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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삼국시대의 고대국가 중 하나. 서기 전후 무렵 성립되어 668년에 멸망하였으며, 한반도(韓半島) 북부와
남만주(南滿洲) 일대를 근거지로 번성하였다.
역사
성립
고구려족(高句麗族)은 만주(滿洲)지방에 살던 부여족(扶餘族)에서 갈라져 나온 민족으로 처음에는 쑹
화강[松花江] 유역에 살았는데 BC 2세기경부터 남하(南下)하여 동가강유역에서 압록강(鴨綠江) 유역
에 걸친 산악지대에 살면서 수렵생활을 하였다. 처음에 고구려족은 현도군의 지배권안에 있었으나, 그
지방이 산악지대이므로 중국의 지배력이 철저하지 못하였다. 민족의식에 눈뜬 이들은 중국에 대하여 꾸
준한 저항을 계속하였으며, 부족간 통일의 필요성을 느끼고 강한 부족을 중심으로 한데 뭉쳐 집권국가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주몽(高朱蒙;東明聖王)이 졸본부여(卒本扶餘:桓仁지방)에 고구려를 세운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에 의하면 BC37년으로 되어 있다. AD 3년 주몽의 아들 유리왕 때에 수도를 국내성(國內城; 지금의 通
溝)지방으로 옮겼고, 제6대 태조왕(太祖王고; 재위 53∼146)때부터 차츰 다른 부족들을 정복하여 강토
를 넓히고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209년(산상왕 13)에는 환도성(丸都城)을 축조하였다.
외세와의 투쟁
고구려가 일어난 땅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한반도에 침입하는 중도에 위치했으므로 그들과 끊임없이
싸움이 벌어졌다. 특히 고구려가 압록강 하류를 공격하여 중국 본토와 낙랑군(樂浪郡) 사이의 교통을
위협하자 당시 중국의 삼국(三國) 가운데 하나로 북쪽을 차지하고 있던 위(魏)나라는 장수 관구검(毋丘
儉)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치게 하여 224년(동천왕 18) 수도 환도성을 함락시킨 적이 있었다.
이같은 위기를 겪으면서도 고구려는 점차 세력을 확대하여 313년(미천왕 14)에는 400여년이나 내려 오
던 낙랑군과 그 남쪽의 대방군(帶方郡)을 정복하여 한반도에서 중국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다. 이어
19대 광개토왕(廣開土王;재위 391∼413)과 20대 장수왕(長壽王;재위 413∼491)에 이르러 대대적인 정
복을 감행하여 북(北)으로는 쑹화강, 서(西)로는 랴오허강[遼河]을 넘었고, 남(南)으로는 아산(牙山)과
삼척(三陟)을 연결하는 선까지 진출하여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루었는데, 427년 장수왕은 수도를 환도
성으로부터 평양(平壤)으로 옮겼다.
이리하여 고구려는 남쪽으로 신라·백제와 맞서고 서쪽으로는 중국을 통일한 수(隋)나라와 겨루게 되었
다. 마침내 598년(영양왕 9)수나라 문제(文帝)는 수륙 30만 군대를 거느리고 랴오허강까지 쳐들어왔으
나 고구려의 반격·질병·풍랑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뒤를 이어 즉위한 양제(煬帝) 역시 군비를 정돈하
여 612년(영양왕 23) 113만 군대를 거느리고 랴오허강을 건너 요동성(遼東城:지금의 遼陽)을 공격하였
으나 고구려의 수비가 견고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자, 양제는 따로 30만 군대를 거느리고 압록강 서쪽으
로 진출하였다.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은 후퇴를 가장하고 수나라 군대를 유인하여 살수(薩水:지금의 淸川
江)에서 일대 반격전을 전개해서 섬멸, 30만중에서 살아 돌아간 자는 겨우 2000여 명이었다. 한편 수군
(水軍)은 7만의 병력이 300척의 배로 대동강에 이르러 평양을 공격하였으나, 영양왕의 아우 건무(建武)
가 복병(伏兵)으로 이를 무찔렀다. 그 뒤에도 양제는 여러 차례 고구려를 치려고 군대를 움직였으나 끝
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고구려가 중국의 동북방에 강대한 세력으로 군림하여 중국과 대립할 뿐 아니라 북쪽의 돌궐(突厥) 등과
내왕하니 중국으로서는 큰 위협이 되었다. 수나라 다음에 일어난 당(唐)나라도 이같은 고구려를 두고
안심할 수 없어서 태종(太宗)은 644년(보장왕 3) 30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수도 낙양(洛陽)을 출발하여
다음해 봄에 랴오허강 건너 요동성 백암성(白巖城)을 총공격하였으나 60여 일의 공격에도 고구려군은
끝까지 항전하여 태종은 마침내 후퇴하였다. 당나라 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고종(高宗)도 여러 차례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고구려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영도하에 국민이 일치단결하였고 군대가 막강
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 고종은 신라군과 힘을 합하여 660년 먼저 백제를 공격한 뒤 그 여세를 빌어 이듬해에 평양을 포위·공
격하였으나 연개소문이 이끄는 군대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크게 패하고 돌아갔다.
멸망
666년(보장왕 25) 연개소문이 죽은 후 그의 세 아들 남생(男生)·남건(男健)·남산(男産) 사이에 내분이 일
어나 나라의 형편이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이 기회를 틈타 667년 이적(李勣)·설인귀(薛仁貴)가 이끄
는 당나라 군대 50만, 김인문(金仁問)이 이끄는 신라군 27만이 합세하여 평양을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이듬해인 668년(보장왕 27) 나당(羅唐) 연합군의 맹렬한 공격 앞에 마침내 항복,
보장왕과 중신들은 당나라 군대에 붙잡혀서 장안(長安)으로 갔다. 이때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安
東都謹府)를 설치하고 고구려의 영토를 9도독부와 42주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제도
정치
고구려는 본디 소노(消奴)·절노(絶奴)·순노(順奴)·관노(灌奴)·계루(桂婁)의 5부족으로 형성되어 처음에
는 소노부에서 부족연맹의 장(長)인 왕이 나왔으나 후에는 계루부가 이를 대신하였다. 이 5부족은 항상
고구려의 중심세력이 되었는데 중앙집권제가 확립되고 부족제도가 무너짐에 따라 이들의 집단제도는
행정구역으로 개편되었다. 각 부족의 장을 대가(大加)라 하고 그 밑에 사자(使者)·조의(早衣)·선인(先人)
등의 벼슬을 두었는데, 이것은 옛날 중국의 경대부(卿大夫)가 거느리던 가신(家臣)에 해당되는 것이었
다.
