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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설교(86)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
본문 : 눅 18:9-14 (신126)
오늘 본문 앞에 나오는
-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18:1-8)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가르치시는 비유라고 한다면 -
오늘 본문은
“어떠한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시는 비유입니다.
앞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과부의 간청을
예로 들면서 ‘끈질기게’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과부의 사정에 대하여 무관심한 불의한 재판관도....
결국 그녀의 간청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너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성도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은 부족함을 느끼십니다.
그래서 거기에다가
오늘 비유를 덧붙이십니다.
무조건 기도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끈질기게 인내심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
바르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 바른 기도를 오늘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해 주십니다.
<비유 대상자>......
오늘 비유의 대상자는 누구입니까?
9절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이 비유를 들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입니다.
즉 자기 주제 파악이 안 된 사람입니다.
전혀 의롭지도 않으면서 자신을 의롭다고 믿고....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이웃을 멸시하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거짓된 자기 확신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죄를 짓는
근본적인 요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누구를 염두에 두고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본래 바리새인은 이스라엘의 존경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구별한다’는 뜻의 그 이름이 말해주듯이...
그들은 먹는 것..., 입는 것..
움직이는 생활 전부를 거룩한 방향으로
구별하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산으로, 광야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 살면서 거룩하고
깨끗하게 살겠다며 모여진 단체입니다.
얼마나 귀한 단체입니까?
그들의 출발은 이렇듯 선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잡하고 까다로운 크고 작은
종교적 규례를 철저히 지키며 살았습니다.
이 복잡한 규례를 다 지키려면.....
상당한 자기 생활의 포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이러한 생활은
상당히 존경받을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형식만 남고 내용(정신)은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율법의 뜻은 잊어버리고
그 껍데기만을(제도적 형식만을)
열심히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다보니 하나 덧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나만큼 더 잘 지키는
사람은 없다’고 하는 교만한 마음이
그들 마음속에 자리 잡았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의 불같은 저주를 받았고,....
오늘날에 와서는 외식주의,
형식주의 대명사가 된 것입니다.
장차 감리교회가 없어질 것을
염려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
감리교회의 창설자인 존 웨슬리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감리교회라고 하는 교단이 없어질까를
염려하지 않습니다.
나는 복음과 구령의 열정이 사라진
껍데기만 남은 감리교회가 될까 염려합니다.”
한편 예수님은 오늘 바리새인들을 책망하면서
그들을 누구와 비교합니까?
10절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세리와 비교합니다.
바리새인을 세리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바리새인들에게는 상당한 모욕입니다.
그들은 극과 극으로
먼 거리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리가 누구입니까? ....
이들은 유대를 식민 통치하고 있는
로마의 하수인으로 세금을 거두어
로마의 황제에게 바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단지 로마에 낼 세금만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착취할 몫까지 거두어 들였습니다.
이들은 폭력을 휘둘러서라도
강제로 세금을 징수하였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힘을 등에 업고 있었기에
그들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대가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반민족주의자요, 포악자요,
율법과 상관없는 자로서 사회적(민족적)으로,
종교적으로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세리는 죄인의 대명사가 되어
“세리와 죄인”이라는 말은 항상 같이
따라 다니는 말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세리를 오늘 예수님은
그 거룩하다(의롭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과 대비를 시키십니다.
그 만큼 예수님은 오늘 비유를 통해....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태도와
기도를 강하게 책망하시려는
의지를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
그러면 구체적으로
바리새인의 기도를 살펴보면...
<본문 11-12절 읽어라>
11절“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절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바리새인의 기도를 살펴보면.....
첫째, 바리새인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 속에는 자기만 있었지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비록 입술로는 하나님을 불렀지만
그의 의식에는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나는”(11절, 12절)이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예로 든 기억이 있습니다만,
창과 같은 기도가 있고,
거울과 같은 기도가 있습니다.
- 창은 다른 것을 보게 합니다.
즉 창과 같은 기도를 드리는 이는
열려진 창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이웃을 바라봅니다.
- 그러나 거울과 같은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거울을 통하여 반사되는
자기 자신만을 바라봅니다.
그는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합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만족으로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바리새인은 거울과 같은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의 눈에는 자기 자신 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 확신, 자기만족 속에 갇힌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열려진
대화가 아니라 자기 독백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저와 성도님들은 기도를 통해
내가 아닌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를 살펴보면.....
첫째, 바리새인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둘째, 바리새인은 자기 의에 빠져
기도하고 있습니다 <본문 11-12절 읽어라>
11절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절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본문의 바리새인의 기도 속에는
참회가 없습니다.
고백이 없습니다.
자기의 죄인됨에 대한
처절한 부딪힘이 없습니다.
자기 자랑만 가득합니다.
