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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법정에 서다
누가 누구의 명예를 훼손했는가
'홀로코스트 부정' 하면 아마도 영국의 재야 역사학자 데이비드 어빙(David Irving)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어빙은 2017년 국내에서도 개봉해 화제를 모은 영화 <나는 부정한다(Denial)>에서도 주인공 중 한 사람으로 등장했다. 영화는 이른바 '데이비드 어빙 대 펭귄 출판사와 데버라 립스탯(Irving v Penguin Books and Deborah Lipstadt)'사건의 재판과정을 다루고 있는데, 어빙의 홀로코스트 부정론과 그 함의를 둘러싼 법정 공방이 주요 내용이다. 소송의 시작은 어빙이 명예훼손 혐으로 미국의 역사학자 데버라 에스터 립스탯(Deborah Esther Lipstadt)과 그녀의 저서 <홀로코스트 부정하기(Denying the Holocaust)>를 출간한 영국의 펭귄 출판사를 영국 법정에 고소한 1996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립스탯은 책에서 어빙을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로 규정했다. 이 책은 우리에게 미용실과 샴푸로 잘 알려진 비달 사순(Vidal Sassoon)의 재정 지원으로 설립된 비달 사순 반유대주의 국제연구센터(Vidal Sassoon International Center for the Study of Antisemitism. SICSA)에서 연구 기금을 지원받아 1993년 미국에서 먼저 출간되었다. 책은 출간되자마자 <뉴욕타임스>, <보스턴글로브> 등에 우호적인 서평이 실려 주목을 끌었다. 다음 해에 펭귄 출판사를 통해 영국에서 출간되었지만, 영국에서는 유대계 미디어를 제외하면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첫해 판매 부수도 총 2,088부에 불과했다. 그런데 1996년에 어빙이 명예훼손으로 립스탯을 고소하고 변호팀의 '증거개시절차'(discovery)를 거쳐 2000년 1월부터 런던 법정에서 역사해석을 놓고 불꽃 튀는 재판이 진행되면서 영국 언론의 관심을 끌게 된다. 어빙은 립스탯이 공개 사과와 함께 자신이 지정하는 자선단체에 500파운드를 기부하면 고소를 철회하겠다고 공개 제안했다. 본격적인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처럼 도발적인 공개 제안을 한 배경에는 나름대로 주도면밀한 계산이 있었다. 미국에서는 명예훼손소송시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어 소송을 제기한 원고 측에서 피고의 명예훼손 의도를 입증 해야 하는 반면, 영국에서는 반대로 피고가 원고의 명예를 훼손할 의도가 없었음을 입증 해야 한다. 원고는 그저 피고의 명예훼손적인 말이나 글 또는 행위의 일단을 법원에 증거로 제시하기만 하면 된다. 명예훼손 관련 고의성을 입증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감안하면 미국 법정은 명예훼손에 관한 한 피고에게 유리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미국 법정을 피해 대서양 건너 영국 법정에 제소하는 관행이 생겼고 미국 법조계에서는 이를 '명예훼손법 이민'이라고 농담처럼 부르기도 한다. 그러니 영국에서의 재판은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원고인 어빙에게 유리한 재판이었다. 립스탯은 어빙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어빙이 내세운 조건이 상당히 모욕적이기도 했지만, 입증의 어려움을 빌미로 싸움을 포기하면 자칫 홀로코스트 부정론을 공인하는 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데이비드 어빙 대 펭귄 출판사와 데버라 립스탯' 사건의 재판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어빙이 전개한 논지의 핵심은 아우슈비츠에 가스실이 있었다는 주장은 사실무근이므로 홀로코스트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며, 따라서 자신을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로 규정하는 것은 명백한 명예훼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립스탯이 어빙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판결이 내려지면 영국 법정이 가스실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홀로코스트 자체를 부정하려는 어빙의 홀로코스트 부정론을 공인하게 되는 꼴이었다. 이 재판을 취재하여 책<법정에 선 홀로코스트(The Holocaust on trial)>으로 출간한 미국의 저널리스트 돈 거트플랜(Don D. Guttenplan)>의 표현을 빌리면, 결국 '홀로코스트가 법정에 서게 된 것'이었다.
