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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23편 강해 (4)
+ 제 목 :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 본 문 : 시 편 23장 1절 - 6절 (구약성경 818쪽)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아멘!
오늘 본문 시편 23편 3절 말씀을 다 함께 큰소리로 선포하겠습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아멘!
지난 시간에 전반부에 있는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라는 말씀을 함께 나누었고,
오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라는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죄의식을 제거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슬픔을 제거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원망을 바꾸시게 하십니다.
삶이란? 살아가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의 것들을 선택하고 결정함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모든 결정에는 반드시 그 결과가 있습니다. 성공이란 현명한 결정을 함으로 오는 결과며,
실패란 어리석은 결정을 함으로써 오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슨 결정을 할 때에,
그 결과가 다 성공이면 좋겠지만, 실패도 있기에 우리는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결정을 잘못해서 실패하면 어떻게 하나?” 그래서 쉽게 결정하지를 못하고,
망설인 적이 많이 있었으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지금 결정해야 되는 문제들을 결정하지 못해서,
오는 스트레스는 엄청난 압력이 됩니다. “택해야 될 것인가? 아니면 포기해야 할 것인가?”
“내가 지금 그 일에 참여해야 되는가? 아니면 참여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 사람과 결혼을
해야 될 것인가? 말아야 될 것인가?” “새로운 직장을 택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이사를 가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이렇게 결정하지 못함으로 오는 압력이 무겁습니다.
야고보서 1장에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정함이 없다” 는 말은 헬라어 원어로 보면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린다.” 는 뜻입니다.
삶에 대한 분명한 결정을 하지 못한 채, 비틀비틀 허우적거리며 사는 것을 두고 한 말씀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무슨 일엔가 결정을 한 후, 그 결정에 대하여 “정말 내가 바른 결정을,
한 것인가?” 하면서 염려합니다. 이렇게 무엇인가 결정하지 못하고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망설이거나, 결정을 하고도 염려하는데서 오는 마음의 부담감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분명하게 말씀해 줍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결정할 수 없는 일이나, 이미 결정한 일까지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도록 맡기라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러분! 아멘입니까?
선한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제공해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 올바른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인도함을 받기를 원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분의 뜻을 알기를 더 원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를 그토록 원하면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잘못된 엉뚱한 곳에서 찾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신비한 방법으로 접근합니다.
느낌을 찾고 있습니다. 어떤 감정으로 온 몸에 전율을 느끼기를 바랍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신비한 감정에 사로잡힐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좀 더 합리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머리로! 이성으로 찾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데 조직적인 방법으로 찾거나, 기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예를 들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9가지 단계” - 이런 공식을 적용하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은 공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머리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찾을 때, 마술적인 방법 – 기적이나 표적을 원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무슨 놀라운 기적이나 표적을 보여주기만을 기다립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은 느낌이 아닙니다. 어느 일정한 공식도 아닙니다. 놀라운 표적도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을 찾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을까요?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하나님이 인도자가 되어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삶의 방향을 잃었을 때, 지금까지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더 헤매게 되고, 더 방황하게 되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더 곁길로 빠지게 됩니다. 성경은 이런 우리의 모습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사야 53장 6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그렇습니다. 양들에게 바른 길로 인도해 주는 선한 목자가 필요하듯이, 우리들도 우리의 삶을,
인도해줄 선한 목자가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물론, 하나님을 믿는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까지도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엉뚱한 길로 갑니다.
다른 사람의 말도, 하나님의 말씀도 따르기를 원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이니까, 자기에게는 다른 안내자, 다른 인도자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양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만, 우리는 양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래서 양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면 이렇습니다. 양은 바로 앞에 있는 것도 잘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멀리 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이 가는 길이 절벽으로 지금 가고 있는지,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길로 가고 있는지 전혀 모릅니다. 그래서 양들에게는 인도할 목자가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양과 같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미래를 전혀 모릅니다.
내년이나 십년 후는 말할 것도 없고, 내일, 아니 1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전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셨기에, 우리가 아무리 미래를 알려고 애써도 알 수 없습니다.
미래를 점치는 사람들이 뭘 안 듯이 말하지만, 사실은 점치는 자신의 1분 후의 일도 모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미래를 전혀 알 수 없도록 우리를 창조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오직 우리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자신만을, 오직 믿음으로 의지하는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받아야 합니다.
양이 가까운 것도, 먼 것도 볼 수가 없듯이, 우리 또한 우리의 미래를 전혀 알 수가 없기에,
우리는 우리의 인도자가 되어 주시는 선한 목자, 하나님이 없으면 늘 비틀거리며 살게 됩니다.