부족의 장이 아니라도 왕족의 경우는 일가의 적통장자(嫡統長子)가 대가의 자격을 가졌는데, 이것을 고
추가(古雛加)라고 불렀다. 이 밖에 전에 왕위를 차지했던 소노부의 대가와, 대대로 왕실과 혼인한 절노
부의 대가도 고추가의 칭호를 사용할 수 있었다. 고추가는 백제의 길사(吉師), 신라의 거서간(居西干)과
같이 <귀인(貴人)>이라는 뜻이다.
중앙에서 임금의 지시를 받아 국정을 담당한 총리적인 벼슬이 대로(對盧)와 패자(沛者)였는데, 대로 밑
에 주부(主簿)·우태(優台)·승(丞)이 있고 그 밑에 사자 이하 선인까지 있다. 그리고 대로 위에 상가(相加)
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왕가의 직속 신하가 아니라 각 부의 대가 중에서 뽑힌 일종의 대변자(代辯者)
였다.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에는 관직의 서열이 정비되어 국가의 기밀·법령제정·징발·관작(官爵)을 취급
하는 고위관리로서 대대로(大對盧)·태대형(太大兄;莫離支)·울절(鬱折)·태대사자(太大使者)·조의두대형
(鳥衣頭大兄)을 두었고 그 밑에 대사자(大使者)·대형(大兄)·발위사자(拔位使者)·상위사자(上位使者)·소
형(小兄)·제헝(諸兄)·과절(過節)·부절(不節)·선인(先人 또는 仙人)을 두었다. 또 왕족이나 이에 준한 가문
의 대가(大加)에게 주던 고추가는 관직명(官職名)이 되어 외빈(外賓)을 접대했는데 태대사자의 품관이
이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대막리지(大莫離支)는 대대로(大對盧), 태대막리지(太大莫離支)는 태대대로
의 별칭(別稱) 이었다.
행정
초기 5부족의 집단체제가 그대로 행정구역체제로 발전하여 동·서·남·북·중(내)의 5부로 나뉘었다. 즉 계
루부는 내부(內部 또는 黃部), 소노부는 서부(西部 또는 右部), 절노부는 북부(北部 또는 後部), 순노부
는 동부(東部 또는 左部), 관노부는 남부(南部 또는 前部)라 하였고 이들이 사는 행정구역을 통틀어서
내평(內評)이라 하였다. 지방도 5부(部)로 나누었고 부 밑에 성(城)이 있었다.
부의 장관을 욕살(褥薩), 성의 장관을 처려근지(處閭近支) 또는 도사(道使)라 하였는데, 각각 관료와 군
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고구려는 국민개병주의(國民皆兵主義)로 문무(文武)의 관리가 구분되지 않았으
며 군대에는 대모달(大模達;중국의 衛將軍 같은 것)·말객(末客;중국의 郎將 같은 것) 등의 직위가 있다.
평양 이외의 국내성(지금의 通溝)·한성(漢城;지금의 載寧)을 별경(別京)으로 삼았다.
사회·경제
왕족과 5부의 장(長)인 대가(大加) 그 일가 친척, 그 밑에서 일을 보는 관료들이 지배층을 형성하였는데,
이들은 군사·정치·교육·제사 등을 담당하였고 농경에는 종사하지 않았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노동을
지배하는 권력계급으로, 지위에 따라 의관(衣冠)도 달랐다. 농민·노예 등을 하호(下戶)라 하였는데 이들
은 직접 육체노동을 하는 피지배층이었다.
부족사회의 특징은 고구려 말까지 이어져 가부장적(家父長的) 지배체제가 유지되었고, 중요한 일을 결
정하는 대가(大加)의 회합인 제가(諸加)의 회의도 말엽까지 계속 이어졌다. 법이 매우 엄하여 반역자에
게는 군중이 모인 가운데 우선 화형(火刑)을 가한 다음에 목을 베며, 재산을 몰수하고 처자를 종으로 삼
았다. 전쟁에 진 자와 사람을 죽인 자, 강도 등도 사형에 처했다. 도둑질을 한 자는 12배의 배상을 물어
야 했고, 우마(牛馬)를 죽인 자는 종으로 삼았다. 기본산업은 농업이고, 어업이 그 다음이었다.
토지는 개념상으로 국가에 소속되었으나, 실제로는 왕자와 귀족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이들은 토지
와 아울러 농민도 지배하였다. 수공업이 발달하여 금속기구·목기(木器)·토기·혁구(革具) 등을 만들었고,
직조(織造)기술도 발달하여 세포(細布)는 화폐의 구실도 하였다. 또 고구려는 낙랑군을 정복하여 그곳
의 발달된 기술을 배웠고, 철이 많이 나는 평곽(平郭;지금의 鞍山 부근)을 점령함으로써 철공업(鐵工業)
이 발달되어 나라가 강성해지는 원동력이 되었다. 상업은 주로 물물교환이었고 이웃나라들과도 모피
(毛皮)·철구(鐵具)·세포(細布) 등의 교역이 있었다. 세금에는 2개의 종류가 있었는데, 사람에게 부과하는
것을 세(稅)라 하여 포(布)와 곡(穀)으로 받았고, 매호(每戶)에 부과하는 것을 조(租)라 하여 곡식으로만
받았다. 세는 1명에 포 5필 또는 곡 5섬이었고, 조는 3등급으로 나누어 1등은 1섬, 2등은 7말, 3등은 5말
이었다.
문화
교육
중국과의 지리적 관계로 건국 전부터 한문이 사용된 것으로 짐작되나 372년(소수림왕 2)에 비로소 중국
식 태학(太學)을 세웠고, 이해에 전진(前秦)의 임금 부견(符堅)이 불상(佛像)·불경(佛經)·승려(僧侶)를
보내옴으로써 불교가 들어왔으며 다음해에 율령(律令)을 제정하였다. 태학에서는 중국의 고전과 아울
러 무술도 가르쳤다. 이 문무일치의 교육은 후기에 들어와서 더욱 보급되어 전국 각지에 경당이라고 하
는 사립학교를 세워 미혼남자들을 모아 고전과 궁술(弓術)을 가르쳤다. 태학에는 귀족의 자제들이 들어
갔고 경당에는 평민의 자제들이 들어 갔다.
국사편찬
한학이 퍼짐에 따라 국사(國史)도 편찬하게 되었는데, 기록에 나타난 것을 보면 연대와 편찬자의 이름
은 알 수 없으나 《유기(留記)》라는 100권의 국사책이 일찍부터 내려오고 있었다. 600년(영양왕 11)에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에게 이것을 추려 《신집(新集)》 5권을 만들게 하였으나, 《유기》와 《신집》
은 오늘날 모두 전하지 않는다.
