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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보았을 판소리란 말은, 공간을 지칭하는 ‘판’과 노래라는 의미로 ‘소리’가 붙어서 만들어진 말이라는 설도 있고, 노래로 이야기 한 판을 모두 소리한다고 해서 판소리라는 설이 있다. 판소리는 예술적인 형태로서 서서히 발달하다 20세기에 들어 음악유통, 음악가의 신분 등의 변화를 통한 전성기를 누리게 되는데 이 시기의 명창들은 수많은 대중들 앞에서의 무대공연은 물론이고, 전국적인 순회공연과 음반 제작 등을 통해 지금의 연예인과 같은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이때 활동했던 인물들이 바로 김창환·송만갑·이동백·김창룡·정정렬 등으로, 소위 근대 판소리 5대 명창으로 불리는 이들이다. 이들 근대 5대 명창 중에서도 당대 가장 큰 인기를 누렸던 명창이 서천 출신의 이동백과 김창룡인데, 이들은 예전 판소리의 마지막과 오늘날의 판소리를 이어주는 명창이며 현재까지 판소리사의 중요한 의의를 갖는 인물들로, 판소리 중고제의 마지막 창자이기도 하다. 오늘은 서천 출신의 명창, 중고제의 거목 이동백과 김창룡 두 인물을 통해 지금은 계승자가 없어 맥이 끊어진 소리이지만 판소리 역사의 한 장을 장식했던 중고제와 중고제의 고향, 서천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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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나이 45세에 서울로 상경한 후 이동백은 당대의 명창 김창환과 송만갑을 보좌하면서 함께 명창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였고 그 명성은 날로 높아져 마침내 고종의 총애를 받기에 이른다. 이동백의 훤한 인물과 뛰어난 소리에 탄복한 고종은 자주 그를 불러 어전에서 소리를 하게 하였으며, 마침내 고종은 이동백에게 당상관인 정3품에 이르는 통정대부의 벼슬을 내린다. 물론 이때의 벼슬은 명예로서 내리는 것이지만, 판소리가 생겨난 이후 소리광대가 정3품의 벼슬을 제수 받는 것은 이동백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때부터 이동백을 ‘이통정’ 이라고 불렀다.
이동백은 74세가 되던 해 국악인 최초 은퇴공연을 열었고 서울에서의 공연뿐만 아니라 만주 지역에까지 가서 공연을 하였는데, 84세 나이로 자택에서 생을 마감할 때 그의 뒤를 잇는 후계자가 없음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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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제는 독서체 억양이 강하기 때문에 노래 곡조가 단조하고 소박한 맛이 있다고 해서 어떤 부류에서는 환영했고, 어떤 사람들은 아기자기한 맛이 없어 냉담했다고 하는데 특히 여류층에서는 별다른 인기가 없었다고 한다. 때문에 김창룡의 소리는 남부보다는 특히 관서 일대에서 대단히 좋아하여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그곳에서는 판소리 명창으로 김창룡만을 제일로 알고 흥행계약에서도 김창룡의 이름이 없이는 극장 계약이 될 수 없는 형편이었다고 한다. 유기룡에 의하면, 무대에서 아무리 이동백, 송만갑이 열창을 하여도 모두 하품만 하다가 김창룡이 등장하면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그가 서울로 온 나이는 32세 때였다. 이때는 대원군으로부터 고종이나 순종에 이르기까지 많은 명창들이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소리 하나로 사는 보람을 가질 수 있었던 시기였다. 국창으로 대접받는 명창들은 통정대부라든지 감찰, 의관 등의 직계를 하사받기도 했는데 김창룡도 참봉을 제수 받았다. 참봉이라면 종구품의 벼슬로 물론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는 예술인에 대한 국가적 대우라는 점에서, 소리하는 예능인으로서 벼슬자리를 받는다는 것은 매우 큰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64세를 생애로 1935년 타계한 김창룡은 심청가 중에서 꽃타령에 특징이 있었으며, 적벽가 중에서는 특히 유비가 공명을 찾아가는 삼고초려 대목이 빼어났다. 그러나 명창은 가고 소리만 남아 삼대를 내려온 명창 가계도 그의 대에서 끝났고, 그의 문하에서 배운 제자들은 많았으나, 섬세하거나 세련된 기교는 없었지만 소박한 맛을 지니고 있던 김창룡이 추구했던 중고제의 법제를 이어받아 승계한 제자는 없었기에 더욱 애석한 일이 되고 말았다.
최근 문화콘텐츠 산업이 지역 경제를 견인하는 원동력이자 지역 주민의 문화 수요를 충족하는 문화자원으로 부각되면서, 문화콘텐츠 산업의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가치는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사라져간 중고제의 고향이자 근대 5대 명창을 2명이나 배출한 서천은 중고제 집안이라 불리는 김창룡의 생가부터 이동백의 생가, 이동백이 동굴독공을 위해 용굴을 마련했다는 희리산, - 이곳에서 이동백은 득음을 위해 똥물도 마다하지 않고 피를 토하는 독공을 행했다고 한다 - 등 관련된 다양한 문화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직은 파편화되어 있는 서천의 문화자원을 어떤 방법으로 가치를 부여하고 스토리를 갖는 문화콘텐츠로 완성시킬 수 있을까?
이제 서천은 이러한 문화콘텐츠를 통한 고유의 문화적 잠재력을 일깨울 방법을 다각적으로 모색해야 할 때이다.
다음 회에는 신사임당,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 중기 3대 여류시인으로 꼽히며 중국에서 더욱 인정을 받았던 숨겨진 여류시인, 서천 비인면 남당리의 임벽당 의성김씨에 대해 알아본다.
<송나미 시민기자> 2009년 08월 03일 (월) 13:54:32
중고제란? 판소리의 유파 중 하나로써 판소리의 유파는 흔히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로 나눌 수 있다. 각 유파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보면 동편제는 남성적이고 호탕하며 끝을 짧게 끊는 것이 특징이며, 서편제는 여성적이고 섬세하며 끝에 여운이 남는다. 즉 꼬리가 달려있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중고제는 책을 읽는 것처럼 운이 떨어지고 고졸한 멋을 풍기며 충청, 경기, 경상도 일부지역에서 부르던 소리로 먹어도 물리지 않는 나물과 같은 맛이 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
첫댓글 중고자동차 매매기사인줄 알았습니다. 서천에서 그런분들이 강탄하셨군요.
근래 돌아가신 박동진선생이 중고제의 대가셨죠!
유익한 정보 감사합니다(^^*)
부끄럽지만 김창룡은 멀지않은 친척(?).
정확하지는 않지만 울 할배로부터 들은 바, 이곳 성주리(?) 빗그멘가에서도 사시었던 걸로 아는데 -소리와 북에 미쳤었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