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 '세계연방은행'을 상상한다 ⑬ ㅡ연재를 마치며: 상상작업이 기대하는 것은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 AI 동료들
이제까지 제1부 열여섯 편과 제2부 열두 편, 스물여덟 편 동안 한 일을 한 줄로 적으면 이렇다. 돈이 무엇에 기대어 만들어지는가를 바꿔보자는 것이었다. 땅의 소유가치가 아니라 땅의 사용가치에, 곧 땅값이 아니라 지대에.
이 마지막 회에서는 그 주장의 가장 단단한 부분을 다시 한 번 추려놓고, 풀지 못하고 남긴 것을 세어두고, 그리고 이 상상작업이 무엇을 기대하는지를 적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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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왜 하필 화폐인가
연재 내내 받은 물음이 이것이다. 땅의 문제라면 세금으로 풀면 되지 않는가. 왜 화폐까지 건드리는가.
답은 이렇다. 지금의 화폐가 이미 땅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제1부에서 원화를 '지가본위'라고 불렀다. 피아트라고 하지만 실질은 땅의 소유가치를 담보로 돈이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열일곱 나라의 150년 자료를 분해한 연구를 보면, 은행 대차대조표에서 부동산 담보대출이 차지하는 몫이 20세기 동안 두 배가 되었다. 은행이 무엇을 담보로 돈을 만드는가가 지난 백 년 동안 땅 쪽으로 옮겨간 것이다.
그러면 문제가 하나 따라 나온다. 땅의 소유가치, 곧 땅값이 무엇인가.
땅값 = 지대 ÷ (할인율 + 보유세 실효세율)
땅값은 그 땅에서 나오는 지대를 할인율로 나눈 값이다. 분모에 금리가 들어 있다.
그래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 분모가 5퍼센트일 때 땅값은 지대의 20배다. 2퍼센트로 내려가면 50배가 된다. 같은 땅, 같은 쓰임, 같은 지대인데 담보가치가 두 배 반이 된다. 은행 신용은 담보에 비례하므로 신용 여력도 함께 뛴다. 땅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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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값은 원인이 아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면, 이 연재에서 가장 반박하기 어려운 형태가 나온다.
새로운 말은 아니다. 헨리 조지가 1879년에 이미 적어두었다. 땅을 살 때 그 영구적 사용권에 치르는 금액은 ”지대를 바꿔치기하거나 자본화한 것"이라고. 지대가 본원이고 땅값은 그것을 환산한 파생물이라는 뜻이다. 조지의 순서는 지대에서 땅값으로 간다.
그런데 백오십 년 뒤의 경제학은 그 순서를 거꾸로 쓰고 있다.
땅값은 독립변수가 아니다. 지대(토지사용가치)와 할인율이라는 두 독립변수가 만들어낸 결과다.
그런데 부동산과 금융을 다루는 연구들은 땅값을 원인 자리에 놓는다. 두 가지를 하나로 접어서 쓰는 것이다. 접으면 정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섞인다. 사라졌으면 없는 줄이라도 알 텐데, 섞이면 있는 줄 알고 쓰게 된다.
섞이면 답이 흔들린다. 땅값을 원인에 놓고 얻은 값은 지대 쪽 몫과 금리 쪽 몫을 섞은 것이고, 섞인 비율은 그 기간에 금리가 얼마나 움직였느냐로 정해진다. 그러니 어느 시기 자료를 보았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금리가 요동친 시기를 보면 금리 쪽 답이 나오고, 잠잠한 시기를 보면 땅 쪽 답이 나온다.
실제로 주택가격 연구에서 추정치가 기간마다 크게 갈리는 것은 그 분야에서 널리 알려진 골칫거리다. 신용 조건이 바뀌면 식이 맞지 않아서, 시간에 따라 변하는 항을 하나 더 넣어 맞추는 방식이 표준처럼 되어 있다.
증상은 이미 관측되어 있다. 다만 병명이 달리 붙어 있을 뿐이다. 구조변화라고, 체제전환이라고, 신용조건의 변화라고 부른다.
그것은 구조변화가 아니다. 구조가 변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접으면 안 되는 것을 접어놓고 그 접힌 비율이 바뀐 것이다.