시가·음악
고구려의 문학은 왕자 호동(好童)이나 온달(溫達)이야기의 설화문학이 전해지고, 유리왕의 《황조가(黃
鳥歌)》와 을지문덕의《오언시(五言詩)》 등 몇몇 시가(詩歌)가 《고려사(高麗史)》에 전해질 뿐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고구려의 악기에는 관(管)·현(絃)·격타악(擊打樂)을 합하여 모두 14종이 있었으며,
악곡에는 《지서가(芝栖歌)》·《지서무(芝栖舞)》·《공후인》 등이 있었다. 또 재상 왕산악(王山岳)은
진(晉)나라로부터 들여온 칠현금(七絃琴)을 개량하여 거문고를 만들고, 100곡이 넘는 악곡도 엮었다.
고구려의 음악은 수·당에도 전해져 많은 영향을 주었다.
미술
고구려의 미술은 고분(古墳)에 남아 있는 벽화(壁畵)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용총(舞踊塚)·각저총(角抵
塚) 등 초기의 그림은 표현에 있어 기법이 서툴렀으나, 화상리(花上里) 감신총(龕神塚) 등 중기의 그림
은 섬세한 사실(寫實)의 필치로 당시의 풍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사신총(四神塚) 등 후기 벽화는 강한
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웅대하고 건실한 기풍을 나타내고, 사실을 초월하여 사의(寫意)의 경지에 들
어섰다. 또한 강서고분에 그려진 사신도(四神圖)는 고구려시대 최고의 걸작으로 색의 조화가 뛰어나며,
쌍영총에서 발굴된 기마상(騎馬像)·남녀입상(男女立像) 등은 당시의 풍속을 알려준다. 고분의 구조나
규모로 볼 때 건축기술 또한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풍속
고구려인들은 검소하고 무(武)를 숭상하여 말타기·활쏘기에 능하였다. 궁궐·관청·절 등과 귀족의 집들은
기와를 덮고 일반 민가는 초가였으며 온돌을 사용하였다. 남자들은 모자를 썼는데, 특히 관료들의 모자
는 소골(蘇骨)이라 하여 깃을 꽂고 금은으로 장식하였다. 여자들은 머리에 수건을 쓰고 주름잡힌 치마
를 입었고 저고리는 무릎까지 내려왔다.
상류층에서는 바둑·투호(投壺)·축국(蹴鞠) 등 중국식 놀이를 하였고, 평민들은 춤·노래·씨름·석진(石戰)
을 즐겼다. 장례식은 성대히 치러졌으며 여러 가지 부장물(副葬物)을 관 속에 넣는 후장(厚葬)의 풍족이
있었다. 또 10월에는 동맹(同盟)이라 하여 고대사회에 널리 유행하던 추기(秋期) 부족공동체의 대제전
(大祭殿)인 국중(國中)대회를 열었다.
종교
불교
불교가 공식적으로 고구려에 들어온 것은 372년(소수림왕 2) 전진왕 부견이 승려 순도(順道)를 시켜 불
경과 불상을 보낸 때였으나, 그 이전에도 어느 정도 유포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순도가 들어온 2년 후
인 374년에는 진나라 승려 이도(阿道)가 들어왔고, 그 다음 해에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
를 세워 순도와 아도로 하여금 각각 그곳에서 불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소수림왕 다음인 고국양왕(故國讓王;재위 384∼390) 때에는 어명을 내려 불법을 숭상하라고 권장했고,
광개토왕은 즉위한 다음해인 392년 평양에 9개의 절을 더 세웠으며, 395년에는 진(秦)나라의 승려 담시
(曇始)가 경률(經律) 수십부를 가지고 와서 활발히 전도하였다. 576년(평원왕 18)에는 고구려의 승려 의
연(義淵)이 위(魏)·제(齊) 2대의 숭통(僧統)으로 이름이 높던 법상(法上)에게 가서 불교사를 배워 왔고,
같은 시대의 승려 낭(朗)은 양(梁)나라에 가서 불법을 공부하였다.
625년(영류왕 8)에 일본으로 건너간 혜관(惠灌)은 일본 삼론종(三論宗)의 개조(開祖)가 되었고, 평원왕
때 담징(曇徵)은 일본 호류사[法隆寺]의 벽화를 그렸을 뿐 아니라 지묵(紙墨)·맷돌 등을 전하였다. 이밖
에 영양왕 때 보덕(普德)은 백제로 옮겨가서 열반종을 창시하였으며 혜량(慧亮)은 신라에 가서 그 곳 불
교에 공헌함으로써 초대 국통(國統)이 되었다.
도교
도교(道敎)가 공식적으로 고구려에 들어온 것은 624년(영류왕 7)으로, 당나라 고조(高祖)의 명을 받들
어 도사(道使)가 천존상(千尊像)과 도법을 가지고 와서 노자(老子)를 강론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뒤 643
년(보장왕 2) 연개소문이 임금에게 권하여 당나라로부터 도사 숙달(叔達) 이하 8명을 데려다가 불사(佛
寺)를 몰수해서 그 곳에 머물게 함으로써 도교숭상이 표면화되었다. 이로 인하여 650년(보장왕 9) 고구
려의 이름난 승려 보덕화상(普德和尙)이 불만을 돕고 백제로 망명하는 등 말기에 들어 점차 불교 세력
이 쇠퇴하였다.
신라
삼국시대 고대국가의 하나. BC 57년부터 AD 935년까지 56대 992년 동안 존속하였으며, 7세기 중엽에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평정하여 대동강∼원산만 이남에 한국 역사상 최초로 단일민족통일국가를 세
웠다. 신라라는 국호는 역사서에 따라 사로(斯盧)·사라(斯羅)·서나(徐那)·서나벌(徐那伐)·서야(徐耶)·서
야벌(徐耶伐)·서라(徐羅)·서라벌(徐羅伐)·서벌(徐伐) 등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그 뜻은 동방의 나라, 새
로운 나라, 또는 성스러운 곳이라는 <수풀>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503년(지증왕 4)에 그 중에서 신
라로 확정하였다. 《삼국사기》 찬자에 의하면 이 신라의 <신>은 덕업일신(德業日新)에서, <라>는
망라사방(網羅四方)에서 각기 취하였다고 한다.
역사
성립
시조 설화에 의하면, 시조는 BC 1세기 무렵의 박혁거세(朴赫居世)로서 그는 경주평야에 자리잡고 있던
6부족의 우두머리들에 의해 추대되었다고 한다. 신라 초기의 왕들은 박(朴)·석(昔)·김(金)의 3성(姓) 가
운데에서 추대되었는데, 이들은 6부족 중 특히 우세하고, 또 서로 밀접한 혈연적 관계를 가진 3개촌의
부족들이었다. 신라는 4세기 중엽 부근의 여러 작은 나라들을 차례로 통합하면서 연맹왕국으로 발전하
기 시작하였다.
