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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좌) 프랑켄슈타인(우)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를 떠나보내고, 이제야, 그녀가 듣고 싶었던 고백을 한다. 검은색 깔끔한 정장 슈트를 입은 남자는 등 돌려 떠나는 여자가 자신이 50을 세기 전에 돌아올 것이라고 주문을 건다. 아니, 그것은 주문이 아니라 소원에 가깝다. 안타깝게, 그녀의 이름을 숨죽여 부르지만 한번 떠나간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 9주 반 동안 사랑을 나눴던 그들의 이야기다.(‘나인 하프 위크’)
여기 또 다른 남자가 있다. 그는 긴 사랑의 여정을 지나 마음속 화인(火印)처럼 남은 그녀를 지우기 위해서 먼 곳에 와 있다. 그 먼 곳의 이름은 바로 앙코르와트. 남자는 앙코르와트 비밀의 문 앞에 서서 그간의 일을 고백한다.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빈 공간 너머 추억은 시간이 되어 사라져간다. 그는 그렇게 그녀와의 일을 서둘러 과거완료형으로 만들어버린다.(‘화양연화’)
추억은 힘이 세다. 추억의 힘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는 데서 비롯된다. 지금 이 순간도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 과거가 되면, 바꿀 수가 없다. 지울 수도 없다. 영화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과거로 되돌아가고 싶어 안달한다거나, 잠깐의 실수로 잃어버린 그녀를 되찾으려 전전긍긍할 때 혹은 그 지독한 바람이 이뤄져 과거로의 시간여행이나 영생이 이루어진다면, 아마도 그것은 그만큼 화석이 된 과거를 말랑말랑한 현재로 되돌리고픈 열망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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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과거라는 형벌
하지만 냉혹하게도, 지나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보르헤스의 소설처럼 3월보다 먼저 4월이 오는 세계는 오지 않는다. 벤자민 버튼처럼 아흔 살로 태어나 영아로 죽을 수도 없다. 이 멋진 시간여행은 오로지 소설과 영화 안에서만 가능하다.
영화가 힘이 세다면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일 테다. 영화는 되돌아간 시간을 계속해서 되감기해 보여준다. 때로는 필름의 녹화분을 지우고 새로운 영상을 담을 수도 있다. 다른 감독이 리메이크해서 완전히 다른 영화를 만들 수도 있다. 지독히도 후회스러운 사건에 용서를 구할 수도 있다. 놓쳐서 안타까워, 지금도 잊지 못하는 그녀를 영화 속에서라면 다시 불러올 수도 있다. 시간의 일회성과 죽음의 필연성 앞에 영화는 환상이 된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떨어지고 나면 내년에도 푸른 은행이 달리지만, 어제의 그 은행은 아니다. 가을이면 왜 단풍이 드는지 과학은 설명해주지만, 지나간 추억에 달리 어쩔 길 없는 상황 속에서 과거를 들여다보는 사람의 심리는 알 길이 없다. 추억은 방울방울이라지만, 놓쳐버린 인생의 길은 안타까움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Some where In Time, 1980.
15년 전쯤 TV를 멍하게 바라보던 소녀는 어떤 영화를 보게 된다. ‘슈퍼맨’으로 나왔던 남자 주인공이 주연을 맡았던 것 같고, 여자 배우가 매혹적이었던 것 같다. 내용은 이렇다. 어떤 남자가 우연히 머문 호텔에서 아름다운 여성의 사진을 보게 된다. 그녀에게 무작정 빨려 들어간 남자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문제는 여자가 60여 년 전 활동했던 여배우라는 사실. 남자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 자기최면을 건다. 진심으로 최면을 건 덕분에 남자는 60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여자를 만난다. 그런데 남자는 자기 시대에서 가져온 1979년 동전을 보는 바람에 다시 현재의 시간으로 튕겨져 나오고 만다.