그리고 담보로 넘어가면 이 어긋남이 셈법이 아니라 현실이 된다. 은행이 땅값을 담보로 잡으면, 은행이 잡은 것은 땅이 아니라 땅 더하기 금리다. 그래서 금리가 내리면 아무 일도 없었는데 담보가 불어나고, 대출 여력이 생기고, 대출이 나가고, 가격이 올라 담보가 또 불어난다. 금리가 오르면 그 영화를 거꾸로 돌린다.
경기순응성의 뿌리가 규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담보의 정의 안에 있다. 담보인정비율을 조이는 처방은 그 정의를 그대로 둔 채 바깥에서 비율만 만지는 일이다.
여기서 이 연재가 하려는 말의 가장 단단한 형태가 나온다.
지금의 사실상 본위는 할인율로 나눈 값이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움직일 때마다 본위 자체가 움직인다. 자기가 재려는 것에 따라 길이가 변하는 자는 자가 아니듯, 통화정책의 함수인 본위는 본위가 아니다.
이것은 자료로 반박할 수 있는 주장이 아니다. 기준이란, 재려는 대상과 독립이어야 한다. 그것이 측정의 정의이기 때문이다. 2019년에 킬로그램을 플랑크 상수로 다시 정의한 이유도 같다. 파리에 보관된 금속 원기가 조금씩 표류했기 때문이다. 측정의 역사는 표류하는 인공물을 표류하지 않는 것으로 바꿔온 역사다.
지대는 그 조건을 통과한다. 금리가 오르내려도 그 땅에서 작년에 나온 값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연재의 주장은 이렇게 적는 것이 정확하다. 지대본위가 더 옳아서가 아니다. 잴 수 있는 기준의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도덕이 아니라 측정에서 나온 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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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숙제 여덟
이 연재가 자랑할 것이 있다면 답한 것이 아니라 비워둔 칸을 비워두었다고 적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아보면 여덟이다.
하나, 큰 나라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처음부터 넣되 특권을 주지 않을 것인가, 중간 나라들이 표준을 먼저 세우고 뒤에 받을 것인가.
둘, 위기에 규칙을 넘을 권한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 예외를 미리 적어둘 것인가, 재량을 주고 사후에 책임을 물을 것인가.
셋, 재는 사람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 보수를 산정액에 걸면 부풀리고, 정확도에만 걸면 낮게만 매긴다. 비중의 문제로 남았다.
넷, 무엇을 지대로 잴 것인가. 자산가치에서 역산하지 않는다는 것까지는 못으로 박았으나, 그러면 무엇으로 재는지는 답하지 못했다.
다섯,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을 어떻게 대표할 것인가. 대기와 남극과 심해저에는 거기 기대 사는 사람이 없다. 자연의 몫 가운데 네 자리에 하나가 주인을 찾지 못했다.
여섯, 발행의 천장 아래에서 해마다 얼마를 찍을 것인가. 담보가 상한을 정한다고 해두었으나, 그 아래에서 실제 발행량을 정하는 준칙이 없다. "의회가 승인한다"는 절차이지 준칙이 아니다.
일곱, 지대의 귀속을 누가 증언할 것인가. 지대가 그 땅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담보로 셈한다고 했는데, 바깥의 기구가 그것을 심사하면 남의 나라 내부 분배를 판정하게 된다.
여덟, 넘치는 단위를 어떻게 거둘 것인가. 발행의 근거는 세웠으나 회수의 장치는 아직 설계하지 않았다.
넷째가 가장 깊다. 그리고 이 숙제를 들여다보다 알게 된 것이 있다.
아무도 지대를 제대로 잰 적이 없다.
땅값은 오래 재왔다. 그런데 유량으로서의 지대, 곧 그 땅에서 한 해에 실제로 나오는 값을 가격에서 역산하지 않고 잰 계열은 사실상 없다. 이 주제의 대표 연구조차 땅값에 수익률을 곱해 지대를 얻는다.