내물왕(奈勿王;재위 356∼402) 때부터 왕호로서 마립간(麻立干)을 썼으며, 종래의 박·석·김 3성에 의한
왕위의 교립(交立)이 없어지고 김씨가 왕위를 독점 세습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안으로 정치체제를 변
혁하고 왕의 칭호를 개정하는 등 발전을 꾀하는 한편, 밖으로는 고구려·전진(前秦)·일본 등과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신라는 정치·군사적인 면에서 고구려의 지원을 받았는데, 광개토왕릉(廣開土王陵)의
비문(碑文)에 의하면 신라왕의 요청으로 400년에 고구려 병사 5만 명이 신라의 국경지대로 출동하여 신
라를 괴롭히던 백제군을 크게 격파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고구려의 군사원조는 신라의 자
주적인 발전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했으며, 특히 427년(고구려 장수왕 15) 고구려가 평양(平壤)으로
천도하면서 남하정책을 꾀하자 신라는 백제와 동맹관계를 맺었다.
발전
신라가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로서의 통치체제를 갖추어 대내외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시작한 것은 6
세기 초부터였다. 법홍왕(法興王;재위 514∼540) 때에는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으
며, 불교를 공인하고, 연호를 건원(建元)으로 하는 등 통치체제를 갖추었다. 다음의 진흥왕(眞興王;재위
540∼576) 때에는 이와 같은 기반 위에서 대외발전이 추진되었다. 532년(법흥왕 19) 김해(金海)에 있던
금관가야(金官伽倻)를 병합한데 이어 562년(진흥왕 23)에는 고령(高靈)의 대가야(大伽倻)를 공략·멸망
시킴으로써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한편 백제와 연합해서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탈취하였는데, 처음에는 한강 상류지역의 죽
령(竹嶺) 이북과 고현(高峴;지금의 鐵嶺) 이남의 10군을 점령했으나, 553년에는 백제군이 점령하고 있
던 한강 하류지역을 기습 공격하여 한강유역 전부를 독차지하였다. 이같은 진흥왕의 정복사업은 창녕
(昌寧)·북한산(北漢山)·황초령(黃草嶺)·마운령(磨雲嶺)에 있는 4개의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와 단양(丹
陽)에 있는 적성비(赤城碑)가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진평왕 후반기 고구려·백제 두 나라의 침략이 강화되고 선덕여왕이 즉위한 뒤 한층 가열되자 신
라는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당(唐)나라에 대한 외교를 강화하였다. 당나라의 무력에 힘입어 660
년(무열왕 7)에 백제를, 668년(문무왕 8)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킴으로써 삼국통일을 이룩하였다. 삼국통
일 뒤 왕권은 더욱 강화되어, 신문왕(神文王;재위 681∼692) 때에는 강력한 전제왕권이 구축되었다. 신
문왕은 상대등(上大等)으로 대표되는 귀족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했을 뿐 아니라 통일에 따른 중앙·지방
의 여러 행정·군사 조직을 완비하였다. 그리하여 성덕왕(聖德王;재위 702∼737) 때에는 전제왕권하에
극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쇠퇴와 멸망
혜공왕(惠恭王;재위 765∼780) 이후는 전제왕권의 몰락기로서, 왕위쟁탈을 중심으로 한 난리가 헌강왕
(憲康王;재위 875∼886)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진성여왕(眞聖女王;재위 887∼897)에 이르러서는 전국적
인 동란을 맞게 되었다. 중앙의 문란한 정치가 지방에까지 번져 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결과 국경지
방의 백성들이 중국·일본 등지로 몰래 도망하는 예가 많아졌고, 일부는 해적이 되기도 하였다. 마지막의
약 50년간은 중앙정부의 부패에 따라 지방의 호족세력이 다시 대두되어 후삼국시대가 전개되었다.
신라의 세력은 지금의 경상도지방에 국한되고 전라도 방면은 견훤(甄萱)이 차지하여 후백제를 세웠으
며, 강원도 북부와 경기도·황해도·평안도 지방은 궁예(弓裔)가 차지하여 후고구려를 세워 다시 3국 정립
(鼎立)의 형세가 되었다. 918년 궁예를 쓰러뜨리고 고려 태조에 즉위한 왕건(王建)이 한동안 신라와의
친선정책을 꾀함으로써 신라는 그 수명을 다소간 연장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려가 후백제에 대해 절
대우위의 위치에 놓이게 되자 경순왕(敬順王;재위 927∼935)은 935년 11월 고려에 자진 항복하여 신라
는 멸망하였다.
제도
정치
중앙의 통치조직은 법흥왕 때부터 정비되기 시작하여 516∼517년 무렵에는 병부(兵部)가 설치되었으
며, 531년에는 귀족회의인 화백회의(和白會議)의 의장으로서 상대등제도가 채택되었다. 그 뒤 544년
(진흥왕 5)에는 관리의 규찰을 맡은 사정부(司正府)가 만들어졌고, 565년에는 국가의 재정을 맡은 품주
(稟主)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신라의 행정기구 발달에 있어 획기적 시기는 진평왕 때였다.
581년에는 인사행정을 담당하는 위화부(位和府), 583년에는 선박과 항해를 담당하는 선부(船府)가 각
각 창설되었으며, 586년에는 의례·교육을 담당하는 예부(禮部) 등이 잇따라 창설되어 관제의 발달을 보
게 되었다. 진덕여왕 때에는 당나라의 정치제도를 모방한 대규모의 정치개혁이 단행되었다. 즉 651년에
종래의 품주를 개편, 국왕 직속의 최고관부로서 집사부(執事部)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신라의 관제가
크게 변화하였음을 의미한다.
즉 집사부는 귀족연합적인 전통보다는 왕권의 지배를 받는 행정적인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삼국시대
부터 시작된 당나라제도의 채용은 통일 이후에 더욱 성행하여 경덕왕(景德王;재위 742∼765) 때에 이르
러서는 여러 제도가 모두 갖추어졌다. 중앙에 집사성(景德王;집사부가 개칭됨)·병부·창부(倉部)·예부·승
부(乘部)·사정부·예작부(例作府)·선부·영객부(領容府)·위화부(位和府)·좌우이방부(左右理方府)·경성주작
전(京城周作典) 등 많은 관청이 마련되었다.
행정
신라의 행정체제는 그 영토의 확장에 따라 변천되어 갔는데, 지증왕 이후에 주요한 곳에 주(州)를 두고,
그 장관으로 군주(軍主)를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으며, 이 군주 밑에 여러 성주(城主)가 있었다. 삼국
시대에 신라의 영토는 낙동강 유역과 동해안지방, 그리고 북으로 한강 유역까지 뻗쳤는데 낙동강 상류
의 중심지인 상주(尙州)에 사벌주(沙伐州), 중류지역의 중심지인 창녕에는 비사벌주(比斯伐州)가 설치
되었으며, 새로 편입된 한강유역의 통치를 위하여 신주(新州;후에 漢山州, 南川州로 개칭)를 두었고, 강
원도 춘천(春川) 방면에 수약주(首若州), 삼척(三陟)·강릉(江陵) 방면에 하서주(河西州) 등이 설치되었
다.