줄거리를 요약하니 엉뚱하고 비논리적인 시간여행 영화에 불과한 이 작품은 사춘기 시절 내 머릿속에 남아 내내 묘한 기시감(旣示感)과 슬픔을 전달해주었다. 영화가 준 슬픔은 마치 오후 네 시 집에 돌아갔을 때 나를 기다려줘야 할 엄마는 집에 없고 마루 한 가득 조금 일찍 떨어진 햇빛이 가득한 느낌과도 닮았다. 오후 네 시의 쓸쓸함이라고 부를 수 있을 그 이상한 상실감과 슬픔이 영화 속에 가득했다. 마루턱에 걸터 앉아 무릎까지 내려앉은 석양을 맞으며 혼자 노래를 흥얼거리는 어린 소녀의 실루엣 같은 느낌 말이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본 이 영화는 ‘슈퍼맨’ 크리스토퍼 리브와 TV드라마 ‘닥터 퀸’으로 알려진 제인 세이모어가 주연을 맡은 ‘사랑의 은하수’라는 작품이었다. 한국어 번역 과정에 약간 어설픈 제목을 갖게 된 영화의 원제는 ‘Somewhere In Time’인데, 원제가 영화의 분위기에 훨씬 더 어울리는 듯싶다. 사실 이 영화는 개연성이나 필연성이라는 서사적 원칙을 두고 보았을 때 지나치게 우연적이고 비과학적인 작품이다. 시간여행이라는 SF적 소재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너무 공상적이라 판타지에 가깝고 때로는 웃음이 나올 만큼 억지스럽기도 하다.
“내게로 돌아와”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성긴 서사물이 오히려 ‘시간’에 대한 사람들의 무의식적 안타까움과 과거에 대한 집착 그리고 영원한 사랑에 대한 낭만적 기대를 고스란히 응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에는 ‘INSITE’라는 모임을 조직하고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그랜드호텔을 매년 방문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의외로 영화의 제목을 인터넷 검색창에 쳐보면 수많은 한국 관객 역시 아련한 기억 속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매력으로 영화를 기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Somewhere In Time’은 지나간 시간에 대해, 인간의 힘이 미칠 수 없지만 결국 자신의 실수이기에 더 뼈저린, 과거라는 형벌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리처드는 1912년에 당도하기 위해 ‘자기최면’이라는 방법을 쓴다. ‘백 투 더 퓨처’처럼 기계를 사용한다거나 ‘나니아 연대기’처럼 벽장문을 통해서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리처드의 스승은 시간여행이 간절한 바람과 자기최면으로 가능하다고 말한다. 스승의 말을 따라, 리처드는 당대의 물품을 구입하고 1910년대 스타일의 옷과 머리 모양을 하고는 주문을 외운다. 간절하게, 진심으로, 자신이 1910년대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치 않고 주문을 건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이 당신의 세계다”라고. 그 결과 그는 너무도 보고 싶었던 여자를 볼 수 있게 된다.
당연히 과거의 여자 앨리스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는 묘한 매력으로 그에게 빠져든다. 매니저의 방해 공작에도 앨리스는 리처드와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는 너무도 흥분한 나머지 그녀와의 행복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다. 단 하룻밤의 정사, 그에게 가장 행복한 그날 아침.
그런데 그는 주머니 속에서 자신이 왔던 곳, 1979년의 동전을 발견하고 곧장 현재로 소환되고 만다. 그렇게 그는 행복의 절정에서 추락하고 만다. 리처드는 너무나도 간절히 되돌아가려고 애쓴다. 최면을 걸고, 걸지만 이번엔 쉽사리 과거로 갈 수 없다. 결국, 남자는 일주일 만에 사체로 발견된다. 간절히 원했지만, 그는 다시는 그곳에 갈 수 없다.
사실 영화 속에서 리처드는 과거를 향해 갔지만 그에게는 그 과거가 단 한 번뿐인 삶, 현재의 시간이다. 그러니까 언뜻 보기에 자유롭게 시간을 넘나드는 듯싶지만, 그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회복하지 못한다. 과거로의 여행이 그의 현재적 삶이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곱게 늙은 한 할머니가 리처드를 찾아와 회중시계를 전해주는 데서 시작한다. 할머니는 리처드의 첫 공연을 보러 와서 “내게로 돌아와”라고 말한다. 짐작했겠지만, 할머니는 바로 리처드가 떠나버린 후 시간을 견디며 늙어온 앨리스다.