의도적 왜곡인가, 의도치 않은 오류인가
피고 측의 비용만 하루에 1만 파운드씩 소요되는 비싼 재판이었다. 게다가 데버라 립스탯은 학교가 있는 애틀란타와 런던을 수없이 왕복해야 했다. 펭귄 출판사가 비용의 대부분을 떠맡았다 해도 대학교수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립스탯은 미국의 유대인 단체들과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감독인 스티븐 스필버그가 설립한 쇼아 재단의 지원으로 겨우 데이비드 어빙에게 맞설 수 있었다. 어빙이 역사를 왜곡하고 거짓말을 했음을 입증하는 차원의 문제였다면 차라리 간단했을 것이다. 법정 공방이 계속되면서 어빙이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했는가, 아니면 단지 자료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누구나 범할 수 있는 오류를 범했는가 하는 문제로 논쟁이 발전했다. 변호팀은 어빙의 의도를 밝혀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했다. 어빙의 머릿속에 들어가 의도적 왜곡이었는지 단순 실수였는지를 파헤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변호팀은 정면대결을 택했다.
전략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아우슈비츠에 가스실이 존재했고 나치가 유대인 말살을 위해 가스실을 이용했다는 증거에 초점을 맞춰 홀로코스트가 역사적 사실임을 증명하는 자료를 제시하되, 합리적이고 공정한 역사가라면 이를 의심할 수 없음을 보여주어 어빙은 합리적이지도 공정하지도 않음을 드러낸다. 둘째, 어빙의 정치적 견해와 네오나치 집단과의 협력을 문서로 입증한다. 셋째, 어빙의 역사 왜곡을 어빙의 저작과 자료들을 통해 입증한다. 법률적으로는 위험부담이 큰 결정이었지만, 어빙의 홀로코스트 부정론이 영국의 법정에서 공식적으로 인가받게 할 수는 없다는 도덕적 고려가 크게 작용했다. 그러려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필요했다.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홀로코스트 연구자인 크리스토퍼 브라우닝(Christopher Browning)과 독일의 역사학자 페터 롱게리히(Peter Longerich), 네덜란드의 건축 전문가 로버트 얀 반 펠트(Robert Jan van Pelt)가 첫 번째 전략을, 베를린 자유대학의 정치학 교수 하요 풍케(Hajo Funke)가 전문가 증인(expert witness)으로서 두 번째 전략을 책임지기로 했다. 세 번째 전략이 성공하려면 뛰어난 나치즘 연구자가 필요했다. 나치즘에 관한 어빙의 역사 지식은 웬만한 역사학자보다 깊고 풍부했기 때문이다. 그때문에 피고측 변호사들은 탁월한 나치즘 연구자로 평가받는 역사학자에게 자문 역할을 맡기려 했다. 먼저 접촉한 이어 커쇼(Ian Kershaw)는 너무 바쁘다며 거부의 의사를 밝혔다. 변호팀은 고민 끝에 케임브리지 대학의 독일사 전문가 리처드 에번스(Richard J. Evans)를 유력한 전문가 증인이자 자문역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에번스의 합류에 힘을 얻은 변호팀은 재판 전 증거개시절차를 신청했다. 이를 통해 어빙의 서재에 들어가 비밀스러운 연구 파일과 자료를 확보햇다. 에번스의 지휘 아래 박사과정 학생 두 명이 약 18개월 동안 어빙의 책과 자료들을 샅샅이 읽고 분석했다.