삼국을 통일하여 확장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지방조직의 정비가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685년(신
문왕 5)에는 9주가 마련되어 신라·고구려·백제의 옛 땅에 각기 3개의 주가 설치되었다. 주의 장관은 문
무왕 때에 군주에서 총관(摠管)으로, 다시 원성왕 때에는 도독(都督)으로 개칭되었는데 이것은 군사적
성격에서 차츰 행정적인 성격으로 변해간 것을 의미한다. 주 밑에는 군(郡)·현(縣), 그 아래로 하급 행정
단위인 촌(村)·향(鄕)·부곡(部曲)이 있었다. 그리고 수도가 남동쪽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그 결함을 보
충하기 위하여 5소경(小京)을 요지에 두었다. 소경에는 장관인 사대등(仕大等) 이하 여러 관직이 있었
는데 중앙의 귀족들이 여기에 살며 지방문화의 중심을 이루는 동시에 지방세력의 통제를 위한 역할도
담당하였다.
군사
신라의 군사제도는 정세의 변천에 따라 여러 번 변화했다. 통일 이전에 부족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6
정(停)은 통일 후에 크게 변화하여 중앙군으로서 9서당(誓幢), 지방주둔군으로서 10정 및 기타 여러 부
대가 편성되었다. 9서당은 신라뿐만 아니라 고구려·백제·말갈 등의 다른 부족까지도 포함하였는데, 이는
반란을 일으킬 위험성이 있는 다른 부족에 대한 근심을 덜고, 나아가 중앙의 직속부대의 병력을 강화하
자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한편 10정은 9주 중 가장 지역이 넓고 국방상의 요지인 한산주에만 2정을 두
고 다른 주에는 각각 1정씩을 배치하였다. 이와 같이 전국에 배치된 10정은 국방과 경찰의 임무를 아울
러 담당하였다.
사회·경제
신라는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신분제도인 골품제도를 마련하여 통치기반을 구축하였다.
골품제는 개인 혈통의 존비에 따라 정치적인 출세는 물론 혼인·가옥의 크기·의복의 빛깔, 우마차(牛馬
車)의 장식 등 일상생활에까지 특권과 제약이 부여되는 제도로서, 성골(聖骨)·진골(眞骨)·6두품(六頭品)
·5두품·4두품 등이 있었다.
성골은 김씨왕족 중에서도 왕이 될 자격을 갖춘 최고의 신분이었다고 하는데 진덕여왕을 끝으로 하여
소멸하였다. 진골도 성골과 마찬가지로 왕족이었으며, 처음에는 왕이 될 자격이 없었으나 성골이 소멸
되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진골 아래 6개의 신분 중 6두품·5두품·4두품은 하급귀족으로서 관료가 될
수 있는 신분이었으나, 3두품·2두품·1두품은 그것이 불가능하여 일반 평민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이 골품제와 관직관계를 보면 진골은 최고 관등인 이벌찬(伊伐飡)까지 승진할 수 있었으며, 6두품은 득
난(得難)이라 하여 진골 다음가는 신분으로 6관등인 아찬(阿飡)까지, 5두품은 10관등인 대나마(大奈麻)
까지, 4두품은 12관등인 대사(大舍)까지 승진의 한도가 제한되어 있었다.
한편, 신라의 토지제도는 토지국유제를 전제로 마련되었다. 사원(寺院)에는 사전(寺田)이 지급되었으
며, 관리들에게는 녹읍(祿邑)을 주다가 689년(신문왕 9)에는 이를 폐지하고, 그 대신 조곡(租穀)을 주기
로 하였으나 뒤에 다시 녹읍이 부활되었다. 삼국시대에 사전(賜田)·녹읍 등을 준 것은 개인에 의한 대토
지소유의 계기를 만들었으며, 삼국통일 이후의 토지 및 농업인구의 증가, 생산력의 향상, 잉여생산물의
상품화 등의 사회상황은 대토지소유의 가능성을 한층 더 촉진시켜 토지사유화의 경향을 조장하였다.
일반 백성들에게는 토지를 나누어 주는 대가로 조·용·조(租庸調)의 의무를 부담하도록 했다. 신라의 기
본적인 산업은 농업이었다. 주요 농산물로는 보리·조·수수·콩·마 등으로서 쌀은 그리 흔하지 않았던 것
같다. 가공품으로는 술·기름·꿀·간장·베 등이 있었고, 농촌에서도 어느 정도 농기구를 만들어 썼다.
무덤의 유물에 의하면, 귀족사회에서는 고대로부터 금속공예품이 쓰였으며, 자체 내에서 금·은·철·구리
의 공예품이 제작되기는 6세기 초기부터인 듯하다. 그러나 철의 산출은 고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
며 3세기 전부터 낙랑·대방·일본 등지에 수출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509년(지증왕 10)에는 경주(慶州)
에 동시(東市)가 열렸고, 7세기 말에는 서시(西市)·남시(南市)가 열릴 정도로 상업이 번창하였다. 삼국
통일을 전후해서는 행상(行商)도 나타났으며, 무역은 대외관계가 시작되면서 행해졌는데 문성왕(文聖
王;재위 839∼857) 때에는 장보고(張保皐)가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여 한 때 해상권을 독점하였다.
문화
교육
신라시대에는 귀족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사회도덕으로서 유교를 중요시하였다. 삼국통일 이전에는
유교교육을 담당하는 학교가 정비되지 않았으나, 교육적 기능을 지닌 화랑도(花郎道)가 도덕적 교육에
큰 구실을 담당하였다. 그 뒤 682년(신문왕 2) 유교적 이념을 교육하는 기관으로 국학(國學)을 설립, 3
과(科)로 나누어 유교경전을 교육하였다. 국학은 원래 특권층 자제들에게 출세의 길을 열어주기 위한
기관이었는데, 788년(원성왕 4)에는 이에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라는 제도를 설치하고, 성적을 3등급
으로 구분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 유교교육기관 이외에 천문루각(天文漏刻)·의학·율령 등 직업화을 전
문으로 하는 기관도 있었다.
국사편찬
한자의 사용과 더불어 545년(진홍왕 6) 《국사(國史)》가 편찬되었다. 이 국사편찬은 당시의 대신이던
이사부(異斯夫)가 상주하여 국왕의 재가를 얻은 뒤에 거칠부(居柒夫) 등에 의해서 국가의 큰 사업으로
추진된 것이었다. 이는 유교적인 정치이상에 입각하여 왕자(王者)의 위업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편찬
된 것으로 짐작된다.
시가·음악
왕자 우로(于老)나 박제상(朴堤上) 등에 관한 설화문학과 함께 민요·향가 등 다양한 시가문학이 전해지
고 있다. 민요풍의 시가로는 <서동요(薯童謠)> <풍요(風謠)>가 있고, 많은 향가가 제작되어 888년
(진성왕 2)에는 왕명으로 위홍(魏弘)과 대구화상(大矩和尙)이 《삼대목(三代目)》이라는 향가집을 편찬
하기도 했다.
