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여의주의 뜻
여의주는 이익의 구슬 잘 다듬는다는 뜻
사심의 탐욕 벗고 무심의 무욕 바라는 것
“이미 이 여의주를 알았으니 나와 남을 이롭게 함이 끝이 없음이라.
강에 달 비치고 소나무에 바람 부니, 긴긴밤 맑은 하늘 무슨 할 일이 있을손가?
불성계의 여의주는 마음의 구슬이요, 안개 이슬 구름 노을은 몸 위의 옷이로다.”
증도가의 위 구절은 깨달은 이가 부른 밝고 맑은 마음의 시원함을 읊은 것이다.
깨달은 이는 마치 마음이 여의주를 품은 것에 비유된다.
여의주는 마음대로 자신의 이익을 부르는 그런 주문을 가능케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불교의 사회사상의 핵심을 얻을 수 있다.
현대식 공부를 한 젊은이들은 불교사상의 사회적 관심을
사회 정의의 회복에 있는 것인 양 즐겨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불교는 사회정의에 몰두하는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다.
불교는 그런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는 사회적 이익을 더 돋보이게 한다고 여긴다.
여기에 불교사상의 진정한 참모습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불교는 기독교처럼 사회정의를 외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 까닭은 석가모니의 눈에는 사회정의가 사실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인간에게 사실상 이익이 아니라, 손해가 몰려 왔다는 것을 말한다.
사회정의는 이상주의적 허구요 망상을 말하고,
사회정의의 요구는 자기에게 오로지
손해만을 안기는 그런 판결이나, 여론을 부당하게 여기는 발상법과 같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법을 말함에서 결코 정의의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늘 이익의 용어를 사용하신 것은 그것이 이 우주의 사실이므로 자연적으로 쓰신 것이다.
자연적인 것이 사실이고 사실적인 것이 법이므로
불법은 사실의 이상도 그 이하도 결단코 아니다.
화엄학에서 불법을 ‘이사무애(理事無碍)’로 설파한 이유는
불법의 사실(事)이 바로 법(理)을 뜻하므로 생긴 구절이라 하겠다.
불법은 자연의 사실을 넘어선 그 이상의 것도 그 이하의 것도 주장하지 않는다.
정의는 자연적 사실의 차원에서 존재하지 않는 인간의 허구적 이념일 뿐이다.
자연적 사실의 차원에서 존재하는 것은 오직 이익과 손해의 두 개념일 뿐이다.
정의의 요구는 늘 손해만을 초래하는 판결을 재숙고하여 달라는 주장일 뿐이다.
불교는 인간에게 늘 이익만을 있게끔 하는 그런 철학이요 종교다.
그래서 팔만 사천의 법문은 죄다 모든 중생들에게 생물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나,
사회생활상(도덕적으로)으로나, 정신심리학적으로
다 이익이 되게 하는 사고방식의 쓰임새를 말하는 교설이다.
그래서 불교만큼 인간에게 이익의 길을
친절히 안내하는 가르침이 없다고 여겨야 할 것 같다.
사실적으로 왜 부당한지
손해의 측면을 좌우간 상세히 보고하면 쉽게 수월하게 풀릴 텐데,
불필요한 도덕주의의 유교적 잔재가 한국 사회에 깊숙이 남아 있어서
정의의 명분으로 서로 대처하는 고약한 사고 때문에
우리나라는 끝까지 서로 물고 찢겨져서
게딱지같은 명분이 나라전체를 투견장으로 만들고 만다.
불교는 기독교나 유교처럼 도덕적 정의를 요구하는 그런 철학이나 종교가 아니다.
구체적으로 이익이나 손해의 측면이 분명해야 인간은 중재를 할 수 있고
현실적인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불교는 유교나 기독교처럼 이상적인 주장을 하지 않는다.
불교가 말하는 여의주는 이런 각도에서 이익의 구슬을 잘 다듬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익의 구슬을 잘 다듬는다는 뜻은
마음이 사심의 탐욕을 버리고 무심의 무욕을 바라는 데서 잘 나타난다.
그 여의주가 곧 본성의 구슬이다.
이 본성의 구슬은 바로 여래장의 구슬이고 불성의 구슬이다.
우리는 여기서 ‘증도가’에서 영가 대사가 신화와 같은
여의주라는 의미를 등장시켰다고 해서
까마득한 꿈속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2012. 06. 27
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