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종 시인의 당진편지 30- 배롱나무 꽃을 보며<br>찬란한 가을날, ‘서슬 퍼런 겸양과 경이로운 끈기’를 보다
화단에 배롱나무 꽃이 한창이다. 가을이면 늘 기다렸던 꽃이기에, 폭염이 물러난 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자 자연 배롱나무로 눈길이 가곤 했다. 마당에 화단을 만들 때부터 배롱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고 마음먹었던 터라, 매화나무 다섯 그루와 함께 내가 가장 아끼는 나무가 되었다. 어느 나무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있겠냐만, 유난히 마음이 가는 것을 어쩌랴.
이름을 불러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 것이 있겠냐만, 10년 전 마음속으로 들어온 배롱나무에 유난히 마음이 가는 것을 어쩌랴.
산골에 새집 지으면 앞마당에 배롱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고 결심한 것은 10여 년 전쯤, 강진 백련사 누각에 앉아 여연스님과 차 한 잔 마시며 보았던 오래된 배롱나무를 만난 때부터였다. 그 전에도 큰절 오가다 몇 차례 본 적이야 있겠지만, 웬일인지 그날따라 배롱나무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스님, 참 아름답습니다. 이름이 배롱나무 맞죠?”
“그렇지. 절집 마당이나 서원, 향교 등에 많이 심었지. 선비들의 집에도 많이 심었고….”
그때 다승(茶僧)으로 이름이 높은 여연스님은 배롱나무에 얽힌 이야기도 들려주었는데, 아쉽게도 그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려나, 하루가 다르게 붉게 피어나는 배롱나무 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현묘재의 가을은 풍요롭다. 틈틈이 마당으로 나가 배롱나무를 보는 재미는 쏠쏠하기 그지없다. 분홍빛 감도는 발그레한 꽃잎의 자태는 자세히 보면 작은 꽃들이 무리지어 자아낸 아름다움이다. 수피(樹皮)는 옅은 갈색으로 매끄러운데, 얇게 벗겨지면서 흰색의 무늬가 커다란 점처럼 생겼다가 오래지 않아 사라진다. 타원형의 이파리들은 가녀린 듯 애써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원뿔모양의 홍자색 꽃차례는 가지 끝에 매달려 약한 바람에도 간들간들 위태롭다. 배롱나무 꽃은 잇따라 피어나며 늦가을까지 달려있는데, 이파리와 꽃잎의 구분은 겹친 듯 애매하다.
배롱나무 꽃은 무려 3개월 넘게 피어나는데, 100일 동안 꽃을 피운다고 해서 백일홍이라고도 불린다. 매끄러운 수피는 마치 살갗처럼 부드러워 만지면 간지럼을 탄다고 해서 간지럼나무라는 별칭도 얻었다.
배롱나무가 아니더라도, 예로부터 사람들은 처소의 정원에 기호하는 각각의 나무를 심고 감상하는 전통이 있었다. 절집이나 전통가옥, 향교, 서원 등에는 마치 정해진 듯 특정한 나무를 심곤 했었다. 그 연유를 살펴보면 선택된 나무마다 그럴듯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의미를 알고 보면 나무가 다르게 보인다. 마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꽃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는 것처럼.
향교나 서원에는 은행나무가 거의 심어져 있는데, 이는 공자님이 강의를 하시는 곳을 행단(杏壇)이라고 부른데서 비롯됐다. 그러므로 은행나무는 공자의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는 곳을 의미한다. 성균관대학교의 상징이 은행나무 잎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대부분의 향교와 서원에는 은행나무가 있다. 그러다보니 오늘날의 학교에도 은행나무가 없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느티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접받는 나무 중 하나이다. 동네나무 정자나무로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으레 느티나무가 서 있다. 우리 선조들은 느티나무 아래에서 갓난아기 때부터 놀다가 늙어 노인이 되어서도 느티나무 아래에서 쉬었다. 잘 자라고, 병에도 강하고, 그늘 또한 일품인 느티나무는 개인 집보다는 동구(洞口)나 학교에 주로 심었다.
퇴계는 도산서원에 자신이 좋아하던 매화·대나무·소나무·국화를 심었다. 아마도 지조와 절개, 그리고 풍류를 상징하는 꽃과 나무를 보며 멋들어진 삶을 가꿨던 것으로 보인다. 곧은 절개와 지조를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선비들에게 소나무는 최고의 나무였으며, 매화나무는 선비의 곧은 지조를 상징했다.
전통가옥이나 사찰, 선비들의 집에서 자주 발견되는 배롱나무는 이들 나무 못지않은 사랑을 받았다. 한 여름부터 가을까지 백일동안 꽃을 피우고, 반들반들한 나무껍질을 가진 덕에 깨끗한 청결과 고요함의 상징이 되었다. 선비들의 집이나 정자, 전통가옥, 사원 등에 배롱나무가 자주 눈에 띄는 것은 아름다운 매무새 때문만이 아니라 이런 고유한 특성 때문일 것이다.
배롱나무의 꽃말은 부귀라고도 하고, ‘떠나간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라고도 하는데, 오랜 세월 형제의 연을 맺고 사는 소설가 정찬주 형님께 물으니, 선비의 집안에서는 관직에 나가는 자제가 있을 때 기념해 이 나무를 심었다고 알려주신다. 화무십일홍이라고 해서 권력의 무상함을 잘 알고 있었던 옛 선조들이, 자신의 자제들만큼은 오랫동안 관직에 종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100일이라는 긴 기간 동안 피어나는 배롱나무를 심었다는 것이다.
때마침 배롱나무 꽃 활짝 핀 이달 초부터 아들이 공무원이 되어 당진시청으로 출근을 하게 되었으니, 내겐 그 의미가 더 각별하게 다가온다. 첫 출근을 하고 귀가한 아들에게 배롱나무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며, 부디 부끄럽지 않은 공직자가 되어줄 것을 당부했다. 배롱나무 꽃처럼 오래오래 피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손길만 닿아도 부끄러움에 온몸을 움찔거리는 배롱나무의 성정처럼 부정함을 부끄러워할 것이며, 언제나 겸손함을 잊지 말라는 <주역(周易)>의 가르침을 전했다.
기이하게도, 꽃이 만개했을 때 아들의 출사(出仕)를 맞았으니 올 가을 배롱나무로부터 얻은 감흥은 오래오래 기억될 것 같다.
부귀는 부럽지 않아
벗을 향한 그리움 따윈 접어야 하네
천년만년 머물길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짓
이 가을엔 알아야 하네
얻을 수 없는 것을 구하는 것은
고뇌와 실의로 이어질 뿐이라는 것을
허물을 부끄러워할 줄 알고
회개는 몸서리로 드러내야 하네
홍자색 꽃차례를 보게
닿을 듯 손길에도 온 몸을 떠는
피고지고 또 피며 백일을 이어 사는
서슬 퍼런 겸양과 경이로운 끈기
송이송이 피토하듯 터트리는
찬란한 가을을 귀담아야 하네
- 졸시 ‘배롱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