미술
신라의 미술은 고분과 불사(佛寺)에서 찾아볼 수 있다. 통일 전의 신라 고분양식으로서는 돌무지덧널무
덤·독무덤·돌방무덤 등이 있다. 또 경주 황남동(皇南洞)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와 여러 고분에서 나온
출토품들은 매우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어, 신라미술의 높은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통일신라의 대
표적인 예술작품은 석굴암과 불국사이다. 석굴암은 그 안에 본존불상을 중심으로 보살상·나한상·인왕상
등을 배치하여 불교세계의 이상을 나타내고 있으며, 불국사는 토함산을 배경으로 하여 앞쪽에는 청운교
·백운교 등의 돌층계와 범영루 등이 있다.
종교
신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5세기초 눌지마립간 때, 고구려로부터 전해졌으나 당국의 박해로 전파
되지 못하다가, 521년 중국 양(梁)나라 무제가 승려 원표(元表)를 보냄으로써 정식으로 진해졌다. 그러
나 법흥왕 때 귀족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쳐 전파에 실패하였고, 이차돈(異次頓)이 순교하기에 이르렀
다. 그리하여 불교가 공인된 것은 527년(법홍왕 14)이었다.
신라의 불교는 고구려를 거쳐 들어온 북방계통과 공인 뒤에 양·진(陳) 등을 통하여 교류된 남방계통의
불교가 비교적 빨리 합류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약 100년간은 백제·일본 등지의 불교와 같이 왕법적
(王法的) 색채가 강한 것이 특색이었다. 구법사상(求法史上) 한 시기를 그은 원광(圓光)을 비롯하여 자
장(慈藏)은 636년(선덕왕 5) 당나라에 들어가 율종(律宗)을 들여왔다.
원효(元曉)는 경론(經論)을 해석한 책 81부를 지었고 해동종(海東宗;淨土敎)을 열어 민중불교를 일으켰
으며, 의상(義湘)은 해동화엄종(海東華嚴宗)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 밖에 유식론(唯識論)에 원측(圓測)·
경홍(憬興)·도증(道證)·대현(大賢), 화엄종에 승전(勝詮), 율종에 진표(眞表) 등이 나타나 불교의 전성기
를 이루었다.
신라 말기에는 선종(禪宗)이 성행하였는데 신라의 선종은 7세기 전반에 법랑(法郎)이 처음 전한 것으
로, 이를 이어 8세기 후반에는 신행(神行)·도의(道義) 등이 북종선(北宗禪)과 남종선(南宗禪)을 차례로
들여왔다. 이로 말미암아 교외별전(敎外別傳)인 선(禪)의 신앙이 차차 일어나기 시작하여 마침내 9산
(山)이 성립, 5교(敎)와 대립해서 발전하게 되었다. 도교에 관해서는 문헌이 없어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도가(道家) 내지 신선(神仙)사상의 영향은 화랑도에서 추측할 수 있는데 신라 통일 뒤 태평시대에는 도
교의 영향도 컸으리라 생각된다.
발해
渤海 한반도 북부, 만주 동부, 연해주(沿海州)에 걸쳐서 존속한 나라.
고구려가 멸망한 지 약 30년 뒤인 699년에 동북지구의 당(唐)나라 세력이 쇠퇴한 틈을 타 백두산(白頭
山) 동북지방에 근거를 둔 숙신족(肅愼族)의 후예와 고구려 유장(遺將) 대조영(大祚榮)이 창건하였으며
926년 멸망하였다.
건국과 성쇠〕
〈건국〉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唐)나라가 옛 고구려와 한반도를 다스리기 위하여 평양에 설치하였던 안동도호
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으로 옮겨 압록강 이북의 고구려 옛 땅만을 통치하게 된 지 약 20년이 지난
696년에 랴오시지방[遼西地方]에서 거란족 이진충(李盡忠)의 난이 일어나 약소민족의 자각심과 주체
의식을 깨우쳐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고구려 별부(別部) 출신인 대조영이 말갈족의 지도자 걸사비우(乞四比羽)와 더불어 무리를 이끌
고 영주(營州;지금의 朝陽)에서 북동으로 빠져나와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처
음에 회유책을 썼으나 실패하자 이해고(李楷固)를 시켜 이들을 추적하게 하였고, 걸사비우는 당군에게
참살되었으나 대조영은 추격을 물리치고 지금의 지린성[吉林省] 둔화청[敦化城] 밖의 육정산(六頂山)
으로 빠져나와 성을 쌓고 건국의 터전을 잡았다.
대조영은 성력(聖曆;698∼700) 연간에는 자립하여 진국왕(震國王)을 칭하기에 이르렀다. 뒤에 당나라
와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예종(睿宗)의 선천(先天) 2년인 713년에 발해군왕이 되었다. 이로부터 진국
(震國)을 발해국이라 하였으며, 대조영의 아들을 계루군왕(桂婁郡王)으로 봉하였다. 〈성쇠〉 대조영의
정책과 치적에 대하여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그가 진국을 세우고 당시 한창 세력을 뻗치고 있던
돌궐의 추장 묵철과 서로 통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716년(개원 4) 묵철이 살해되고, 당나라가 영주를 되찾아 랴오시의 경영에 활기를 띠게 되자, 대
조영은 당나라의 초무(招撫)를 받아들여 건국 초에 발해 외교정책의 기본인 평화적외교의 기틀을 잡았
다. 한편 수도는 아직 동모산(東牟山;지금의 육정산 부근)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 당이 그를 군
왕(郡王)으로 책봉한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건국 초의 발해는 추장국(酋長國)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
인다.
719년(개원 7) 대조영이 죽고 맏아들 대무예(大武藝), 즉 무왕(武王)이 즉위하였다. 그는 오늘날의 올가
강유역에 이르는 연해주 남단을 발해의 영토로 만들었고 동해를 통해 일본과 수교하였으며, 그 뒤 북동
쪽의 흑수말갈(黑水靺鞨)의 문제로 당나라와 대립하였다. 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왕(文王)은 내치
에 힘을 기울였으며, 당나라에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하고 관무역을 활발하게 하여 대외관계에서는 평화
외교정책을 취하였다.
