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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류귀종(萬流歸宗)-3-통권87화
“서방님, 너무해!”
“소궁주, 상공께서 새로운 경지에 드셨는데 축하해야지요.”
“안 그래도 서방님은 충분히 넘치도록 강하다구. 거기서 더 강해져서 우화등선(羽化登仙)이라도 하면 나는 생과부가 되는 거잖아!”
설화는 철이 들고 나서 처음으로 서방님에게 큰 소리를 질렀다. 생각해보면 서방님은 자신을 칭찬하는 표현에 혼자 화를 낸 것이기에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래서 적당한 시기에 용서해줄 생각이었으나 서방님은 백록파의 천방대협 금동보와 비무 같지 않은 비무 후, 뭔가 깨달았는지 길고 긴 사색에 잠겨버린 것이다. 설화는 겨울이 초입이라 쌀쌀한 날씨에 몸이 상할까 서방님에게 말을 시키려 했으나 오진자가 그렇게 하면 깨달음을 놓치게 된다고 하여 가슴 졸이며 서방님 곁을 맴돌았다. 그리고 잠깐 자릴 비운 사이 이번에는 금동보의 거처로 가서 다시 7일 간이나 나오지 않으니 걱정은 화로 바뀌었다.
“묘연 언니도 생각해봐. 내가 얼마나 걱정을 많이 했는지. 그런데 서방님은 그런 내 마음도 몰라주고 금 대협에게 갔단 말이야.”
“그거야! 당장 확인하고 싶으신 것이 있어 그러셨겠지요.”
“아무리 그래도 나보다 금 대협을 먼저 찾다니 너무하잖아!”
“….”
잔뜩 골이 난, 설화 소궁주의 모습에 주묘연의 입가에 미소를 걸렸다. 그것은 소궁주의 표정에서 진짜 부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묘연 언니.”
“말씀하세요.”
그러다 문득 설화는 이제까지와 다른 무겁게 내려앉은 차분한 어투로 하소연을 했다.
“저는 두려워요.”
“뭐가요?”
“서방님이 이대로 사라질까 봐!”
“예?”
“그동안 생각해보았는데, 저는 서방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요.”
“?”
주묘연은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설화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서방님에게 무공을 가르쳐주신 사부가 누구인지, 부모는 누구인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하다못해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조차 몰라요.”
“예?”
주묘연은 설화의 말에 은근히 놀랐다. 고인(高人)들은 자신의 신상을 밝히길 꺼려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여인천궁에서도 굳이 상공의 내력에 대해서는 파고들지 않았다. 처음에는 설화 소궁주가 묘가의 손이라는 소문에 묘가와 어떤 관련이 있을 것이라 짐작했지만 설화가 백호라는 것이 밝혀진 지금 그의 정체는 진정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아내인 설화가 상공의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는 것은 은근한 충격이었다.
“무공을 수련하면서 궁의 장로님들이 나누시는 말씀을 들었는데, 젊은 나이에 서방님 정도의 경지는 있을 수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제 서방님이 노회(老獪)한 고수로 반로환동(返老還童)했대요.”
“서, 설마요.”
“하지만 상관없어요. 그래도 서방님은 서방님이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합궁하지 않는 것을 보면 지금이라도 당장 더 높은 도(道)를 위해 절 떠나실지도 몰라요.”
“아닙니다. 소궁주 상공이 소궁주님을 생각하시는 마음은 소궁주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지극합니다.”
검선자 주묘연은 설화 소궁주에게 그런 불안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상공이 나이 어린 설화를 아내라고 말한 것이 백호인 설화의 신분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상공이 설화의 양부였다면 설화는 영원히 숨어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설화의 뛰어남은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모여 있는 닭들 사이에 훤칠한 백학처럼 숨어 있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설화는 바로 주묘연 자신이 찾아낸 여인천궁의 미래를 책임질 기재 중 기재였다. 세상에 나선 이상 설화가 백호라는 사실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든 밝혀질 것이고 아무리 강한 상공이라 하나 양부의 신분으로 설화를 보호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 뻔했다. 그러나 남편이라면 설화라는 여인을 얻는 데 가장 방해되는 존재가 되고, 설화에게 미칠 모든 위험은 몇 배로 확대되어 남편인 상공을 노릴 것이다. 그러니 상공의 심중에 설화의 존재가 그저 딸 같은 존재라면 설화가 안전하다 판단한 순간, 상공은 설화의 말처럼 그냥 사라져버릴 수도 있었다. 비록 천하에 천하제일미 천상천화라 칭송되는 설화지만 상공 같은 고인(高人)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주묘연은 슬픈 표정의 설화 소궁주에게 다가가 조용히 끌어안아주었다.