2000년 1월 11일, 드디어 런던 법원 제37호 법정에서 재판이 시작되었다. 이후 에번스 이하 전문가 증인들의 조언을 받은 피고측 변호사들이 어빙과 벌인 법정 공방은 통렬하다. 예컨대 변호사들은 어빙이 쓴 헤르만 괴링(Hermann Goring) 전기의 한 대목을 꼭 집어 이렇게 물었다. "1923년 뮌헨 반란 실패 직후의 집회에서 괴링이 눈을 부릅떴다고 썼는데, 그가 눈을 부릅떴는지 어떻게 알았는가?" 어빙은 "작가의 재량"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변호사들은 다시 물었다. "당신이 지어냈다는 말인가?" 어빙이 대답했다. "그렇다." 어빙이 인종주의자인지를 놓고 벌인 공방도 흥미롭다. 어빙은 자기 집에서 일했던 유색인들의 사진을 법정에 제시하고는, 이 사진들이야말로 자신이 인종주의자가 아니라는 훌륭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에번스가 반문했다. "당신이 인종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할 직접적인 문서상의 증거(documentary proof)가 있습니까?" 문서가 아닌 정황 증거들만으로는 홀로코스트를 증명할 수 없다는 어빙의 논리 그대로 어빙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실제로 어빙은 히틀러가 홀로코스트를 명령했다는 공식 문서를 찾지 못하는 한 히틀러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또 히틀러가 학살에 개입했다는 문서를 대는 사람에게는 1,000달러를 주겠다는 기상천외한 제안을 했었다.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이 법정에서 증언했듯이, 실제로 히틀러가 유대인 학살을 명령한 문서는 발견된 적이 없다. 그러나 히틀러는 자신이 무엇을 기대하는지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 등 측근에게 여러 번 이야기했고, 그들도 히틀러의 의중을 이해했다. 그런데도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명령서를 찾지 못하는 한 히틀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어빙의 주장은 역사적 논변이기보다는 궤변이었다.
재판을 맡은 판사 찰스 그레이(Charles Gray)는 "판사는 역사학자가 아니다"라고 했지만, 법정에서 역사 이야기가 빠진 날은 하루도 없었다. 에번스는 어빙이 어떻게 자료를 왜곡하고 오역을 남발했으며, 자신의 왜곡을 숨기기 위해 어떤 술수를 썼는지에 대해 700페이지가 넘는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졸지에 역사 논쟁에 휘말린 판사는 9명의 증인이 쏟아낸 150만 단어에 달하는 증언 기록과, 수천 페이지의 보고서 및 수만 페이지에 달하는 역사 자료를 읽어야 했다. 2000년 4월 11일 열린 선고 공판에서 판사는 무려 300페이지가 넘는 판결문을 공시했다. 판결문의 4분의 3을 제출된 모든 증거를 분석하는 데 할애한 후에야 판사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학자라면 누구나 아우슈비츠에 가스실이 있었고 이것들이 상당한 규모로 가동되어 수십만 유대인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며, 어빙이 네오나치즘을 조장하려는 극우주의자들과 협력하며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의도에 따라 역사적 증거들을 왜곡하고 조작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실증의 이름으로 증인을 핍박하다
홀로코스트를 입증하는 압도적인 증거와 증언을 모두 무시한 데이비드 어빙의 홀로코스트 부정론은 반유대주의적 표현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피고 측 변호인단이 증거개시절차를 통해 어빙의 출발점에 서서 그의 생각을 따라가며 그가 사용한 증거와 논리를 하나하나 면밀히 검토해서 반박한 과정은 칼포퍼(Karl Popper)의 '오류의 반증가능성(falsifiablility)' 테제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헤이든 화이트(Hayden White)류의 구성주의가 어빙과 같은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에게 빌미를 주었다는 데버라 립스탯이나 리처드 에번스의 비판은 너무 성급하다. 그런 비판은 어빙이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증언을 무시한다는 점을 무시한다. 유대인 생존자의 증언을 무시하는 어빙의 태도는 정치적으로는 반유대주의의 반영이지만, 기술적으로는 문서중심적 실증주의의 결과다.