특히 무왕 때까지 수도로 되어 있던 동모산인 이른바 <구국(舊國)>에서 중경현덕부(中京縣德府)로 천
도하였다가, 천보(天寶;742∼755) 연간에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다시 정원(貞元;785∼794) 연간에
는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로 옮기는 등 잦은 천도가 있었다. 문왕의 재위기간 중 당나라는 762년(보응
1)에 그를 발해국왕으로 올려 책봉하였고, 이것은 발해의 국력성장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독립국가로서의 기틀을 완전히 굳힌 문왕이 죽고, 그 뒤 제10대 왕 대인수(大仁秀), 즉 선왕
(宣王)에 이르기까지의 25년(793∼818)간은 제 6 대 강왕(康王) 대숭린(大嵩璘)의 15년간 재위를 제외
하고는 모두 재위기간이 짧아 뚜렷한 업적이 없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5대 성왕(成王)의 재위기간 중 수도가 동경용원부에서 상경용천부로 옮겨진 점이
다. 이와 같은 발해의 침체상태를 벗어나 왕국의 황금시대를 이룩한 것이 선왕이었다. 그는 발해의 영토
를 헤이룽강[黑龍江] 하류까지 확장하여 이른바 <방 5천리(方五千里)>를 이룩하였으며, 제 3 대 문왕
시대에 알려진 3경 외에 다시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와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를 더하여 <5경 15부
(府) 62주(州)>의 이름으로 전국을 통치하였다.
재위 10년에 <해동성국(海東盛國)>을 이룩한 선왕은 830년에 죽었다. 한편 묵철이 죽은 뒤 세력이 약
화되었던 거란의 수령은 안녹산(安祿山)의 반란 이후의 혼란을 틈타 당나라를 멀리하고 역시 오르혼강
을 근거로 옛날의 돌궐과 같은 경로를 밟아 남하하던 위구르에 복종하면서 그 세력을 확장하여 발해의
선왕 대인수의 무렵에는 북류쑹화강[北流松花江] 부근을 경계로 하여 발해와 겨루는 형세로까지 발전
하였다. 10세기 초에 이르러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거란족의 숙원이었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중
국본토 진출에 앞서 발해경략의 전략을 감행하였다.
927년 아보기가 이끄는 거란군은 발해가 거란을 방비하기 위하여 최전선에 구축한 부여성(扶餘城;지금
의 昌圖 부근 西面城)을 뚫고 곧 국도 상경용천부를 포위, 공격하여 불과 20일 만에 발해의 마지막 왕인
제15대왕 대인전의 항복을 받았다. 이로써 대조영에서부터 15대 220여 년 간 건재하던 발해는 멸망하
였다. 〔강역과 교통로〕 〈강역〉 전성기의 강역은 《신당서》 <발해전>에 대체적인 방향과 주의 이
름 등이 적혀 있으나 분명하지 않은 점이 많다. 종전의 연구성과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⑴ 남계(南界):《신당서》 <지리지>에 실려 있는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에 압록강 하구에서
약 130리의 상류에 있는 박작성이 발해의 경계선으로 되어 있다. 이 박삭성은 지금의 주롄청[九連城]의
북동 약 20리에 있는 압록강에 흘러 들어가는 포석(蒲石) 하구에 있었다.
그러나 북동에서는 발해, 남쪽으로부터는 신라의 세력이 북상하여 이 지방에 있어서는 발해와 당나라는
직접 경계를 접하는 일이 없었으며, 압록강과 청천강을 갈라놓은 산맥이 이 양국의 경계선이 되어 있있
던 것으로 믿어진다.
발해의 동쪽은 《신당서》 <발해전>에 보이는 바와 같이 지금의 함경남도 덕원(德源) 근처의 용흥강
(龍興江)으로 믿어지는 이하(泥河)가 신라와의 경계선이 되어 있었다.
⑵ 서계(西界):《신당서》에 따르면 발해의 전성기인 선왕 대인수시대까지는 그 서쪽 경계의 국경선이
압록강 하류 주롄청 부근인 박작성에서 북으로 휘발하(輝發河)유역의 산성자(山城子) 서변을 거쳐 창도
의 서변을 이어 눙안[農安]까지의 일선(一線)으로 보인다.
⑶ 북계(北界):《신당서》 <발해전>에 보이는 발해 15부의 위치 이름을 보면, 발해의 북방경계선은 대
체로 동류쑹화강까지이고 이와 헤이룽강의 합류점 북동에서 하류까지는 흑수말갈이 건재하여 발해의
영토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러시아의 연해주 남부에서 싱카이호[興凱湖] 일대와 우수리강과 헤이룽강
이 합류하는 지금의 산성까지의 선이 발해의 영토였던 것으로 보인다.
〈오경과 주요 교통로〉 발해의 5경에 대하여 각각 그 위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상경용천부:지린성 닝안현[寧安縣] 동경성(東京城)에 있는 고성지(古城址)가 그 유적이다. 제 3대
문왕이 742∼755년에 중경현덕부에서 이곳에 천도하였다가, 785년부터 문왕이 사망한 794년까지 다시
동경용원부로 옮겼으나, 제 5 대 성왕에 이르러 다시 상경으로 되돌아와 927년 나라가 망할 때까지 130
여 년 간 발해의 정치중심지가 되었다.
② 중경현덕부:발해가 건국의 터전을 마련한 이른바 <구국>이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둔화현 육정산 오
동성에서 제 3 대 문왕 때에 처음으로 천도하여 다시 상경으로 천도하기까지 발해의 수도였다.
이 중경현덕부의 유적지 추정은 어려운 문제의 하나로 되어 휘발하와 쑹화강의 합류점인 <나단포로설
(Nadan foro設;那丹佛勒說)>, 지린성 화뎬현[樺甸縣]의 <소밀성설(蘇密城設)>과 <둔화현설> 등이
모두 제 나름대로의 논거를 가지고 그 정당성을 고수한 바 있었으나 둔화현설이 가장 많은 지지를 얻어
정설화(正說化)되고 있었다.
그러나 발해의 유적에 대한 발굴이 전개되어 상경용천부와 겨룰 만한 유적으로서 두만강에 유입하는 해
란하(海蘭河)와 차오양강[朝陽川]의 중간지점에 있는 서고성자(西古城子)의 유적으로 비정(比定)하게
되어 정설화되고 있다.
③ 동경용원부:발해의 제 3 대 문왕이 중경현덕부에서 천보 말년에 상경현덕부로 천도하였다가, 정원
연간에 이곳으로 천도하여 제 6 대 강왕이 다시 상경으로 천도할 때까지 발해의 수도였다.
《신당서》 <발해전>에 확실한 위치가 나와 있지 않아 그 위치의 비정에 여러 설이 엇갈려 있었다. 그
러나 1940년대 초의 발굴 결과 젠다오[間島]의 훈춘현[琿春縣] 반라청[半拉城]의 유적에 비정되어 정
설화되고 있다.
④ 남경남해부:남경의 위치에 대하여는 함흥설(咸興說)을 비롯하여 함경북도의 경성설(鏡城說), 또는
종성설(鐘城說)·북청설(北靑說) 등이 있으나, 함흥설이 거의 정설시되고 있다.