지독한 자기최면
그런데 생각해보면 리처드는 정말이지 행복한 남자다. 그는 행복의 절정을 맛보았지만 행복의 대가를 죽음으로 치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냉혹하다고? 도리도리. 앨리스와 첫날밤을 보낸 이후 리처드에게 남은 것은 먹고 싸고 살아야만 하는 현실이다. 미래에서 온 그에게는 신분증도, 집도, 학력도, 돈도 없다. 매니저에게 의존해온 앨리스 역시 현실적인 생계 대책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리처드와 앨리스는 첫날밤을 보낸 이후 어떤 행복한 일을 할까, 계획을 세우다가 헤어지고 만다. 그들에게는 순도 높은 90%의 행복과 행복한 삶에 대한 기대가 있을 뿐 현실은 없다. 리처드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고통은 아마 남아 있는 10% 행복을 맛보지 못한 아쉬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10%의 여분이 곧 90%의 현실과 맞닿아 무미건조한 일상으로 바뀌는 순간을 경험한다. 사랑 때문에 죽을 것 같았던 사람들이 모두 다 사랑을 사전 속에 담아 두고 무감하게 살아간다.
리처드를 과거로 데리고 간 비법이 자기최면이었다는 사실도 유심히 봐야 한다. 어쩌면 리처드는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처럼 현실 같은 꿈을 꿨을지도 모를 일이다. 너무도 절실히 원한 나머지 그는 사진 속의 그녀를 현실 같은 꿈에서나마 만났던 것은 아닐까? 한 번쯤 열심히 사랑을 해본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그와 혹은 그녀와 헤어진 후 어느 날, 그녀와 행복했던 하루를 꿈속에서 보내고 눈을 떠 방에 걸린 익숙한 시계를 보며 눈물 흘렸던 그 순간. 간절히 꿈이지 않기를 바랐던 바보 같은 그 순간을 말이다. 과거, 그때, 그렇게 하지 말았을 걸, 이라는 후회와 함께 꿈속의 그녀는 과거 속에 봉인된다. 바보 같은 실수를 되돌리기 위해 과거로 가고 싶지만 갈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지독한 자기최면뿐이다. 결국 되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소년 조슈아가 소원을 비는 기계 앞에서 말한다. “어서 어른이 되고 싶다”고. 그런데 그 소년 조슈아가 눈을 떠보니 정말 어른이 돼 있다. 가랑이에 털이 숭숭 나고 수염까지 까칠한, 어른이 된 조슈아. 그는 장난감 회사에 취직해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사실 그는 열세 살이니 어린이의 마음으로 상상하는 게 결코 어렵지 않으니 말이다. 페니 마셜 감독의 ‘빅’은 소원을 비는 기계에 “어른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가 정말 어른이 된 소년의 이야기다.
12세 관람가 영화 ‘빅’은 사실 아이들의 바람과 어른의 욕망을 동시에 채워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은 어서 빨리 어른이 되어서 지겨운 청소년기나 학창시절을 건너뛰어버리고 싶은 바람을, 그리고 어른들은 지금 이렇게 몸집이 커졌지만 다시 엄마 품에 꼭 안기는 아이로 되돌아가고픈 욕망을 갖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갑자기 줄어든 조슈아가 바닥에 끌리는 양복을 입고 걸어가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 이 작품은 사실 어른들의 욕망을 거꾸로 말해주고 있다.
그토록 빨리 스무 살이 되어서 성인전용 영화를 보고, 술집에 들어가고, 담배를 피우고 싶었지만, 어느 새 그 시간들이 너무나 빨리 지나쳤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쩌면 우리는 조슈아처럼 작아진 몸 위에 어른의 옷을 걸치고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를 어른이라 부르고, 어른다운 몸짓과 언행을 하라고 말한다. 작아진 몸, 소년으로 돌아가는 조슈아는 어른들의 꿈이자 환상, 그리고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과거 회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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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
돌이키고 싶은 운명
돌이킬 수 없는 후회는 때로는 평생의 상처로 남기도 한다. 서양의 고전 ‘드라큘라’는 생의 일회성과 선택의 불가항력이라는 문제를 영생이라는 징벌로 사유한 작품이다. 브람 스토커 원작의 이 작품은 영원히 살아간다는 것을 저주로 해석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게다가 영원히 살아가게 된 계기가 바로 실패한 사랑이니 말이다.