립스탯측 변호인단은 법정에서 직접 증언하겠다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생존자들의 기억이 부정확하다는 점을 노려 마치 범인을 취조하는 형사처럼 어빙이 덤벼들 게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어빙의 실증주의적 공격에 생존자들이 상처받게 할 수는 없었다. 이들에 대한 배려도 재판에서 이기는 것 못지않게 중요했다. 히틀러의 최종 명령서에 1,000달러의 상금을 건 데서 보이듯이, 어빙의 역사 서술은 생존자의 증언이나 기억을 무시하고 공식적인 문서에 집착한다. 어빙의 논리는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의 발포 명령서를 찾지 못했으므로 전두환에게 광주시민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논리나, 군대의 관여를 증명할 만한 공식 문서가 없다는 이유로 일본군 '위안부'를 부정하는 일본 우익의 논리와 놀랄 정도로 가깝다.
이 같은 부정론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나 구성주의보다는 실증주의를 따르는 전통적 역사 방법론에 더 의지하고 있다는 게 내 판단이다. 물론 이 부정론자들은 필요할 때 서슴없이 포스트모더니즘이나 구성주의를 받아들인다. 자신들의 정치적 의제를 위해서는 언제든지 역사적 진실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문서 자료가 없거나 사라진 상황에서는 실증주의가 이들에게는 한층 더 유리한 무기이다. '있음'을 증명하기 보다는 '없음'을 지키는 게 더 쉽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정론자 어빙이 증인의 기억이 사실과 어긋난다 하여 그것이 가짜는 아니며 때때로 '진실(목격자의 기억)'이 '사실'과 어긋나기도하는 '아우슈비츠의 아포리아'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홀로코스트의 수기 중 진짜는 작가가 직접 경험하거나 목격했다는 사실에 의존해 자신의 기억을 문서 자료와 대조하는 과정을 소홀히 하는 반면, 가짜는 그 과정을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당시의 상황을 더 사실에 가깝게 묘사하고 있는 역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실증의 이름으로 증인의 진정성을 무시하고 증언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것은 홀로코스트, 일본군 '위안부', 식민주의 제노사이드 등을 부정하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서 널리 발견되는 현상이다.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기억의 연대를 위해서는 부정론을 재생산하고 있는 '부정'의 국제주의를 깨트리는 것이 급선무이다.
학문의 자유와 법적 규제
재판의 후일담도 흥미롭다. 리처드 에번스 교수는 처음부터 피고 측에서 어빙 대 립스탯 재판에 참가한 경험을 바탕으로 어빙의 홀로코스트 부정론을 실증적으로 조목조목 반박한 책 <히틀러에 대해서 거짓말하기(Lying about Hitler)>(2001)를 출간했다. 그러나 출판과정이 순조롭지 않았다. 애초에 출간하기로한 영국의 출판사에서 계약을 취소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미국에서 출간해야만 했다. 2,000부 조금 넘게 팔린 책을 위해 200만 파운드에 이르는 막대한 재판비용을 감당해야 했던 펭귄 출판사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게 그 출판사의 판단이었으리라. 재판비용 때문에 펭귄 출판사는 이기고도 진 셈이었다. 출판사들은 명예훼손 소송이 두려워 아예 논쟁적인 책을 출판하지 않으려 했다. 비용이라는 시장의 검열체제가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반면 어빙은 지고도 이긴 셈이었다. 어빙은 우선 보상금으로 재판비용의 일부인 15만 파운드를 지불하라는 선고를 받았지만 보상금을 내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파산 선고를 당하고 런던 메이페어의 살던 집까지 잃게 되었다. 그러나 어빙은 이 재판을 계기로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세계 곳곳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처음부터 그의 의도는 여기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2005년 11월에는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던 어빙이 홀로코스트를 부정했다는 혐의로 오스트리아 경찰에 체포되면서 재판의 후일담이 계속되었다. 홀로코스트 부정을 범죄로 규정하는 오스트리아 정부는 1989년 빈 강연에서 홀로코스트를 주정하는 논지를 편 어빙에게 이미 체포영장을 발부해놓은 상태였다.