***
“흐음,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인가?”
밀림 한가운데 사방에서 비둘기가 날아드는 투박한 정자(亭子)에서 호도 하남천원군부에 하남천원군의 상초와 작도인 두 장수의 목을 노리고 잠입했다가 그들의 대화를 듣고는 대담하게 제안을 한 진토인 자객(刺客)은 전서구(傳書鳩)들이 매달고 온 밀지를 하나하나 펼쳐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야(大爺),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야에 관한 소문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나도 안다. 용의주도한 백호나한이 적대적 인사였던 그들의 수작에 넘어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욱 타당할 테지.”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인상의 그는 남례일족의 대야(大爺)로 최고 수장이었다. 남례일족은 사실 남례성의 진토인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남례일족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천하가 십이진가(十二眞家)를 주축으로 한 수인들에게 제패되고 변방으로 생각되던 도남(圖南) 지역으로 진출하며 남례성으로 바뀐 후 독자적인 생활과 문화를 가진 진토인들과 조정에서 임관해온 관리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힘을 가진 쪽은 관리들이었고, 도남인들은 그들에게 티끌과 같이 하찮은 사람이라는 의미로 진토인(塵土人)이라 불리며 그들의 문화와 전통은 철저히 무시되고 파괴되기까지 했다. 이에 도남인들은 자객(刺客)이 되어 자신들의 주장을 펴기 시작했고, 많은 남례성의 관리들이 사살되었다. 이것이 바로 남례일족의 정체였다. 그러나 차차 중주의 문화에 적응하고 동화되어 도남인은 사라지고 진토인만 남아 수인 조정이 만든 질서에 안주하자 자객으로 시작된 그들은 무림의 일각을 차지하고 남례성을 지배했다. 그러나 가끔 남례성의 진토인들을 대표하며 자객의 업을 이어나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했다.
자객(刺客)과 살수(殺手)는 같은 의미로 생각하기 쉽지만 자객은 자신들의 행위로써 세상에 뭔가 말하려는 자를 말하고, 살수는 말 그대로 죽음을 업으로 삼는 족속들이었다. 돈에 고용되거나 대가를 위한 자객은 있을 수 있지만 살수는 오로지 황금이라는 대가를 위해 의미도 관계도 상관없이 살행(殺行)을 일삼는 족속들이었다.
“백호나한이 남례성을 떠나지 않았으니 봉수성에 있는 것이 분명한데, 밖으로 나오질 않으니….”
“지금 백호나한이 머무는 저택의 경호는 의외로 허술합니다. 그냥 암살대를 편성해서 공격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것은 나도 생각해본 바다. 하지만 백호나한이 그곳에 있다는 확신이 없다. 그러나 암살대를 준비해 배치해두는 것이 좋겠다.”
“존명!”
대야(大爺)는 강호에 남례일족이라 알려진 결사의 모든 것을 이용할 권한이 있는 존재로, 그야말로 남례일족의 전부였다. 그는 최고의 자객이자 최고수이기도 했다. 소야(少爺)는 대야가 되기 위한 후계자들로, 대야에게는 많은 소야들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가장 뛰어나 다음 대야로 생각하던 소야 예하(藝河)가 귀림에서 백호나한에게 무공이 전폐되자 모든 활동을 접고 사태를 예의 주시했다. 그러다가 백호나한이 열지족을 꼭두각시로 만들어 남례성을 완전히 장악하려 하는 행태를 취하자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백호나한에게 남례성 장악 임무를 받은 작도인과 상초를 제거하려 했던 것이었다.