지대를 전면에 내세우는 쪽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지대를 '가격에서 본래의 비용을 뺀 나머지'로 정의하면, 뺄 값을 관측할 수 없으므로 역시 재지 못한다.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1994년에 토지 총액 공표를 아예 그만두었다. 자료를 믿을 수 없게 되었다는 이유였고, 거기 붙은 설명이 "평가사들에게는 가치를 땅과 건물로 정확히 나눌 유인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조지의 순서로는 지대를 재고 거기서 땅값을 얻는다. 지금은 땅값을 재고 거기서 지대를 얻는다. 순서가 뒤집힌 채 백오십 년이 지난 것이다.
그러니 넷째 숙제는 내가 못 푼 숙제가 아니라 아직 아무도 묻지 않은 물음에 가깝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이 이 연재에서 내가 얻은 가장 큰 소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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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릴 수 있게 적는다는 것
나는 경제학자가 아니다. 이 연재의 구상은 그럴듯해 보일지 몰라도 엄밀성에서는 손볼 곳이 많으리라고 생각한다. 전공자가 보면 용어가 어긋난 데도 있을 것이고, 이미 논파된 길을 다시 걸은 데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연재를 쓰는 동안에도 앞 회차의 조항이 틀린 것을 발견해 고친 일이 두 번 있었다.
매 회 글쓴이 자리에 '+ AI 동료들'이라고 적어온 그대로, 이 연재는 인공지능과 함께 썼다. 발상과 판단은 내 것이지만, 자료를 찾고 논지의 빈틈을 짚고 반론을 미리 세우는 일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내가 세운 조항이 산술적으로 틀렸다는 것을 지적받아 고친 것도 그중 하나다.
그럼에도 이 작업에 뜻이 있다고 보는 이유를 적어두겠다.
이것은 이론의 제안이 아니라 계기(計器)의 제안이다.
온도계가 만들어 진 것이 1724년이고 카르노가 열역학을 세운 것이 1824년이다. 백 년 차이다. 잴 수 있게 된 다음에 이론이 왔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 어디에 눈금을 꽂을지 지목하는 일에는 그 분야의 학위가 필요하지 않다.
전문성은 변수 목록을 물려받는다. 목록에 빠진 것은 전문성이 깊어질수록 더 안 보인다. 지금 경제학에서는 땅값이 어떻게 정해지는지 아는 사람들과 은행이 어떻게 돈을 만드는지 아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학회에 간다. 그 사이의 회로는 어느 쪽의 소관도 아니다.
빈 곳을 가리키는 일은 분야 밖에서도 할 수 있다. 메우는 일은 전문가가 해야 한다. 이 연재가 하려 한 것은 메우는 일이 아니라 가리키는 일이었다.
그리고 가리키되 틀릴 수 있는 형태로 적으려 했다.
예컨대 이런 명제다. 지대는 땅값보다 덜 흔들린다. 재면 참이거나 거짓이다. 덜 흔들리지 않는다면 이 구상의 토대가 무너진다. 땅값을 원인 자리에 놓으면 답이 기간마다 달라진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료를 들여다보면 판가름이 난다.
이렇게 적는 데는 이유가 있다.
누군가 이 방향이 틀렸다고 반박하려면, 지대를 재야 한다. 지대가 땅값만큼 요동친다는 것을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아무도 재고 있지 않다.
그러니 이 글이 맞든 틀리든 측정이 생긴다. 보통의 논쟁은 끝나면 글이 남는데, 이 논쟁은 끝나면 자료가 남는다. 그리고 앞에서 적었듯 지금 비어 있는 것이 바로 그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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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작업이 기대하는 것
그래서 이 연재는 완성된 설계도가 아니라 공개된 초안이다.
나는 이 상상이 옳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지대가 가진 경제원리로 보아 이 방향에서 해법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 이 방향이 틀렸다고 반론한다면, 그 반론에 담긴 내용은 그 자체로 진전을 위한 거름이 된다. 틀린 곳을 지적받는 것이 이 연재의 목적에 어긋나지 않고 오히려 부합한다. 그래서 이 상상의 작업에 뜻이 있다고 본다.
다섯 해 전에 한 문장으로 적어둔 것을 스물여덟 편에 걸쳐 풀어놓았다. 푼 것보다 못 푼 것이 많다. 그러나 비워둔 칸을 비워두었다고 적어두었으니, 누군가 그 칸을 채우러 올 수 있을 것이다.
기다리는 것은 동의가 아니라 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