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은 명종 8년, 명종 나이 스물에 섭정을 그만두고 명종 으로 하여금 만기(임금이 보는 여러가지 업무)를 친지(직접 업무를 봄)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물러났어도 그녀는 여전히 권력의 중심이었고, 그 동생 윤원형의 권세 역시 변함없이 강성하였습니다.
윤원형은 20년동안 권력 실세로 군림하면서 그 끝을 모를 부패행위를 일삼았습니다. 사시사철 전국 각지에서 뇌물을 실은 수레가 올라왔고, 곳곳이 농장이며, 한양에만 대저택 이 10여채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윤원형의 주변 인물 중 최고 화제는 바로 정난정 이었습니다. 정난정은 부총관을 지낸 정윤겸과 관비의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로 엄청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남자 를 유혹하는 묘한 매력을 가진 여자로, 원형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그 첩이 되더니, 한 발 더 나아가 기존 정실을 내몰아 죽인 후 스스로 정실이 되었습니다.
난정은 문정왕후의 사랑도 듬뿍 받아 궁궐을 무시로 드나 들었고, 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장악하여 전매, 모리 행위로 많은 부를 축적하였으므로, 당시 원형과 난정 부부의 자녀들과 혼인하고자 하는 자들이 줄을 섰다고 합니다.
이러한 난정도 나름대로의 공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적자와 서자의 신분차별을 폐지하고 서자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도록 하였고, 불교를 융성하게 하였다는 것이 그것 입니다.
하지만 난정 역시 문정왕후와 함께 사대부들의 공공의 적 이었으므로, 원형의 권력 즉 문정왕후가 죽자 원형과 함께 유배될 수밖에 없었고, 끝내는 늘 소지하고 다니던 독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형 역시 난정이 죽은 지 5일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문정왕후, 윤원형이 모두 죽은 후, 이들의 자리를 메운 것은 사림이었습니다. 사림은 거듭되는 사화로 많은 유학자를 잃었지만 전국 각지에 은거하며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길렀으며, 문정왕후 가 죽자 봇물처럼 정계에 등장하여 윤원형 일파를 제거 하는 등 실로 오랜 만에 중앙무대를 장악할 토대를 마련 하였습니다.
한편, 명종은 부인 심씨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을 뿐, 후궁으로부터도 아들을 하나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 뿐인 아들이 열세 살의 나이로 죽고 말았습니다.
이에 후사를 걱정하던 명종은 배다른 형제 덕흥군의 아들 셋을 불러 자신이 쓴 익선관을 벗어 써보라고 하자, 다른 아들들과 달리 셋째인 하성군은 “성상께서 쓰시는 것을 신하된 자가 어찌 쓸 수 있겠나이까”라고 하여 명종의 눈 도장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얍삽한 자가 명종의 뒤를 이은 선조가 됩니다. 하튼, 영양가 없는 애들은 대가리 하나는 잘 돌아갑니다.
명종은 외아들 사망 이후 시름시름 앓다가 재위 22년만인 1567년 죽으니 그의 나이 겨우 34세였습니다.
담에 이어서~
<조선왕조실록(53)> 선조 1 - 동서분당(東西分黨)
명종이 34세의 나이에 죽자 중종의 서자인 덕흥군의 3남 이 13세에 왕위에 오르니 바로 선조입니다. 서자도 아닌 서손이 임금이 된 유일한 사례입니다.
선조가 어린 관계로 대비인 인순황후 심씨가 수렴청정을 했는데, 문정왕후를 반면교사로 삼았는지 달랑 7개월 만에 섭정을 거두었고, 선조는 매우 어린 나이에 친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선조 시대에는 초기부터 사림(士林)이 크게 세를 이루어 조정에 등장하였습니다. 고봉 기대승, 퇴계 이황, 이이 등이 그들로서, 높은 학식을 바탕으로 선조에게 여러 가지 상소 를 하는 등 조정을 좌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는 현재의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백성의 실제적 삶과 별 상관도 없고 구체적 대책도 없는 실로 쓸데없는 논쟁에 불과하다 할 수 있습니다.
높은 정신세계도 좋지만, 백성은 굶어 죽고 국력은 바닥을 치고 있는데, 이기일원론이니 사단칠정론이니 여기에 목숨을 걸고 있는 꼴이 영 재수가 없습니다. 곧 조선 백성 태반이 죽어 나자빠지는 변란이 일어나게 되는 걸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마당에, 급기야 조선 정치가 붕당정치로 흐르니, 그 시초가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는 동서분당(東西分黨)입니다.
선조 7년 인사권을 가진 요직 중 요직인 ‘이조 정랑’ 자리가 비었는데, 젊은 사류 중 명망이 높은 김효원이 추천 되었으나, 심의겸이 이를 반대하였습니다. 김효원은 결국 이조정랑이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이듬해에 후임자로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거론되었고, 김효원은 보란 듯이 이를 반대하였습니다.
이 일을 두고, 김효원을 지지 하는 측과 심의겸을 지지하는 측이 적대적 방향으로 대립하게 되었는데, 김효원이 동쪽 인 건천방에 위치하였다고 하여 동인이라 하고, 김의겸이 서쪽인 정릉동에 있다고 해서 서인이라 칭하였습니다.