“확실히 백호나한만 없다면 나머지는 지리멸렬(支離滅裂)할 것이 뻔해. 그렇지 않더라도 그렇게 만드는 것은 쉽지. 남례성은 다시 도남이 되고 도남은 수인 조정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족하겠지.”
남례일족의 대야 하수(遐壽)는 백호나한을 도모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역량을 걸었다.
“자객의 입장에서 백호나한만큼 가치 있는 자는 찾아보기 힘들지. 남례가 도남이 되면 남례일족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
목숨을 버리고 죽여야 할 자를 찾은 하수는 조용히 투지를 불살랐다.
***
겨울이 왔다. 북지성은 이미 눈이 쌓여 천지가 하얗게 변해 있었다.
―뽀드득, 뽀드득, 뽀드득, 뽀드득….
밤새 눈이 내린 다음날 아침 라혼은 해가 뜨자마자 지난 열흘간의 새로운 경험에서 얻은 깨달음을 정리하기 위해 태회진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이름 모를 산에 올랐다. 이 산도 분명 불리는 이름이 있을 테지만 지금 라혼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흠~ 후~!”
라혼은 찬 바람을 폐부 깊숙한 곳까지 들이마시고는 완전히 밝아진 하늘과 서편에 펼쳐진 푸르고 넓은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이 순간 라혼의 머리 속은 완전히 비어 있었다. 어떠한 생각이나 고민도 없이 그저 바다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라혼은 이내 고개를 돌려 하얀 능라 비단으로 몸을 가린 산봉에 눈을 두었다. 그리고….
―휘이이이이이… 촤라.
“…!”
너무나 평범한, 그래서 생각할 것조차 없는 일이 라혼의 눈앞에서 펼쳐졌다. 한줄기 돌풍이 불어 나뭇가지에 쌓여 있는 눈이 떨어지는 사건이었다.
‘왜? 바람에 눈이 떨어졌지? 아니, 바람은 왜 부는 거야?’
라혼은 갑자기 일어난 기이하기 그지없는 심상(心想)에 허리를 굽혀 눈을 한 움큼 주워 다시 떨어뜨렸다. 그러자 눈의 일부는 미풍에 날렸고, 대부분은 눈 쌓인 땅에 떨어졌다. 라혼은 고개를 계속 갸웃거리며 눈을 집어 떨어뜨리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박힌 듯 서서 사색에 빠졌다.
‘뭐지? 뭐야? 왜 눈이 땅으로 떨어지는 거지? 눈이 땅에 떨어진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아니야, 이건 힘이다. 만물을 땅으로 끌어당기는 힘. 그럼 달은 해는 어떻게 하늘에 떠 있을 수 있지? 신이 만든 힘?’
라혼의 시선은 땅에서 하늘로 시선이 옮겨졌다. 그리고 라혼은 하늘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라혼은 이 세상이 둥근 구(球)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땐 그 사실이 그저 신기했을 뿐, 별 감흥은 없었다. 유체(流體) 상태에서 본 사실이기 때문에 그저 꿈처럼 치부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몸으로 느끼고 어떤 실감을 얻고 싶어 끝없이, 끝없이 하늘로,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라혼은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대기가 차가워지고 숨쉬기가 힘들다는 것을 체험했다. 그것은 마치 천계의 신들이 쳐놓은 결계인 듯 라혼을 괴롭혔다. 그러나 라혼은 그런 그들과 싸워나가야 했다. 결계 따위에 무너진다면 싸워보나 마나였다. 그러나 라혼은 결국 맨몸으로 견디는 것을 포기하고 에텔 스페이스로 결계를 쳤다. 그리고 끊임없이 높이높이 솟아올랐다. 그러자 이번에는 태양에서 내리쬐는 따사로운 햇볕이 날카롭기 그지없는 창이 되어 라혼의 피부를 태우기 시작했다. 라혼은 다시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결계를 손봄으로써 태양에서 쏘아 보내는 태양신의 창을 방어했다. 그렇게 얼마나 높이 올랐을까, 라혼은 높이 오르는 일을 멈추고 의식을 개방해 자신이 얼마나 올랐는지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경험에 없던 초장거리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를 시전했다.
