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을 위해 어느 누구에게도 한푼받지 말 것, 즉시 입관하여 묻어버릴 것, 어떤 기념행사도 하지 말 것, 나를 잊고 자기 생활을 돌볼 것."
아시아인으로는 유일하게 세계적인 문호 반열에 오른 중국 작가이자 사상가인 루쉰(魯迅)이 죽기 전에 미리 써놓은 유서 중 일부다.
그의 꼿꼿함과 정갈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부분이다.
최근 그가 남긴 주옥 같은 산문을 새롭게 정리한 책 두 권이 나와 눈길을 끈다 . <희망은 길이다>,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라는 제목의 이번 산문집은 루쉰 전문 가인 이욱연 씨가 편역을 하고 판화가 이철수 씨가 그림을 그려 더욱 눈길을 사로잡는다.
루쉰은 1881년 중국 저장성에서 태어났다.
루쉰은 필명이고 본명은 저우수런( 周樹人)이다.
10대 후반에 신학문을 접한 그는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후 항일 운동과 중국 근대화운동에 뛰어든다.
그는 문학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중국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의 대표작 <아큐정전>은 전세계 독자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산문집에서 그의 강직한 문학관이 드러나는 부분을 찾아보자.
"나는 알고 있다.
사람들이 어떻게 공리니 정의니 하는 미명으로, 성인군자란 간판으로, 유언비어와 여론이라는 무기로 사리사욕을 채우면서 칼도 없고 붓도 없는 약자들을 숨도 못쉬게 하는지를. 나는 깨어났다.
그러기에 늘 이 붓을 들어 기린의 피부 속에 감춰진 마각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글쓰기는 때로는 고뇌의 외침이기도 하고 때로는 유머이기도 하고 날카롭게 번뜩이는 비수이기도 하다.
엄청난 혼란기를 살았던 루쉰이 목숨을 다하는 날까지 중국 국민들에게 말하고자 한 것은 '희망'이었다.
"희망이 없으면 존재도 없고 미래도 없고 현재도 없다"는 그의 소신은 많은 중국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혁명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필연적으로 더러운 것이며 피가 섞이기 마련이다.
시인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혁명은 더군다나 매우 현실적인 일이기에 여러 가지 비천하고 번거로운 작업이 필요하다."
루쉰의 글은 냉정함이 느껴질 정도로 현실적이다.
모호한 낭만성은 찾아 볼 수 없다.
낭만적이지 않으면서 사람을 울릴 수 있다는 게 루쉰 문학의 특장점이다 .
루쉰의 인생은 불꽃 같았다.
매순간 열렬하게 사랑하고 열렬하게 증오했던 그는 죽기 전 가족들에게 "나를 증오하는 자들은 증오하도록 내버려둬라. 나도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길 만큼 자기 삶에 투철하고 정직했다.
그러나 그의 분노는 곧 중국에 대한 사랑이었다.
분노하는 자만이 용서도 할 수 있는 것처럼…. 다음 문장을 보자.
"꼴찌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 민족은 어떤 일에서든 일시에 무너지지 않는다.
나는 운동회를 보러갈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우승자는 당연히 존경할 만하다.
그러나 뒤떨어졌더라도 기어이 결승선까지 달려가는 주자와 그런 주자를 진지하게 보는 관객, 그들이야말로 중국 미래의 대들보다."
그는 너무나 따뜻했기에 냉정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만약 혼란기가 아닌 태평 성대에 태어났다면 낭만적인 문인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현실은 가혹했다.
외세 침입에 만신창이가 된 조국에서 그는 이렇게 외쳤다.
"옛날을 흠모하는 자, 옛날로 돌아가라! 세상을 떠나고 싶은 자, 어서 떠나라! "
루쉰의 아포리즘은 언제 읽어도 육중함으로 다가온다.
20031213 / 허연 기자
중앙일보
"희망이 위안이고 빛이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20세기 중국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사상가며 혁명가이기도 했던 루쉰(魯迅.1881~1936)의 소설 <고향>에 나오는 말이다. 일본에 유학해 의학을 공부하다가 병든 육체보다는 중국인들의 병든 정신을 개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문학의 길로 전환한 루쉰의 일생을 대변하는 문구다. 한마디로 '희망은 길'이라 줄일 수 있다. 봉건적 폐습과 서양의 침탈이란 이중적 억압 구조에 놓인 중국을 변혁하는 것이 루쉰이 가야할 길이었다.
루쉰이 죽는 날까지 온 몸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희망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우리가 위안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희망이란 존재와 한몸으로 존재가 있으면 희망이 있고, 희망이 있으면 빛이 있다."('존재가 있으면 희망이 있다')
루쉰의 팬은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과 일본에도 많다. 신간 '희망은 길이다'는 루쉰에 푹 빠진 한국의 판화가 이철수씨와 중국문학 연구자 이욱연씨의 합작품이다. 대학시절부터 거의 20년 동안 루쉰의 책을 밑줄 그으며 읽어 왔다는 이욱연(서강대 중국문화학) 교수는 자신이 루쉰 전집 이곳 저곳에서 가려 뽑은 문구를 모아 번역했다. 루쉰이 따로 아포리즘 형식의 글을 쓴 것은 아니지만 일종의 '루쉰 아포리즘'이 된 셈이다.
판화가 이철수씨의 작품이 곁들여있다는 점이 이 책의 독특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루쉰 역시 중국 목각 판화 운동의 개척자였다. 예술과 대중을 매개해 주는 목각 판화의 성격을 루쉰은 일찍이 간파했다. 문맹자가 많았던 당시 중국에서 판화는 중국민을 계몽하는 적절한 수단이었다. 루쉰의 글과 이철수의 판화가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서로 만나는 가운데 20세기 초반 중국의 이야기가 마치 오늘 우리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부패한 현실, 기회주의적이고 위선에 차 있는 인간 등에 대한 루쉰의 통찰은 살아 있는 듯 날카롭다"는 이씨는 루쉰의 글을 읽다보면 "숨을 데가 없다"고 고백한다.
<희망은 길이다>와 함께 루쉰의 산문집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예문, 9천5백원)도 다시 출간됐다. 이욱연 교수가 루쉰의 산문 가운데서 뽑아 1991년 출간했던 책인데, 이번에 일부는 빼고 일부는 추가하면서 전문을 다 싣는 등 내용을 수정.보완해 새로 펴냈다. 자신의 글을 '잡감(雜感)'이라 불렀던 루쉰은 독특한 산문 형식을 선보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20031213 / 배영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