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 고정희 생가에서 / 서형오]
둥글게 구르던 해가 옷을 버리며 놀다 어머니의 부름을 받은 아이처럼 산머리를 넘어가고 빛도 따라 여위어 가서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이 내왕하기 알맞은 시간에 밥 짓는 연기 자욱한 마을에 이르렀습니다. 누군가 어둠의 수로에 잠시 물꼬를 터 빛을 흘려보낸 듯 하얗게 눈을 떤 길을 따라가 한 여류 시인의 생가를 다시 찾았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외출 중이었습니다. 잠시 살가운 동무를 보러 나간 듯 대문을 열어 놓은 채로. 살 밖에는 동백나무들이 서서 골목길을 두드리는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허락을 얻지 않고 그녀의 의자에 앉은 내 귀에 난 골목길에는 가는 숨소리며, 책장 넘어가는 소리며, 펜 끝에 공책을 긁는 소리들이 걸어 다녔습니다. 그렇게 한참 귀를 열고 있다가 바람이 새들을 데리고, 새들은 자기 그림자를 데리고 하늘을 건너다니며 풀씨를 안아 나르듯 하나인 그녀가 수천수만의 아린 마음들을 쓸어주느라 오늘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아서 동백나무들의 배웅을 받으며 발길을 돌렸습니다. 어둠이 조금 더 깊게 고인 곳으로 와서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녀가 머물렀던 집이 하얀 뼈로 누워 뒤척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를 벗어 놓고 간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l해설l
우리나라 초기 여성운동에 혁혁한 공을 남긴 고정희(본명 고성애) 시인의 고향은 몸의 고향 전남 해남, 문학적 고향 서울 수유리 그렇게 두 곳입니다. 그는 어떤 어려움에도 쉽게 절망하지 않는 강한 의지와 생명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노래하며 고통을 부정하거나 외면하지 말고 고통과 정직하게 대면하여 이겨내자고 호소하며 상처받은 존재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작품을 썼던 시인이며 198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나타난 페미니즘 운동의 선구자였습니다.
불평등하게 부여된 여성의 지위·역할에 변화를 일으키려는 여성운동 여성들의 권리회복을 위한 운동을 가리키는 관점이 패미니즘 입니다. 그러하기에 서형오 선생님은 46세로 실족사한 고정희 시인의 생가를 방문해 그녀는 현재와 미래형의 외출 중이라는 시어로 고정희 시인의 사상과 정신이 영원히 계승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맹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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