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 2005~2020]/번개산행기
2009-02-03 18:45:43
1.31(토) 검봉산 번개산행기(믿는 자들을 위한 산행)
참석자: 황문수, 박은수, 양웅식, 이학희, 최경림
일요일 수락산 정기산행을 앞두고, 5공대장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서 금요일 저녁에 전화를 했더니 토요일 번개산행이 있다고 한다. 문수대장을 비롯해서 누구누구가 같이 가게 되어 있고, 무슨 산이라고 하는데, 잘 들리지는 않지만 일단 동참하기로 한다. 만나는 장소도 좋다. 양재역에서 나오면 바로 있는 서초구청 앞 - 집에서 지하철 타면 40분도 안 걸린다.
토요일 9시, 서초구청 앞에 서 있으니 하키가 차를 몰고 온다. 조금 있으니 은수대장이 도착, 셋이서 재봉선사 사무실로 간다. 항상 일요산행에는 참석 못하는 웅식이를 위하여 문수대장이 웅식이와 함께 부부동반으로 가기로 했는데, 웅식이와 같은 이유로 일요산행에 참석 못하는 하키가 동참하게 되고, 거기에 은수대장과 나까지 끼이니 사모님들은 빠지기로 했단다. 친구를 위하여 사모님들과의 약속을 배신하는 간 큰 남자들. 같은 배짱으로 오늘 산행에는 “믿는 자들을 위한 산행”이라는 거룩한 이름을 붙인다.
재봉선사 사무실에 가니 문수대장과 웅식이 먼저 와 있다. 문수대장 차에 옮겨 타고 출발한다. 오늘 산행의 목적지는 강촌의 검봉산. 대학 다닐 때 여자 아이들과 같이 MT 갔던 동네다. 그 중에는 내가 좋아하던 아가씨도 있었는데, 이제는 할머니가 되어 가고 있겠지
아가씨와의 추억, 창밖으로 보이는 북한강의 아름다움, 그리고 말로만 듣던 문수대장의 운전솜씨에 서서히 취해가는 순간, 문제가 생긴다. 차내 좌석배치가 잘못 되었다.
믿는 자 두 분이 나와 같이 뒷자리에 앉았는데, 은연중에 두 분 사이에 긴장이 형성된다.
신자 1이 신자 2에게: 손에 뭐 들고 있노?
신자 2: 커피다. 재봉선사 사무실에서 빼 마셨다.
신자 1: 우리 오는 줄 알고 있었으면, 우리 것도 빼 두었어야지---궁시렁궁시렁
신자들이 계시니 불가피하게 교회 이야기가 나온다. 언제나 민감한 주제인데, 눈치 없는 자는 오히려 불을 지핀다.
신자 2: 나는 친구들의 좋은 일, 궂은 일, 함께 즐거운 일이 있으면 한두 잔 하는데, 우리 교회는 안수집사하려면 술을 한 방울도 마셔서는 안 된다고 해서, 안수집사 안하겠다고 했다.
눈치 없는 자: 안수집사가 무슨 뜻이고?
신자 2: 안수를 받은 집사를 안수집사라고 하는데, 안수란 목사님이 하느님을 대신해서 신자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하는 것이다. 교회 집사에는 안수집사가 있고, 서리집사가 있는데, --- (주저리주저리 설명이 길어진다.)
신자 1: 설명이 뭐그리 기노? 안수집사는 어쩌고 저쩌고 --- (결국 신자 2의 설명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긴장관계는 담배 때문에 더욱 고조된다.
신자 1: 담배 좀 피워야겠다.
신자 2: 차 안에서 꼭 담배를 피워야 되겠나? 나는 닫힌 장소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이 제일 싫더라.
신자 1: 문수야 창문 좀 열어 도.
신자 2: 창문 열면 추우니, 썬 루프를 열어라. 썬 루프 열면 담배 연기 잘 빠진다.
신자 1: 창문 열면 재는 어디다 떠노?
신자 2: (그때까지 들고 있던 종이 커피컵을 주면서) 여기다 떨어라.
임시 재떨이가 제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썬루프와 함께 창문이 열린다.
신자 2: 아이고 추워라. 나도 한 때는 하루에 두 갑 이상 피웠지만, 기도하고 끊었다.
신자 1: 나도 담배를 주기적으로 끊지만, 직장에 붙어 있으려니 담배가 필요하다.
신자 2: 성경에도 너희 몸은 작은 성전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성전을 담배연기로 더럽혀서 되겠나?
눈치 없는 자의 혼자 생각: “너희 몸은 작은 성전” - 너무 좋은 말이다. 앞으로 누가 교회 다니자고 하면, 내 몸은 이미 작은 성전이니 굳이 교회에 나갈 필요는 없다고 물리치면 되겠다.
종교적 대화에 열중하다 보니 어느덧 검봉산 입구 구곡폭포 주차장에 도착한다. 하늘은 맑고 날씨는 따뜻, 정상 높이는 530m에 불과하다. 유유자적한 산행을 앞두고 차안에서의 긴장관계는 씻은 듯 없어진다.
주차장에서 조금 올라가니 빙벽 등반으로 유명한 구곡폭포가 나온다. 오늘도 두 사람이 빙벽에 매달려 있다. 얼마 전에 누가 여기서 떨어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기념사진을 몇 장 찍는다. 무엇을 기념할 수 있을까? 나는 다른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빙벽 등반하는 곳에 갔다 왔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부드럽다. 바위가 거의 없고, 경사도 완만하다. 요즘 휴대전화 선전처럼 꼭 내 타입이다. 1시간쯤 올라가니 문배마을이 나온다. 나무 태우는 냄새가 정다운 전형적인 산촌 마을이다. 검봉산 곳곳에 문배마을 가는 표지판이 있어서 왜 유명하냐고 물어보니 뚜렷한 대답이 없다. 문배주 담그는 곳은 물론 아니다. 예전에 워낙 오지였는데, 한국전쟁 때는 한동안 전쟁이 일어난 줄도 몰랐다는 문수대장의 설명이다. 옛날에 오지였기 때문에 오늘은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산골치고는 문배마을에는 음식점이 꽤 있다. 등산객들이 많이 들리나보다. 그 중 은수대장이 옛날에 가봤다고 하는 장씨네 가게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누런 막걸리와 칡 부침, 도토리묵이 혀에 감긴다.