어빙이 체포되자 미국의 신망 있는 역사학자들은 어빙의 석방을 촉구하는 연판장을 돌렸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은 학문의 장에서 학문적으로 걸러 소멸시켜야지 법으로 제재한다면 학문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흥미로운 것은 어빙에게 고소당했던 립스탯까지 연판장에 서명했다는 사실이다. 영국이나 미국은 홀로코스트 부정론을 법적으로 처리하는 문제에 대해 유럽 대륙의 국가들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유럽 대륙에서는 홀로코스트 부정을 형법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대세인 반면,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학문과 표현의 자유를 우선시하는 분위기다.
이는 어느 편이 옳고 어느 편이 그르냐의 문제는 아니다. 학문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각각의 사회적 기준과 공감대에 따라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게다가 이는 홀로코스트 부정론에만 해당되는 문제도 아니다. 예컨대 홀로코스트 부정론이 학문의 자유에 속한다면, 타자 집단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는 '혐오 발언(hate speech)'도 표현의 자유에 넣어야 하는가? 만약 혐오 발언을 법적으로 규제한다면 홀로코스트 부정론도 구제해야 하는 게 아닌가? 홀로코스트 부정론과 혐오 발언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가? 또 식민주의 제노사이드, 일본군 '위안부', 민간인 학살 부정론 등은 어떻게 다룰 것인가? 법리를 따져서 이런 문제들에 대한 답을 얻을 수는 없다. 특히 홀로코스트 부정론에 대한 유럽 대륙과 영미권의 입장 차이는 홀로코스트와 연루된 역사적 경험의 차이와 무관하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 점령당했던 유럽 대륙의 여러 나라가 홀로코스트 부정론에 대해 더 엄격한 입장을 취하는 것은 나치의 공범이라는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영국과 미국은 같은 교전 당사국이었지만 유럽 대륙 국가들과 달리 나치의 점령하에 놓인 적이 없으니 나치에 협력한 홀로코스트 공범자라는 과거의 굴레 같은 것도 없다. 따라서 홀로코스트 부정론에 대해서도 사상과 학문의 자유에 더 방점을 찍고 법적 규제보다는 공론장에서의 학문적 토론을 선호하는 게 아닌가 한다.
사법적 정의와 역사적 진실
우리나라에서도 2013년 <반인륜 범죄 및 민주화 운동을 부인하는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안>이 발의된 데 이어 2014년에는 <일제 식민지배 옹호행위자 처벌 법률안>과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 전쟁 등을 부정하는 개인 또는 단체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안>이 발의된 바 있다. 또한 조선 여성들이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가 학대당한 사실을 부인하거나 왜곡하고 그들을 매춘부라 칭하며 명예를 회손하는 행위에 대해 엄격히 처벌하려는 <일제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 2018년 현재 국회에 입법 예고된 상태이다. 한국 역시 역사 부정을 법으로 규정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성찰해야 하는 시점인 것이다.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개인이나 단체에 형사책임을 물어온 독일의 경험이 유용한 참조가 될 것이다. 독일에서는 네오나치를 견제하기 위해 형법에 대중선동죄를 규정하고 있다. 통상 '아우슈비츠 거짓말(Auschwitzluge)법'이라고도 불리는 형법 제 130조는 국가사회주의(나치) 지배하에서 벌어진 반인도적인 범죄를 공공의 평온을 교란하기에 적합한 방식으로 공연히 승인, 부인, 고무한 자(제3항)와 나치 피해자의 존엄을 침해하는 방법으로 공공의 평온을 교란한 자(제4항)를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아우슈비츠 거짓말 법은 홀로코스트 부정을 개인의 법익을 넘어 집단의 법익, 더 나아가 사회의 법익을 침해하는 범죄로 보았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요컨대 홀로코스트를 부정하거나 정당화하는 언행은 유대인 개개인의 대한 모욕일 뿐만 아니라 독일이라는 국가에 대한 모독이자 사회 통합을 해치는 행위라는 것이다. 법이 보호하려는 이익, 즉 보호법익이 사적 권리를 넘어 사회적 기억으로 확장되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아우슈비츠 거짓말 법 이전에는 홀로코스트 부정론을 규제할 만한 법 규정이 마땅찮아 명예훼손에 관한 법률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고소인의 자격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지곤 했다는 점이다. 