사림은 사화를 겪으면서 풍비박산이 난 후 어렵게 조정 권력을 장악했으나, 이렇게 이해관계에 따라 붕당을 이루게 되었고, 이러한 붕당은 이후의 조선 정치의 기준 이자 큰 장애가 되고 맙니다.
"난 고귀한 정신을 추구하는 양반이야" 하고 외치고 백성은 나몰라라 하고 있었던 시절~~
배움은 써먹으려고 배우는건데, 아무짝에 쓸모 없는 소모전만 했던 것~ 지금도 그짓은 계속되고 있지요. 당리당략에 안 맞으면 일단 무조건 반대부터 하고 지랄하는~
이러한 시기, 그나마 인물이랄 수 있는 사람이 하나 등장 하니, 이 사람이 율곡 이이입니다.
담에 이어서~~
<조선왕조실록(54)> 선조 2 - 율곡 이이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강릉에서 태어난 이이는 말보다 글을 먼저 익혔고 세 살에 시를 지었으며 일곱 살에 경서를 섭렵하기 시작했고 열세 살에 진사시에 합격한 천재 중의 천재였다고 합니다. (누구는 열세살에 담배를 배웠는데)
효자인 이이는 어머니이자 스승인 사임당 신씨가 죽자 인생에 회의를 느껴 금강산으로 들어가 1년 동안 불교를 공부했고, 하산 해 성리학에 전념하여 20대에 이미 학문적으로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이어서 이이는 명종 19년에 대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나선 뒤, 선조 1년에 이르러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사회 개혁안에 대해 논한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써서 선조에게 바치기도 하였습니다. 이이의 학문적 명성과 됨됨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나, 실상 이이는 외로운 사람 이었습니다.
즉, 당시 사림은 서경덕, 이황, 조식 등 자신들의 스승을 하늘처럼 떠받들고 그들 대로의 학파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이는 그 어느 누구로부터 배운 것도 아닌 독학파인데다 서경덕, 이황, 조식을 비판하기까지 하였기에 사림과 신료 들 간에 이른바 왕따를 당하기도 한 모양입니다.
이이는 동서분당의 시대에 사실상 홀로 중립을 지키며 동서 간의 화평을 위해 고군분투했고, 동서의 강경파 이발과 정철을 불러 중재를 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얼마간의 평화가 유지되었으나, 수면 아래에서는 서로 간의 적대감이 계속 자라고 있었습니다.
한편, 임금 수업을 받아본 적도 없고 믿고 의지할 정치 세력도 없이 임금 노릇을 하게 된 선조,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 사림들이 조정에 가득 찬 가운데 자칫하면 신하들 에게 휘둘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조가 누구입니까. 어린 나이에도 전 회에서 본 것과 같은 기지를 발휘해 두 형을 제치고 옥좌를 차지한 인물답게, 조선시대를 통 털어서 가장 얍삽하고 가장 비겁한 임금답게, 붕당 상황을 방관, 조장하고, 더 나아가 이를 이용해 왕권을 확립해 나가는 재주를 보였습니다. 에라이~
선조는 어느 편에도 있지 않은 이이를 이용해 세가 높아 지는 동인을 견제하고자 마음먹고, 이이를 중용해 국가의 주요 대사를 맡겼는데, 그 능력이나 마음가짐에 선조도 반했는지 이이가 사직상소를 올리고 물러나 앉았을 때에는 엄청난 애정과 신뢰를 담은 비답을 내리기도 했으니, 이이가 인물은 인물이었나 봅니다.
이이는 모처럼 조정의 주요 직책을 두루 맡아 국가구조 개혁, 공물. 군제, 민생 등의 개혁적 일을 의욕적으로 추진 했으나, 그럴듯한 성과도 나오기 전인 고작 1년 남짓 만에 이를 시기하는 신하들의 탄핵과 선조의 변심으로 사직을 당하고, 곧 세상을 뜨니, 그의 나이 고작 49세였습니다.
이이는 17년을 재조와 재야에서 한 결 같이 경장(제도를 크게 뜯어 고치는 일)과 동서간 화해를 외쳤지만, 세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동인 서인 두 붕당은 새로운 차원의 격렬한 대립으로 치닫게 되니, 이게 탁상 공론의 달인들인 선비들 집단의 어쩔 수 없는 한계였나 봅니다.
밤나무 백그루인가..천그루 심어서 난 천재...栗谷.
왜란야그는?
이동훈 그건 실록이 아니구 야화아닌감???
천재가 아니기에 천만 다행이네.
나종덕 손주ㆍ손녀 좋아졌니??
윤우섭
그려.
많이 좋아졌네.
담 주 부터 등원시킬 예정이네.
2주 동안 고생했네.
그 동안 손주들과의 정도 새록새록 쌓였지.^^
나종덕 일장 일단이었구먼...
애기들이 힘들었고 와이프가 젤 힘들었겠다..
윤우섭
식구가 다 고생은 하지만,
나름 보람도 있지.
요즘 일이 적어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나종덕 일적어 다행...???
먼가는 안맞지만...그래도 다행이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