느긋하게 다시 출발, 산길은 여전히 내 타입이다. 몇 잔 마신 막걸리가 아직 그리 부담스럽지 않다. 작년에 개장한 강촌 스키장이 멀리 보인다. 오랫동안 가물어서인지 슬로프만 하얗고, 주위에는 눈이 전혀 없다.
1시간쯤 걸었을까. 정상이 바로 앞에 보이는 곳에 마루로 바닥을 깐 넓은 전망대가 있고, 강원도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올해 시산제 등반을 나와 사람들이 와글거린다. 점심시간이 지나려고 해서 우리도 자리를 펴지만, 문배마을에서 먹었던 새참 덕분에 생각들이 별로 없다. 과자, 떡, 과일을 안주 삼아 막걸리만 몇 잔 더 마신다. 벤쿠버 공항에서 호기심으로 샀던 참치 육포를 꺼내 놓지만 너무 짜서 인기가 없다. 전망대를 등산로 입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만남의 장소처럼 만들어 두어서인지 신자 1은 거리낌 없이 담배를 태운다.
눈앞에 보이는 정상으로 올라가는데, 막걸리가 드디어 효력을 발휘한다. 점심을 제대로 먹지 않았는데도 발걸음이 무겁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좋다. 사방으로 산이 점점히, 전체적으로 포근하게 깔려 있다.
외국에 나가보면 산을 가깝게 볼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특히 동남아나 유럽으로 가면 대부분의 경치는 평평하다. 지난 출장 중에 페루를 들렀는데,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 산이 여럿 보이길래, 여기는 산이 있네 했더니 공항에 나왔던 페루대사관 후배 직원은 어디에 산이 있냐고 되물어본다. 저기 보이는 것들이 모두 산 아니냐고 했더니, 나무가 전혀 없는 민둥산들이라 산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정말 남미의 안데스 산맥 산들은 나무가 없다. 작년 가을에 칠레로 출장가면서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니 풀포기 하나 없는 돌멩이 많은 산들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질린 적이 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산들은 안에서 보나 밖에서 보나 눈에 즐겁다.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은 올라왔던 길의 반대편을 택한다. 중간에 강선봉이라는 봉우리(485m)가 있는데, 정상에서 내리막을 내려와 다시 올라가야 한다. 막걸리 때문에 올라가는 길이 힘들다. 강선봉 주위에서 멀리 보이는 산들과 강, 그리고 모양 좋은 소나무들을 배경으로 50대 아저씨들은 사진을 많이 찍는다. 웅식은 요즘 가벼워진 몸을 자랑하듯 자꾸 나뭇가지 위로 올라가서 포즈를 취한다. 내려오다가 의암댐이 멀리 잘 보이는 곳에서 다시 사진을 여러 장 찍는다. 오늘은 사진을 잘 찍으려는 노력이 눈물겹다. 문수의 지팡이에 카메라를 올려놓고 단체사진을 찍는데, 한 번은 카메라가 쉽게 고정되지 않아 약 10분을 기다리기도 한다. 어쨌든 주중에 부대끼다가 산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즐겁다. 주말에는 친구들과 또 어디론지 간다는 생각만으로 시간이 흘러간다.
내려오는 길은 가파르다. 올라가면서 이 코스를 택했더라면 상당히 고생했을 것 같다. 문수대장의 훌륭한 선택이다. 강촌 역 쪽으로 내려오니 젊은이들이 많다. 점심을 어떡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우선 재봉선사 사무실로 돌아가기로 한다. 올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차량 좌석 배치를 조정한다. 신자 2를 앞자리로 보내고 은수 대장이 뒷자리에 앉는다. 덕분에 차 안은 평화를 찾는다.
재봉 선사 사무실에 들르니 선사와 사모님이 출근해서 일을 보고 계신다. 내일 일요 산행에 참석하기 위해 잔무를 처리 중이라고 한다. 후딱 커피 한 잔씩 얻어 마시고, 덕소로 향한다. 점심을 건너 뛰었으므로 당연히 식당으로 가는 줄 알았더니, 웬걸 당구장으로 간다. 당구를 치고 나서 저녁을 먹는 것이 낫단다. 문제는 시작한 게임이 끝나지 않는 것. 각자 놓은 주판 알 숫자가 너무 많다. 2시간이 넘는 사투 끝에 간신히 3게임을 마치고 나니 8시가 훌쩍 넘었다. 다음부터는 모두 핸디를 50씩 줄이기로 한다. 경림 200, 웅식 150, 문수 100. 다른 친구들이 핸디를 같이 줄이겠다면 좋고, 지금 핸디를 굳이 유지하겠다면 그것도 환영이다.
생삼겹살과 된장찌개로 늦은 저녁을 채운다. 다들 시장해서 고기와 채소를 남김없이 비운다. 하키는 우리가 왜 이렇게 사서 고행하는지 거듭 문제를 제기하지만, 친구들과 산에 가는 즐거움은 바로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치기를 무기로 생활의 박스에서 벗어나 자유를 맛보려는 것. 밤이 늦었으나, 믿는 자들을 위한 고결한 산행이었으므로 충만한 마음으로 집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