 8.2m, 아들 5.7m, 딸 6.6m, 반려견은 2.5m다. 2018. 6. 보령시장 - 작품 설명안내판
머드광장을 향해 해수욕장7길을 따라가는 길에 '머순아 사랑해' 조형물을 보고 지나간다.
해수욕장7길 쏠레르호텔 앞 광장에 여러 바다 생물 조형물들이 조성되어 있다. 그 오른쪽 빌딩은 머드비치호텔이다.
머드비치호텔 앞, 머드광장 남쪽에 서해랑길 이정목과 그 오른쪽 이정목 기둥에 서해랑길 60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붙어 있다.
서해랑길 59코스 종점은 이곳에서 900m 지점이라고 이정목 날개에 적혀 있다.
이정목 기둥에 서해랑길 60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붙어 있다. 59코스 종점은 분수광장과 스카이바이크를 지나서 있는 것 같다.
서해랑길 60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길고 긴 서해랑길 59코스 탐방을 마치며 기념한다.
서해랑길 58코스와 59코스를 종주한고 머드광장 앞으로 나가서 서해랑길 탐방팀 버스를 찾아간다.
대천해수욕장은 전국의 다른 해수욕장에 비해서는 일반 숙박시설과 같은 편의시설은 비교적 많이 갖추었다고 할 수 있으나, 날로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는 관광객의 욕구를 충족하기에는 모든 시설면이나 환경면에서 여건이 크게 부족하여 이대로 지속된다면 관광객의 감소마저 우려되었다. 또한, 석탄 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어 정부의 합리화 계획에 따라 광산 대부분이 폐광되었으므로 대체 소득원의 개발이 절실히 요구되어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해수욕장 관광지 개발을 착수하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현재 대천해수욕장은 대천 지역 경제의 상당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 디지털보령문화대전
머드광장에 여러 물놀이시설이 조성되어 있다. 머드광장 앞에서 머드로 횡단보도를 건너 머드광장로를 따라간다.
1998년부터 개최된 보령 머드축제는 ‘문화관광축제’로 지정되었으며 세계적인 축제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대형 머드탕, 머드 씨름 대회, 머드 슬라이딩, 갯벌 극기 훈련 체험 등 관광객을 위한 다양한 머드 체험 프로그램과 록 콘서트, 머드 미인 선발 대회, 행글라이더 대회, 용왕굿한마당 등의 행사를 개최하여 관광객에게 해수욕과 머드 체험을 동시에 경험하고 즐길 수 있게 하고 있다. 2022년에는 보령해양머드박람회가 7~8월 중 한 달여에 걸쳐 대천해수욕장 일원에서 개최된 바 있다. 천연적으로 빼어난 해수욕장의 조건에 걸맞게 각종 휴양 편의시설, 문화 예술 공간도 서해안에서는 으뜸으로 갖추고 있으며, 최근에는 각종 서비스 시설의 고급화도 병행되고 있다. 보령시는 국제적인 수준의 휴양 및 해양 레포츠 관광지로 도약하기 위해 ‘서해안권광역관광개발’ 계획에 따라 아쿠아리움, 숙박시설, 상가, 문화시설 등 전체 경관의 재정비와 해수와 머드를 이용한 스파시설 조성으로 휴양 기능을 강화하고, 마리나를 비롯한 해양 레포츠 센터를 조성하는 관광 개발 사업을 추진 중에 있다. 대천해수욕장은 무창포해수욕장, 죽도 관광지와 함께 ‘보령 해수욕장 관광특구’로 지정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대천해수욕장에는 외지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며, 서해안 최고의 휴양지이자 국제적 관광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머드축제에 참여한 수영객들이 머드광장의 여러 물놀이시설을 즐긴다.
고속&시외버스터미널 방향으로 머드광장로를 따라 간다. 앞쪽에 대천서중 및 충남해양과학고등학교 건물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