드라큘라 백작은 전쟁에 나가 승리하지만 그가 전사했다는 소식이 잘못 전해지자 사랑하는 아내가 목숨을 버린다. 백작은 삶의 의미를 잃고 생의 에너지인 피를 빨면서 영원히 삶을 저주하겠다고 선언한다. 최초의 SF소설이라는 평가를 받는 메리 쉘리의 ‘프랑켄슈타인’의 시작도 비슷하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한다. 의사였지만 그는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한다. 치유는 인간의 몫이지만,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는 신의 뜻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감히 신의 권한에 도전하고자 한다. 죽은 자의 몸뚱이를 모아 양수를 붓고 전기 에너지를 투여해 살려내는 실험을 말이다. 그는 사체들의 몸뚱이 결합체를 살려낸다. 하지만 그것을 뭐라 이름 짓지 못해 그냥 ‘그것(it)’이라고 부른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슬픔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신과의 거래를 원한다. 자신의 목숨을 가져가기를, 혹은 내 소중한 모든 것을 가져가기를, 이런 기도를 한다. 하지만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른다. 운명 앞에서 사람들은 그 어쩔 수 없음에 대해 어떻게든 돌이키고 싶어한다.
언젠가 소설가 김영하는 “이 시대에 신이 되고 싶은 자는 살인을 하거나 창작을 한다”라고 쓴 바 있다. 젊은 작가의 도발적 선언 속에는 신의 권능으로서의 창조와 파멸에 대한 감식안이 담겨 있다. 선택이 인간에게 맡겨진 영역이라면 신은 끊임없이 두 개로 갈라지는 미로로 만들어진 선택의 여지를 제공한다. 신은 그 선택의 불가지성에 대한 다른 이름일 것이다. 한편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그 무엇을 돌이키고 싶을 때, 수정 불가능한 과거가 된 역사를 고치고 싶을 때 ‘소설’을 쓴다. 영화 이야기는 그래서 간혹 생을 창조하는 신과 닮아 있다.
연애에 실패한 제인 오스틴은 자신의 삶과 정반대의 결말을 맞게 될 여자를 등장시켜 ‘오만과 편견’을 써낸다. 소설 ‘오만과 편견’의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제인 오스틴처럼 가난하고 자존심 강하고, 글솜씨가 뛰어나다. 현실 속 제인 오스틴이 돈 많은 상속녀에게 사랑하는 남자를 양보해야 했던 것과 달리 엘리자베스는 잘생기고 부유한 남자에게 청혼을 받는 데 성공한다. 제인 오스틴은 평생 혼자 살았다. 하지만 그녀의 소설 속 주인공들, 여자들은 언제나 마지막에 가서 행복한 결혼을 맞는다. 아마도 이 결혼은 결국 그녀가 실제의 삶에서 놓친,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반복재생이자 자기최면이었을 것이다.
시간의 폭력에 대한 원망
여기 또 다른 남자는, 자신이 세 번이나 부정했던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2009년 아카데미상 주요 부문에 후보작으로 올랐던 ‘더 리더’의 주인공은 자신에게 여성을 가르쳐주었던 그 연상의 여자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재판에 회부된 것을 보자 모른 척한다. 그는 그녀뿐 아니라 그가 경험했던 10대의 일탈과 부끄러웠던 욕망을 모두 거절한다. 그녀가 죽고 나서, 남자는 후회와 회한, 그리고 사죄의 글을 쓴다. 그렇게 남자에게 ‘글’은 못다 한 사죄와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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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 ● 1975년 서울 출생 ● 고려대 국어교육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국문학) ● 동아일보 신춘문예 입선(영화평론),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문학평론),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문학평론) ● 現 고려대·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 |
시간은 결코 되감을 수 없다. 간간이 추억이 상처로 아려오는 까닭도 영화처럼 시간을 거꾸로 돌려 그때의 나로 되돌아갈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영화와 이야기가 시간의 재생과 반복을 말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인간의 욕망이 그토록 강렬하기 때문일 테다. 신의 뜻이라고 믿고 기도하는 자의 마음속에도 역시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무참한 폭력에 대한 원망과 안타까움이 자리 잡고 있다.
간혹 불혹이 가까워지는 나이에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E. T’의 낭만적 환상이 따뜻하게 다가오는 까닭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주로 날아오르는 자전거는 어쩌면 자기 최면에 의해서나 가능할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면 누구도 자전거로 하늘을 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한때 그런 장면을 꿈꾸었다는 사실도 잊고 만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업’의 주인공은 70세 할아버지다. 그는 어린 시절의 낭만을 찾아 집 굴뚝에 풍선을 주렁주렁 달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뼈저리게 사무치는 과거에 대한 회한이 있다면,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자기최면보다, 남은 시간에 환상을 다시 가져오는 것은 어떨까. 달의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이 눈물겹도록 다정하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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