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한국의 기도 도량 / 태백산 부석사
선묘가 화현한 석룡 천년 세월 지나서도 화엄세계 떠받치다
문무왕 16년 의상 스님 창건
선묘의 호법의지 용으로 변해
방해세력 바위 들어 물리쳐
절마당서 선묘석룡 발견돼
배흘림기둥 유명한 무량수전
태백산 자락 앞마당 삼고 호젓
▲해 그늘 아래 앉은 부석사는 잿빛이었다. 그 빛깔 속에서도 사람들은 분주했다.
언제 오려나. 잎 떨군 나무들과 언 땅이 태백산 기슭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봄소식은 아련하다.
그네들 달래듯 오후 예불의 목탁소리가 은은하게 저물고 있었다.
하늘은 흐렸고, 아팠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가시처럼 뻗었다.
은행나무는 뼈만 남은 제 몸 가릴 게 없어서인지 한이 서렸다. 그렇게 겨울하늘을 노려봤다.
태백산 부석사 일주문 들어서는 길 위의 하늘은 가을이면 노랗게 물이 든다는데….
겨울 끝자락에 선 은행나무는 옹심을 품었다.
곧, 찬란한 가을을 맞이할 텐데 조급한 마음이 옹졸하게도 뾰족한 게다.
부석사를 찾은 마음도 덩달아 조급해진다.
금방 굵은 빗줄기라도 떨어트릴 기세인 하늘도 발걸음을 재촉했다.
천왕문 들어서기 전, 길 오른쪽엔 돌탑들이 여럿이었다.
머리가 부석사 본전인 무량수전을 향해 있었다. 유심히 보니 서로 비스듬히 기댔다.
부석사에 올랐던 이들이 쌓아올렸던 신심이 차가워진 몸 부비며 온기를 간직하려는 애씀이었다.
천왕문부터 범종루, 안양루, 무량수전으로 이어지는 길은
극락정토에 이르는 찰나의 연속이라는 세간의 평가 그대로였다.
뒤늦게 자료로 확인한 사실이지만 무량수전까지 딛고 올라서야할
108계단으로 구성된 9개 석축은 화엄의 ‘구품정토(九品淨土)’를 상징한단다.
앞서 알았더라면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에 조심을 담았으련만….
때늦은 후회 뒤로 하고 천왕문을 지나 범종루를 눈앞에 뒀다.
그러자 범종루로 향하는 길을 따라 층층이 놓인 부석사 건물들이 품에 안겼다.
한 눈에 봐도 가지런했다.
범종루를 머리에 이고 계단을 올라섰다.
종루를 받친 나무기둥들이 수백년 세월을 견디느라 힘에 겨웠는지 갈라지고 빛이 바랬다.
허나 그 흔적은 시간의 흐름이 남긴 자연스럽고 고운 결이었다.
새삼, 범종루 아래를 걷는 마음을 헤아렸다.
늘 어딘가의 위에 서거나 앉거나 누웠다. 바닥 위였다.
바닥 아래 놓여보니 위에 서서 내려 보던 시선들이 처참히 무너진다.
범종루 머리 위에 두다보니 얄팍한 하심이 고개를 쳐든다. 다시 마음 매무새를 가다듬는다.
범종루엔 목어, 법고, 운판이 매달려 있었다.
목어 모양에 눈길이 머문다. 머리와 비늘이 용이었다.
부석사가 왜 해동 화엄종 수사찰인지 그제야 얼핏 옛 이야기가 떠올랐다.
용이 돼서라도 의상 스님의 구법의지를 지키려했던 선묘낭자.
부석사는 연모의 정이 종교적 사랑으로 승화된 아름다운 전설이 서려 있었다.
‘떨리는 가슴을 들킬 수야 없는 노릇이다. 스님에게 연모의 정이라니….’ 다행이었다.
선묘는 아무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운명은 매정했다.
안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비범한 모습의 스님에게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아비 유지인은 중국 화엄종 제2조 지엄 스님에게 화엄을 배우기 위해
바다 건너 당나라로 유학 온 신라의 의상 스님이라 소개했다.
뛰어난 미색으로 칭송받으며 뭇 남성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선묘가
신라에서 온 스님에게 마음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이미 사랑에 눈이 먼 선묘는 스님을 극진히 공양하며 주위를 맴돌았다.
그럼에도 스님의 태도는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수행자로서 법도에 한 치 어긋남이 없었다.
‘아, 어찌 이런 스님이 계신단 말인가. 존경받아 마땅한 스승이로다.’
선묘는 삼보에 귀의하겠다는 원을 세웠고 스님에게
“반드시 다시 찾아와 달라”는 간곡한 부탁으로 스승을 떠나보냈다.
의상 스님은 지체 없이 길을 떠나 구도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화엄을 공부한 뒤 귀국이 다가오자 스님은 선묘의 부탁을 떠올리며 집을 찾았으나 엇갈렸다.
스님은 신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스님 소식을 들은 선묘는 어렵게 구한 서책과 손수지은 의복과 요깃거리를 들고
스님을 뒤좇았지만 배는 떠난 뒤였다. 뒷모습이라도 봐야 했다.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절벽에 올라 옷가지를 담은 옷함을 바다로 던지며 간절히 빌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옷함을 배로 이끌었다. 그러자 선묘는 다시 큰 원을 세웠다.
‘용으로 화현해 저 배를 무사히 신라까지 인도해 스님의 큰 뜻이 널리 퍼지도록 돕겠나이다.’
지체 없었다. 선묘는 훌쩍 절벽 아래로 뛰어 내렸다.