⑤ 서경압록부:서경의 위치에 대해서도 《신당서》 <발해전>의 설명이 없어, 정약용(丁若鏞)의 평안
북도 자성북안설(慈城北岸說) 등 몇가지 설이 있으나 아직 확실하지 않다. 한편 발해의 중요한 교통의
간선에 대하여 《신당서》 <발해전>에 따르면 상경현덕부를 중심으로 각 방면에의 교통로를 알 수 있
는데, 동경용원부는 동해를 항해하여 일본의 쓰루가[敦賀] 등 북륙(北陸)지방의 각 항구로 향하는 선박
들의 출항지였다고 설명되어 있다.
남경남해부는 신라와의 국경도시인 이하, 즉 함경남도 덕원에서 신라로 들어가는 교통로였다. 한편 서
경압록부가 조공도(朝貢道)인 것은 당나라로 가는 조공사(朝貢使)가 상경에서 중경현덕부를 거쳐 린장
[臨江]·통구지방을 통과하여 랴오둥반도[遼東半島]의 연안을 따라 산둥반도[山東半島]의 등주(登州)
에 상륙한 뒤, 육로로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長安)으로 향하였기 때문이다. 부여부는 거란도(契丹道)라
고도 하여 거란으로 가는 경로로 이용되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사회구조〕
발해의 사회구성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 사료로는 당나라에 유학하였던 일본의 승려 영충이 견문을 적
어 남긴 기사(記事)를 들 수 있다. 즉 스가하라[管原道眞]의 《유취국사(類聚國史)》 권193에 수록되어
있는 영충의 견문담에 따르면 토인(土人)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고구려족이 곳곳의 촌락의 촌장을 비롯
한 지배계층으로 나타나 있으며, 촌락의 구성원인 주민들은 거의 말갈계였다. 즉 소수의 고구려계 유민
이 지배층이 되어 다수의 말갈족을 통치하는 복합민족국가 같은 모습을 띤 사회였다. 그러나 극소수였
지만 말갈계의 참여가 전혀 막혔던 것은 아니었다.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 <신고(臣考)>에도 적혀 있는 수령관함(首領官銜)의 이알기몽(已閼棄蒙)
이라든가 일본에 파견된 사절단의 부사격이었던 이진몽(已珍蒙) 같은 말갈계의 사회참여도 찾아볼 수
있다. 발해의 유력한 성으로는 고·장·양(楊)·두(竇)·오(烏)·이(李) 등 모두 한족식의 성을 가진 고구려계였
다.
이와 같은 발해의 사회구조는 성당문화(盛唐文化)를 섭취하여 그 관제와 정교면(政敎面)에 발전을 거듭
하여 내려오던 말기에 이르기까지도 신분계층에 관한 큰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 점이 발해가 지
니는 사회구성상의 취약점이었다.
즉 혈통과 문화·언어·역사의 공동체의식을 느낄 수 없는 족적관계(族的關係)가 이익을 달리하면서 한 국
가를 형성하고 거기에 다시 종족적 차별이 노출되어 피지배종족까지도 국민의 성원으로서의 소속감이
나 운명공동체의식 같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취약성이 가장 뚜렷이 나타난 것이 거란에게
멸망하게 된 시기로서 국력이나 군사력에서 패한 것이 아니고, 사회 모순의 취약성에 기인한 결과였다.
〔산업경제〕
발해의 산업과 경제활동은 분명하지 않으나, 발해가 남만주의 심장부인 랴오양[遼陽]·선양[潘陽]·카이
위안[開原] 등지의 평야지대를 점거하지 못한 채 당나라에 점유되고, 그 북동의 산악지대를 개척하면
서 천연자원의 활용에 힘을 기울였던 자취는 당과 일본과의 무역품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즉 인삼·우황
(牛黃)·황명(黃明) 등의 약재류와 몇 가지의 특산물의 수출은 매우 활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발해의
중요 생산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현주(顯州)의 포〉 현주는 중경현덕부에 속한 6주 가운데 수주(首州)이다. 그 위치는 분명하지 않으나
옛 북옥저(北沃沮)인 두만강 하류의 어느 지점으로 짐작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된 옥저의 특산물인 맥포(貊布)와 발해가 후당(後唐)에 공품(貢品)
으로 수출한 세포(細布) 등은 현주의 포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포는 심[麻]을 원료로 한 직물이었을 것
이다. 〈옥주(沃州)의 면(綿)〉 옥주는 남경남해부에 영속된 주이다. 남경남해부는 지금의 함경남도 함
흥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여 옥주도 이 부근으로 짐작된다. 면은 누에의 일종에서 만들어내는 실로 짠
직물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강원도지방인 동예에서 양잠을 하여 면을 만든다는 기사가 있다. 〈용주
(龍州)의 주(紬)〉 용주는 상경용천부에 영속된 수주이며, 지금의 지린성 닝안현 부근이다. 주는 면포를
말하는 것으로 앞서의 강원도지방의 양잠이 남경과 중경현덕부를 거쳐 지금의 목단강(牧丹江) 유역인
닝안현의 특산물로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노주(盧州)의 벼〉 발해의 산도지(産稻地)로 《신당서》 <발해전>에 적혀 있는 노주는 중경현덕부
에 영속된 주로 해란하 유역의 평야인 것으로 믿어진다. 이 지역은 만주 북동부에서 가장 비옥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위성(位城)의 철〉 발해의 철생산지로 알려진 위성은 중경현덕부에 영속된 철주(鐵州)
의 수현(首縣)이다. <철주>란 이름도 철의 생산으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중경현덕부의 서
고성자는 BC 4세기의 제철유적지가 발견된 두만강 남쪽의 무산(茂山)과 매우 가까우며, 지금도 이 부근
에 천보산(天寶山) 같은 만주 북동부 굴지의 철광산이 있다.
〔대외무역〕 발해는 당나라와 일본을 대상으로 공사무역(公私貿易)을 활발히 계속하였다. 일본과는 제
2대 무왕이 727년 처음으로 대사(大使) 고인의(高仁義) 이하 24명을 일본에 파견하여 국교를 청한 이후
점차 관사무역(官私貿易)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발해는 상리주의적 입장에서 능숙한 외교술을 구사하
면서 일본에는 주로 모피류 및 인삼을 수출하고 그들로부터는 견포(絹布)를 수입하였다.
발해는 713년(개원 1) 왕자를 당나라에 보내어 호시(互市)의 자유로운 출입을 요청하여 동의를 얻어냈
다. 그후 당나라는 산둥반도인 치청절도사(淄靑節度使)의 관하에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海運押新羅渤
海兩蕃使)를 두어 등주 같은 항구에 신라와 발해의 무역선에 관한 업무를 전담하게 하고, 대종(代
宗;763∼779) 이후는 칭저우[靑州]에 발해관(渤海館)을 두어 발해 사신과 무역선의 편의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한편 매년 발해에서 명마(名馬)의 수입이 끊이지 않았다는 《신당서》와 《구당서》의 기사에
서 미루어 보아도 당나라와의 무역이 활발하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