‘춥고 어둡다. 이곳이 마계인가?’
라혼은 거대한 돌과 바위산이 허공에 떠 있는 곳에 홀로 서서 의식을 개방해 주위를 탐색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은커녕 그 흔한 작은 풀뿌리조차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라혼은 칼처럼 뾰족한 난석 지대를 걸어보기 위해 한 발 내디뎠다. 그러나 라혼은 그 작은 동작에 마치 능공천상제(凌空天上梯) 신법을 펼친 것처럼 몸이 허공으로 뽑아 올려지자 순간 당황했다.
‘헉! 이게 뭐야?’
그리고 라혼은 천지가 분간 안 되는 상황에 빠지자 무척 혼란스러웠다. 몸을 바로 하기 위해 금리도천파(金鯉倒千波)의 묘리로 허리를 튕겼는데 사방이 돌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돌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천지가 돌고 있는 것인가? 아니, 과연 여기가 천지간이긴 한 것인가? 욱! 그보다 뭔가가 아래위로 잡아당기는 것 같아.’
라혼은 어떤 힘이 머리와 다리를 잡아당기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고 거대한 바위산이 확대됨을 느끼며 격공흡인(隔空吸引) 수법으로 가장 가까이에 있던 바위 덩어리를 잡아챘다.
“허억~!”
단순히 잡아챈 것에 불과한데도 라혼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는 바위 덩어리에 기겁하며 몸을 바로 하려 했지만 좀전의 상황을 재연하고 싶지는 않았다.
‘커억!’
―쿵.
라혼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충격음을 예상했지만 몸이 받은 충격에도 소리는 나지 않았다. 날카로운 바위에 입고 있던 옷이 너덜너덜한 걸레가 되었음에도 소리가 나지 않자, 라혼은 아직도 자신에 부딪힌 충격에 비산하여 허공에 떠 있는 돌들을 집어 바닥에 던져보았다. 그럼에도 소리는 나지 않았다.
‘여기선 아무도, 아무것도 살아갈 수 없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바람도, 구름도, 그리고 어떠한 생명도 보이지 않는다. 거대한 판게아만이 바람이 있고 구름이 있고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이야. 그렇다면 신은 그곳을 보호하는 존재였나?’
라혼은 그러한 생각을 하며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문득 자신이 생각한, 아니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사실에 의문을 품었다.
‘태양이 땅을 중심으로 도는가? 땅이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가? 아니, 땅이 움직이는 것이었나?’
그리고 라혼은 아름다운 푸르고 둥근 탁자같이 보이는 ‘땅’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관점에서 그 땅이 허공에 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자 왜 떨어지지 않는지 의문에 싸였다. 그러나 이내 어디가 아래이고 어디가 위인지 알 수 없는 바깥 세계의 모습에 의문만 점점 늘어갔다. 그리고 다시 땅으로 돌아가기 위해 [플라이트Flight : 비행] 주문을 시전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어 라혼은 재차 [플라이트Flight]를 시전했다. 그래도 아무런 변화가 없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플라이트Flight] 주문은 이미 시전되고 있었다. 다만 바람이 없는 공간이고 땅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멀리 있어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을…. 라혼은 에텔 스페이스를 이용해 땅과의 거리를 측정하고 결국 [플라이트Flight] 주문을 거둬들였다. [플라이트Flight] 주문으로 가기에 땅은 너무 멀었던 것이다. 라혼은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를 하여 땅을 보호하는 결계 근처까지만 이동한 뒤 그대로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쿠릉 쿠르르르릉!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적막한 곳에 있다가 귓가를 자극하는 바람 스치는 소리가 새삼스럽게 생경해진 라혼은 또다시 새로운 결계의 효용에 당황했다. 엄청난 고열이 라혼을 태울 듯이 발생한 것이다. 라혼은 어쩔 수 없이 바람을 느껴보고 싶어 약화시켰던 결계를 강화시켰다. 그리고 그 상태를 유지하여 땅의 힘을 느끼며 몇 개의 구름층을 뚫고서야 온전한 땅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내 땅과 충돌했다.