웃시아 왕이 죽던 해에 성전에 들어간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순간 하나님 앞에서 엎드려지며
이사야의 입술에서 맨 처음
터져나온 고백은 무엇입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6:5).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자마자
상대적으로 불결하며, 추하고,
더러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어느 여름 디베랴 바닷가에
고기를 잡고 있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밤을 지새워 노력했지만
그 날 따라 베드로는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물을 거두려고 그물을 물에 씻는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가오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5:4).
베드로가 믿음으로
그물을 깊은 곳에 내렸을 때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고백을 기억하십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자의 공통적인 고백은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자신의 죄인됨의 발견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리새인은 자신의 죄인됨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기 의를 내세우고 자기의 자랑,
자기의 공로, 자신의 선행을 내세우기에
침이 마릅니다.
“서서 따로 기도할” 정도로 교만합니다.
나는 죄인들하고는 질적으로 다르니까,
특별하니까 구별하여
서서 기도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이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교만한 자의 기도를 받지 않으십니다.
자기 의에 빠져 있는 자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를 살펴보면.....
첫째, 바리새인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둘째, 바리새인은 자기 의에 빠져 기도하고 있습니다
셋째, 바리새인의 기도는 사람을 의식한 기도였습니다.
그의 기도는 사람 들으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사람 앞에 바치는 기도입니다.
<본문 11-12절 읽어라>
11절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절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기도 속에서 내세우고 있는
거룩한 행위도 사람을 의식한
행위로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내세우고 있는 경건한 행위는
율법의 요구를 훨씬 초월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즉 율법은 일 년에 단 하루 속죄일에
금식할 것을 규정하고 있는데....
그는 자진해서 일주일에 두 번
곧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하였습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끼리 만들어 놓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무슨 풀어야 할 문제가 있어서
작정 금식을 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자기들이 금식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하여 금식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금식을 남몰래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오히려 금식하는 것을 숨기기 위하여
머리에 기름까지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랑하기 위하여
금식을 한 것이요
그것을 기도를 통하여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이것들은 아주 작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중요한 정의와
자비와 믿음은 져 버렸다”고
책망하셨습니다(마23:23).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자랑을 목적으로 하여
(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
십일조를 했다는 증거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어떤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이는 매우 기초적인 것이요,
신앙인의 상식에 속합니다.
억지로 더 받쳐놓고 자랑하는 것은
상식이하입니다.
더군다나 더 큰 잘못은.....
자기의 의를 더욱 크게 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비하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11절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기도를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수단으로
이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한마디로 바리새인들의 기도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의를 사람들에게 드러내려는
수단에 불과하였던 것입니다.
<세리의 기도>.....
그러나 세리의 기도를 보세요....
13절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그의 기도는 참으로 겸손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선 자신의 죄된 모습을
발견하고는 진심으로 참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 못하였습니다.
가슴을 치며 “불쌍히 여겨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자기보다 더 나쁜 사람을 지목하며
그보다는 덜 나쁜 놈이라고
스스로 위로하지도 않았습니다.
누구 때문이라는 말도,
세상 탓하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였습니다.
세리가 죄를 지은 것이 잘한 일은 아닙니다.
그의 행위 자체를 칭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의 죄인됨을 철저히 깨닫고 ...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번은 유명한 전도자인 무디가
어느 도시에서 집회를 하는데.......
그 도시의 신문에 그에 대한 온갖
허위 선전과 날조된 기사들이 실렸습니다.
집회 담당자들이 펄펄 뛰며
이 사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의논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억울한 일을 당한 무디는
빙글빙글 웃고 있었습니다.
“아니 화나지 않습니까?
사실도 아닌 것으로 비방하고 욕하는
저 사람들한테 할 말이 없으십니까?”
이에 무디는 이러한 명언을 했습니다.
“내버려 두게나. 저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나는 신문에 난 것보다
훨씬 더 악한 놈이야.”
그날 밤 무디는 그 집회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당신의 자비와 은혜의 보좌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설교했고,.....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특히 자기를 중상했던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주님 앞에 나아오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죄를 참으로 느낄 때에야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사모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하나님은
기뻐 받으십니다.
시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오늘 우리는 정말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허물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필요성을
깨닫고 있습니까? ......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없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맺는 말씀 - 예수님의 결론>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을 이렇게 맺으십니다.
14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하나님 앞에서 누가 의롭다고
인정받았습니까?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입니까?...
아니면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기는
겸손한 세리입니까?
사랑하는 성도님들 !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올바르게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기도는 하면 할수록 더욱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하면 할수록 교만해지는 사람은
잘못된 기도를 한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우리 금산교회 성도님들이 !
세리와 같이 겸손한 기도,....
바른 기도를 드리심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칭찬과
더불어 응답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