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인의 명칭과 특징
본래 셈어족에 속하며, 유태교를 신봉하고 전세계에 산재하는 민족이다. 인종적으로는 대다수가 지중해계와 알프스계에 속하는데 일찍부터 여러 민족과 혼혈되어 독자적인 형질적 특징은 분명하지 않으며, 흔히 지적되는 유태적 코라는 것도 힛타이트와의 혼혈에 의한 것으로 추측된다. 스스로는 이스라엘인이라고 부르나 타민족들에게는 헤브라이인으로 불리며, 바빌론포로에서 귀환한 뒤 유태인이라는 호칭방식이 널리 알려졌다. 현재의 이스라엘 공화국에서는 "유태인이라는 말은 유태인의 어머니로부터 출생한 자, 또는 유태교로 개종한 사람을 의미한다"고 정리되어 있다.
유태인의 기원과 유태교의 성립
유태인의 선조(족장)은 유목민으로 기원전 15세기경 메소포타미아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했다. 그 가운데 일부는 다시 이집트에 들어갔으나 얼마 안 있어 압제를 받자 모세에 인도되어 '출애급'을 감행(기원전 1230년경)하였고, 시나이산에서 야훼로부터 '십계'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가나안 정착 후 12부족의 종교연합이라는 형태의 이스라엘이 성립했다. 그 후 페리시테인과의 항쟁을 통해 기원전 11세기 말 무렵, 왕국을 창설했고, 다비드는 수도를 예루살렘에 정하고 국력을 발전시켰다. 그 아들 솔로몬 때에 왕국은 전성기를 맞아 신전을 만들었으나, 그의 사후 국토는 이스라엘왕국과 유태왕국으로 분열(기원전 962년경)했다. 그리고 그 후 전자는 앗시리아에(기원전 721년), 후자는 신바빌로니아에 멸망(기원전 586)했다.
'바빌론의 포로'가 되었던 유태인들은 약 50년 후 페르샤에 의해 옛 땅으로의 귀환이 허락되어 재건된 신전의 예배와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적 공동체로서 유태교를 결성했다.
헬레니즘, 로마시대의 유태인
헬레니즘 시대에 유태인들은 시리아 왕국의 지배로부터 마카베아전쟁으로 해방되어 하스몬왕조의 독립된 제사장 왕국을 수립했으나(기원전 142년), 곧 로마에 정복되었다. (기원전 63년). 로마의 종주권 아래 헤롯왕가가 군림했으나 기원후 6년 로마의 직접지배 아래 들어갔고, 총독 본티우스 빌라도스의 시대에 예수가 처형되었다. (30년경). 두번의 유태전쟁(66~73, 132~135)에 의한 민족적 반로마 저항도 헛되이, 패배한 유태인들은 세계를 유랑하기 시작했다. 예루살렘 성전 소멸 이우의 유태교는 회당예배(시나고그)와 랍비의 율법해석이 중심이 되었고, <탈무드>가 편찬되어 교리와 사회생활의 지침이 되었다. 고대 말기, 로마제국의 기독교공인과 국교화에 의해 유태인은 한층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중세의 유태인
중세 이후도 유태인의 고향 팔레스티나는 비잔틴 제국, 아라비아인, 셀주크 투르크, 십자군, 오스만 투르크 등에 의해 지배됨으로써 유태인은 세계 각 지역을 유랑하여 동으로는 중국에서부터 서로는 이베리아반도, 영국에까지 이주했다. 유태인은 많은 경우 이주지역에서 억압을 당했다. 특히 십자군 열기가 고조되었던 서유럽에서는 여러차례 박해를 당하고, 스페인이나 영국에서는 추방되었고, 또 유태인 거주지역(게토)으로 강제로 이주당하거나 복장에 특별한 표식을 달도록 요구받았다. 유태인은 대체로 토지소유를 인정받지 못했으므로 상업, 금융업에 종사했는데, 그것은 폭리를 추구한다는 비난의 구실로 이용되었다. 반면에 유태인은 유럽 여러 나라에서 원전으로 접근하지 못했던 그리스철학이나 과학의 저작들을 아라비아 번역본을 기초로 번역하여 소개함으로써 수학, 의학, 천문학, 제도법 등의 발달에도 기여했다. 또 이븐 카피롤, 마이모니티스의 저작은 스콜라철학에 영향을 끼쳤다.
유태인 해방과 반유태주의
근대가 되어 계몽주의가 보급되면서 유태인 해방의 사상이 생겨났고 프랑스혁명에 의해 유태인의 권리도 보장되어(1791년 입법화), 나폴레옹 1세는 유태인의 해방을 규정하였는데, 그것이 점차 서유럽 전체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보수적 민족주의에 의한 반유태주의(antisemitism)도 고양되어, 19세기 말의 프랑스에서는 드레피스사건이 발생했다. 또 20세기의 러시아에서는 혁명운동의 탄압에 대응하여 유태인을 박해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러시아, 동유럽에서 박해를 받았던 유태인들은 상당수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했다. 한편, 유태인을 결집하여 팔레스티나에 유태인 국가를 건설하려는 시오니즘 운동이 헤르쯜의 제창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제1차대전중에 영국 외상 발포아의 선언에 의해 지지를 받았으나, 전후 이주한 유태인과 팔레스티나에 거주하고 있던 아랍계 주민과의 사이에 격렬한 대립을 야기시켰다. 또 유태인 가운데에도 시오니즘에 냉담하여,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나라에 적응하는, 즉 동화주의(同化主義)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 적지않다.
현대의 유태인
그러나 1933년 나찌의 정권탈취 이래, 유태인 배척은 역사상 유래없이 격렬하여 나찌는 유태인의 공직으로부터의 배제, 아리아인과의 결혼금지, 재산몰수 등을 강행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히틀러의 '유태인문제의 최종적 해결'방침에 따라 유태인의 강제수용과 조직적 살육이 강행되어 575만 명의 유태인 아우슈비츠 등의 수용소 가스실에서 학살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태인 세계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현상은 대량이주이다. 1948년 숙원의 이스라엘공화국이 성립하자 다수의 유태인이 이 신생국으로 옮겨갔고, 또 아메리카, 캐나다, 호주, 라틴아메리카로 이주하였다. 소련에서는 초기 공산주의 체제 당시에 제시된 유태인의 정치적 지위는 1950년의 반 시오니스트운동에 의해 소멸되고, 유태인의 출국도 엄격히 제한되었으나 최근 완화되어 가는 추세에 있다. 이렇게 오랜 역사를 통해 억압을 당해 온 유태인은 이스라엘공화국에서는 중동전쟁으로 점령한 지역의 지배자로서 원주민인 팔레스티나인의 저항을 초래했고, 주변 아랍국가들과의 적대관계도 계속되고 있다. 현대 세계에서의 유태인 총 인구수는 약 1,200만 명을 헤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