―쿵! 콰콰콰콰콰과과과….
그리고 엄청난 굉음과 함께 지표면이 밥주발처럼 파였다.
“쿨럭쿨럭쿨럭…. 휴우! 대단하군. 이런 엄청난 충격이라니….”
라혼은 전신이 찢어져라 비명을 지르는 몸의 상태를 점검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곤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 청명하기 그지없는 하늘을 보았다.
“천지(天地)가 고작 거대한 우주의 티끌도 안 되는 일부분이었어.”
라혼은 새로운 사실을 알고 나서 자신이 그동안 알고 있던 모든 것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순간그동안 의심하지 않았던 단순한 것에 파생되어 엄청난 진실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되었으니 그동안 의심하지 않았던 모든 것이 새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라혼의 사색은 오래가지 못했다.
“!$#$%@!!@$#%@!!!!!”
“…?”
소인들이었다. 드워프 정도의 작달막한 사람들이 저마다 꼬챙이를 꼬나들고 뭐라, 뭐라 소리를 지르며 라혼 주위를 에워쌌다. 라혼은 즉 [콤프리헨드 랭귀지스Comprehend Languages : 언어 이해] 주문을 시전해 그들이 하는 말을 엿들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이래.”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마족일 수도 있어.”
“곧 제사장이 온다니까 뭔가 해주겠지.”
라혼은 그들의 대화에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이곳은 칸 대륙도 아니고 인시드 대륙도 아니며 시드그람 대륙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남방 대륙에 떨어진 모양이군. 어쩌나? 그냥 이대로 돌아갈까? 아니지, 기왕 여행(?) 온 김에 이들과 인연을 맺어두는 것이 좋겠어.’
라혼이 그런 궁리를 하는 동안 흰 천에 황금실로 수를 새긴 옷을 입은 노인이 탄 화려한 황금 수레가 접근했다. 수레의 문양을 보고 짐작하건대 아마도 태양신이거나 태양신과 관련된 신을 모시는 제사장 같았다. 이윽고 장중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수레가 멈춰지고 건장한 노예가 수레 앞에 웅크리자 그 노인은 그의 등을 밟고 땅으로 내려서더니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라혼에게 걸어왔다. 그리고 근엄한 어조로 입술을 떼었다.
“나는 태양과 지혜의 주신(主神) 라(Ra)를 모시는 헬리오스 신전의 대제사장 라혼이다.”
“….”
“그대는 누구이며, 어찌하여 성스런 도시 헬리오폴리스에 왔는가?”
라혼은 라혼이란 이름의 늙은 제사장의 말에 평원 저쪽 언덕 너머에 많은 사람들이 사는 도시가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왜 아무런 대답이 없는가?”
“….”
[콤프리헨드 랭귀지스Comprehend Languages] 주문을 통해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는 있었지만 그가 하는 남반 대륙 언어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혹시 몰라 라혼은 자신이 알고 있는 세 가지 언어인 시드그람 공용어, 인시드어, 그리고 칸어를 모두 사용해보았다. 그러자 그들의 태도가 돌변했다.
“외륙인이로군.”
“…?”
라혼은 갑작스럽게 격렬한 적의와 함께 전의를 불태우는 작은 사람들의 태도에 얼떨떨했다. 시드그람, 인시드, 칸은 서로의 존재를 알고 미약하지만 서로 교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방 대륙은 그 어떠한 곳과도 교류가 없어 신비에 싸인 땅이었다. 라혼은 지금 이들의 태도를 보고 비로소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대가 어찌하여 게브 땅에 왔는지 모르나, 비록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신성한 게브를 더럽혔으니 너의 순결한 붉은 피로만 정화할 수 있을 것이로다.”
“….”
간단히 말해서 죽이겠다는 뜻의 제사장 라혼의 말에 라혼은 어이가 없었다.
“게브누트에 가득한 슈여, 그대의 아버지 위대한 라의 이름으로 청하노니 나 라혼에게 그대의 권능을 빌려주소서.”
