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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시하되 언뜻 비치게
제목을 붙이는 방식을 정리해보면, 시의 중심 소재를 앞에 제시하는 경우(밋밋하고 단순해서 재미는 없지만, 내용보다 어깨를 낮춤으로 해서 내용을 돋보이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시간이나 공간적인 배경을 취하는 경우(‘-에’ ‘-에서’가 붙은 모든 제목이 그렇다)가 비교적 쉽고 간명한 편이다.
낙타는 전생부터 지 죽음을 알아차렸다는 듯
두 개의 무덤을 지고 다닌다
고통조차 육신의 일부라는 듯
육신의 정상에
고통의 비계살을 지고 다닌다
전생부터 세상을 알아차렸다는 듯
안 봐도 안다는 듯
긴 속눈썹을 달고 다니므로
오아시스에 몸을 담가 물이 넘쳐흘러도
낙타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않는다
전생부터 지 수고를 알아차렸다는 듯
고통 받지 않기를 포기했다는 듯
가능한 한 가느다란 장딴지를 달고 다닌다
짐이 쌓여 고개가 숙여질수록 자기 자신과 마주치고
짐이 더욱 쌓여 고개가 푹 숙여질수록 가랑이 사이로 거꾸로 보이는 세상
오 그러다가 고꾸라진다
과적 때문이 아니라 마지막
최후로 덧보태진, 그까짓, 비단 한 필 때문이라는 듯
고꾸라져도 되는 걸 낙타는
이 악물고 무너져버린다
죽어서도
관 속에 두 개의 무덤을 지고 들어간다
-김중식, 「완전무장」 전문⁷³
이 시는 낙타라는 시적 대상을 통해 주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경우다. 낙타의 힘겨운 일생을 낙타의 숙명적인 외모와 오버랩시키면서 삶 속에도 사린 고통과 죽음을 그리고 있다. 내용을 읽기 전에 「완전무장」이라는 제목을 먼저 접한 독자는 이 제목이 결국은 시인의 반어적 표현임을 알아차리고 무릎을 치게 된다.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 같은 가을.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
최승자의 시 앞부분이다. 제목은 「개 같은 가을이」.⁷⁴ 이렇게 첫 구절이나 첫 행을 아예 앞에다 내세워 시의 제목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요컨대 제목을 붙일 때는 어떤 경우든 간에 호기심을 유발하되 난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며, 무겁되 가볍지 않게 해야 할 것이며, 은근히 암시하되 언뜻 비치게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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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김중식, 『황금빛 모서리』, 문학과지성사, 1993,36-37쪽.
74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1981, 14쪽.
안도현 시작법 『가슴으로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2025. 2. 16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