온몸에 바다의 찬 기운이 퍼지는가 싶더니 몸이 붕 떠올랐다.
아름다운 용으로 화현했던 것이다. 의상 스님을 실은 배는 탈 없이 신라에 도착했다.
후에도 선묘는 의상 스님의 뜻을 호위했다.
신라 문무왕 16년(676) 스님이 왕명으로 봉황산 기슭에
화엄을 펴기 위해 절을 짓고자 했으나 방해하는 무리들이 많았다.
이에 선묘는 조화를 부려 바위를 공중으로 세 번이나 들어 올려 물리쳤다.
해서 절은 ‘부석(浮石)’이란 이름이 붙었다.
▲부석사 이름 유래가 된 부석.
1300여년 세월을 뛰어넘는 숭고한 선묘의 사랑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부석사 자료에 따르면 40척(약12m)에 이르는 석룡이
본존불에서 석등까지 연결돼 있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 2001년 부석사 주위에 대한 레이더 탐사 결과 길이
13m의 석룡이 발견돼 사람들을 놀라게 했단다.
등줄기는 도드라져 솟았고 밑으로 내려가면서 좁아지는 꼬리 형상이
흡사 용의 모습이었다고. 앞서 1996년에도 마당 정비 사업 중 땅 밑에 석룡을 찾아냈는데,
꼬리는 석등 지하 깊숙이 두고 머리는 부처님이 있는 본존불로 향하고 있었다고 한다.
범종루와 안양루를 거쳐 부석사 본전인 무량수전(국보 제18호) 앞뜰에 다다랐다.
해 그늘 아래 앉은 부석사의 하늘은 잿빛이었지만
무량수전은 아름다운 자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혜곡 최순우 선생의 유작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 배흘림기둥 하나에도 천년을 살아 숨 쉬어온 기품이 풍겼다.
선묘가 지금도 그렇게 부석사를 떠받치듯,
무량수전의 배 부른 기둥이 천년 동안 불법을 떠받치고 있었다.
무량수전 법당 입구의 털 고무신 한 켤레가 예불 올리는 스님 마음을 닮아 부처님 향해 가지런하다.
무량수전 안에선 법당 화주보살이 아미타부처님에게 쉬지 않고 절을 올리고 있었다.
선묘의 따뜻하고도 결연한 마음이 함께 느껴지는 건 왜일까.
▲무량수전의 배 부른 기둥이 천년 동안 불법을 떠받치고 있었다.
석등(국보 제17호)과 무량수전 사이에 섰다.
‘예전부터 석등을 100번만 돌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소문이 있어
부처님오신날이면 마을 사람들 모두 달밤에 이 석등을 돌았다던데.’
석등 사이로 언뜻 보이는 무량수전 편액이 쓸데없는 생각을 물리쳤다.
안양루 문턱에 올라 태백산 기슭에 마음을 뒀다. 끝없이 이어지는 산 너머 산,
산마루와 산마루가 잿빛 하늘과 어울려 한 폭의 수묵화처럼 펼쳐졌다.
김삿갓이 “인간 백세에 몇 번이나 이런 경관을 볼까”라고 읊조리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저자 유홍준이 “태백산맥 전체가 무량수전의 앞마당”이라고 했던 말들이
가슴 깊이 담기는 순간이었다. 감상에 젖었다. 언제 오려나.
잎 떨군 나무들과 언 땅이 태백산 기슭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봄소식은 아련하기만 하다.
그네들 달래듯 오후 예불의 목탁소리가 은은하게 저물고 있었다.
부석은 무량수전 왼쪽에 있었다.
부석사 이름 유래가 된 부석.
화엄세계를 펼치려는 의상 스님의 뜻을 지키려는 선묘의 의지가 깃들었다.
낙엽 속에 동자승이 부석 옆에 앉았다. 선묘의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진하기만 했다.
문득, 선묘각이 궁금했다. 선묘각은 무량수전 오른쪽에 자리했다.
1칸의 작은 집이었다. 선묘의 모습이 탱화처럼 놓였었다.
허리 굽혀 그의 신심에 존경을 보태기도 버거운 크기였다.
겉모습이 초라하면 어떠랴. “세세생생 귀의하겠다”는
그의 발원은 1300년 지난 지금까지 오롯하지 않은가.
▲석등 사이로 보이는 무량수전 편액.
선묘각 오른쪽 삼층석탑(보물 제249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니
의상 스님 초상이 모셔진 조사당(국보 제19호)이 객을 맞았다.
스님이 부석사를 창건한 뒤 꽂은 지팡이가 나무로 자라 아직도 꽃을 피운다는
신비한 ‘선비화’가 철장 속에 갇혀 봄을 기다렸다.
그 아래로 난 샛길을 걸어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20호)이 봉안된 자인당까지 순례하고
무량수전 앞뜰로 향하자 새삼 걸음이 무겁다.
선묘의 마음이 환희보단 부끄러움으로 다가왔다.
언 눈 녹기 시작한 길은 신발에 젖어있는 흙을 짐처럼 딸려 보냈다.
마음바닥에 달라붙은 중생심이 질척거렸다.
그 때, 법고에 이어 범종소리가 근심을 밀어냈다.
해질 무렵 저녁예불을 알리는 33번의 타종. 절로 환희가 일었다.
타종을 마치고 예불을 위해 무량수전에 드는 스님에게 절로 합장이었다.
다시 감상에 젖는다. 봄소식은 언제 오려나.
범종은 태백산 기슭에 깃든 생명들을 일깨우고자 천년 넘게 법음을 울렸건만.
순례 중인 객 마음속 신심은 아직도 겨울이었다.
2013. 02. 19
최호승 기자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