―휘이이이잉~!
기도인지 주문인지 헬리오스 신전에 제사장 라혼의 영창(靈唱)이 끝나자 갑작스런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 바람은 점점 강해져 흩날리는 먼지에 눈을 뜰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라혼은 이미 결계를 펼쳐두고 있었기에 그 자리에 태연히 서 있었다.
“엘 슈El Shu!”
―후웅, 후웅, 후웅….
바람은 점점 거세지더니 이내 작은 회오리바람으로 바뀌었다. 이에 라혼은 허리춤에서 협봉검을 뽑아들고 횡소천군(橫掃千軍)의 일식으로 크게 휘두르며 공간을 베어갔다.
―펑!
그러자 거세게 몰아치던 회오리바람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이, 이럴 수가….”
제사장 라혼은 외륙인이 꼬챙이를 장난처럼 휘두른 것만으로 대기의 여신 슈(Shu)의 권능을 빌려 만든 신의 바람이 사라지자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리고 비로소 상대가 태양과 지혜의 신 ‘라’가 머무는 신성한 땅에 기이한 상처를 낸 자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또 한 번 늙은 제사장 라혼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나는 라혼이다.>
“…!”
바로 라혼이 허공에 신성 문자(神聖文字) 히에로글리프(Hieroglyph)로 허공에 황금빛으로 그렇게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그대 또한 나와 같은 위대한 라의 사제인가?”
라혼은 상대가 신성 문자를 알아보고 다시 묻자 다시 허공에 글을 적었다.
<어찌하여 나를 공격하는가?>
“그대는 외륙인이 아닌가?”
<내가 이 대륙에 살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내가 공격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그대는 외륙인이 이 땅이 와서 벌인 살육을 모르는가?”
<살육?>
사정은 이러했다. 수백 년 전 남방 대륙, 이 땅에 사는 이들이 스스로 게브 대륙이라 불리는 곳에 한 무리의 외륙인들이 상륙했다. 그들은 처음 작은 마을을 이루며 살아가다 어느 순간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유입돼 스스로 나라를 세우더니 게브 대륙인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에 이른다. 그들은 강력했다. 키도 게브 대륙인들보다 머리 한두 개가 컸으며 거대한 짐승을 타고 종횡무진 전 게브 대륙을 100년 이상이나 피로 물들였다. 그러나 그들 자손의 키가 점점 작아지더니 게브 대륙인들과 비슷하게 되고, 그들이 타고 다니던 짐승은 게브 대륙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일이 그렇게 되자 압도적인 수의 게브 대륙인들은 외륙인들에게 피의 복수를 했다. 100년 간 쌓인 증오는 그들을 살아남지 못하게 했고, 그 후 게브 대륙 밖은 모든 존재를 금기시하여 가끔 조난당한 외륙인들은 발견되는 족족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렇게 된 것이다. 이제 내가 물을 차례다. 그대는 라의 사제인가?”
<아니다.>
“라혼이란 이름의 연원을 모르겠군.”
<그렇다.>
“라혼은 태양과 지혜의 신 위대한 ‘라’를 가장 가까이 모시는 자의 이름이다.”
<알았다. 그러나 나는 라는 모른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그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잘 안다. 그리고 이 땅의 율법이 날 허락하지 않으니 곧 떠나겠다.>
라혼은 제사장 라혼의 대답이 있기도 전에 칸 대륙의 북지성 태회진이 있는 곳으로 [텔레포트 워프Teleport warp]했다. 라혼이 노예로 팔렸을 때 라혼을 사들였던 산 주인의 가문을 상징하던 문장은 바로 태양이었다. 그러니 라혼이란 태양에 봉사하는 자라는 뜻이 되니 ‘라혼’이란 훌륭한 노예의 이름이 된다. 문장의 뜻과 의미 그리고 발음이 전혀 교류가 없는 남방 대륙인 게브 대륙과 인시드 대륙이 똑같았다. 라혼은 신성 언어에 해당하는 단어이니까 과거 아주 먼 과거엔 두 대륙이 서로 교류하고 같은 말을 사용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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