잠언서 14장 12절 말씀입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결정할 때에는 옳다고 결정했으나, 나중에 잘못된 것이었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도 가도 못하는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서, 비틀거리며 헤메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슨 일에나 가장 먼저 솔직하게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의 길로 - 올바른 길로 인도” 하여 주십니다. 믿습니까? 아멘!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믿음으로 우리 삶의 방향을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아멘!(마 7:7)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며, 도움을 요청하면 다 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야보고서 1장 5절- 6절 말씀에서도,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주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시려고, 준비하고 기다리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지혜를,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을 가르쳐 달라고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하면서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참 지혜! 나의 모든 삶을 하나님의 시선에서,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완전하십니다. 실수하지 않습니다.
조건이 딱 하나입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구해야 응답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믿음으로 나의 올바른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 간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잘 들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예배드리고 있는 이 예배당 안에, 라디오나 텔레비젼 전파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들이 볼 수는 없으나, 라디오를 가지고 채널을 맞추면 온갖 소식을 다 들을 수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라디오 주파를 만든 자가 우리가 그 주파를 잡을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수화기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면, 그는 아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가운데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하나님과의 영적 수화기를 꺼놓은 상태일 것입니다.
아니면 하나님과 항상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듣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면 하나님의 채널 – 성령의 채널이 아닌 세상이라는 다른 채널에 맞춰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듣지 못합니까? 채널이 맞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채널을 사용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법들은 여러 가지입니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목사를 통해서 들려지는 설교를 통해서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삶의 환경을 통해, 어려운 삶의 고통을 사용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같은 방법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많이 말씀하시는 통로가 바로 성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가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삶은 여행이며 성경은 삶을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을 보여주는 지도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침반을 주셨습니다. 그 나침반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양심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완벽한 안내자를 주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십니다.
우리가 삶의 길에서 방황할 때, 성경이라는 지도와 양심이라는 나침반이 있으면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보다 우리의 모든 미래를 아시고 도와주시는 성령님이 인도하시면, 더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매일 매일 성경을 통해 하나님과 통화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채울 때, 우리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또 하나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목사인 저를 통해서도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구나 하고, 가슴 뜨겁게 느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바로 그때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는 말씀 체험의 시간입니다.
믿습니까? 저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통해서도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항상 듣고 계십니까?
하나님께 채널을 맞추어 듣고 계시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바른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넷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이해가 안 되도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하신 그 길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바로 왕 밑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를 하다가, 하나님께서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시고 출애굽을 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출애급 여정에 홍해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장자의 재앙으로 출애굽을 허락했던 바로가 마음을 바꾸어 군대를 이끌고 쫓아옵니다.
그렇게 앞뒤가 꽉 막힌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지금 가정의 문제 - 다시 말씀드리면 부부간의 문제, 자녀들의 문제,
그런가 하면 경제적인 문제 - 생업, 돈 거래문제, 또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등등,
이런 저런 문제로 힘들어 하시는 분들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거기가 끝이 아닙니다.
선한 목자 되신 우리 하나님은 반드시 다른 문을 여시고, 다른 길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 앞에 처해있는 삶이 어둡고 절망적이며 좌절감과 실망을 안겨 줄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다고, 이제는 전혀 가망이 없다고 포기한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길이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길을 여신다는 믿음으로 믿고 나아가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면, 잘 되고, 갈수록 더 잘 줄로 믿습니다. 아멘!
이렇게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마침내 승리요, 성공입니다. 마침내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여행입니다.
잠언 4장 18절입니다. “의인의 길은 듣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어느 날 밝게 비치는 한 낮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삶의 길을 분명히 밝혀 주시면,
하나님께서 자녀 삼아주신 나를 위해, 특별히 선택하신 삶의 목적을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잠언 3장에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만 신뢰하면 됩니다.
잠언 3장 5절, 6절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아멘! 진실로 아멘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함을 믿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님만 믿고, 오직 예수님만 믿고, 오직 성령님만 믿고,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시편 23편 3절의 말씀도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나를 인도하여 주시는 하나님만 믿고 나아가라.” 는 시편 기자 다윗의 권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죄의식을 제거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슬픔을 다 제거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원망을 바꾸어 찬송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기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의의 길로,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바른 길, 의의 길로 인도함을 받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면,
첫째로, 내게 내 모든 삶을 인도하시는 인도자 - 주님이 필요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둘째는, 오직 믿음으로 주님이 내 인생의 방향 제시하시고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셋째는, 성경을 통해서,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넷째는, 내 상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도,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아멘! 아멘!
이 시간 통성으로 나의 모든 인생을, 나의 목자되신 하나님께 다 맡기는 기도를 드립시다.
그리고 나의 모든 인생에 채워주시기를, 주여! 세 번 크게 부르고 기도하겠습니다.
♡ 마무리기도 / 김대용목사