독일에서 명예훼손죄는 친고죄에 해당하는 관계로 재판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홀로코스트 부정론으로 모욕당하거나 명예가 훼손된 피해 당사자가 직접 주정론자를 고소해야 했는데, 고소인이 유대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공소가 제기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반대로 공소가 성립된 경우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고소인 자격을 인정받으려면 유대인임을 입증해야 했는데, 1979년의 한 판례가 그러한 예이다. 이 재판에서는 홀로코스트 생존자가 1935년 나치에 의해 제정된 뉘를베르크 법에 의거해 유대인의 피가 4분의 1가량 섞인 '2등급 혼혈'임을 근거로 피해자로서 고소인 자격을 인정받았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를 처벌하기 위해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에 토대한 나치의 뉘른베르크 법에 의거해야만 했던 모순 앞에서는 누구라도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아우슈비츠 거짓말 법은 바로 이런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이 법은 명예가 아닌 역사적 진실을 보호법익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모욕죄와 달리 친고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고소인의 자격을 문제 삼을 근거가 사라진 것이다. 아울러 독일 형법 제194조는 해당 모욕이 나치 치하에서 받은 박해와 연관되어 있을 경우, 피해자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이상 고소 없이도 형사소추, 즉 기소가 가능하다고 명시하고 있다. 입법 과정에서 과거의 죄를 인정하는 독일의 솔직함은 '망각'을 통해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다른 국가들과는 도덕성에서 분명히 차별된다.
그러나 이 법에도 그늘은 존재한다. 법제화를 위해 보수파의 협력이 절실했던 아우슈비츠 거짓말 법 추진 세력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동유럽 점령지에서 추방당한 독일인들의 고통을 부정하는 부정론자들도 형사소추 대상으로 못박았다. 1,20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피란민과 많게는 200만 명으로 추산되는 독일 민간인 희생을 간과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물론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 법의 틀 안에서는 독일인 피란민이 홀로코스트 희생자와 똑같은 역사적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유대인 희생자 개개인을 대신해서 국가가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를 고소할 수 있도록 만든 이 법의 함의는 이처럼 역설적이다. 이 법의 입법자들의 의도와는 달리 1990년대 이후 통일의 기억 문화에서 독일의 희생자의식이 다시 고개를 드는 데 기여했는지도 모르겠다. 역사 부정론을 법으로 규제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를 낳는다.
민주화운동, 일본의 식민 지배와 침략 전쟁, 일본군 '위안부' 부정론에 대한 법적 문제도 다르지 않다. 만약 남한의 우파가 북한의 남침설을 부정하는 부정론자들을 처벌하자고 주장한다면? 만약 좌파가 제주 4.3사건이나 한국전쟁 당시 미군과 정부군이 저지른 양민 학살을 부정하는 행위를 처벌하자고 주장한다면? 또 좌파와 우파 민족주의자들이 합심해서 구한말 의병운동의 민족적 대의를 깎아내리는 역사학자를 반민족주의자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고구려가 중국도 한국도 아닌 복합적 역사 공간이라는 변경사의 주장을 반민족적행위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상식적인 기억 연구자라면 실증의 이름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모욕하고 상처를 덧내는 역사 서술 방식에 분노하고 비판하는 것이 당연하다. '사실'과 '진실'이 모순되기도 하는 과거 재현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희생자에게 '문서적 사실에 의한 실증'의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의 지적, 도덕적 천박성을 감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법이 홀로코스트, 식민주의 제노사이드, 일본군 성노예제에 의한 피해 등의 역사를 윤리적이고 책임 있는 사회적 기억으로 만드는 데 적합한 도구인지는 자신이 없다. 또 국가가 희생자를 대신해서 역사 서술의 모독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할 수 있다는 생각이 마땅한지도 모르겠다. 법이나 공권력에 피해자에 대한 정서적 공감을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과거에 대해 책임을 지며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사회적 기억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쩌면 법을 넘어서 구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